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은 길게만 느껴졌다. 어머님이 계실 때와 달리, 가신 뒤로 김정우와 모르는 사이처럼 거리를 두고 걸었다. 어머님께 우리가 헤어졌고 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살갑게 헤어지며 다음을 기약하기까지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김정우는 한숨을 쉬었고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김정우는 중얼거리며 옆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엄지 손톱으로 검지 손가락을 꾹 누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타 신경질적으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네가 그렇게 싫으면 나도 그럴게. 뭐, 자기만 힘든가. 두 번째 이별을 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중하고 예뻤던 시간들이 어머님으로 인해 상기되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순간들과 너로 인해 웃을 수 있던 날들, 지금도 너만 보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픈데. 내가 정재현과의 일로 우리가 헤어지게 되었지만 김정우와 나 역시 감정이 아직 있었기에 나쁜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나한테는 김정우가 나쁠 기회조차 없었다. 그랬기에 더 아쉬움이 남고 보고 있으면 다시 잡힐 것만 같이 그립고 그랬다.



"아 왔네! 김주임."



사무실에 들어가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꽤나 진지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어제의 일 때문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자 부장님이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 일로 차장님과 김주임이 출장을 가게 되었어. 이박 삼일 정도인데 괜찮지?"



출장이요? 나도 모르게 눈으로 정재현을 찾았다. 부장님 뒤쪽에 서 있던 정재현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출장을 가게 되다니. 그것도 이박 삼일 동안이나.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아아 네. 괜찮죠."

"어어, 김 사원도 마침 오네."



김정우도 들어온 건지 발소리가 들렸고 부장님이 그를 보았다. 뭐지? 김정우도 함께 가나 싶어 불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연락 받았지? 연수 내일부터 갔다 오면 돼."

"네 부장님."



인사를 꾸벅한 김정우를 데리고 부장님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고 자연히 모여있던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출장, 그것도 빡빡하고 예민하신 차장님과. 그에게 욕을 듣지 않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내가

왜 

다시


(兩者擇一)

Phrase








신입 사원인 김정우는 자리를 비웠다. 일주일이었나? 연수를 갔다는 얘기를 대충 흘려들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니 사실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출장 준비로 나도 만만찮게 바쁜 하루들을 보내고 있었기에. 



나 좀 데리러 와.



출장 전날 밤 캐리어에 짐을 챙기다 그의 집에 두고 온 편한 바지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바지는 핑계고 출장을 가는 약 이틀 동안 못 보니까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재현은 우리 집에서 자는 것보다는 자기 집에서 자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했다. 솔직히 당연했다. 좁아빠진 집에, 고작 싱글인 작은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자는 것은 180이 넘는 그에게 힘든 일이었다. 일을 마치고 제 집으로 가자던 정재현에게 집에 들러 짐을 싸야한다고 딱 잘라 말한 지 딱 두시간째 되던 시간이었다. 출장 준비로 그간 못 만났으니 오랜만에 사랑을 듬뿍 줘야지 생각했다.



도착. 짐 많으면 올라갈게.



내 문자를 기다리기도 했던 건지 거의 날라 온듯한 스피드였다. 답장도 하기 전에 집으로 올라 온 정재현은 그대로 제 차에 캐리어를 싣고 나를 그의 집으로 데려갔다.



"무슨 바지를 찾는 거야?"

"그 왜, 회색 바지 있잖아."



어떤 거. 아 그거. 아 그거?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을 굴리며 하는 내 말에, 정재현은 다 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기도 전에 정재현이 내 입술을 찾았다. 꽤나 격한 입맞춤에도 내가 다칠까 내 머리를 제 두손으로 감싸고는 벽으로 나를 밀어붙였다. 다급한 그의 행동에 당황한 내가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파고든 정재현의 숨결에 몸이 뜨거워졌다. 정재현의 목을 팔로 감싸자 정재현은 내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 덕에 정재현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고 그에게 코알라처럼 안긴 상태가 되었다. 불안하게 매달려 있던 구두가 신발장에 떨어지고 그대로 정재현은 나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입술을 맞부딪힌 채, 우리 사이에는 작은 빈틈도 없었다.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지?"

