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럭저럭 기념할 만한 날이다.

 

하르카인이 중앙 신전에서 서약식을 치르고 신성 기사가 된 지 딱 반년이 지났다. 이대로 똑같은 시간을 버티면 또 다음 기수의 기사들이 입단할 테고 하르카인은 나름 초년을 벗어나는 셈이다.

 

그렇다. 애석하게도 하르카인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야 한다. 비단 신성 기사 서임 이후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한 귀족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여의고 가까스로 보육원에 거두어져 일곱 살까지 자라다가 다시 또 다른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어 스물한 살에 신성 기사가 되는 삶이 평탄했을 리 없으며 앞으로 평탄하기만 할 리도 없다.

 

보육원에 있을 때만 해도 자신이 그냥 평범한 고아인 줄 알았으나 루체드 공작가의 양아들이 되었던 순간부터 하르카인은 그 청량하게 빛나는 은발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뒷말을 들어야 했다. 눈부신 달빛 머리칼이 뤼휴르 공작 가문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루체드 공작가와 뤼휴르 공작가는 서로 치고받고 다투는 관계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썩 화기애애하게 좋은 사이 또한 아니었다. 비록 라카이튼 제국과 그 국교인 원결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지라도 황권과 신권은 엄밀히 분리되어 있었으며 언제나 서로를 견제해왔다. 루체드 공작가는 바로 그 신권을 황권보다 조금 더 우위에 두는 입장인 반면, 뤼휴르 공작가는 황권을 신권보다 중요시하는 입장을 취했으므로 둘 사이가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루체드 가문은 대체로 학자적 경향을 띠고 뤼휴르 가문은 정반대였다. 하르카인이 어찌하여 무사다운 기질을 타고났는지 증명하는 지점이다. 물론 그는 일반적인 뤼휴르 가문의 핏줄이 아니기에 황실 기사단 대신 신성 기사단을 선택했다.

 

양자를 잘 키워서 가문의 충성스러운 기사로 삼는 편이 이득일 수 있겠으나 루체드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 유사시에 해당 가문 출신의 신성 기사를 우선으로 파견해달라 요청할 권리가 생겼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권리를 더 신전에 행사할 수 있는데, 혹자는 이를 두고 원결교 신전이 톄무하브 앞에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한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신전 측은 예부터 가장 많은 후원과 지지를 보내는 가문들을 무시할 만큼 융통성 없지 않았다. 타협과 정치 없이는 신의 권위마저 알게 모르게 힘이 꺾이는 세상인지라.

 

신성 기사는 톄무하브에게 귀의한다는 맹세에 따라 성씨를 버리는 셈으로 치지만, 신성 기사단 대부분의 출신이 귀족이기 때문에 자기소개를 할 시 자신이 어느 가문에 적을 두었었노라 덧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여 신성 기사를 호적에서 분리하는 법도 오래전에 사라졌다. 따라서 신성 기사는 그 자체로 소속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존재다.

 

요컨대 한마디로 루체드 공작은 하르카인을 양아들로 들임으로써 뤼휴르 공작의 속을 긁는 동시에 제 집안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신성 기사를 배출하는 쾌거를 이뤄낸 셈이다. 어차피 가산이야 많으니 하르카인을 육성하는 데 들인 돈은 문제도 아니었다.

 

하르카인은 자신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입양한 루체드 공작에게 충분히 고마워했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그 덕분에 십수 년 동안 기사 교육을 받아 신성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비록 하르카인이 누구의 사생아인지 모를 리 없는 귀족 자제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신성 기사가 되었음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을 느꼈다.

 

신전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일곱 해를 살다가 신실한 루체드 가문의 일원이 되어 성장해온 하르카인은 자연히 원결교를 믿었다.

 

톄무하브는 언제나 하르카인의 신이었다. 그에게 시련을 주면서도 늘 견딜 만한 시련만을 내려 마침내 이겨내게끔 하는 존재.

 

그러니 저 시끄럽게 포효하는 새까만 하늘 역시 톄무하브의 뜻이리라.

 

쉬이 잠들지 못한 이 신입 신성 기사는 새벽하늘을 응시했다. 이내 경건하게 눈을 감는다. 까맣게 암전된 하늘과 별다를 바 없는 어둠이 그를 덮쳤다.

 

 

“첫 번째 약속의 주인이시여.”

 

 

검정은 모든 빛깔을 흡수하고는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하게 만드는 색이다. 욕망이란 단어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필시 저 칠흑 같은 어둠을 가리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에 갇힌 인간은 기원한다.

 

 

“부디 오늘 하루도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그 속에 잠긴 내부세계와 그를 둘러싼 외부세계의 모든 악한 것을 무찌를 수 있기를.

 

하르카인은 다른 신성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예배 시간이 되기 전에 기상하여 정결하게 목욕재계를 마쳤다.

 

원결교의 최고위 성직자, 대신관이 주도하는 예배에 매일같이 참석하는 것은 오직 수도의 제1기사단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다. 대신관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라쿠스의 중앙 신전에 기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도시로 파견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제2기사단은 해당 교구의 주신관이 집전하는 예배에 참여한다.

 

대신관은 어느 때보다도 엄숙했다.

 

 

“최초의 약속을 지키는 주인께서, 머지않아 우리를 암흑의 심연으로 밀어 넣을 악이 도래하노라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 바쳤던 약속을 어기도록 충동질하는 악에 대비하라 이르셨지요…….”

 

 

아침 예배 직후 신성 기사단에는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었다.

 

 

“디알브면 여기서 제일 먼 곳이지?”

