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학년 늦가을 시점(오기인 처형 무대 이후)

· 가능한 한 치명적으로 잘생긴 와타루를 써 보자는 미션이었습니다. 낯설 정도로 날카로운 면모를 부각해 보려고 노력했으므로 조명되는 캐릭터의 부분도 낯선 면이 있네요……. #히비키와타루_지지마_네가_우주제일쿨아이돌

· 딱히 커플링은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원하시는 쪽으로 소비해 주세요. 





 아마도 어두웠던 거지. 연극의 막이 내리고 피날레가 끝나, 웅장한 소리를 연주하던 트럼본의 장엄한 음색도 사그라들면 객석에는 그렇지만 여전히 그 누구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어. 마지막 장면의 무게에, 그리고 연극을 마지막까지 보고 나자 그 맨 처음의 기억부터 반추되어 몰려오는 한 이야기의 커다란 감동에 숨이 막혀, 눈조차 깜박일 수 없는 거대한 전율이 모든 관객들을 지배하고 있었어. 옛날식 오페라 하우스처럼 몇 층으로 된 객석에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천장까지 20여 미터가 훌쩍 넘는 광대한 공간을 오직 하나의 극에 대한 감상만으로, 침묵만으로, 눈물이나 몰입해서 흘렀던 땀을 닦으려는 손수건을 들어올리는 소리 없는 움직임만으로 채우는 것이 그의 재능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아마도 어두웠던 거지. 객석에는 아직 불이 켜지지 않았고 아무도 앙코르를 외치지 않았어. 그건 아마도 거의 하나의 인생을 직접 산 것처럼 자신들에게 겪게 해 버린 그 대상이, 인물이 아닌 채 그것을 하나의 가짜의 이야기로 그것을 연기했던 배우로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일지도 몰라. 침묵이 잦아들고 훌쩍거리는 소리나 기침 소리, 두 시간이 넘도록 고정되어 있던 목을 겨우 움직여 보는 소리 등의 부스럭거리는 부산스러움이 그제서야 살아나는 때, 사람들이 앉아 있던 쪽의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과 함께 파도처럼 박수 소리가 일기 시작했어. 끊임없이 갈채가 울렸고, 마치 하나의 생이 무대 위에서 끝난 것을 배웅하듯이 커다란 박수 소리와 환호는 멈추지 않을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열광과 다시 한 번의 눈물과 비명으로 회장을 가득 채웠지.


 그렇지만 무대의 막은 열리지 않았어. 사람들은 열띠게 마주치던 손바닥이 지칠 때까지 양껏 가슴에 들어찬 감상을 보내다가 그 몇 분의 끝에, 이제 사그라드는 환희를 불씨로 남기고 자신들의 짐을 챙기기 시작해. 배우가 다시 나오지 않고 이야기의 끝에 무대로부터의 배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히비키 와타루의 연극의 특징이야. 사실은, 아무리 불러도 커튼 콜이 없다는 그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아무도 배우 히비키 와타루를 다시 무대로 불러내려 하지 않았겠지.


 사람들은 오직 연극으로 그를 보았고, 서면의 몇몇 인터뷰나 오디션 때의 소문 같은 것만이 떠돌았고, 그는 연기하지 않는 방송에는 출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히비키 와타루' 란 같은 얼굴의 수많은 다른 인물들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종종 그는 배역에 따른 전통적인 분장을 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의 얼굴로 연기에 임하는 때가 많았기에 그의 맨얼굴이나 복장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맨얼굴이라는 그뿐, 그의 말버릇은? 어조는? 표정은? 질문에 답하거나 대화에 임하는 태도는 어떻고, 성격은 어떠하며 그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료는 있는지, 친구나 은사나 그의 생에서 중요한 다른 인물은 있는가. 히비키 와타루는 배우로서 어떤 정체성을 중시하는가? 연기해 보고 싶은 역할은 어떤 것이 더 있는가? 애초에 그의 목소리는 어떤 것이지? 사람들이 아는 것은 그의 연기가 완벽하다는 것뿐이었다. 마치 악마처럼.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였다.


