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버스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소설입니다. (컬러버스: 사람들은 태어날 때마다 운명의 상대를 가지고, 자신의 그 운명의 상대와 서로 사랑하게되면 온통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색깔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함.)

*피폐물입니다. (피, 자해 등등과 같은 고어적 요소는 없음)

*보쿠아카 장편은 그 여름이 가기 전에 시리즈가 완결된 뒤에 다시 이어집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앞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상단에 작은 창문이 나있는 철제 문은 아마 아오바죠사이 학교 옥상으로 이어지는 문일 터였다.


끼이익-


문을 살짝 밀었을 뿐인데도 녹슨 쇳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옥상으로 발을 내딛자 옥상의 끝을 둘러싸고 있는 초록빛 철창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하늘과 같은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털구름이 아름답게 퍼져있는 하늘은 양의 기운이 만연한 여름의 것이었다. 분명 무더운 여름은 청명함 따위와는 거리가 있을게 분명한데, 왜인지 지금의 하늘은 보고만 있어도 시원해지는 느낌이라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깡!

학교 교정 내에 있으면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야구방망이의 소리가 어김없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소리, 익숙한 느낌. 그렇담 이곳엔 익숙한 너도 있을 터였다.


"이와쨩! 오이카와 씨 왔지롱~"


입을 열어 활기차게 말하자 아니나 다를까, 저 앞에 서있던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에 손을 번쩍 든 오이카와가 활짝 미소 지었다.


"많이 기다렸어?"


"오냐.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네. 난 또 네가 무슨 우유빵 사러 가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들러 간 줄 알았다고."


"미안미안~! 그런데 잘생긴 토오루 씨를 본 여자애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는걸~ 빠져나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서 말이야!"


"... 쿠소카와 같으니."


거의 습관처럼 붙은 욕을 중얼거린 이와이즈미가 들고 있던 빵을 까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에에? 이와쨩은 단팥빵? 뭐야 그게~ 할아버지 같아!"


"남은 게 이것밖에 없었어."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오이카와의 목덜미를 손날로 가볍게 친 이와이즈미가 초록색 철창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우물우물. 우물.

그 뒤로는 말없이 빵만 씹는 이와이즈미에 오이카와 또한 들고 있던 우유빵을 부시럭대며 깠다. 반쯤 벌어진 비닐 사이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우유빵의 속살이 드러났다. 장난스럽게 반대쪽 손으로 그것을 쿡쿡 찔러보던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닿아 있는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에~ 축구부랑 야구부인가? 점심시간까지도 열심이네..."


"... 엉, 그러게."


빵을 씹으면서 대답하느라 그의 발음이 약간 뭉개져서 들려왔다.
귀여워. 자연스레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미소 지었다. 삐죽삐죽한 성게머리 밑에 있는 이목구비는 그가 우유빵보다도 더 사랑하는 그의 것이었다.



깡!

".... 오오."


야구방망이가 공에 맞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옴과 동시, 이와이즈미의 작은 탄식 소리가 옆에서 흘러나왔다.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그의 모습을 보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은 오이카와가 다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홈런을 친 건지, 야구공이 푸른 하늘을 시원스레 가르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우물우물... 여기서 배구부는 잘 안 보이네... 우물..."


"그러게. 별관이 체육관을 가려서 잘 안 보인다. 그건 그렇고, 내가 다 씹고 말하랬지 오이카와!!"


분노와 짜증으로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던 오이카와가 씹던 우유빵을 꿀꺽, 삼킨 뒤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여학생들에게 자주 흩뿌리곤 하는, 이와이즈미가 매우 싫어하는 종류의 미소였다.


"이와쨩은 우리 엄마예요?"


"...."


"악!! 아파, 이와쨩!"


"아프라고 때린 거야! 넌 좀 맞아야 돼!"


뒤이어 날아온 발차기가 종아리를 강하게 가격하자, 알싸한 아픔이 다리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파...! 다리를 끌어안은 오이카와가 끙끙대며 목소리를 키웠다.
이와쨩, 그렇게 진심으로 차면 어떡해! 어디 인대 하나 늘어났을지도 몰라!
조용히 해, 쿠소카와!


얼마 동안의 실랑이 끝에, 오이카와는 옥상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이 센 소꿉친구를 상대하는 건 늘 힘이 들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는 듯했다.


"오이카와."


"응?"


"넌..."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그의 눈동자가 먼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 한동안 이어지지 않는 말을 재촉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렸다.