 

 

하르카인의 숙소 동기인 데이안이 침대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장기 파견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바로 내일 하르카인과 데이안은 이 중앙 신전이 위치한 라쿠스의 시에랑 자치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디알브 행정구로 가야 한다. 당분간 별일이 없다면 중앙 신전으로 복귀하지 않고 디알브 구민들을 위한 예배당에서 일반 신관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리라.

 

길고도 길었던 명령의 기본 골자는 단순하다. 해당 지역의 순찰 및 탐색.

 

신성 기사단과 황실 기사단의 역할은 평소 크게 다르지 않다. 신전 혹은 황실의 명령에 따라 특정 임무에 임하는 것. 단지 누구를 섬기느냐의 차이였다. 따라서 라카이튼 제국 전체에 퍼져 있는 치안대와는 또 다른 성격이며 기실 순경 업무야말로 치안대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라 할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악이 팽배할 앞날을 예견하신 톄무하브 님께서 하늘에 장막을 침으로써 그를 알려주었노라 대신관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파견 기간 중 미심쩍은 정황을 포착하면 즉시 신성력을 이용하여 탐지 의식을 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떨어진 것이었다. 비록 하르카인은 반년짜리 경력뿐이지만 이게 흔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쯤은 잘 안다. 신성력은 신에게서 하사받은 순수한 힘이기에 함부로 남용해선 안 되었다. 개인의 판단에 의한 섣부른 신성력 남용은 원결교가 경계하고 금칙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신전이 허락했다는 뜻은…….

 

 

“하르카인, 혹시 방락자(彷落者)를 본 적 있어?”

 

 

방락자. 악마에 홀린 자를 일컫는 공식 명칭이며, 그릇된 존재에 의하여 헤매다 타락했다는 의미에서 그리 이름 지어졌다.

 

 

“없습니다. 은우(恩友)님은 있습니까?”

 

 

사석에서 말을 편히 놓는 데이안과 달리, 하르카인이 데이안에게 예우를 다하는 것은 데이안이 뷰던 공작가의 차남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무관하다. 만약 그런 걸 신경 썼더라면 지금처럼 동등한 원결교 신자로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사용할 게 아니라, 숫제 귀족으로서의 예법을 깍듯이 따랐을 터다.

 

데이안은 이 순진하고 우직한 동기가 밉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리어 언젠가 죽기 전에 하르카인한테 형님 소리를 듣고야 말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 다짐하곤 했더랬다. 겨우 하르카인보다 한 살 많으면서 말이다.

 

 

“그래. 나는 어렸을 때 딱 한 번 본 적 있다. 내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었지.”

 

 

데이안이 제법 낡은 기억을 떠올리듯 눈동자를 굴리다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공작가의 하인이 한밤중에 집사를 살해해놓고 이른 아침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때까지 가만히 그 주검 옆에 앉아 있었더란다. 어렸던 데이안은 후일 조사를 거친 그 살해범이 신성 기사단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귀동냥으로 훔쳐들었고 그제야 그자가 악마에 미혹된 인간임을 이해했다.

 

 

“그래서 다섯 살 때의 기억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포박되어 끌려가는 그 사람 눈동자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지 뭐냐. 도무지 인간 같지가 않더라. 어딘가 텅 빈 사람 같기도 하고, 길을 잃은 사람 같기도 했어.”

 

 

그게 데이안이 신성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였다. 너무 늦지 않게 공허를 채워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신의 아들이 되자는 굳은 다짐이 데이안으로 말미암아 후계자 경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오늘 치안대에서 처형당하는 사형수가 하나 있었지.”

 

 

그 말에 하르카인은 곧장 최근의 기억을 되살렸다. 생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다음 시체를 훼손한 그 죄인은 신성력에 의하여 삿된 기운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치안대로 넘어가 사형이 결정되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처형은 아니지만 신성 기사처럼 일정 계층 이상의 확실한 신분 증명이 가능한 자는 사형장에 입장 가능하다.

 

하르카인이야 구태여 보러 갈 마음이 없었으나 데이안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그 정도 수준의 중범죄자를 가까이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결국 데이안은 실제로 처형을 보고 돌아왔다. 그는 하르카인이 특별히 관심을 주지 않는데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그 사형수도 똑같이 탁한 눈빛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악마와의 관련성은 전혀 없고……. 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악한 것을 헤아리려 들지 마십시오. 마음을 쏟으면 쏟을수록 스스로를 늪으로 가라앉히는 일입니다.”

 

 

신실한 신성 기사가 주저하지 않고 단호히 대꾸했다.

 

경전에 따르면, 상대에게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은 삿된 것을 이해하려 애쓰다 외려 그것마저 공감하게 되어 타락의 길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게 바로 교활한 악마의 속셈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데이안은 착잡한 미소를 짓고는 툴툴 털고 일어났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예배 의식을 마치자마자 부지런히 디알브로 이동하려면 얼른 채비를 끝내고 잠드는 편이 이롭다.

 

태양이 사라진 밤, 하르카인은 바르게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또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신을 찾는다.

 

 

“악의 덫에 헛되이 발 디디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신성 기사는 오늘 하루를 돌이켜본다. 희미한 달무리조차 보이지 않던 새벽하늘과, 그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긴 신전과, 죽음으로써 악을 비워낸 인간과, 악한 자를 궁금해 하는 동기…….

 

 

“첫 번째 맹약의 주인께서 비추는 광휘로운 영광으로 모든 어둠이 걷히기를…….”

 

 

정말이지 여러모로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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