으악! 활짝 열린 현관문 사이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채 자신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코 앞으로 바짝 다가온 얼굴에 사쿠라이는 그만 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한 손에 쥐고 있던 서류 가방은 어찌할 새도 없이 떨어뜨리리고 말았지만, 수트케이스가 넘어지려는 것은 겨우 잡아 세우고선 가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현관 안쪽으로 잽싸게 몸을 비집어 넣었다. 야심한 시각에 이 이상으로 이웃들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뭐야, 마츠모토. 놀랐잖아!”

사쿠라이의 서랍장에서 찾아냈을 쥐색의 얇은 파자마를 입은 마츠모토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하자 반쯤은 안도감, 반쯤은 원망이 담긴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여전히 급격하게 오른 심박수가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자정을 한참 넘겨버린 기나긴 하루 온종일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내며 고개를 들어올리면, 사쿠라이의 인삿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마츠모토가 도끼눈을 치켜떴다. 어쩐지 그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언제 온 거야?” 라고 물으면서도 사쿠라이는 그제야 예정보다도 훨씬 늦어진 비행 스케쥴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러니까 딱 일주일 전 이 현관문을 나설 때의 장면을 되짚어보노라면  이 새벽에 마츠모토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은 사쿠라이로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2주 만에 얼굴을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2주 동안 서로 짧게 안부를 물어보는 정도 메일을 몇 번 주고 받았을 뿐.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그마저도 마츠모토는 아직도 사쿠라이에게 들려주지 않고 있었다. 

해외 출장을 가 있는 동안, 계속 외면하려 했던 사실─간만에 마츠모토와 제대로 냉전 상태라는 것─을, 서로에게 여전히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급격한 피로가 다시금 몰려왔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찾아온 거냐고 따지고 들고 싶은 마음에 속이 뒤틀리려는 무렵, 사쿠라이와 마주 보고 서 있기만 하던 마츠모토가 한 걸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순간적으로 다시 뒤로 물러나려는 사쿠라이의 양 어깨를 강한 아귀힘으로 붙잡아 세웠다. 여름 밤 공기의 습한 열기가 묻어있는 사쿠라이의 지친 몸 위로 마츠모토의 향이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안 올까봐 겁이 났어.”

그 언젠가 수줍게 마음을 전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선 조용하게 속삭이는 마츠모토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마츠모토에게 안겨 있는 사쿠라이의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들어차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그러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은 품마저도 모자라다는 듯이 자꾸만 다가오는 마츠모토에 결국 사쿠라이는 현관문에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다시 한번 수트케이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철문에 부딪히고선 현관 바닥 위로 넘어져버리고 말았지만, 어디선가 곤한 잠을 설칠 지도 모를 이웃들에 대한 미안함 따위 사쿠라이의 머릿속에서 더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츠모토의 몸을 마주 감싸안은 양 손으로 가늘게 들썩이는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배고프진 않아?”

“괜찮아, 기내식도 다 먹고 계속 잤어.”

사쿠라이의 수트케이스를 거실로 들어다 한쪽 벽에 세워 놓고서는 마츠모토는 곧장 소파로 가 털썩 주저 앉았다. 낮은 볼륨으로 켜둔 TV와 제 취향에 맞게 온도를 맞춰둔 실내에, 제법 마음에 들어하던 사쿠라이의 담요까지 꺼내와선 소파에 앉아 선잠을 자고 있었을 마츠모토의 모습이 쉽사리 상상이 갔다.

“너 먼저 들어가서 자도 돼.”

사쿠라이가 습관처럼 자주 건네던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래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마츠모토를 바라보면, 언제 그렇게까지 서로 냉랭하게 굴었을까 의아해질 정도로 언제나처럼의 마츠모토가 평소의 모습 그대로 마주 바라보았다.

“아냐, 짐은 내일 정리하구. 샤워만 하구 빨리 자자.”

한참을 울고 나서 그런 것일지, 다시 담요 안으로 파고드는 마츠모토의 말투와 표정이 수마가 다시 몰려오는 것마냥 나른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사쿠라이는 수트케이스의 지퍼를 열다 말고, 그 자리에 앉아서 마츠모토의 감은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급한 거래 건을 수습하기 위해 해외로 출장을 갔던 사쿠라이가 시차 적응은 커녕, 제대로 숙소 돌아갈 시간도 없이 바빴던 것은 몇 번 제대로 연락을 하지도 않아도 되는 편리한 핑계가 되었다. 되짚어 보면 서로 다투게 된 계기는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던 것 같이 느껴졌다. 최근 서로에게 서운한 감정이 쌓이던 것이 사쿠라이의 갑작스러운 출장 때문에 터져나왔고, 역시나 말다툼을 제대로 끝맺을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사쿠라이는 공항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제 집에서, 마츠모토에게서 도망쳐 나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전날 오후에 도쿄에 도착하는 스케쥴이었을테지만, 기내에 응급 환자가 생기는 바람에 앵커리지에 긴급 착륙하게 되며 자정을 한창 넘기고서야 겨우 도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츠모토에게 더 늦어진다는 연락을 했어야 했지만, 어색하게 얼어붙어버린 두 사람의 라인창은 사쿠라이의 목을 죄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던 끝에, 어차피 공항에 마중 나와 달라고 부탁할 것도 아니었다며 합리화하고 말았던 몇 시간 전의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 이렇게 기억도 못할 거였으면서, 마츠모토의 말 한마디에 금방 다 털어버렸을 거였으면서.


