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다음 내용입니다.

콘티짜는 느낌으로 슥슥 뽑아내고 수정할 생각으로 썰로 올리던건데 분량이 썰로 올리기엔?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그냥 포타에 바로 올리는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상태...


문단 조정이나 소소한 단어 수정을 제외하고 타래에 올렸던 썰 그대로 백업합니다. 






경위야 어찌됐던 마물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숨이 끊어졌고, 유중혁과 그의 수하들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던 관계로 일단 성벽 안으로 돌아가기로 했음. 예상치 못했던 수확인 허연 남자도 함께. 물론 밧줄로 꽁꽁 묶고 새파란 날붙이가 겨누어진 상태였지만 허연 남자의 동의 하에(묻지는 않았다) 이루어진 일이었으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허연 남자는 성에 다다를때까지 잠시도 나불거리는걸 멈추지 않았음. 이시국에 성벽 방비가 이거밖에 안돼? 우리 중혁이 개풀어졌네?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아. 이렇게 드나드는게 많으면 쥐새끼가 숨어들어도 티가 안난나구. 얼마 전엔가 집에 있는 곡식이 야금야금 사라지길래 보니까 집에 쥐새끼가 몰래 숨어들어서였지 뭐야. 그놈들은 집 대들보도 긁어놔. 그거 알아? 아 우리 중혁이는 벽돌로 만든 성에서 사니 모르려나? 

이쯤되니 천하의 유중혁도 빡침을 견디지 못하고 허연 남자를 향해 칼을 뽑아들었는데 이 미친놈은 그걸 보더니 또 신이 나서 중혁아, 나 풀어주려고??하면서 헤벌레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음. 대체 뭐하는 놈인지 물어봐도 뒤가 구려보이는 웃음만 짓는 남자의 목을 뎅겅하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정도의 마물을 그렇게 해치울 수 있는 존재라면 그렇게 쉽게 썰려줄지도 의문이었음. 유중혁은 그대로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누르며 이 이상 시끄럽게 나불거리면 그 입에 뭐든 쑤셔넣어버릴거라고 말하고 돌아었음. 등 뒤의 남자는 또 어어 중혁아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할텐데~같은 헛소리를 주워섬기다가 유중혁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입을 꾹 다물곤 예의 그 뒤가 구려보이는 미소만 한가득 지어보일 뿐이엇음. 



어찌저찌 성에 도착해 비형을 비롯한 사절단을 제 방으로 돌려보낸 유중혁 일행은 문제의 허연 남자를 대동하고 성 구석의 빈 방으로 갔음. 부관인 이지혜를 제외한 모두를 내보낸 유중혁은 아직도 끈에 꽁꽁 묶여져있는 남자에게 물음. 네놈, 정체가 뭐지? 


- 우리 중혁이, 그렇게 안봤는데 매너가 꽝이네. 손님을 모셨을때는 손님 대접을 해야지.


순간 남자를 묶고있던 끈이 끊겨 바닥으로 떨어졌음. 마치 처음부터 묶여있지 않았었던 것 처럼. 


- 설마 정말 나를 다 잊은거야? 아무리 나라도 이건 좀 상처인데.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그걸 잊어. 

- 헛소리 그만해라. 너 같은 놈을 내가 알리 없다. 

- 나는 김독자. 너희가 카이제닉스라고 부르는 땅과 그 너머를 근거지로하는, 너희 말로 하자면 정령. 이렇게 말해도? 너무한데. 너 내 친구 해준다고 했잖아. 


숫제 떼를 쓰듯이 말하는 남자의 말에 유중혁은 할 말을 잃었음. 정령이라고? 개국 전설에 나오는 그 정령? 빡돌아서 계약 파기하고 ㅈ돼보라고 저주하고 떠났다던 그 정령? 그게? 여기서 이렇게?? 갑자기요?? 이지혜도 비슷한걸 떠올린 듯 입이 쩍 벌어져서는 김독자라 밝인 남자와 유중혁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음. 

가장 놀라운 사실은 마지막 문장이었음. 친구? 그 유중혁이?? 카이제닉스 내에서 유중혁은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능력, 믿고 따를만한 상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유독 거리가 있는 평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친구'라는 수식어였음. 어린 시절부터 친근과 온화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던지라 유중혁에게는 전우와 동료라면 몰라 친구같은 말랑따근한 수식어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인사였음.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웬 정령인지 뭔지가 유중혁을 두고 친구라고 하니 듣는 이지혜는 산타의 정체가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들은 어린아이같은 기분이 되어버리는 것이었음. 당황스러운건 유중혁도 마찬가지였음. 유중혁 평생의 기억에 저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음. 있었으면 기억 못할리가 없었음. 왜냐하면 유중혁 기준 피죽도 못얻어먹은 몰골에 저런 쭉정이 같은 사람을 제 옆에 가만히 두고 봤을리가 없기 때문이었음. 게다가 친구? 그런 나약한건 키운 기억이 없었음. 