 그 과거를 신기할 정도로 아무도, 어째서인지 잊어버렸다고 여길 만큼 다들 잘 모르겠다는 점은 아무래도 미스터리다. 지금과 같이 기록과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에. 그렇게 유명한 인물의 과거 하나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어쩌면 히비키 와타루는 그것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하며, 그 조명 아래에서 어떤 색으로든 얼마든지 물드는 날카로운 머리카락과 천변만화의 빛 속에서도 수정처럼 번뜩이는 보라색임은 반드시 알 수 있는 마법을 거는 눈으로, 속삭였는지도 모른다. 부탁을. 말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오직 그런 가정에서야 자신의 꼬리를 불태우며 궤도를 돌아 얼음의 떼조차 녹아 버린, 흔적을 남기지 않는 혜성처럼 떠돌아다니는 이 존재의 느닷없음을, 덜컥 마주쳐 숨이 멎을 것 같은 정도의 낯선 압도를 설명할 수 있다.


 필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주변은 어두웠을 것이다 병상 근처의 불이 꺼져 있었고 어두운 병실 안에서 발광하는 유일한 TV의 화면 속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당신의 화상이 당신과의 내 첫 만남이었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당신이라는 사람은 너무나도 밝아 주변을 어둡게 하지 않고는 흘러넘치는 빛으로 인해 아무도 실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커다랗고 존재의 엔트로피를 초월한 존재는 상대적인 밝기의 모든 빛을 꺼뜨리기 때문에, 그러니까 당신의 무대 아닌 모든 곳이란 어두웠을 것이다. 오직 당신을 위해 마련된 세계 전체를 사용해야 숨쉴 수 있을 만큼 당신은 밝았을 것이다. 감히도 그런 초월을 동경하고 만 것이다…. 미물인 인간의 몸 가운데서도 한스럽도록 하찮은 껍데기를 가지고.


 불이 꺼지고 무대 뒤로 내려선 당신이 어둑어둑한 계단을 딛어 머리채가 찰랑거리는 손잡이를 쥔다. 달칵. 하고 눈을 뜬 당신이 이제 불이 켜진 이면의 세상에 내려왔다.


 대기실은 거울과 화장대와 옷걸이, 소품들이 몇 널려 있어도 그런대로 깔끔하게 치워진 편이었다. 히비키 와타루는 맨얼굴을 가지고 두 단의 계단을 밟아 내려와, 아마 관객에게 보이는 바깥 무대의 높이보다는 영점면 아래 오케스트라의 위치와 가까울 실내의 마루로 왔다. 의자 앞으로 앉으려던 그가 발치에 놓인 한 아름 크기의 풍성한 꽃 바구니를 발견한다. 히비키 와타루는 자리에 섰다가, 잠시 허리만 굽혀 그 이름의 메시지 카드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는다. 꽃의 바구니는 발치에 있다. 텐쇼인 에이치.


 "당신이군요? 이걸 보낸 게."


 앉은 채 몸을 숙여 그가 장미꽃들에 손을 뻗었다. 엷은 베이지 빛의 장미다. 얼굴 앞으로 드리워진 머리카락도 눈두덩과 콧대도 이 전구의 눈부신 빛이 마지막 손길로 다듬은 조각상 같다. 실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곳에서 당신은 몇 초 전까지 채 떠나지 않았던 신의 손길을 몸에 지고 있다.


 "거기서 나오세요. 숨어 있다는 것 알고 있으니까."


 목소리는, 무대의 마지막에 얼음 같은 청보라 색이 바닥에 깔려 인물의 죽음을 표현했었지. 마치 그것처럼 차고 담담했다.


 두근.


 안구의 뒤편이 냉기에 담가진 것처럼 눈이 마주친다. 텐쇼인 에이치는 벽의 틈에 숨어 있었다. 보랏빛의 눈. 이 핏줄마저 드러나는 주먹. 마법에 걸릴 것 같은 시선. 순식간에 목을 옭아매 숨을 앗아가는 그 은실의 시선.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히비키 와타루가 가느다란 눈을 깜박이지조차 않고 시간을 멈추었다… 그는 왼손에 장미를 쥐고 있었다. 꽃을 쥐지 않은 쪽 손이 까닥 그를 이쪽으로 불렀다. 나갈까? 악바리로 버티는 것이라면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유일하게 잘 한다. 버틸 수는 있다. 자존심이 있다. 벽 틈을 쥔 주먹은 버틸 수 있다고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발을 움직이기로 정한 순간 당신의 눈끝이 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은색 속눈썹들이 달린 눈꺼풀은 허공을 나는 날쌘 물고기들처럼 한 수 앞서 날개 같은 비늘의 방향을 달리한다. 말에 따랐으니 잘 했다고 웃는 표정을 해 줄 수도 있었겠으나 전혀 웃어 주지는 않았다. 그저 날 선 모서리가 누그러진 것뿐이다. 자신이 대기실 안으로 나아가기로 해서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목에 맨 실의 장력이 팽팽하다 감소하듯이.


