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잠이 안 왔다. 잡생각 줄이려고 일부러 뱅뱅 돌다 오기까지 했는데도 어째 눈은 더 말똥했다. 핸드폰을 키면 회색 털을 가진 고양이가 떠 있다. 씻고 누운 후로 내내 들락거린 강다니엘의 프사다. 볼 때마다 같은 사진임에도 계속 보고 또 봤다. 그 애와의 대화창은 짧게 멈춰있다. 너희 집 고양이냐고 물었던 그때를 시작으로 간간이 게임 관련해 연락한 게 다다. 전부 박지훈이 먼저 보냈다. 시답지 않은 걸로 연락해도 강다니엘은 잘 받아줬다. 용건이 끝나면 대화도 자연스레 끝나는 패턴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화창을 조금 더 늘려볼 생각이다. 뭐라도 보내기 전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고양이 사진을 내리고 강다니엘과의 대화창에 들어갔다. 길지도 않은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의미없이 반복하다 보면 대화의 모든 시작점이 제 쪽이라 순간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그도 금세 수긍하고 만다. 관심있는 쪽이 더 다가갈 수밖에 없으니까. 박지훈은 끝이 둥그런 두 엄지를 액정 위에 올렸다.


집이야?
들어갔어?
뭐해?


당장 떠오르는 게 이런 것뿐이다. 저 중에 뭘 보내도 웃길 것 같다. 새벽 두시가 다 넘은 시간. 강다니엘과 헤어진 지도 한참 됐다. 이제와서 저런 멘트를 날리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겠지 싶다. 그러면...


                                       [자?]
                                       [안 자면 게임할래?]


결국 또 이거다. 몇 바퀴를 돌고 돌아 결국 택하게 되는 건 역시나 가장 무난한 주제. 이제 박지훈에게 있어 게임이란 강다니엘에게 말 걸기 위한 하나의 수단쯤으로 변질돼가고 있다.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 겪어도 참 길다. 오분쯤 지났나 싶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제 겨우 이분 지나있다. 아직 집 안 들어갔나? 아니 이 시간까지? 둘이? 왜??? 뭐 하나 아는 것이 없으니 근거없는 추측만 늘어간다. 오분, 십분.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다. 답장은 18분이 지났을 때 왔다.


[나 지금 잘라고 누웠어]
[ㅠㅠ]


아흑, 지금 잘라고 누웠대... 저 눈물은 또 뭐야 귀여워. 어쨌든 집이라는 것에 묘하게 안심이 된 박지훈은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얼굴로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잘 자라는 내용을 쓰다 하마터면 내 꿈 꾸라고까지 할 뻔했다. 정신 챙기자 박지훈. 창을 띄워놓고 있는지 보내자마자 1이 사라졌다. 곧 굿나잇 인사를 건네는 고양이 이모티콘이 왔다. 귀여워서 주먹을 물다가, 문득 강다니엘 이름 옆에 떡하니 자리한 회색 고양이가 미워져서 액정을 껐다. 카톡의 마지막은 무조건 제가 장식하던 혼자만의 룰을 깬 거다. 고양이가 미운 게 아니라 그 고양이의 주인이 미운 것 같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강다니엘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이 밉다. 이런 게 짝사랑인가.




한순간을 스치고 4

W. 스킨




잠을 설쳤다. 그런데도 아침 일찍 울리는 알람만큼은 기똥차게 캐치했다.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것부터 떠오르고 그러던데. 오늘은 딱 강다니엘 프사 속 고양이부터 떠올랐다. 강다니엘, 회색 고양이, 짝사랑. 도무지 연결 짓고 싶지 않은 단어를 나열하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교는 가야 했다. 일찍, 강다니엘 보러.


저기압에 가까웠던 기분은 학교 정문에 서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기 무섭게 서서히 올랐다. 하얀 하복을 입은 강다니엘이 효길 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반가웠다. 박지훈은 여태 산발을 하고 온 앞머리를 정리했다. 강다니엘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꾸벅 고개 숙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한 그는 뒤에 있는 박지훈을 발견하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효길 쌤이 박지훈을 부르려 한다. 허리 숙여 인사하며 급하게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댔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강다니엘을 놀래켜 주고 싶어졌다. 별스럽단 표정을 지어보이는 선생님께 애교 있게 웃곤 뒤를 따랐다. 살금살금 누가 봐도 놀래키려는 모양새로 따라가다 보면, 뜬금없이 감상에 빠지게 된다.