많이 늦을 거 같아서, 아침에 연락 하려고 했었거든. 미안. 집에 와서 기다릴 줄은 몰랐네. 물론 고맙지만. 피곤하지 않아? 계속 야근이었다던데. 수트케이스를 거실 바닥에 눕혀서 이것저것 풀어내기 시작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이 방 저 방을 오가는 낯익은 발걸음 소리가 눈을 감은 마츠모토의 귓가에 다정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조용하게 읖조리는 사쿠라이의 이야기에도 대꾸해주지도 못한 채, 마츠모토는 어느덧 소파 팔걸이에 옆구리를 맞대고서 몸을 기울여 반쯤 드러누워버렸다.

“먼저 자라니까. 눈도 못 뜨면서.”

어느덧 마츠모토의 얼굴 앞까지 뻗어온 손이 한쪽 볼을 감싸쥐었다. 전날 밤에도 몇 시간만 겨우 눈 붙이고 다시 출근하고, 자정에 가까워서야 사쿠라이의 집에 도착한 마츠모토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 드리웠을 뿐일텐데. 들쭉날쭉하게 수염이 올라와있을 턱을 간지럽히는 손길의 주인의 얼굴이 너무 그리워져, 마츠모토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고 싶었는걸.”

“그럼 봐줘야지.”

“그렇지만 졸린 건 어쩔 수 없어, 벌써 3시가 넘었다구.”

마츠모토는 애써 커다랗게 뜬 눈을 느리게 껌뻑이면서도, 겨우 2주 만에 보는 얼굴에 뭐라도 하나 바뀌기라도 했을 것마냥 사쿠라이의 얼굴을 한 가득 바라보았다. 뭐해, 빨리 하라니까아. 마치 사쿠라이가 침대에 같이 누워야지만 자기도 잠들 수 있단 것처럼, 빨리 씻고 자러 가자는 귀여운 항의 같은 말투. 졸음을 겨우 버티고 있으면서 느슨해진 입매가 하품을 하려는 듯 꿈틀거리는 것을 코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쩐지 조금 근질거렸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서는 일 자를 만들며 꼭 닫히려는 입술을 보고 있던 사쿠라이는 반쯤 늘어진 마츠모토의 몸 위로 올라가 입술을 맞댔다. 언제 졸음이 묻어있었느냐는 듯이 토끼눈을 부릅 뜨는 것을 바라본 채로 사쿠라이는 마츠모토의 윗입술을 진득하게 빨아당겼다. 조금 뒤늦게 겨우 마츠모토가 혀를 내밀어오는 것에 몇번이고 달큰하게, 잔잔한 흥분감을 나누며 호흡을 나누었다. 간만에 서로에게 맞닿는 감촉에 몰입하던 중,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마츠모토가 고개를 휙 떼어냈다.

사쿠라이의 수트케이스를 펼쳐 놓은 거실, 소파 위에 앉아서 사쿠라이를 말없이 바라보았던 그 날 저녁. 마츠모토의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지퍼를 잠그고서 수트케이스를 일으켜 세우며 성큼 일어서던 사쿠라이의 모습. 차마 잘 다녀오라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앉아만 있었던 제 한심한 모습. 

“그날 그렇게 나가는 거 너무 싫었어.”

“….”

“출장이 아니라, 정말로. 쇼군이 아주 가버리는 것 같았단 말야.”

양 입술을 물어 말고서는 말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쿠라이를 바라보던 마츠모토는 다시금 사쿠라이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쇼군, 연락도 잘 안 하고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그렇지만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런 말보다는 더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돌아와줘서, 고마워.”

약간 붉어진 사쿠라이의 눈매가 어쩐지 마음에 들어, 마츠모토는 다시금 사쿠라이의 턱을 잡아 끌었다. 언제 떨어졌냐는 듯이,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마구 뒤섞이기 시작한 호흡에 차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입술이 떨어지면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마츠모토를 바라보며 사쿠라이가 흡족해할 차례일 테였다. 정말로, 짐은 내일 마저 정리하자.  







190824. 

월간쇼쥰(@monthly_shojun) 8월호 참여작입니다. 주제는 논노 화보였던 수트케이스. 그동안 미뤄두다 거의 1년 만에 제 포스타입에도 백업하게 되어 간만의 새 글이 재업이네요..

아라시 / 사쿠라이 쇼 / 마츠모토 쥰 / 쇼쥰 / 쇼준 / 사쿠쥰 / 사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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