 에이치가 대기실 가운데로 걸어나오자 히비키 와타루가 몸을 돌이켜 앉으면서 다발에서 뽑아 든 베이지 색의 장미를 코끝에 가져다 댔다. 줄기를 쥔 부분과 꽃받침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품평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감은 모습에, 들려진 소매 속 프릴에서 빠져나온 손목은 와인 글라스를 들듯 한 송이 꽃줄기를 두 집게손가락으로 쥐고, 나머지 셋은 나른하도록 우아하게 걸쳐져서, 가시는 쳐내서 정리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저 손가락이 다치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에이치는 불려나와 선 채로 걱정하면서 제 손을 말아쥐었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히비키 군의 앞에서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와타루는 눈을 뜬다.


 "왜 보냈습니까?"


 장미는 크림처럼 연한 페일 옐로, 베이지 색이었다. 동산처럼 한 다발이었다. 공물처럼 한 무더기였다. 송이 송이가 커다랗고 부풀게 영글어 꽃잎을 연, 손대면 힘 아래 휘어지도록 여리고 부드러운 끄트머리들은 물기 띤 입술처럼 쓰다듬는 손바닥에 애무로 답하는, 그런 수십 송이의 장미들이었다.


 히비키 군의 코끝은 아직까지 장미꽃 속에 파묻혀 있었다. 수술의 가루가 묻을 만큼 깊지 않을까. 향기가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혹시 이 장미는 향이 옅은 편인 걸까. 웬만해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해서 저렇게 해도 그다지 인상조차 쓰이지 않을 만큼…. 에이치는 코 아래와 크림 색 장미꽃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의 입술을 보려고 한다. 왜 보냈습니까?


 "그 저. 나 히비키 군의 팬이니까…."


 연극의. 좋아해. 당신의. 목소리의. 울림이나 그때 오르내리는 가슴팍. 사람이 자아내는 공기의 공명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기적 같은 목소리. 얼굴. 감정을 담아내고 인생을 담아내는 얼굴. 희비로 온갖가지 절실함으로 노여움에 물들어도 결코 그 그릇의 모양을 잊지 않는데도 홀릴 만큼 전부 다르다고 느끼고 전부 다른 심장의 부분들을 자극하는, 당신, 의 존재하는 방식 하나하나가 모두 내 몸 속 다른 세포를 건드리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기적을. 죽음을 초월할 것 같은,


 "이를테면 내 몸이 썩어도 각각의 털끝부터 되살려 일으킬 것 같은 그런 당신을…."


 에이치는 말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어."


 이런 식으로 하는 고백이라면 어떤 상식에도 맞지 않겠지. 그렇지만 선택지 같은 건 히비키 군이 장미의 연유를 자신에게 물었을 때부터 없었던 것이다.


 풉.


 공기를 떨게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은 당신의 음색이란 본연 이런 것인가?


 "후후 흐하하!"


 폭군의 것 같은 웃음 소리가 울렸다. 이것은 비유이므로 폭군 같은, 이라고 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히비키 군은 어떤 인격을 뒤집어써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에이치는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쫓아오며 사랑해 왔으니까 이것만은, 수많은 인물을 담아도 변하지 않던 그 하나의 그릇에서 나오는 질감임을 그러니까 이것은 날것의 당신의 웃음소리임을 에이치는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이


 히비키 와타루는 우습도록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마주보아 주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무대 뒤로 배우를 쫓아온 이만이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인 걸까. 화답도 예의바른 인사도 아닌 그의 진짜의 얼굴을 보는 것, 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어?


