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는 거 맞아 진짜로?”
“GPS가 그렇다고 한다니까? 이 골목을 돌아가면....”


진심으로 귀찮아 죽겠단 얼굴을 한 나를 이끌고 척척 발걸음을 옮기는 카렌을 따라 이 근방을 헤맨 지 벌써 30분 째였다. 아직 초여름에다 저녁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마 땀이라도 뻘뻘 흘리고 있었을 거다. 폭이 좁은 구두가 발볼을 죄여왔고, 다리는 피곤했다.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어디 카페나 바에라도 가서 시원한 거라도 마시자고 말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카렌이 요즘 얼마나 간절한 상태인지 알았기 때문에 참았다. 


카렌은 본인이 가장 잘 하는 걸 내세우며 사업을 하나 시작했다. 말하자면 온라인쇼핑몰 같은 건데 퍼스널 쇼퍼스러운 뭔가를 덧붙여서, 제 소셜미디어 팔로워들을 믿고 잘 다니던 직장도 때려친 채 사업을 벌린 것이었다. 그런데, 나도 사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딱 카렌에게 어울리는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잘 안 되는지 매출이 좀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쪽박을 차겠다며 광광 울던 카렌이 온갖 방법을 시도해보다 안 되자 이번엔... 기어코 미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어디 이 골목에 유명한 점성술사인지 점쟁이인지가 있다며, 카렌은 약속도 없이 간만에 칼퇴의 기쁨을 누리며 막 회사를 빠져나오던 나를 낚아채 지금 이 골목사이를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3분 내로 못찾으면 너 여기 두고 갈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니, 반드시 찾을 거니까 기다려...................... ..... 역시! 이것 봐, 내가 오늘 여길 올 운명이었던 게 분명하다니까!”



무슨 헛소리람. 아,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류에 대해 믿음이 단 요만큼도 없다.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나랑은 사실 거리가 먼 얘기고, 나는 차라리 그 돈으로 맛있는 걸 사먹고 기분전환이나 하는 게 더 남는 거라고 생각하는 부류지만, 사실 카렌의 처지가 안쓰럽기도 하고, 한없이 팔랑팔랑 가벼워 보이는 친구지만 나름 진지한 부분이 있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봐준다 진짜. 아니 그런데, 이렇게 간판도 제대로 안 달아두면 어떻게 찾겠냐고! 굳게 닫힌 나무문에 커다란 별.. 그러니까 5갈래로 나뉜 별 말고, 무슨 성경삽화에 나올 것 같은 별 그림 하나만 딱 달려있으니, 어지간해선 이게 뭔지도 모르고 지나갈 것 같았다. 어쨌든 카렌은 기뻐서 거의 함성을 지르기 직전이라, 나는 카렌의 어깨를 잡아끌고 노크를 한 뒤, 그 가게의 문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그러나 안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다만 사람은 없었지만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의도한 것 같은, 반짝이는 실로 수를 놓은 반투명한 소재의 휘장과 아주 작은 종이 달린 금색 실타래가 늘어진 벽면, 묘하게 향긋한 듯 꺼려지는 듯한 짙은 풀냄새와 희미하게 들리는 명상음악 비슷한 것들이 누가 봐도 여기가 뭐하는 공간인지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뭐랄까, 너무 그쪽으로(?) 치우친 압도적인 분위기에 살짝 질려 미간을 구기고는 사람은 왜 안 보이나 계속 두리번거렸다. 카렌은 너무 흥분한 듯 거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찰랑거리는 (가짜일 게 분명한) 크리스탈이 드리워진 발을 헤치고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새까맣고 숱 많은 머리카락에 엄청나게 진한 눈썹과 날 야단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 등, 개인적으로는 프리.다 칼.로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기가 아주 대단해서, 방방 뛰던 카렌조차 얌전해졌다. 물론 나도 괜히 목을 가다듬고 있었지만.