- 헛소리를 그만하라고 했더니 미친 소리를 하고 있군. 역시 베는 편이 낫겠어. 


급기야 칼을 뽑아든 유중혁을 앞에 두고서야 김독자는 손을 내흔들며 설명하기 시작했음. 


-  아니 진짜, 친구하기로 했다니까. 네가 알았다고 했잖아. 

-  만난 기억조차 없는 놈과 친구가 된다는게 헛소리가 아니면 뭐지? 

- 환장하겠네, 이 망토도 네가 준거잖아! 


이건 또 신박한 헛소리였음. 남자, 김독자가 유중혁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한 망토는 온통 시허연 남자가 겉에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였음. 제법 신경써서 관리를 한 듯 했으나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낡은 망토는 과연 어중이 떠중이가 두르고 다닐만한 물건은 아닌듯 보였음. 김독자는 망토를 벗더니 직접 확인해보라며 유중혁에게 던져주었음. 유중혁은 망토를 손에 쥐고 잠시 김독자를 노려보는 듯 하더니 이내 망토를 뒤집어 목 깃을 따라 둘러친 모피로 덮힌 안쪽을 살폈음. 카이제닉스 공가로 납품되는 물품은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몇가지의 장치를 해두는데, 개중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모피와 옷감이 이어지는 경계의 독특한 재봉법과 자수였음.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채지 못하는 작은 차이인지라 대부분의 위조품은 여기서 진품 여부가 갈렸음. 그리고 놀랍게도 김독자가 넘긴 망토는 정말 공가로 납품되는, 그것도 유중혁의 몫으로 진상된 망토였음. 희미하게 당황스러움이 떠오른 유중혁의 표정에 김독자는 신이 나서 제 말이 맞지 않냐며 반색했음. 김독자는 유중혁이 어렸을적 숲에 제물로 바쳐졌을때 자신을 만났으며 그것을 제가 돌려보낸 이야기를, 더불어 유중혁이 열다섯번쯤 죽을뻔 하고 세번쯤 요단강에 허리춤까지 담궜다 뺐을 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그를 도왔는지를 신이 나서 나불거리기 시작했음.  이쯤되니 유중혁도 시허연 남자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음. 남자가 하는 말들 중엔 바깥으로 알리지 않고 조용히 묻은 이야기들도 있었음. 남자가 정말 그 일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는 일들이었음. 

혼란스러워진 유중혁은 일단 남자와 떨어져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음. 그래서 남자─김독자에게 우선 이 곳에 머물라고, 자신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함. 김독자는 흔쾌히 수락햇음. 


- 물론 내가 이 방에서 나가지 않는 편이 너에게는 좋겠지? 네가 '생각'을 정리할때까지는 얌전히 이곳에서 기다려줄게. 모쪼록 그 정리가 빨리 끝나길 바래. 가능하다면 이번처럼 내가 기다리다 못해 널 찾아가기 전에 말야. 


닫혀가는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김독자는 예의 뒤가 구려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음. 



김독자를 뒤로하고 나온 유중혁은 그길로 카이제닉스의 중진들을 불러모았음. 팔려가듯 늙은 귀족에게 시집 갈 뻔 한 것에 빡쳐 망명해 온 재상 유상아와 공가의 전속 의사로도 활약중인 학사 이설화, 유중혁의 오른팔로 자리잡은 근위대장 이현성까지.

카이제닉스는 생각보다 지배계층의 연령대가 젊은 편이었는데, 쓸만한 인재가 커지는걸 견제한 성류국의 영향도 있고, 워낙 젊은 나이에 대공이 된 유중혁이 잇다보니 자연스럽게 평균 연령대가 낮아진 탓도 있었음. 어쨌거나 다들 연령과는 무관하게 능력이 출중했고, 유중혁 또한 그들의 능력을 존중하고 우대했기에 지금의 빠른 발전이 가능했음. 