며칠 전 머리를 잘라 조금 짧아진 갈색 뒷머리. 뒤통수가 동글동글하니 예뻐서 뒤에서 보면 꼭 누룽지 사탕 같다. 강다니엘이 박지훈의 뒤통수를 만진 적은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없다. 언젠가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한 의도 아니고 그냥 귀여워서... 동그란 뒤통수 아래론 떡 벌어진 어깨가 있다. 방금까지 귀여워를 외치던 게 미안하리만치 넓고 단단하다. 언제 봐도 신기한 허리 위치를 시작으로 쭈우욱 내려가는 다리까지. 저 중 하나만 갖고 태어나도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절을 할 텐데. 볼 때마다 놀랍다. 진짜 멋있다... 박지훈의 입이 헤 벌어졌다.


"언제 놀래킬 거야."


강다니엘이 갑자기 혼잣말을 했다. 아니지. 박지훈한테 한 말이었다. 놀라서 갈색 뒤통수를 가만 쳐다보는데 유리문에 비친 강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 진작부터 알고 있었구나. 민망함에 멈춰서자 강다니엘이 뒤돌아보며 웃었다. 햇살 받은 멍멍이 같은 얼굴이 반짝거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 얼굴로 저렇게 웃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


"언제부터 알았어?"
"쌤한테 인사하고 뒤돌았을 때부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괜히 살금살금 걸었네. 뒤에서 몰래 하트 안 날린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신발을 갈아신고 나란히 들어갔다. 조용한 학교 안에 서로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아침. 언제부턴가 박지훈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게 된 시간이다. 필요 이상으로 붙어 섰는지 자꾸만 하복 아래 드러난 팔끼리 스쳤다. 아까부터 입꼬리를 씰룩이던 강다니엘이 간지럽다고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모티콘 같은 상큼한 표정에 심장이 또 쿵쿵댄다. 강다니엘은 모르겠지. 이 간질거림은 언제고 적응되지 않을 것 같다. 박지훈은 괜히 몸을 붙이며 장난을 걸었다. 일부러 더 큰 액션을 취하며 받아주는 강다니엘이 좋았다. 좋다는 말밖엔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다.


다니엘은 어제 일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박지훈은 정문에서 강다니엘 뒤통수를 보자마자 네가 좋아한다는 그 짝사랑 상대에 대해 캐묻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추측해보건대 먼저 묻지 않는 이상 강다니엘이 그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어제가 아니었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프사 속 회색 고양이는 여전히 그저 아는 사람의 고양이, 그뿐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짝사랑 중이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다.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하고 또 궁금했지만 우선 참기로 한다. 여지껏 먼저 말 안 한 걸 보면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고, 무엇보다 박지훈이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막상 듣고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이리 와서 앉아. 게임하자.”
“이제 너네 반 다 됐네.”
“나 이제 우리 반보다 여기가 더 익숙한 것 같애.”


그냥 해 본 말 아니고 진심이다. 하도 출석하다 보니 1반보다 5반 풍경이 더 익숙하고 친근해졌다. 정작 진짜 반으로 돌아가선 수업시간에 조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다. 지훈은 다니엘 앞자리에 뒤로 돌아 앉았다. 잠시 후 사물함에 다녀온 강다니엘이 제 자리에 앉으면 둘은 완벽히 마주 보는 포지션이 된다. 바로 옆에선 하얀 커튼이 아침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린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순간. 박지훈은 게임이 로딩되는 틈을 타 의자 등받이에 턱을 기댔다. 마찬가지로 로딩을 기다리며 강다니엘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상대적으로 낮아진 박지훈의 시야에 갸름한 턱과 그를 받친 큰 손, 이름 넉 자가 새겨진 하얀색 하복이 들어온다. 오늘은 안에 하얀 반팔을 받쳐입고 온 모양이다. 좀 낯간지럽고 웃긴 생각이지만 얼굴도 몸도 옷도 다 뽀얘서 순간 천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해놓고 소름 돋아서 금방 떨쳐내긴 했다.