“....당신이 원하는 건 올해 겨울이 오기 전에 이뤄질 거예요.”
“저, 저요?”
“그럼요, 분명히 보여요, 하늘과 별이 말하기를, 당신의 운은 가을의 문턱에서 트이기 시작해서...”



이게 무슨 소리람.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부드럽고도 엄숙하게 예언(?)을 하는 프.리다 칼.로를 보면서 카렌은 거의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새된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저 정도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걱정마, 카렌, 이제 사업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위한 준비기간만 남았어, 올해까지만 좀 두고 보자, 분명 여지가 있어..... 그렇지 않은가?



“당신에게 아주 딱 맞는 사업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다만 세상이 당신의 바뀐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지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당신의 추종자들은 곧 당신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거예요..........”



허억. 카렌은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반쯤 비명을 질렀다. 음. 이건 나도 좀 놀라기는 했다. 제법 구체적으로 들리잖아? 아니, 아니다. 사업이라는 건 아주 우연히 맞춘 걸 수도 있고... 직장인 아니면 사장님이지 뭐, 추종자들은 사업이라고 하면 고객들을 말할 수 있는 거니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이 안으로 들어와요. 당신에겐 카드가 길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요....”
“좋아요 네 네!!!”
“당신은 들어오지 않아도 돼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저 발 너머가 아니라 이곳에 있으니까요.”



그녀는 긴 검은 머리를 우아하게 젖히더니 내게 제법 단호한 표정을 짓고는 카렌을 데리고 발 뒤로 사라졌다. 나는 따라 들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내게 필요한 게 여기 있을까보냐. 나는 짜증이 나서 괜히 아직도 살짝 찰랑이는 발을 노려본 후 망설이다가 푹신하게 생긴 의자에 앉았다. 착석감은 좋았지만 괜히 찝찝했다. 이 쿠션 빨기는 하는 거야? 이 안을 가득 메운 그 짙은 풀냄새가 마찬가지로 잔뜩 배인 느낌에 나는 괜히 엉덩이 끝으로만 앉은 채 한숨을 푸 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선지자 같이 생긴 사람의 사진(아래에 작은 설명으로 로자리아 카스트로라고 써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나 할머니일까? 왜냐면 무척 닮았거든), 흐르는 물과 황금색 컵을 들고 물을 긷는 긴 머리의 여자가 수놓인 태피스트리, 해와 달의 얼굴이 반씩 합쳐진 유화, 각양각색의 신기하게 생긴 초와 촛대, 이상한 카드뭉치 등 이 곳은 아무리 봐도 나와는 그 성질이 맞지 않는 곳이었다. 이 시대에 점이 웬 말이냔 말이다. 


발 너머에선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조곤조곤대는 그 점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씩 카렌은 감탄을 하거나 반쯤 비명을 지르며 그 점쟁이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효, 그렇게 해서 니 맘이 편해진다면야. 앉아있기도 무료해진 나는 일어서서 낯선 물건들이 가득 올려져있는 선반을 구경했다. 이거 파는 거야? 가격표가 붙어있으니 파는 거겠지? 허가는 받은 건가? 뭔 성분이 써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의 묘약. 하, 참나. 환장하겠네 진짜. 지금이 무슨 마녀가 나오고 흡혈귀가 돌아다니는 그런 시대냐고요. 사랑의 묘약이라니 이 무슨............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았군요.”
“!!!!!” 



여태 안에서 카렌이랑 얘기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머지, 나는 내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그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 거의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그러나 점쟁이는 그저 미묘하게 웃으면서 내가 들고 있던 조그마한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크랜베리 주스랑 똑같이 생긴 새빨간 액체가 들어있는 이 유리병이 내게 필요한 그것이라고? 사랑의 묘약이? 미안하지만 개소리였다.