 히비키 와타루는 주먹을 이마에 기댄 채 폭소하고 있었다. 꽉 쥐어진 왼손에서 네 손가락과 엄지 사이에 꽃줄기를 쥐고, 그런데 저 장미, 꺾이지 않았어? 어깨가 오르내릴 때마다 손안에서 우그러진 줄기의 장미가 흔들렸다. 꽃송이의 부피에 비하면 위태롭도록 가느다랗기만 한 가지 끝에 처량하게 매달린 크림 베이지의 꽃잎들이 자존심도 없이 붙잡고 있었다. 히비키 와타루가 킥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 재밌었습니다. 아니. 실망했다고 할까. 뭐, 무대의 뒤편까지 쫓아온 팬에게 주는 상으로 이 정도 솔직함이면 충분했겠죠. 그럼 이제 나가 주세요."


 뭐? 에이치의 어깨 끝에서 장미 꽃잎이 떨어졌다. 히비키 와타루는 아무 마술도 부리지 않았으나 마치 살점이나 그가 입고 있는 똑같은 베이지 색의 수트의 끄트머리가 떨릴 때마다 그 일부가 잘못 배합된 석고처럼 부서지는 것처럼, 아마도 관념적인 가루가 그의 어깨에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히비키 군, ."


 텐쇼인 에이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입을 떼려고 했다. 발을 앞으로, 한 발 더, 앉아 있는 그와 그의 발치에 있는 장미꽃 바구니에 가까워지려고 하면서, 저 그러니까 히비키 군 내가 당신에게 온 건. 사랑을 변명하려는 시도야말로 거절 앞에서 가장 구차하다. 어째서 사랑하는지. 어떻게 당신을 찾아오게 되었는지. 왜 당신이 이것을 들어 주고 있어야 하는지. 어떤 의미인지. 마음인지. 관심 없는데요. 한 마디 앞에서 파도 앞 모란처럼 꺾여 스러질 변명들은, 모란처럼 겹겹이 싸이고 흔들리는 당신의 머리카락들처럼 아름다운, 히비키 와타루는 향기 없이 냉정한 심장을 가졌다. 혹은, 에이치는 오기로 눈을 마주보았다. 당신의 심장을 깨울 만큼 대단한 불을 내가 지피지 못해서였겠지. 그런 건 분하고도 절망스럽다. 와타루는 싱글 웃어 주었다. 기분 나빠.


 비참하다고 생각하려는 때 마법 같은 목소리가 다시 귓구멍 속을 어루만졌다. 향기 없는 당신은 제비꽃처럼 달콤하고 짙어. 나가세요.


 "나가세요, 텐쇼인 에이치 군. 아. 텐쇼인이라고 했지요? 그래, 헛갈릴 수도 있었는데 여기 메시지 카드에 이름을 써 놓았기에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이름들이란 죄다 이것저것 들쑥날쑥 비슷비슷해서 말이죠. 객석을 가득 채운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의 이름이라 해도 외지 못할 제가 아닙니다만 거기에 의미든 흥미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게 둘의 차이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만…. 여하간에. 수줍었는지 이름 말고는 쓰지 않았군요. 차라리 암살 예고장이라도 보내지 그랬나요?"

 "어떻게―"

 "그렇지 않으면 저 히비키 와타루는 앞으로 삼십 초 안에 당신을 잊어버릴 테니까."


 천사 같은 얼굴이라도 자신이 천사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건 누구나와 다름없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뭉개진 밀반죽이나 다름없고요. 에이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발바닥에 힘이 없어서였을까. 이건 오기가 아니라 당혹과 슬픔이다. 히비키 와타루가 우두커니 서 있는 그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에서 베이지 색 장미 줄기가 꺾인 냄새가 났다. 손끝이 그의 턱을 건드렸다.


 인류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히비키 와타루와 그 외.

 사랑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경애와 몸을 끌어안는 사랑.


 육욕이라고도 하던가요? 그것을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만 인간들이 태초에 바다에서 기어나온 생명에서 기원했듯이, 인간은 관념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물질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부분이 퍽 중요하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감정입니다. 마치 배고픔과도 같이.


 장미의 끝에서 에이치는 눈을 감았다. 마주보고 견딜 수가 없었다. 히비키 와타루의 손가락들이 그의 턱을 감쌌다. 당신도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 얼굴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뺨 곁에서 부는 바람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귓가에서 소곤거렸다.


 "목소리는 두 종류입니다. 제가 노래하는 것과 당신들이 중얼거리는 것."