“다니엘 너 운동 많이 하지.”
“많이까진 아니고. 좋아하긴 해.”
“어깨가 어떻게 그래?”
“...내가 넓나? 나만 한 사람 많이 봤는데.”
“......”


재수없으라고 한 말인가? 그렇다면 완벽한 성공인데 또 그렇다고 보기엔 강다니엘의 얼굴이 너무 티없이 맑다. 설령 재수없으라고 한 말이 맞대도 하나도 안 재수없다. 그게 중요하지. 로딩이 끝난 핸드폰을 들고 강다니엘을 힐끔거렸다. 아까부터 작게 하품을 하는 게 피곤해 보이기도 한다. 두시에 잤으면 피곤할 만두 하지. 그렇게 생각하던 박지훈은 그보다 훨씬 더 늦게 잤으면서도 아무런 피곤도 느끼지 못하는 중이다. 짝사랑이란 실로 대단하다.


박지훈은 등받이에 기댔던 얼굴을 바로 하고 쫑알쫑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그걸 듣는 강다니엘은 가만히 눈을 맞추고 적절하게 반응해줬다. 웃으라고 한 말이 전혀 아님에도 별안간 웃음을 터트릴 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다니엘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건 좋다.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박우진에게 들은 이야기부터 옆 반 양아치 김원성에게 들은 이야기,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까지 모조리 끌어왔다. 쉴 새 없이 옹알이던 입이 멈춘 건 턱을 괸 강다니엘의 눈이 어느 순간 제 얼굴을 빤히, 정말 빠안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참이다.


"...왜?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근데 뭘 그렇게 빤히..."
"박지훈 진짜 토끼 닮았네."


아... 난 또 뭐라고. 박지훈은 김빠진 얼굴로 그런 소리는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많이 들어왔으며 어렸을 적 별명마저 박토끼였다고 종알거렸으나, 정말이지 빤히도 쳐다보는 강다니엘의 눈빛을 다시 한 번 인식했을 땐 얼굴에서 반대로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별명이 박토끼였어?”
“어... 아니면 토끼쥬니.”
“쥬니... 아 진짜 귀엽다.”
“...별게 다 귀엽대.”
“지훈아 나 볼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되냐.”
“내가, 내가 니 볼을?”
“아니 내가 너 볼을.”


박지훈은 경악했다. 사내놈들끼리 이 무슨 간지러운 제안이야. 아무리 남의 손타는 게 익숙한 박지훈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 놈들일 뿐이다. 애초에 친구들은 박지훈의 허락 따위 묻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말도 없이 대뜸 손부터 뻗어 볼을 꼬집거나 찌부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든 말든 그거야 당연히 별생각 없었다. 뭘 하든 걔네랑은 너무 친구니까. 근데 얘는 강다니엘이고, 아마 내가 짝사랑 중인 애...란 말이지? 이건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강다니엘은 당황하는 박지훈이 웃긴지 큭큭대며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손끝이 가까워질 땐 다니엘 얼굴에 어린 웃음기가 조금은 사라졌다. 아니 뭐야? 얘 진짜 내 볼 만질 건가 봐, 뭐야 왜 이래? 가까워진 손에서 그 좋은 향수 냄새가 났다. 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


다가온 큰 손은 정확히 왼쪽 볼을 슥슥 쓸었다. 당황스럽게도, 이렇게 조심스러울 수가 있나 싶은 손길로. 볼을 만져 본다는 건 당연히 꼬집어 보겠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강다니엘은 달랐다. 무슨 갓난아기라도 만지는 양 손에 힘을 다 빼고 두어 번 쓸어본 게 전부였다. 그렇게 만져서 느낌이나 나나? 싶을 정도. 허나 그 조심스러운 손길은 소년 박지훈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생전 이렇게 간지러운 손길은 갓 태어나고 느꼈을 엄마의 손길 이후 처음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적당히 따뜻한 손이 훑고 지나간 왼쪽 뺨이 후끈거렸다. 볼에 열이 나다 못해 피까지 나고 있는 게 아닐까. 온갖 오바스런 생각도 전혀 오바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눈을 땡그랗게 뜨고 봐.”
“......”
“아 진짜 토끼 같다. 존나 귀엽네.”