“성분이 뭔지도 모르는 색소 탄 빨간 물을 사랑의 묘약이라고 말하는 게 참 웃기네요.”
“당신의 그 의심이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걸 방해하고 있어요...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도 괜찮을 텐데요...”
“저기요, 모욕적인 말을 할 생각인 건 아니지만 당신은 아무래도....”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라는 건 없어요.”




....................



어느새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와 눈가를 슬쩍 훔치고 있던 카렌조차 숨을 죽이고 나의 반응을 살폈다. 나는 짜증이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의 말은 내 아픈 구석을 찌르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그녀와 유리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렌은 입모양으로 열심히 내게 ‘거봐!! 이 사람은 다 안다니까!!’하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겐 지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라는 건 없다고? 왜? 어떻게?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내가 잘 아니까.



“당신이 알아왔던 가치는 잊으세요. 세상은 그보다 넓고, 또 자유로워요. 왜 그 사람을 사랑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나요?”
“...............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건 먼저 가져가셔서 사용해도 됩니다. 나중에 대금을 치르셔도 돼요...”



나는 낯이 뜨거워져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유리병을 점쟁이에게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고 그냥 걸어서 그 괴상한 곳을 빠져나왔다. 뒤따라나오던 카렌이 내 이름을 여러 번 불렀지만, 나는 너무 짜증이 나서 뒤를 돌아다볼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야 존 조!!!!”
“........"
“존!!!! 좀 천천히 가!! 나 힐 신어서 발 아프단 말이야.”



하, 카렌이 신고다니는 힐은 내가 봐도 발을 학대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보였으므로, 그 말에 맘이 약해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카렌을 기다렸다. 잘도 뛰어온 카렌은 헥헥대면서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제기랄, 아까 그 사랑의 망할 묘약이잖아.



“이딴 걸 대체 왜 가져와?”
“그분이 너한테 필요한 거라고 하셨잖아!”
“'그분'이 대체 언제부터 너한테 이렇게까지 귀중한 분이 되셨어 그래?”


나는 괜히 카렌에게 빈정대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평소 같았으면 카렌은 내 팔뚝을 꼬집었을 테다. 하지만 카렌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서서 내게 계속 그 병을 내밀고 있었다.


“니가 이런 걸 믿는 부류는 아닌 거 잘 알아, 존. 하지만 너도 사실 알고 있잖아.”
“..............”
“그 사람 입에서 나온 말 중 틀린 말이 있었어?”
“.........”



나는 여기서 쏘아붙였어야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내가 이 병을 들고 있는 걸 보고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게 분명하다고. 너의 상황을 맞춘 건 우연이고 이 모든 건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카렌의 손에 들린 유리병 안의 빨간 액체가 찰랑이는 순간, 어떤 사람의 얼굴을 저절로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 해질녘이 가져온 평화와
단 한 번의 완벽한 조화 속의 
세상 위 생명이 깃든 모든 것과 함께 하는
그 사랑을 그대는 느낄 수 있는가? ] 



“........... 개소리야 진짜.”
“뭐? 난 점심으로 타코 어떻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 아, 미안해. 나 딴 생각 하고 있었어.”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게 가증스러웠지만, 동시에 또 웃기기도 해서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칼 어반, 내 대학 동기이자 세상 다시없을 친구. 어떻게 직장까지 근처로 다니게 된 건지는 미스테리지만, 어쨌든 그런 사이. 
칼은 금세 얼굴을 풀고 씩 웃으면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한낮엔 꽤 더워서 누구랑 이렇게 붙어있는 게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나는... 툴툴대면서도 칼에게 안긴 그대로 있었다. 왜냐하면.. 뻔하지 않나, 뭐. 내가 칼 어반을 좋아하는 거지.




“그래서 타코 괜찮냐고?”
“내가 언제 타코 싫다고 하는 거 봤냐.”
“아니지, 그래도 너의 의견이 완전 중요하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뭔 점심메뉴 고르는 걸 가지고....;;”
“니가 그랬잖아, 뭐든지 독단적으로 정하지 말고 상대방 의견 물어보라며.”