 가시에 찔리는 것 같았다. 꽃다발을 주문할 때 이미 그의 손조차 아닌 먼 화원의 가위에서 일찍이 쳐내어졌을 장미 가시가 히비키 와타루의 손가락에서 되살아나 그의 목을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와타루는 마치 물건이나 해골에 입맞추는 것처럼 그의 고개를 끌어와 뺨을 맞댔다. 다른 각도를 하고 있는 머리 사이가 차갑고 뜨겁고 실크처럼 보드라웠다. 베풀어야 할 자애와 이토록 하찮은 당신의 사랑, 지상에서나 피는 장미. 분해서 울 것 같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이래서 관객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걸까. 그 누구에게도 차마 이렇게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오기가 있었다. 그는 자존심이 있어서, 버티는 것은 잘해서, 장미꽃 따위는 없어도 당신에게서는 목덜미에서부터 숨막히도록 짙은 향이 났다. 살 냄새였다. 실신할 것 같은 짙은 향기가, 세상의 향기란 꽃이란 두 종류인가, 히비키 와타루와 그리고 그 이외는 모두 악취인가. 에이치는 덜덜 떨리는 채로 눈과 이를 다물었다. 가슴에 손이 닿았고 팔이 접혔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심장은 갈비뼈 속에서 바깥으로 이탈할 것 같았다. 뺨이 마찰해 히비키 와타루의 고개가 돌아갔고 장미꽃잎 같은 연분홍의 그의 입술이 찰박하게 귓가까지 다가와, 그것은 닿았던가?


 혹은 눈썹에, 올려묶은 머리채에, 그 날카로움에 찔렸던가. 와타루의 손이 등 뒤로 온다. 마치 몸을 관통하는 칼의 자루를 잡듯이 등을 받치고 속삭인다. 어째서 물러섰을까. 받쳐지려면 기대야 하는데 어째서 맡겨 버렸을까. 분하게도, 이 따위 몸, 지상의 사랑을 원했기 때문에. 당신이 말하는. 그 이외의. 그러니까 마치 안기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안기고 싶었습니까? 저에게? 에이치는 그 때 울고 있었던 것 같다. 턱을 끌어내려 끄덕였던 것 같은 품에서, 품에서, 품에서 향기가 짙었다. 당신의 옷 안 몸에서. 이 세상 아닌 것 같은 홀리는 향기가, 어둠이 찾아왔다. 당신은 나를 어둠을 연기해서 덮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당신이라서 이런 걸. 비참해. 결국 당신도 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어. 품 속에서 비수가 귀 속으로 대뇌에서 척수로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리며 가로지른다.


 에이치는 덜컥 뒷걸음질했다. 휘청거리는 발 아래 베이지 색 꽃잎들이 짓이겨졌다. 그의 이름마저, 구둣발 아래에, 사랑했기 때문에 경멸당한다. 나란히 설 수 없으면 이런 마음 따위 한갓 죽음에 지나지 않는 거야. 암살당한 행인처럼 그는 뒷걸음질쳤다. 이제 피를 쏟으며 모퉁이에서 쓰러지는 그를 누구도 눈여겨보아 주지 않겠지. 뭇 사람들이란, 극에서 '그 외' 의 역할들이란 그런 것이다. 이토록 하찮은 마음이나 이름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히비키 와타루와 그 외' 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목표였던 거야. 암살하라는 것은 그런 뜻이었구나. 차라리 그렇게 해 버릴 걸, 그런 걸 대행해 줄 사람은 내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있는데. 머리가 나빠서 이제야 깨달았어. 히비키 군. 다음에는 그런 쪽으로 알아봐 볼게.


 그렇지만 나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크림 색 장미 꽃잎들이 몰아쳤다. 히비키 와타루는 그의 이름으로 보낸 꽃 바구니의 장미들을 하나씩 비벼 뿌려 주고 있었다. 꽃들이, 자존심 없게도, 오기조차 포기하고, 염치가 뜯어져 내려 불빛이 밝은 대기실의 바닥에 차오르는 수위처럼 한 겹씩 두 겹씩 세 겹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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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쇼인 에이치는 눈을 뜬다. 눈꺼풀 사이 병실의 하얀 벽이 새삼스러운 색이었다. 연금빛 속눈썹 그림자 사이에 이어 붙인 타일 모서리의 금들이 가로 세로 십자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종이 구겨지는 것처럼 울렸다. 에이치는 몸을 일으켰다. 가슴은 뻐근하고 목 아래는 머리카락도 끊긴 길이라 닿을 것 없는데도 헛헛했다. 에이치는 병상 위에서 손을 쥐었다. 벽 틈새를 쥐고 있던 핏줄은 보이되 핏기 없는 손이 고집스럽게 담요를 구기고 있었다.