그러면서 거둔 손을 다시 뻗어 한 번 더 슥슥. 눈썹을 내리고 밝게 웃는 얼굴이 잔상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박지훈은 혼미한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그쯤에서 머릿속을 치고 올라오는 의문. 이런 애가, 이런 강다니엘이 누구를 짝사랑 중이라고? 쌍방이 아니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또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이 미워진다. 좋아해줘서 감사하다고 동네방네 물 떠놓고 감사 기도 드려도 모자랄 판에 무려 짝사랑을 하게 만들다니. 복에 겨워도 너무 겨웠지 싶다.


“어제 준석이가 세게 꼬집었어? 볼 여기 빨개졌다.”
“어... 아니, 어, 맞아...”
“애들한테 적당히 만지라고 해. 귀여우면 살살 다뤄야지, 나쁜 놈들이네.”


나한테 제일 나쁜 놈은 너야 인마... 박지훈은 울고 싶어진다. 다정한 강다니엘. 그리고 그 다정한 인간이 좋아한다는 이름 모를 여자.


그녀에 대한 형체없는 분노는 웃기게도 박지훈 스스로의 다짐으로 연결됐다. 다니엘이 짝사랑 중이야? 근데 뭐. 존나 어쩌라고다. 강다니엘이 어떤 여자를 짝사랑 중이라면 나는 그 강다니엘을 짝사랑 중이다. 그래서 뭐, 내가 좋은데 뭐.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괜히 씩씩거리게 되는 마음. 이 답답한 속이 정확히 누굴 향한 것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박지훈은 맞은편 강다니엘의 눈을 마주 보며 소심하게 바랐다. 니 짝사랑보다 내 짝사랑이 더 빨리, 먼저, 완벽하게 이뤄지기를.





‘다니엘이 짝사랑 중이야? 근데 뭐. 존나 어쩌라고다.’ ...라고 생각했던 약 네 시간 전의 자신을 저주한다. 박지훈은 강다니엘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일단 점심시간 전까지 박지훈의 기분은 좋은 편이었다. 타고나길 단순하고 긍정적인 성격 덕에 강다니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든 말든 일단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그건 그쯤에서 생각을 말았다. 그 좋은 기분으로 밥을 맛있게 먹었고, 먹자마자 양치하고, 하자마자 5반으로 달려갔다. 약속한 듯이 들러붙는 놈들은 야무지게 물리쳤다. 이젠 5반 애들 조차 박지훈의 동선에 매우 익숙해져서 그가 오면 자연스럽게 그를 창가 자리로 인도했다. 그러면 박지훈의 목표물이 있다. 누구와도 잘 지내는 다니엘답게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박지훈은 익숙하게 그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선 정해진 자리인 양 다니엘의 앞자리에 앉으려는데, 선수를 뺏겨버렸다. 5반 반장이라던 여자애가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


“지훈아 나은이도 배그 잘한대.”
“아... 그래?”


알 바가 아닌지라 할 말이 없었다. 박지훈은 심드렁히 대꾸하며 앉아 있는 강다니엘의 옆에 붙어 섰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박지훈을 올려다본다. 왜? 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그걸 캐치한 박지훈은 속상해 죽어버릴 것 같다는 표정 연기를 펼치며 5반 반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저기 앉고 시푼데 저 애가 앉아 있어서 못 앉아...를 담은 표정이었다. 다니엘이 알아줄까.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역시 강다니엘은 똑똑하고 천재고 잘생기고 다정하고, 혼자 다한다. 박지훈의 빛나는 연기에 둥그런 눈동자로 반장과 지훈을 번갈아 보던 다니엘은 이내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반장에게 비켜달라고 하자니 박지훈은 애초에 이 반이 아니고, 그렇다고 박지훈에게 그냥 그렇게 서 있으라 하자니 그건 그거대로 미안하고 마음이 쓰였다. 골똘히 고민하는 게 얼굴에 다 보인다. 박지훈은 그 귀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실시간으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니엘아! 담임이 너 교무실로 오래.”
“지금?”
“엉. 잠깐이면 된다던데?”