미친 놈, 그건 연애할 때나 그러라고 했던 거지 무슨... 하지만 나는 솔직히 칼이 내 의견을 물어보고 기분을 헤아려주는 걸 좋아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사심 없는 친구에게라도 그럴 수 있지. 알아 나도. 잘 안 다고.... 칼은 만나는 여자가 있다. 이상하게도 오래 연애를 못하는 인간이라 만난지 얼마 안 된 여자지만... 나도 한 번인가 만났던가, 그랬다. 



“셰인한테나 잘 해줘.”
“걱정 마. 이번 주말에 만날 건데 너도 나올래?”
“내가 거길 왜 가?”
“그냥, 너 어차피 주말에 집에서 뒹굴기만 할 거잖아.”



아마 이래서 이 인간이 연애를 짧게만 하는 거 아닌가 싶다. 허구한 날 나를 불러내는 건 대체 무슨 심보냐고? 나야 백번 붐러내면 99번은 거절하지만 진짜 어떻게든 나를 불러내는 날엔 어쩔 수 없이 나갔다 칼의 여자친구랑 셋이서 어색하게 식사를 하거나 술을 먹은 적도 왕왕 있었다. 세상 어떤 여자친구가 좋아하겠냐고. 




“됐으니까 그때 거기 바에나 한 번 데리고 가.”
“너랑 갔던 거기? 그래, 거기 분위기 좋더라.”
“그래 거기. 나랑 가지 말고 니 여자친구랑 가야지 이제.”
“너랑 가는 것도 재밌는데.”
“............”



나쁜 놈. 니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이 날 얼마나 힘들게 하는 지 이 새낀 상상도 못할 거다. 나는 자그마치 10년 동안 내 마음을 벼리고, 단련하고, 그 짓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데. 니가 무슨 3개월에 한 번씩 데이트하는 여자를 바꿀 때마다 말이야. 뭐 솔직히 이건 좀 과장된 건 맞는데, 내 기분 상 그렇다고.



“넌 새우타코지? 탄산수도 추가할게요.”


내가 좋아하는 메뉴 알아서 척척 시키지 마.


“창가자리로 가자. 니가 이쪽에 앉아.”


나한테 그런 내 취향 반영한 세세한 배려도 하지 말고.


“주말에 저번에 니가 말한 전시회 갈래? 알았어, 토요일엔 셰인이랑 만날 테니까. 일요일에 가자.”


내가 흘리듯 말했던 거 일일이 기억해서 데이트라도 하자는 것처럼 불러내지도 마.


“존, 괜찮아? 알았어, 미안해. 주말에 그냥 쉬고 싶으면 쉬어도 돼. .... 나 뭐 잘못했어?”


내 굳은 표정을 보고 다정하게 내 기분 살펴주는 것도 지긋지긋해.




넌 누구에게나 친절하지, 알아, 칼 어반. 옛날부터 넌 유명했으니까 말이야.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와 눈을 꾹 감았다. 내 표정을 살피며 칼이 안절부절하고 있을 게 빤했지만, 나는 그런 칼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짝사랑을 10년째 하고 있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지겹고 또 지긋지긋했다. 나는 너무 지쳤고, 그런 나머지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실행할 용의까지 있었다.

















[ 멀리 바라보지 않아도, 
이 모호한 밤중에 은근하게도,
사랑은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노라 ]




“..... 당신이 다시 올 줄 알았어요.”
“...............”
“아직 약을 사용해보지는 않았군요, 그렇죠?”
“..... 이 망할 시구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하다구요.”



내가 그 별이 그려진 나무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프리.다 칼.로를 닮은 그 점쟁... 점술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안으로 들였다. 약간은 불쾌한 느낌이었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나라도 불신이 흔들릴 법 했다. 나는 그녀에게 여전히 빨간 액체가 가득 든 유리병을 건넸고, 그녀는 희미하게,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시구를 읽었다. 