"색깔이 보이냐?"


".... 어?"


"오이카와 넌, 색깔이 보이냐고."


긴장이 맥없이 풀렸다. 난 또 뭐라고. 오이카와가 다시금 밝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면서 빙글거렸다.


"당연하지! 이와쨩이 입고 있는 하복 와이셔츠는 파란색, 하늘도 파란색! 오늘따라 하늘이 예쁘네~ 정말 밝은 파란색이야. 이와쨩 셔츠도 이런 파란색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 왜? 내 셔츠는 어떤 파란색인데?"


이와이즈미의 질문에 한동안 벙쪄있던 오이카와가 돌연 요란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이와쨩,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이와쨩도 보이면서 왜 안 보이는 척하는 거래~?"


"무슨 소리야?"


"네네, 알겠어요 이와쨩~ 토오루 씨가 말해줄게요~ 이와쨩 셔츠는 하늘보다 조금 더 칙칙한 파란색!"


"...."


"정답이지?"


아무 말없이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던 이와이즈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모르지."


그 담백한 대답에 오이카와가 불만을 여과 없이 드러낸 얼굴로 눈을 얇게 떴다.



"이와쨩, 대체 언제까지 장난치려는 거야...? 아니 애초에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농담해봤자 전혀 웃기지도 않으니까 그만두지 그래?"


"쿠소카와! 너야말로 오늘따라 왜 그러냐? 설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나한테 아무 말 안 했단 말이지? 살다 보니 천하의 오이카와가 부끄러워서 말을 사리는 모습도 보게 되는구나... 오래 살고 볼일이야, 쯧."



오이카와가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와쨩...


"미리 알려줬으면 축하라도 해줬을 거 아니냐..."


"... 이와쨩. 나 지금 진지해. 정말 안 보이는 거야, 색깔이?"


"너... 지금 색깔 볼 수 있게 됐다고 나 약 올리는 거야? 안 보여! 네가 얘기했던 그 예쁘다던 하늘도 잿빛, 내 옷도 잿빛, 너도 잿빛! 이제 됐냐?"


두 눈을 크게 뜬 오이카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다른 별다른 말없이 한숨만 내쉬던 이와이즈미는 곧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서, 너한테 색깔을 선물해준 네 운명의 상대는 누군데?"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정적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방금 그 질문을 끝으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여름 바람에 휩쓸리듯, 오이카와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이제 알겠다."


아아, 이와쨩. 이제 알아버렸어. 

이건 꿈이구나.


내가 사랑하는 하지메는 색깔을 못 볼 리가 없었고, 나한테 운명의 상대가 누구냐는 질문을 할 리도 없으니까 이건, 꿈이었던 거야. 그걸 이제야 알아버렸어.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아직....!


형상이 흐릿해지는 그를 잡아보려 손을 뻗었지만, 비어버린 손아귀에는 그저 공허한 허공만이 닿을 뿐이었다.




"헉!"


삐비비빅. 삐비비빅. 삐비비빅.


헛숨을 들이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5시 정각으로 맞춰뒀던 시계의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리고 있었다. 그에 한동안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던 오이카와가 천천히 팔을 들어 시계의 전원 버튼을 힘주어 눌렀다. 

이와이즈미와 단둘이 자취를 하겠다고 호기롭게 본가를 나선 지도 어언 3년. 이제는 굳이 보지 않고도 시계의 버튼을 누르는 것 정도는 할 수가 있었다.


땀으로 젖은 져지가 온몸에 휘감겨 있는 게 느껴졌다. 어젯밤, 너무 무리해서 근육을 쓴 게 화근이었던 건지 침대에 눕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잠이 들었나 보다.
침대 바로 앞에 나 있는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는걸 보니 커튼을 치는 것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여름의 밤은 짧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어둠이 깔려있었던 시간인데, 이제는 환하다.

착. 커튼을 당기자 커튼봉과 커튼이 달린 고리가 부딪혀 나는 단말마의 소리와 함께 방안에 남아있던 빛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


침대에 엎드린 채 상체만 일으키고 있던 오이카와가 그제서야 털썩, 하며 다시 베개에 누웠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삭막한 풍경이 들어왔다. 

옷장, 전신거울, 작은 탁자. 크진 않지만 남자 둘이서 살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혼자 살기엔 너무나도 넓은 곳이라는 게 문제랄까.


오이카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2인용 침대의 반절은 온기 없이 차갑게 식어있다.