"고작 이틀인데?"

"그거 못 참아서 여주도 여기 온 거 아냐?"



정재현이 침대 위로 나를 눕히고,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으며 말하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알았어? 내 말에 정재현은 내 볼에 쪽하고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내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풀러냈다. 뭐가 이렇게 급해. 내가 중얼거리자 정재현은 내 목으로 제 얼굴을 묻었다. 시간 없어. 막 씻은 건지 정재현에게서 비누 냄새가 가득했다. 가끔은 진한 향수 냄새보다 이런 비누 냄새도 좋았다. 내 목에 입을 맞추는 그의 머리칼을 손으로 살짝 움켜쥐었다. 이 행복이 영원하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김 주임 오늘 고생했어. 내일 여덟 시쯤 로비에서 봐."

"네 차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마지막 미팅까지 잘 마치고 기분이 좋은 듯한 차장님과 인사를 마친 후 비즈니스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까지 대충 먹은 터라 속이 헛헛했다. 일단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맥주 두 캔을 사서 다시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맥주캔을 땄다.



-자기. 드디어 내일 보네.

"응 그러게. 시간 빠르다."



이틀이 지나가는 동안 정재현 역시 업무가 많았던 건지 연락이 잘 되지는 않았다. 같은 부서에서 봐와서인지 연락이 늦어져도 서로 그러려니 이해를 하는 편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정재현은 내일 본다는 사실에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회사로 출근해?

"아니. 그냥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

-아아 그래? 그럼 시티호텔로 바로 오면 되겠다.



정재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 시티호텔? 거긴 1박에도 꽤나 비싼 편인데. 내가 머뭇거리자 정재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피곤할 것 같으면 다음으로 미룰까?

"아, 아니야. 시티 호텔에서 뭐 먹게?"



가끔 정재현과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갔던 터라 나는 맥주 한 모금을 삼키며 물었다. 정재현은 잠시 말이 없더니 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 먹자.



정재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침대에 누웠고 그래. 하며 대답을 했다. 곧 포근한 침대에 푹 빠져들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사랑해 여주야. 그 말을 끝으로 정재현이 전화를 끊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행복하게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캐리어에 옷을 쑤셔 넣고 잠 덜 깬 눈을 비비며 로비로 향했다. 꽤나 먼 거리였기에 회사 앞에 도착하자 퇴근 시간 직전이었다. 차장님 먼 길 운전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냐 김주임. 덕분에 잘 했지, 고생했어. 쉬어.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차장님은 나를 회사 앞에서 내려준 뒤 헤어졌다. 



"아저씨 시티 호텔로 가주세요."



그대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시티호텔로 향했다. 삐까뻔쩍한 로비에서 꼬질꼬질한 머리를 묶고 화장을 대충 고쳤다. 그나마 회사 출장이라고 정재현이 사준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다행일 지경이었다. 정재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퇴근하고 오고 있겠거니 생각을 하고는 로비를 지나가는 다정해 보이는 사람들을 한참이나 보고 있는데 정재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여주야, 데스크에서 1270호실 키 받아서 올라와.



1270호실은 대체 뭘까. 의심스러웠지만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데스크로 향했다. 아까부터 로비 구석에 앉아있던 여자가 드디어 데스크로 오자 직원은 다행이라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예약하셨습니까?"

"아, 네. 정재현... 일 거에요."