[ 사랑은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곳에 존재하니
순진무구한 떠돌이에게는
그 존재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노라
그 사랑을, 그대는 느낄 수 있는가? ] 



“..... 이 약을 사용하면,” 점술가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했다. “먹은 즉시 약효가 나타날 거예요.”


“...........”
“반드시, 그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될 거예요. 이 약의 주인과....”
“.......”
“당신은 누구보다도 가시적인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죠. 마음의 눈을 뜨지 못했으니까요. 이 약을 먹은 사람은, 이 약이 가진 주술의 힘에 의해서... 당신에게 그 증거를 보일 거예요.”





나는 여기에서라도 ‘이제 농담은 충분하며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으니 나는 이만하면 됐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마음고생을 해온 나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엔 너무나 지쳐있었다. 




“자신 스스로는 볼 수 없는 곳, 연인의 야릇한 입맞춤이 살짝 내려앉기 좋은 곳... 바로 이곳에 작은 표시가 나타날 거예요. 그리고 그 즉시 그는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당신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떠받들고, 당신의 몸을 어루만지고 싶어 할 테고, 당신을 껴안고 은밀히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할 거예요...”



그녀는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으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뒤로 젖혀 귓불의 뒷면, 목덜미가 시작되는 곳을 톡톡 건드렸다. 확실히 억지로 보려고 애쓰지 않는 이상, 거울로도 본인 스스로는 확인이 잘 안 되는 곳이기는 했다. 과연 어떤 표시가...... ....... 내가 미쳤지. 이 무슨 디즈.니 동화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아니면 뭐 이상한 판타지나. ..... 하지만 그 말들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내 상상 속에서나 일어난 해묵은 망상들이 진짜로 이뤄질 수 있다면. 



“중요한 건 당신의 마음이 그 약효를 알아챌 수 있다는 거죠. 이 약은 둘을 그 어떤 관계보다도 특별한 힘으로 강하게 묶어줄 테니까요.”
“........”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이제 그만 그 오래된 외사랑을 끝낼 때도 되지 않았어요?





...... 나는 결국 그녀에게 두 손을 들었다. 명백히, 그녀는 정말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어쩐 일이야? 존 조가 금요일 밤에 나를 다 초대하고!”



칼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서 섰다. 나는 오늘 아침 칼에게 문자를 보내 오늘 퇴근하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했고, 칼은 지체 없이 ‘당연히 좋지! 퇴근하고 너 회사 쪽으로 갈게’라고 답장했다. 폰은 끼고 사는 인간이 아닌 건 아는데, 이상하게 내 연락에는 아주 칼 같이 대답하고는 하는 이상한 인간이다. 뭐, 여자랑 하는 연애에 도가 텄으니까 그런 거겠지.



“어디 갈래? 그때 니가 말한 그 바?”
“어... 아니, 거긴 너무 멀고. 여기 어때? 완전 가까워.”
“걸어서 5분? 이런 데가 있었어? 그래, 가보자.”



칼과 함께 향한 이 바는 요즘 소셜미디어에 사진이 왕왕 올라올 정도로 예쁘거나 잘 꾸며진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어둡고 뭔가 은밀한 짓거리....를 하기에 아주 적당할 만큼의 분위기가 갖춰져 있다는 리뷰가 많이도 남겨진 곳이었다. 내가 별 다른 짓을 할 계획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뭐 눈에 띄지 않아야 할 일을 하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보드카 크랜베리로 두 잔 주세요.”
“어? 아니, 나는 딴 거.....”
“괜찮아요, 네 그렇게 주세요.”



뜬금없이 보드카 크랜베리를 주문하는 날 보고 칼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게 우리가 보드카 크랜베리를 먹던 건 대학시절 파티를 열었을 때 나름 애들한테 저렴하게 술을 제공해야 할 때였었으니. 하지만 칼은 언제나 군말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하고는 했다. 평소엔 나한테 그러지 말고 여자친구한테나 그렇게 해주라면서 틱틱댔겠지만 오늘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런 데를 오자고 할 줄은 몰랐네. 이런 곳 네 취향 아니잖아?”