짧은 고민 끝에 자신의 자리에 지훈을 앉혀야겠다는 다소 천사스러운 결론이 났을 때, 반 친구가 강다니엘을 불렀다. 다니엘은 잘됐다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제 자리에 박지훈을 앉혔다. 그러면서 제 핸드폰도 박지훈의 손에 들려줬다.


“교무실 갔다 올게. 게임하고 있어.”


교무실에 굳이 핸드폰 들고 갈 이유는 없으니 맡겼다는 거 잘 안다. 그래도 이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을 콕 찝어 맡긴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별수 없다. 별것 아닌 것에도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 짝사랑이라 했다. 박지훈은 손에 들어온 아이폰을 야물딱지게 잡아쥐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5반 반장에게 이 의기양양함이 표출됐음 싶었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야 알어? 반장은 그를 뚱하게 바라보다 강다니엘이 나가자마자 자리를 떠버렸다. 괜히 한 명 물리친 느낌이 든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 이때까지도 박지훈은 기분이 좋았다. 강다니엘 자리에 앉아 강다니엘 핸드폰으로 게임하는 이 소소함은 생각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줬다. 뒤에서 정수리를 콕콕 찌르는 5반 껌딱지 놈들도 가뿐히 무시했다. 쉬지 않고 이어지던 웃음은 액정을 활보하던 박지훈의 엄지손가락이 때마침 도착한 카톡을 눌러버리면서 뚝 끊어졌다.


[🐱: 으앙 나 지금 일어났어ㅜㅜ]


헉. 절대 볼 생각 없었고 카톡방에 들어올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기막힌 타이밍에 상단바를 터치해버리는 바람에 빼도 박도 못하고 카톡방에 들어왔다. 어떡하지. 1 벌써 사라졌는데 어떡하지? 우왕좌왕하는 사이 말풍선 하나가 더 올라왔다.


[🐱: 다니엘은 점심시간이겠네?]


와씨 또 읽었어 나 어떡해. 의도치 않게 두 개의 메시지를 읽어버렸다. 그제서야 허겁지겁 카톡방을 나왔다. 엄청난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프사가 상당히 낯익은 거다. 회색 고양이. 심지어 저장명도 고양이. 거기에 방금 본 친밀한 카톡 내용까지 더해지니 미세하게 싹을 틔울 뻔했던 의심이 곧바로 확신이 된다. 강다니엘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인가 보다. 박지훈은 단번에 기분이 나빠졌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방금 전의 카톡방. 박지훈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실수인 척 다시 한 번 고양이와의 카톡방을 눌렀다.


[ㅋㅋㅋ알았어 잘 자고] 오전 4:45
[내일 연락해요] 오전 4:45


방금 여자에게 연락이 오기 전엔 강다니엘이 보낸 내용이 마지막이었다. 근데 그걸 보낸 시간이, 잠깐만. 오전 4시 45분. 오전 4시 45분... 오전 4시...? 박지훈은 미간을 팍 구긴 채 스크롤을 빠르게 올렸다. 끝없이 올라가는 대화방엔 둘의 핑퐁이 가득했다. 구차하게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시간에 눈이 갔다. 두 명 다 카톡방을 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는지 시간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박지훈은 강다니엘의 핸드폰을 엎어두고 제 것을 꺼냈다. ‘강다니엘’ 이라고 새겨진 곳을 누르면 오전 2시에 멈춰 있는 둘의 대화.


                            [자?] 오전 2:03
                            [안 자면 게임할래?] 오전 2:03


[나 지금 잘라고 누웠어] 오전 2:21
[ㅠㅠ] 오전 2:21


잘라고 눕긴 개뿔이. 그 고양이와 한창 바쁘게 카톡하던 때다. 박지훈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게 열이 받아서 그런 건지 창피해서 그런 건지... 무튼 좋지 않은 느낌인 것만은 분명했다. 엎어둔 강다나엘의 핸드폰이 다시 지잉 울렸다. 보기도 싫어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새 볼일을 다 본 강다니엘이 돌아와 박지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디 가? 라는데 지금의 박지훈은 어떤 말도 하기가 싫다. 입 꾹 다물고 빵빵해진 볼을 씩씩대다가 검지끝으로 강다니엘 핸드폰을 가리켰다.


