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사, 살려…….”

아버지는 냉정한 인간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유일하게 관대를 보이는 사람은 제 두 아들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아들 중 한 명이 제 진짜 핏줄이 아니란 것을 알아챈 그는 가짜를 과감하게 버린다. 평생에 손찌검 한번 당해본 적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전 없이 귀하게 자랐던 아들은 안 맞은 곳 없이 흠씬 두드려 맞은 몰골로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이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천한 이처럼 빌었다.

하수인들도 아비를 닮아 자비가 없었다. 그래도 21년을 돌 본 정이 없지는 않을 텐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남처럼 그렇게 뼈마디를 잘근잘근 부순다. 맞고 기절하고 깨어나고 빌고를 반복했다. 죄라고는 단지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남을 업어 키운 실수의 얼룩을 지워버리려고 작정한 듯싶었다.

친자식이 아니란 것은 자신에게도 충격이건만, 저 혼자 배신당한 사람처럼 보기에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눈알이 타들어 갈 듯 하다. 울지 않으려고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아비는 나약한 인간을 싫어했다.

눈앞에는 깊게 파인 구덩이가 있다. 벼랑 끝에 모는 것처럼 아들을 몰고, 냉혹한 눈으로 저 안으로 들어가라 명령한다. 목구멍이 울음으로 꽉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는, 다정하고 너그러운 아버지였지만 잔인하고 난폭한 주인이기도 했다. 단지 친 아들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그는 죽음을 강요하고 있었다. 도망은 애초에 선택지에도 없었다.

서 있을 힘도 없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마지막으로 사정하는 심정으로 아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온몸이 아팠고, 피를 많이 흘렸고, 다리에 힘도 없었다. 차라리 끝내자. 몸에 힘을 빼기가 무섭게 몸뚱이가 기운다.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에도 아버지가 궁금해 눈을 떴다. 변화도 없는 표정에 어쩐지 웃음이 나와 피식 웃고는 마지막으로 그를 불렀다.

“아버지…….”

등이 바닥에 닫는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몰려왔다. 서서히 점멸하는 생명의 위로 흙이 쏟아진다. 언제 구덩이가 있었냐는 듯 평탄한 땅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그들은 몸을 돌렸다.

아버지.

죽음의 품 안에서도 잊히지 않을, 그 이름이여.

*

가을이 오려나. 후덥지근한 공기와 바람 사이로 낯선 향취가 섞인다. 땡볕에 서서 땀을 흘리는 청년은 제 몸보다 훨씬 큰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몸에, 해골 같은 얼굴이 괴기스럽다. 짙고 푹 꺼진 눈이며, 말라서 각질이 일어난 입술, 버짐이 핀 얼굴이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자,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야, 누렁아!”

공장에서 키우는 진돗개도 질색한 이름에 반응한 것은 청년뿐이었다. 상자를 내려놓고 저벅저벅 걸어가니 대뜸 명령한다.

“담배 좀 사와라.”

청년, 누렁이는 익숙하다는 듯 돈도 받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힘없고 느릿한 뒷모습에 남자가 욕설을 뱉으며 뛰라고 했음에도 조급함이 없다. 남자는 누렁이가 두고 간 상자 위에 제 것을 올려놓으며 농땡이를 피웠다. 날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상자를 만드는 공장인 제일 상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머릿수가 훨씬 많다. 공장 반장 몇 명만 한국인이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대게 불법 이민자들이곤 했다. 그들은 저마다 눈물겨운 사연을 안은 이방인들이었다. 길게 가는 법 없이, 적게는 하루 많게는 한 달 정도 일하고는 어디론가 또 훌쩍 떠나버린다. 이곳에서 제일 오래되 노동자는 ‘누렁이’였다. 

주민등록번호는 고사하고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놈이다. 다 죽어가는 걸, 우연히 외국인 노동자가 주워와 여태껏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누렁이를 돌봐주던 외국인이 다른 공장으로 옮겼음에도 녀석은 꾸준히 이곳에 뿌리를 내린다. 며칠만 함께 지내본 사람이라면 머저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련한 짓이었다. 제대로 된 대우는 고사하고 돈을 떼이는 경우도 많았다. 기껏 일해 놓고도 돈 한 푼 못 받은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웃기만 한다. 그러니 너도나도 녀석을 노예처럼 부렸다.

누렁이는 그런 취급에도 불만 없이 매점으로 들어갔다. 공장 옆에 놓인 컨테이너가 간이 매점이었다. 공장은 시골 중에서도 깡시골에 위치한 지라 구멍 슈퍼라도 가려면 15분은 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그런 이유로 사장이 편의상 설치한 매점인데, 월급을 다시 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게 하는 데에 단연 1등 공신이었다. 슈퍼보다도 2배는 훨씬 더 비쌌지만 교통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찾게 되기 때문이다.

한창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직원이 누렁이를 보고 마침 잘 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물건 새로 들어왔는데, 정리 좀 해.”

누렁이는 대답도 없이 가득 쌓인 상자를 열어 진열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해본 것이 아닌 듯 물건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 개수를 채우고 기록했다. 직원은 제 할 일을 미뤄놓고 보던 것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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