칼의 말이 맞았다. 나는 탁 트인 곳을 좋아했으니까. 루프탑바나 뭐 그런 곳 말이다. 



“그냥. 뭐. 가끔은 상관없잖아.”



.... 라고 말하기엔 이곳 분위기가 누가 봐도 데이트에 최적화된 곳이어서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상대방에게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테이블 위로 낮은 조도의 은은한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조명은 딱 테이블 크기만큼만 빛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널찍이 떨어진 테이블별로 마치 칸막이가 쳐져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테이블에서 다들 소곤대고 킥킥대고... 쪽쪽대며 한껏 즐기고들 계셨으니까. 



“음... 뭐 니가 괜찮다면.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올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칼이 자리를 뜨자마자 바로 술 두 잔이 준비되었고, 나는 새빨간 색으로 변한 알코올을 단숨에 몇 모금 정도 마신 뒤, 몰래... 하, 내가 하면서도 미친 짓 같기는 한데, 요 최근 계속 가지고 다닌 작은 유리병의 마개를 뽑고 보드카 크랜베리와 색이 거의 비슷한 그 빨간 액체를 전부 흘려 넣었다. 원래 나온 양과 그런대로 비슷해보였다. 내가 빈 유리병을 다시 주머니에 넣자마자, 칼이 다시 돌아왔다.



“Cheers.”


칼이 잔을 들어 올렸고, 나도 잔을 맞부딪혔다. 이게 뭐라고, 왜 긴장되는 걸까? 내가 말도 안 되는 속임수에 넘어갔을 확률이 몇 십배는 더 큰데 말이다.. 사랑의 묘약은 무슨, 7, 80년대 노래에나 나올 법한 별 볼일 없는 이야기다. 히피나 집시에게 더 어울릴 거 같은 그런 거. 아니면 디,즈니나. 아무래도... 내가 너무 힘들어서 별 병신 같은 짓을 한 게 분명했다.......



“.... 존, 괜찮아?”


아무래도 내가 긴장한 티가 역력했겠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내가 든 잔을 한 번에 반쯤 비워버렸다. 아. 이건 좀... 아무리 간단한 맛이라지만 그래도 보드카인데 무슨 물처럼 마셔버렸으니.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자, 칼이 킥킥 웃는다.



“근데 니 껀 괜찮아? 내 술은 맛이 약간... 아니, 보드카 크랜베리 맛이 나기는 하는데...”



그야 내가 성분도 확인되지 않은 괴상한 액체를 섞었으니까. 미안, 칼. 내가 진짜 판단력이 흐려진 게지. 칼더러 그만 마시라고 해야겠다. 새로운 술을 시키라고....



“........존,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걱정되게 왜 그래.”
“...나 괜찮은데.”
“집중도 전혀 안 하고 있고, 멍하니 딴 생각 하고.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 아니이?”
“니가 날 어떻게 속이겠어. ..... ....너... 만나는 사람 생겼어?”



? 내가? 나는 저절로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물론, 나도 몇 년 전까진 위장용으로 가끔 여자들이랑 짧은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나는 여자한테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커밍아웃은 커밍아웃대로 할 수 없었고. 부모님이 뒷목잡고 쓰러질 것도 빤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너랑 친구도 못할 까봐. 그 오랜 시간 동안 너만 좋아했는데 내가 누구랑 뭘 해.



“.... 아닌 거야? 아닌 거지?”
“... 그래 아냐. 난 이제 연애하기엔 너무 지쳤어. 직장 다니는 것만으로도 진 빠진다고.”