 "."


 에이치가 창가로 고개를 돌리면 거기 은발의 풀어헤친 머리의 뒷모습이 있었다. 창백한 빛깔은 조명 없는 병실 안에서 불안할 정도의 푸른 흰색이다. 히비키 군. 히비키 와타루는 에이치가 일어난 것을 눈치챈 것 같았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병상에 앉아서 보는 히비키 와타루는 자신보다도 키가 큰 것 같았다. 히비키 군. 에이치는 꺼슬꺼슬한 말처럼 그 이름이 혀뿌리에서 가시풀처럼 맴돌고 밖으로 뱉어지지 않는 마음을 느꼈다. 탁상 위에 장미꽃 바구니가 있었다. 문병 선물이었다. 자신의 머리 색과 비슷한 크림 베이지의 장미로, 히비키 와타루와는 관계없는 다른 사람의 선물이었다. 에이치는 탁상 위의 장미꽃 바구니와, 그 너머에 서 있는 히비키 군의 뒷모습을 차례로 보았다. 입술이 절로 깨물릴 듯 싸한 속삭임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았다. 결코 당신도 다를 것 없어.


 이 이상 말한다면 당신을 경멸하고 말 겁니다.


 마지막까지 아이돌로


 흥미가 생겨서요.


 그건 하찮은 꿈이었다. 히비키 와타루의 화려한 연극 무대나 그 뒤편의 대기실, 배우인 그에게 장미 다발을 보낸 자신, 대기실 벽 틈새에 숨어서 히비키 와타루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장면을 훔쳐 보려던 자신 같은 것은 전부 병상 위에서 잠을 자다가 보게 된 꿈으로 그 히비키 군의 품의 향기나 아찔한 뺨의 감촉들은 너무나도 생생했지만 에이치는 알 수 있었다. 연극 배우 시절의 히비키 와타루에게 자신은 접촉한 적이 없다. 그에게 처음 말을 걸게 된 것도 학원에서의 계획을 시작한 이후다. 히비키 와타루를 부르는 호칭은 '당신' 이 아니라 '너' 이며, 그렇지만 꿈 속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졌었지. 대기실 같은 것은 모르고, 꽃을 보낸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싶었다면 텐쇼인 가의 후계자인 자신에게는 좀 더 나은 현실적인 방법들이 있다. 거기다 저 꽃 바구니, 히비키 군이 내 이름을 안 뒤에 여기 있게 된 것이니까. 메시지 카드의 이름을 보고서야 기억했다는 식의 사건 순서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천천히 생각들을 불러와 에이치는 무섭도록 생생하고 찜찜한 그 꿈의 일이 꿈이었다는 것을, 자신의 상상,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었다는 것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정은 파도처럼 가라앉지 않고 가을날의 창 밖 바람은 거칠었다. 와타루는 여전히 그를 등지고 서 있었다. 히비키 군, 에이치가 마침내 소리내어서 중얼거렸다.


 "네. 텐쇼인 에이치 군."

 "머리 말이야. 어째서 풀어내린 걸까?"


 흠? 돌아본 와타루가 싱긋 입끝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현실의 그는 꿈에서와 달리 얼굴을 마주하는 매번 잘 웃어 주는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은 하나의 성, 자신의 영토이니까요. 패배한 자는 머리를 풀고 자신의 영토, 왕조의 지배권이 끝났다는 것을 알립니다. 뭐 이런 모습도 텐쇼인 에이치 군 당신의 마음에 안 드시지는 않을 텐데요?"


 보랏빛으로 마주한 눈동자가 오색의 머릿결 안에 낙엽 같았다. 에이치의 눈이 흔들렸다.


 "아름다워. 그렇지만."