주제는 역시 김독자였음. 이 정체모를 존재는 자신을 카이제닉스 건국 설화에 나오는 그 정령의 후손이라고 자칭했고, 정황상 그건 사실인 것 같긴 함. 하지만 과연 이걸.. 믿어도 되는 것인가? 유중혁은 드물게도 혼란스러워하는게 얼굴에 드러날 정도였음. 유상아는 가만히 그 얘기를 듣더니 여상스럽게 물어봄. 


- 근데 그 김독자라는 자칭 정령은, 뭘 어떻게 하고 싶대요? 


그러고보니 김독자는 자기 소개만 열심히 했지 굳이 이 타이밍에 유중혁 앞에 나타나서 그를 도와주고 여기까지 잠자코 따라온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음. 애초에 유중혁이 묻지도 않았지.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실책에 유중혁은 할 말을 잃었음. 


- 이렇게 된거 우리끼리 아무리 얘기해봤자, 의미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다같이 가서 얘기나 들어보고 결정하는건 어떠세요? 


유상아는 트레이드 마크인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햇음. 기 세기로는 이 파티에서 제일가는 유상아였기 때문에 딱히 그 김독자를 앞에 둬도 방금의 유중혁같이 말릴 것 같진 않았음. 

합의를 본 유중혁 파티는 그대로 김독자가 있는 방으로 갔음. 방안의 김독자는 문을 마주보는 창틀에 기대 웃으며 유중혁 파티를 맞이했음. 얼레벌레 인사를 나눈 두 팀은 말없이 탐색에 들어갔음 시작은 유상아가 끊었겠지. 


- 듣자하니 저희 대공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으시다구요. 

- 어휴 그럼요. 중혁이랑은 뭐 한참 전부터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죠. 


여기서 유상아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유중혁을 향함. 김독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말을 이어가며 유중혁과의 인생사에서 자신이 행한 사실을 기반한 날조를 구구절절 늘어놓았음. 김독자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제 소매를 잡아당기는 유상아가 아니었다면 아마 유중혁은 옛저녁에 김독자의 머리통이든 옷자락이든 뭐든 베어냈을 것이엇음.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물론 유중혁은 제외한다)를 조성햇을 무렵 유상아가 본론을 꺼냇음: 그럼 정령 김독자씨는 어째서 지금, 이 시기에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나셨는지요? 


- 그동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대공을 지켜보고 계시지 않았나요? 지금까지처럼 지켜보기만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었는지? 

- 아까의 마물, 보고도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았어? 


묘하게 서늘해진 김독자의 눈이 유중혁을 향했음.


- '그건' 이 땅의 것이 아냐. 주변을 봐. 보이는 것이라곤 눈 밖에 없는 곳에 그런 시커먼게 돌아다닌다? 그건 잡아먹어줍쇼 하는거지. 작은 짐승들이면 몰라, 이 땅에 색 있는 것들 중 덩치 큰 것들은 사라진지 오래야. 

- ...무슨 말이 하고싶은거냐. 

- 누군가 이 땅을 노리고 있어. 정확히는 너를.


마물이 늘어난 것에 대한 이유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비약이었음. 김독자의 말대로 최근의 마물은 그동안 보이던 것들과는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들이었음. 온화해지는 환경과 달리 나타나는 마물은 다소 기괴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맥락을 잃은 형태인 것들이 많았음. 


- 이 땅에는 주로 하얗고 검은 것들이지. 하지만 그 외의 색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좋아. 반면에 붉은 털은 대륙 동부에서 가장 흔한 색이고, 

- 대륙 동부... 

- 상태만 봐도 그래. 얼이라도 빠진 양 제정신이 아니지. 근데 그거 알아? 요 근래 북쪽 숲에서 그런 녀석들이 제법 튀어나왔어. 너희는 모르겠지만 죽어있는 상태로 발견된 것들도 여럿 있었고. 개중에는 이 땅에서 난 것과 섞이다 만 것도 있었단말이지. 

- '섞이다 만 것'..? 

- 누군가 감히 장난질을 했다는 소리야. 


과연 이 말에는 모두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음. 이능을 다루는 자들 사이에서도 생명을 이용하는 류는 금기로 여겨지고 꺼리는 것이었음. 생명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신 뿐이라는 것이 불문율인 세상에서 감히 신을 칭한다는 것은 신의 후예를 자칭하는 성류국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내용임. 북부 지역은 대륙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고 실험 재료가 넘쳐난다는 장점이 있기야 하지만 실험 이전에 그 실험 재료에게 죽지 않는 것이 먼저인 동네였기 때문에 오히려 실험 장소로는 적절하지 않은 곳이었음.  