내 대답이 그렇다는데 칼은 괜히 실실 웃고 있었다. 뭐 좋을 게 있다고 웃고 있는 거야? 나쁜 새끼. 너나 여자친구한테 잘하라고 얘기했어야 하지만 왠지 목구멍이 꽉 틀어믹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어지간하면 잘 숨기는데, 이젠 정말 지친 게 분명했다..... 이러다 내가 칼의 옆에 친구로 있는 것조차 지치면 어떡하지.



“난 또 그냥.... 아무리 봐도 니가 뭔가 숨기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면서 칼이 뒷통수를 긁는데... 언뜻... 아니, 내가 잘못 본 건가? 



“........ ... 존?”



나도 모르게, 아마 술기운이 돌아서 더 용감(?)해진 것도 있겠지만, 벌떡 일어나서 칼의 턱을 잡고 그의 고개를 돌려버렸다. ............... 이거구나, 그 점술가가 말한 게. 칼의 귓불 뒤에... 아주 조그맣게... 무슨 상형문자 따위일 게 분명한, 내가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타투 따위는 안 하는 인간이니까... 그럼 분명히... 아니 이게 진짜라는 말이야 그럼 지금?




“..... 어.... ...... 저기, 존. 진짜로 나 걱정 돼. 괜찮아?”



볼이 나한테 잡혀 짓눌려서 발음이 뭉개지는 채로 칼이 어눌하게 물었다. 나는 금세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칼에게서 손을 떼고 괜찮다고 대충 얼버무린 뒤 반쯤 남았던 술잔을 아예 비워버렸다. 하, 이래서야 뭐가 있다고 광고하는 꼴밖에 더 되나. 아니, 그런데, 그 사람 말이 진짜로, 정말로 맞다면... 이제 뭐 티가 좀 나야하는 거 아니야? 즉시 약효가 나타날 거라며. 나한테... 나한테 뭐 사랑을 속삭이고 나를 뭐 어쩌고 그럴 거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 즉시 그는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나한텐 얘기해줄 수 있는 거잖아, 존....”



당신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떠받들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당신의 몸을 어루만지고 싶어 할 테고, 



“너무 술을 급하게 마신 것 같아? 이마가 좀 뜨거운데 열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만 집으로 갈래? 바래다줄게.”



당신을 껴안고 은밀히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할 거예요...











“..............”



급하게 마신 술 때문에 은근히 취해 살짝씩 몸에 힘이 풀리려는 날 반쯤 끌어안고 어느새 거리로 나온 칼을...... 나는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져서 은근히 어둑해진 하늘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눈은 내가 잘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올리브색 눈동자. 
........... 나에게만 보여주는 그 눈 말이다.




.... 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정말 처음으로.. 선의와 우정이 앞선 시선 뒤의.... 다른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칼은 언제나처럼 다정했고, 나를 챙겨줬고, 나를 아껴줬고....







중요한 건 당신의 마음이 그 약효를 알아챌 수 있다는 거죠.





“................. 칼.”
“응.”




뭐라고 말해야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너를 오랫동안 사랑해왔어? 네가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 너무 긴 시간 동안 널 기다려왔어? 



“.......”
“................ 너무 피곤한가보다. 택시 먼저 잡자.”




이게 아닌데, 나 하고 싶은 말 아직 안 했어, 칼. 네가 그동안 내내... 똑같은 마음이었다면, 그럼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거잖아. 지금...꼭 말해야 하는데...






택시는 생각보다 금방 잡혔고, 우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한 마디 대화 없이 내 아파트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가로등이 휙휙 지나며 도시의 밤을 훑어 보이는 동안, 나는 온갖 생각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은 머릿속을 진정시켜야 했다. 
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소라면 칼은 내게 이런 저런 말을 걸고 좀 귀찮을 정도로 나를 챙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은 나처럼 그저 침묵을 지킨 채 반대편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그럼 들어갈게.”



택시에서 내린 우리 둘은 여전히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걸어서 내 아파트 문 앞에 다다랐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칼이 너무 조용했고, 나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좌절감에 입이 절로 다물렸다...