내 말에 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카드키를 건넸다. 정말로 1270호실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카드키를 누르니 127층의 불이 들어왔다. 127층? 나는 눈을 의심했고 곧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야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캐리어를 질질끌며 1270호실의 문에 카드키를 댔다. 힘겹게 문을 열자 깜깜했던 현관에 불이 들어왔다. 뭐야? 나는 현관에 그대로 캐리어를 둔 채 구두를 벗고 들어갔다. 스위트 룸이었던지 큰 창문으로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와 미쳤다. 자연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가 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무 예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자기야 야경만 보여?"

"응?"



어쩐지 섭섭한 투의 정재현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붉은색 장미 꽃다발을 든 정재현이 서 있었다. 갖은 초들이 아른거리며 빛을 내는 곳 중심에, 그 초들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빛나고 있는 사람이.



"보고 싶었어."

"갑자기 웬 이벤트? 나쁘지 않네. 고생했어. 이리 와봐."

"잠깐."



그대로 웃으며 그에게 안기려는데 정재현이 갑자기 주저앉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동자가 커졌는데 정재현이 그대로 재킷의 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정재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설마.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 하는 거야? 내 입이 저항 없이 벌어졌다.



"하루 안 보니까 인생에 낙이 없더라."

"..."

"이틀 안 보니까 살아가는 이유가 없더라."

"..."

"그래서 결심했어. 나는 너 없으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진부한 말이지만 전부 진심이야."



말주변이 없던 터라 정재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고회로가 정지된 것처럼 멍하니 굳었다. 이런 상황일 때 보통 눈물을 흘리거나 하던데 머리 속이 새하얘질 뿐이였다. 나 진짜,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 걸까?



"지옥이라도 같이 가겠다는 말 기억해?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갈 때까지 나랑 같이 가자."

"진짜. 정재현..."

"나랑 결혼 해줄래 여주야?"



정재현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그의 손에 들린 반지 역시 세상에서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었다. 넋을 놓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정재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아..."



내가 당황해 굳어 있다가 방방 뛰었다가 정신을 못 차렸다. 얼굴이 뜨거워서 터질 것만 같았다. 꿈속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에도 정재현은 웃으며 내 모든 행동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대답은?"



정재현이 재차 묻자 나는 그를 응시했다. 결혼, 그래 정재현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려고 턱을 높이 쳐들던 그때 요란스럽게 핸드폰이 울렸다. 아 누구야 매너없게. 미간을 찌푸리려는데 그건 내 벨 소리였음을 자각했다.



"여주야?"



기다림에도 한계가 있는지 정재현이 물었고 나 역시 그의 손을 잡으며 대답을 하려는 순간에도 산통을 깨는 전화벨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야 미안. 전화만 받고."

"이 중요한 순간에?"

"더 중요한 전화."



장난스레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내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다. 이 시간에 엄마? 나는 그대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자마자 흐느끼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 엄마? 엄마 왜? 무슨 일 있어?"



급하게 묻는 내 목소리에 엄마는 정신이 들었는지 울음을 참아내며 말했다. 여주야 하며 흐느끼는 목소리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엄마 왜 울어. 뭐야 무슨 일인데?"

-오랜만에 너 보러 올라왔는데, 집에 없어서, 한참이나 기다렸거든.

"...어." 

-근데 갑,자기 아빠가 쓰러져서... 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됐어...



너희 아빠, 지금 수술 중인데 마음의 준비 하라더라. 어떡하니.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재현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흐려 그 잔상만 보일 뿐이었다. 정재현 역시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나를 안았다. 괜찮아, 괜찮을거라고 말해주는 그의 품에서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재현아 나 어떡해. 나 때문인가봐. 자책을 하고 있을 때, 아직 끊기지 않은 전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진정하세요. 잘 될 거예요.





안녕하세요 프레이즈입니다.

응원에 힘 입어 매일 밤을 새워서 쓰고 다음날 일까지 하려니까 몸이 말이 아니네요 ㅠㅠ 죄송하지만 저 좀만 쉬다 올게요... 기다려주실 거죠...? 여러분 댓글과 마음들 감사하고 너무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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