-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동안 이 땅은 이전에 비해서 무척이나 평온해졌는데도 너의 인생은 그렇지 않았지. 

- 누군가 의도한 위협이라는 소린가? 

- 무서운건 마물 따위가 아냐. 너희 인간이지. 


유리알같이 매끈한 눈이 일행을 훑었음. 그것은 진실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음. 


- 나는 숲을 지키고싶어. 시도때도없이 눈이 휘날리고 툭하면 마물이 쏟아져나오는 정신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나름 소중한 곳이거든. 내 숲에 장난질 치는 놈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소리야. 


그러려면 힘이 필요한데, 하며 유중혁을 돌아보는 김독자는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빙글거리며 웃는 표정이었음. 


- 가장 손쉬운 방법이 카이제닉스의 피를 잇는 자와 맹약을  맺는 것이거든. 일전에 만났을땐 우리 중혁이가 아직 꼬맹이였어서 임시적인 가계약 상태로 맺어졌단말이지. 원칙적으로는 네가 날 불러서 맹약을 완성해야하긴 햇는데, 우리 중혁이가 글쎄 몇 년이 지나도록 나를 떠올리고 찾아줄 기미가 안보이는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형님이 직접 찾아오게 됐다, 는게 지금까지의 이야기. 


맹약이라는 것은 어쨌거나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지는 계약 관계였기 때문에 서로가 확실한 인지 하에 계약을 맺어야 했음. 얼레벌레 백지 계약서에 서명해서 등쳐먹는 방식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음. 이게 완전히 끝나야 다시금 정령의 가호를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유중혁은 그날 김독자를 만난 것 조차 까맣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반쪽짜리 계약 상태로 오늘에 이른 것이었음. 그렇지 않아도 김독자는 반쪽짜리 정령인 탓에 계약이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많았음. 김독자가 쫓아와서 유중혁을 탈탈 털어서 계약을 끝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까마득히 어린 애를 상대로 그 짓을 하기엔 김독자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 김독자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음. 물론 이젠 그렇게 기다리고 있기도 지겨워져서 쫓아온거지만. 

어쨌거나 계약만 맺으면 정령을 내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은 유중혁 입장에서는 매우 개꿀인 상황이었으므로 미루고 어쩌고 할 이유도 없었음. 저 정령이 얼마나 쓸모있을지는 바로 오늘 제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 그래서 그 계약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맺을 수 있는거지? 

- 음 일단 조건이 채워져야겠지. 이명을 얻고 성체로 간주되는 정령과 왕에 준하는 집단의 지도자로서 카이제닉스를 이끄는 자 일 것. 이제 너도 정식 카이제닉스의 대공이니 전제 조건은 채워졌고. 여든 다섯의 별빛을 받은 달의 눈물에 햇빛을 베어 문 바람의 결정을 더한 대지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디디고 선 땅 위에 나란히 선 사이임을 천명하고.. 

- 잠깐. 

- 엉? 


가만히 듣고있으려니 먼가 이상했음. 그도그럴게 김독자가 읊고있는 의식이라는건, 


- 그건 혼인 의식 아닌가? 지금 얼렁뚱땅 이상한걸 들이밀고 있는데, 

-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말하는건 초대 카이제닉스 건국 시기부터 내려오는 의식의 순서인데. 

- 네놈이야말로 아까부터 미친 소리만 읊어대고 있지 않나. 나를 가지고 놀 셈인가?! 

- 칼부터 뽑지 말고! 얘길 좀 들어! 맹약의 의식을 흉내낸게 인간의 혼인 의식이라고! 과거 정령과 카이제닉스의 왕이 생사를 함께 한 사이가 되겠노라 맹세한 것 처럼 영원을 약속하는거잖아! 생각을 해봐, 그 의식은 카이제닉스에서만 내려오는 독특한 풍습이잖아! 


그건 맞는 소리엿음. 확실이 디테일에서 많은 부분이 간소화됐지만 전반적인 구조가 비슷한걸 보면 어쨌거나 둘 사이에 유기적인 영향이 있었다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음. 근데 하필이면 저런 뒤가 구려보이는 정령과 모로봐도 혼인 의식을, 그러니까 결혼식을 하자니 웬지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이엇음. 심지어 유중혁은 미혼이었다! 