내가 어떻게든 칼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궁리하는 동안, 칼은 그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기랄, 머리가 어지러워서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결국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건가보다. 약효가 돌려면 우리의 감정이 무無였어야 하는 거겠지. 난... 그냥 너무 늦게 알아챈 거다. 그 사랑의 망할 묘약으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늦은....








“존.”



이제 그만 뒤로 돌아 문을 열려는 나를 멈춰 세운 건 칼의 목소리였다. 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나를 배려했고,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
“그렇게 눈 동그랗게 뜨지 마. 넘 귀여우니까.”
“...................야 너..”



이게 갑자기 뭐라는 거야, 남은 심각한데. 내가 씩씩대면서 잔소리를 퍼부을 것처럼 입을 열자, 칼이.... 내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살짝 숙여서.....
내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게 다였다. 그저 가벼운 입맞춤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 특별한 것이어서..... 칼과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 없는.... 그런..



“..... 존.”
“........”
“정리하고 올게.”



아. 나는 칼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칼은....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 넌 성품이 바른 애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그게 맞는 거고.



“내 착각이 아니길 빌어.”





 이 약은 둘을 그 어떤 관계보다도 특별한 힘으로 강하게 묶어줄 테니까요.





“.............. 아니야.”



내 대답을 들은 칼은 조용히 씩 웃고는, 내 입술 위에 한 번 더 제 입술을 포갰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칼의 허리를 살짝 끌어안았고.... 칼은 조금 아플 정도로 내 어깨를 꽉 쥔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의 악력에 내가 인상을 조금 찌푸리자. 칼이 금세 미안하다는 얼굴로 내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미안해, 존..... 그냥.... 좀 참기 힘들어서.”




...... 그게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우린 꼭 붙어있었고... 어.... 너무 잘 느껴졌거든. 칼도 그럴 테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는 동시에 픽 웃음을 터뜨렸고, 칼은 헤어지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칼을 껴안았다. 너무 행복해.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는지, 너는 알까? 너에게는 이 순간이 얼마나, 몇 년이나 고대한 순간인 거야?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지금 묻지는 않았다. 나중에, 정정당당히 그래도 될 때.... 그때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잘 자, 존.”
“너도.”




나는 칼을 보내고, 혼자 집으로 들어와, 방금 내게 일어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어보려 애쓰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문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았다. 



정말 오래 걸렸지만, 무척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드디어 비로소, 이루어졌다. 
내 10년간의 짝사랑이 말이다.








[ 왕들과 방랑자들이 
그 가장 귀한 가치를 믿게 하기에 충분하도록,
그 사랑을, 그대는 오늘 밤, 느낄 수 있는가? ] 











......






카렌은 숨길 생각도 없이 ‘거 봐, 역시!’라고 외쳤고, 나와 칼의 등짝을 한 대씩 때려주었다. 아니, 칼은 두 대 때렸다. 어쨌든 카렌은 내 친구였으니 말이다. 칼은 그냥 좋다고 허허 웃으면서 내 어깨를 끌어안기만 했지만.


아, 그리고 카렌의 사업은 정말 가을이 지나자 매출액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겨울 쯤 되자 완전 날개라도 단 듯 주가를 미친 듯이 올렸다. 그 바쁜 와중에 행차하셔서 나와 칼을 쥐어박아주셨으니, 나와 칼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카렌은 떵떵거려댔다. 




그 이후로는 그 프리.다 칼,로를 닮은 점술가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런 쪽엔 면역이 별로 없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빈 유리병을 서랍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다. 그리고, 이따금씩 깨알같은 글씨로 라벨에 새겨져있는 시구를 읽어보고 다시 서랍 안에 집어넣고는 했다. 







[ 그 사랑을, 그대는 오늘 밤, 느낄 수 있는가? ] 




나는 이제 오늘 밤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내가 원한다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Presley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