"이와쨩. 또, 네 꿈을 꿨어."


*


탕탕탕탕. 끼익, 끽끽.


시끄럽지만 규칙적인 소음이 체육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소리가 멎은 것은 넓은 공간 전체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고함 때문이었다.


"오이카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관록 있는 표정과 분위기. 필히 팀의 주장일 터였다.


어젯밤 내도록 입고 잤던 져지는 빨래통에 넣어버린 후라, 훈련복 하나만 달랑 걸친 오이카와는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자, 왜 이렇게 멍해? 정신 차려! 기합 넣고 다시 간다!"


짝짝. 그가 두어 번 손뼉을 쳤다. 그에 다시금 들고 있던 공으로 시선을 돌린 오이카와가 손바닥 안에서 공을 핑그르르, 가볍게 굴렸다. 이윽고 공이 손에서 떨어져 허공으로 올랐다. 

다음으로 할 것은, 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달려가 점프. 등허리를 곧게 핌과 동시에, 그대로 팔을 젖혀 공을 후려치는 것. 거의 20년동안 수없이 해왔던 것이었으므로 이제 는 눈 감고도 읊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도움닫기 후 뛰어올랐던 오이카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위로 올랐던 공은 허무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튕겨나갔다.


"오이카와!! 이번엔 왜 또 안 때린 거야?"


"헉.. 헉..."


오이카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굴러가는 공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점프를 했지만, 올려다본 공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거기서 팔을 휘두른다 하더라도 공을 맞힐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내려온 거였다. 

한마디로, 점프의 최고 도달점이 낮아졌다는 뜻이었다. 


이런 것들을 줄줄이 말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오이카와는 그저 이를 악물며 죄송하다고 외쳤다.



"그만해라."


"... 감독님?"


다시금 언성을 높이려는 남자를 막은 감독이 오이카와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어 손에 든 수건을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던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좀 쉬어. 너, 요즘 너무 무리했어.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저기 벤치에 앉아서 머리나 식혀라."


움찔. 벤치라는 단어에 몸이 떨렸지만, 결국에그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후...."


팔꿈치를 무릎에 대어 상체를 지탱한 채로 앉아있던 오이카와가 얼굴을 형편없게 일그러뜨렸다. 

자신이 코트를 나온 뒤 연습이 재게 된 것인지, 운동화와 바닥이 마찰되는 소리가 다시금 체육관 전체에 웅웅 댔다.


알고 있었다. 몸이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 것은스스로도 느껴졌다. 그것이 두려워서, 지난 며칠간은 한계를 넘을 정도로 고되게 훈련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악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이카와."


"... 네."


머리 양옆으로 내려온 수건 때문에 시야가 좁았다.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감독이 보였다. 입가와 눈매에 잡힌 지긋한 주름은 그의 인상을 인자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으나, 오이카와는 훈련만 시작되면 그가 얼마나 냉정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많이 힘드냐?"


".... 아뇨."


"뻥치지 마라. 네 폐가 살려달라고 헐떡거리는 게 여기서도 다 들려. 내가 술이랑 담배 좀 끊으라고 말했잖아. 폐가 망가지니까 운동이 힘든거야!"


오이카와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너 어떡할 건데? 곧 대회야! 이제 한 달도 더 안 남았는데, 주전 세터란 놈이 이렇게 삐걱 대면 어쩌자는 거냐고!"


"면목..."


"뭐?"


"면목 없습니다."


오이카와의 대답에 감독의 한숨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내가 널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봐왔어. 그때는 안 이랬잖아. 오히려 기운이 넘쳐 흘렀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망가진 거냐? 말을 해야 알지!"


"...."


이유는 알고 있었다. 늘 옆에 붙어서 잔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던 사람이 없어져 버려서 그런 거겠지.


"-이와쨩은 우리 엄마예요?"


고교 생활, 틈만 나면 자신에게 타박을 해오는 이와이즈미에게 밥 먹듯이 했던 말이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쥔 오이카와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독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순 없었으니, 적어도 겉치레 정도로는 평소처럼 행동을 해야 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불어, 오이카와."


"음.... 엄마를 잃은 아들의 최후랄까요~?"


능글맞은 목소리에 감독의 얼굴이 서서히 흙빛으로 물들어갔다. 역린을 건드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가 의도했던 바와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지만, 굳이 정정해줄 필요성을 못 느낀 오이카와가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은 감독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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