- 이해해. 우리 중혁이가 결혼은 처음이라 부끄러워서 그러는구나. 그러게 진즉 설화씨랑 결혼했으면 좀 좋아. - 그럼 네놈은 몇번이고 해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건가? 파렴치하군. 그리고 그건 어린 시절에 맺은 정혼이다. 그런 것에 얽매이다니, 보기보다 늙은이같은 구석이 있군. 

- 너무하네, 나도 우리 중혁이에게 처음을 줄 생각으로 완전 아끼고 아끼던, 

- 그런식으로 계속 헛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계약이고 뭐고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보도록 하지. 

- 그건 무조건 너에게 손해야. 알지, 중혁아?  


사실 유중혁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였음. 이 촐싹거리는 정령과 얽혀야한다는걸 제외하면 유중혁에게는 무조건 이득뿐인 계약이었음. 대체 김독자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유중혁을 신뢰하는걸까. 

장난스럽게 얘기해 모든 말이 의심스러운 와중에도 유중혁을 바라보는 눈은 신뢰로 가득 차있었음. 김독자의 말을 따르면 둘이 직접 만나 교류를 한 것이라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이후 오늘이 처음이었음. 아무리 김독자와 자신의 의견이 합치한다고는 하지만 그걸로 이정도의 신뢰가 생겼다고는 믿기 어려웠음. 


- 어쨌거나 그럼 이제 김독자씨도 카이제닉스의 일원이 되는 건가요?  


김독자와 유중혁의 미묘한 대치를 깬 것은 유상아였음.  


-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예요. 마물이야 잡으면 그만이지만 동쪽에서 온 시끄러운 것들이 오늘의 난장판을 봐버려서 말이죠. 김독자씨를 그 사람들 앞에서 정령이라고 소개할 수도 없는 일이구요. 


김독자가 정령인 것은 문제가 없으나 그 존재를 성류국에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였음. 카이제닉스 건국 설화는 대륙을 통틀어 유명한 내용이었음. 그 설화가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고, 심지어 안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이번 대에 일부라도 재현된다면 성류국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도모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음. 그럴 생각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카이제닉스 입장에서는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음. 


 - 우선 독자씨, 아, 그냥 독자씨라고 불러도 되겠죠? 예비 대공비 전하라고 부를수도 없고 말이죠.(이 부분에서 유중혁이 부릅뜬 눈으로 유상아를 노려보았다) 독자씨에 대해서는 망명한 마법사 정도로 치도록 하죠. 소국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서 왔다고하면 깊게 캐묻는 사람도 없을거예요.  


카이제닉스에는 워낙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인재가 많은 편이었음. 능력만 있다면 중용해준다는 풍조가 대륙 곳곳의 인재를 끌어모으는 계기였음. 개중에는 한미한 출신에 어울리지 않는 뛰어난 능력탓에 시달리다 튕겨지듯 카이제닉스로 향한 사람이 다수였기 때문에 대충 말해도 서로가 이해하는 사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때문에 자세한 사정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자리잡아있었음.

아. 유중혁의 뒤에서 모든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있던 이지혜가 손을 들고 발언 기회를 얻었음. 


- 근데 예비 전하가(유중혁이 이번에는 이지혜를 노려보았음) 마물을 잡는 장면을 그 도깨비 무리가 봤는데요. 전부는 아니고.. 그 마지막까지 눈 뜨고 있던 한명.. 이름이 뭐더라, 비형이랬던가..? 


이건 조금 문제였음. 죄다 기절해있었으면 적당히 입이라도 털어서 넘어가겠지만 김독자가 능력을 쓰는 장면을 봤다면 의심을 할 수 있었음. 아무리 마법사라도 일개 개인이 그런 마물을 그렇게 손쉽게 해치울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임.  


- ...여차하면 조용히 없애볼까요.


침묵을 유지하던 남자, 이현성이 조용히 운을 뗐다. 워낙 사건사고로 어이없이 생명을 잃는 일이 많은 북부였음. 스리슬쩍 한명 죽는다고 해도 의심할 여지도 없었음. 당장 저 비형도 그렇게 죽은 선임의 뒤를 이어 온 후임이엇으로.


- 일단 대화로 해결해보지. 저쪽에 빌미를 줘봤자 귀찮아지는건 이쪽이다. 


이현성의 말을 일축한 유중혁은 김독자를 돌아봤음. 영 비리비리해보이는 행색에 창백해한 낯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음. 


- 대충 정리됐으니 일단 밥부터 먹이고 시작하지. 






야생의 소비러. 존잘님들 연성 감사합니다. twt: @mori_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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