“미안. 내가 너 카톡 온 거 봐버렸어.”
“아 그래? 괜찮아.”
“...근데 나 어제 혼자 게임했는데.”
“어?”
“새벽 네시까지 혼자 게임하다가 잤어. 그래서 너한테 물어봤던 건데, 같이 할 사람 없어가지구... 그냥... 그렇다고.”


박지훈은 말을 뱉으면서도 스스로를 나무랐다. 박지훈 이 미친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닥쳐 그만해 그만하라고. 아무리 내적 아우성을 질러도 부리는 말을 듣지 않고 따로 놀았다. 결국 제 할 말을 모두 마친 후에야 부리는 얌전히 닫혔고, 박지훈은 뒤늦은 현타와 쪽팔림에 쳐다도 안 보고 인사하며 몸을 틀었다. 당연히 제가 더 늦게 잤을 줄 알았는데 강다니엘은 그 여자랑 카톡하느라 훨씬 더 늦게 잤다. 오늘따라 잦았던 하품이 이제서야 납득이 간다. 제가 뭐라고 이거에 서운해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감정 숨기기에 능하지 못한 박지훈은 그대로 5반을 나왔다. 뒤에 강다니엘이 따라붙는 것 같길래 나가자마자 보이는 김원성을 붙들었다.


"아씨 깜짝아. 헐. 토끼 뭐냐? 맨날 나만 보면 질색을 하더니."
"지금도 똑같으니까 닥쳐."
"하 진짜 존나 매력 있다니까..."
"닥치라구 원숭아."


평소 스킨십이 너무 과해 늘 피하던 양아치 놈이지만 급하니 눈에 뵈는 게 없다. 징그러운 소리를 하며 허리를 감싸안는 놈을 퍽퍽 때리며 그대로 경보를 했다. 하나도 안 바쁘지만 일단 바쁜 척. 혼자 그러긴 민망하니까 누구 한 명 끌어들여서 같이 바쁜 척. 영문도 모르는 김원성은 토끼 같은 박지훈이 먼저 다가왔다는 사실에 그저 기뻐하며 온갖 뻘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 정도야 가볍게 한 귀로 흘리며 슬쩍 뒤를 살폈다. 따라 나왔던 강다니엘이 옆 반 애에게 붙잡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여간 친구 더럽게 많지. 교실에 다다를 쯤 수업종이 울렸다. 가차없이 김원성을 떠밀곤 교실로 쏙 들어갔다. 웃기지만 지금 좀 삐진 것 같다. 그러길래 잔다는 거짓말을 왜 해. 차라리 딴 여자랑 카톡해야 돼서 바쁘다고... 아니지. 이건 너무 아니다. 빡쳐서 침대 다리 하나 부러트렸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 상관 없다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였던 게 무지하게 창피해진다. 강다니엘에겐 무조건 박지훈보다 그 여자가 우선순위라는 걸 확인사살 당한 느낌. 그게 당연한 거 알지, 아는데... 말 한마디에 홀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짝사랑, 아주 제대로 체험한다.


다음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몸이 먼저 반응했던 박지훈은 아직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 도로 엉덩이를 앉혔다. 강다니엘을 알게 된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책을 정리하던 짝꿍조차 왜 안 가고 앉아 있냐며 의아하게 물어왔다. 맨날 보러 가던 놈한테 삐져서 그렇다고 어떻게 말해.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잠시 후 강다니엘이 반으로 찾아왔다. 찾아왔다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겠다. 다음이 체육 수업인지 반 친구들과 우르르 지나가다 창문 너머로 눈 마주치고서야 멈춘 거라. 널널한 검은색 반팔티를 입은 강다니엘이 창틀에 팔을 올리며 박지훈을 불렀다. 이미 눈도 마주쳐놓고 못 들은 척 짝꿍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박지후운."
"박지 너 부르잖아."


강다니엘이 한 번 더 부르자 짝꿍을 포함한 반 애들까지 덩달아 지훈을 부르기 시작했다. 계속 모른 척하기도 이상한 상황이다. 박지훈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꾸물꾸물 일어났다. 창문 너머의 강다니엘이 끈질기게 움직임을 쫓았다. 누가 말이라도 걸어줬으면 했건만... 그런 일은 없었고 박지훈은 결국 복도로 나왔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섰다. 박지훈은 스스로에게 거한 현타가 온다. 나 왜 삐졌냐 진짜. 내가 뭐라고. 아, 진짜... 내가 뭐라고.


"나 이제 체육 나가."
"응. 그래 보이네."
"썬크림 빌려서 발랐는데 너무 하얗진 않지?"


원래 하얘서 별반 다를 게 없다. 박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끝에 우르르 몰려 있는 강다니엘네 반 친구들이 바찌훙 어쩌고를 외치며 장난을 걸었다. 강다니엘이 잠깐 기다려달라 한 모양이다. 그 틈엔 박우진도 섞여 있다. 애들 기다리는데 얼른 가라고 그랬다. 강다니엘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박지훈을 빤히, 또 빠안히 쳐다봤다. 오늘 아침 거의 관찰하듯 쳐다보다 토끼를 닮았다고 했던 그때처럼.


"밤에 같이 게임할래?"


그러다 한다는 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박지훈은 또 아주 거한 현타를 맞이했다. 강다니엘은 아무래도 박지훈이 새벽 내내 혼자 게임하다 잔 것에 대해 삐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닌데. 겨우 그런 거 가지고 너한테 삐질 리는 없잖아. 너는 잔다 해놓고 좋아하는 여자랑 내내 카톡하다 다섯 시에 잤다는 게 짜증나는 거지. 물론 이것도 강다니엘에게 삐질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강다니엘에게 삐질 이유도,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걸 알겠어서 더 짜증이 난다. 강다니엘 말고 자기 자신한테. 그런데도 요만큼 삐죽 튀어나온 볼따구는 차마 숨겨지지가 않아서 강다니엘이 더 애를 먹는다.


"응? 새벽에 같이 하자."
"...됐어. 오늘은 일찍 잘 거야."
"내가 어제 같이 안 해줘서 삐졌어?"
"야 아니거든. 내가 그런 쫌팽이로 보이냐."


박지훈이 삐진 정확한 이유는 오직 본인 혼자만 안다. 강다니엘에겐 죽어도 말할 수 없다. 만약 말했다간 저 순수한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아 그렇구나...근데 그게 왜? 하고 물을 거야. 그럼 박지훈은 얼굴이 시뻘게져선 아무 대답도 못 하겠지. 박지훈은 훤히 그려지는 시나리오에 침묵을 택했다.


"강다 빨리 와!"


이 와중에 반 애들은 얼른 오라며 재촉하고. 변태 같을지 모르겠는데 강다니엘의 저 난감해하는 얼굴이 왠지 좋았다. 그래도 자기를 신경 써 주는 것 같으니까. 강다니엘이 대뜸 박지훈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과 손의 모호한 경계 그 쯤을 잡곤, 눈을 반듯하게 맞추고 말했다.


"오늘 게임하자. 그리고 너 이번 시간에 창가 자리 앉아."
"...왜?"
"어, 그렇게 물어보면 이유는 없는데... 그냥. 나 축구하는 거 보라고."


자기도 말해놓고 보니 웃긴지 입동굴을 보이며 특유의 웃음을 뱉는다. 딱히 이유는 없대서 더 설레면, 중증인가요 이거. 박지훈은 아닌 척하지만 어느새 눈 녹듯 녹아버린 얼굴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한결 풀어진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강다니엘은 체육을 하러 내려갔다. 가기 전에 머리도 슥 만져주고 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복도에 제 심장소리가 퍼질까 봐 무섭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삐지고 이렇게 쉽게 풀릴 수가 있나. 태초부터 쿨맨의 길을 걸었던 박지훈에겐 너무나 낯선 현상이다. 나갈 때와 사뭇 달라진 분홍빛 얼굴로 돌아온 박지훈은 창가 자리를 쭈욱 스캔했다. 어디 보자, 어디가 제일 명당이려나...


"성훈아 미안한데 나 이번 시간에 자리 한 번만 바꿔줄 수 있을까?"


날씨가 좋았다. 이번 수업은 시간이 금방 갈 것 같다.







강다니엘박지훈 짱짱짱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녤윙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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