 저기, 왜 나에게 와 있는 거지. 무대는 끝났는걸. 당신을 사랑하던 내가 당신을 동경해서 시작한 이야기를, 당신을 죽임으로써 짓밟고 앞으로 나아가 버렸는걸. 악역은 끝나지 않았어? 연기는 마지막이 아니었어? 이제 그런 것은, 그러니까 나와 당신이 같은 장소에 있을 개연성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아진 것 아니었을까?


 히비키 와타루는 가을의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에이치를 찾아왔다. 흥미가 생겨서요. 그뿐이었다. 설명도 없이 머물러 있는 그는 머리를 풀고 있었고 검게 차려입었던 그 옷과도 달리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은색 머릿결은 여신처럼 아름다웠지만, 에이치는 그 히비키 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의 방문을 그냥 내버려 두며―보고 싶으니까, 그냥 둬.― 몇 번의 시덥잖은 인사를 나눴다. 병실에서 히비키 군은 얌전하게 있으면서 그렇지만 에이치와 딱히 말을 나누거나 하려고 하지도 않고 테이블 옆에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그의 손가락들이 팔랑거리는 머리카락 너머에서 까닥거렸다. 저기. 에이치가 말을 걸었다. 혹시 이대로 내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걸 지켜보러 온 거야? 히비키 군의 표정은 그 때 싸늘하도록 가라앉아서 변했다. 그런 가정만은 용서하기 어렵네요. 없었던 것처럼 주워담아 주세요. 이후로 에이치는 히비키 군의 목적을 묻지는 않았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도 착오로 벌 대신 상을 받는 것처럼 좋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왜? 에이치는 히비키 군이 '친구' 들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목을 조르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전력으로 당신을 뿌리치고 가둘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기, 머리."


 묶는 것도 좋아했어. 오만하도록 아름다워서 마치 검은 깃털을 가진 공작새나 불사조 같았어. 에이치가 말했다. 흐응. 히비키 와타루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잡아 보시겠습니까?"

 "머리카락을?"

 

 킥 하고 히비키 와타루가 웃었다.


 "당신이 풀게 한 머리니까요. 지금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는 것도 당신의 손이 할 수 있는 일이죠."


 곧장 돌아서자 눈앞에 폭포처럼 풀어내린 은발이 가득했다. 덜컥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곁눈질로 보면 진짜로 심박도 올라가고 말았다. 달빛의 향기와 세상에는 그 이외의 무취뿐. 에이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머리카락 위로 가져갔다. 거미실 같은 투명한 은발이 손가락에 감겼다. 결 속으로 손이 파고들었다. 퍼올렸다. 모아 본다 이런 것은 한 번도 해 본 일 없어. 태어나서 한 번도.


 절로 숨이 가빠지면서 에이치는 히비키 군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어, 이런 모양으로 높이 올려서 묶고 있었지, 위로 미는 그 때.


 새하얗게 드러난 목덜미가 시야에 가득 들어오며 꿈의 죽음에 메말려 들어갔다. 이건 얼음의 향기구나. 혜성이 불태우며 궤도를 도는 얼음 조각의 꼬리. 무시무시한 열로 얼음이 연소하면서 나게 되는 새하얀 불꽃. 섭씨 2,700도의 궤적. 차마 따라갈 수 없는 소원의 칼날 앞에서 텐쇼인 에이치의 손이 스륵 풀렸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쓸어져 내려오며 뒷모습을 덮었다. 그 사이에 히비키 와타루가 시간을 멈춰 싸늘한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들이, 발처럼 쏟아져 내리는 무지개의 유성우 사이에서 바이올렛의 눈동자가 그를 마주보고,


 에이치는 칼에 찔린 것처럼 병상에서 화들짝 물러섰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면서 구겨졌다. 면직은 표면이 거칠거렸다. 가을날은 저무는 하늘에 구름이 황야처럼 부대끼고 있었다.


 풀린 머리카락의 와타루는 잠시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익살스럽던 말투도 재담이나 호의적인 공간도 한순간 멎었다. 그 사이에 자신의 맥박이 총 열 네 번 뛰었다는 것을 에이치는 기억할 수 있었다. 물리의 시간이 멈췄을 때 유일하게 생체로 남는 것. 인간이란 본래 바다에서 기어나온 생명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벽의 틈새였다. 틈에서 숨어서 지켜보려고 했던 그 하나의 숨 멎는 모습이었다. 대기실 속의 당신이었다. 무대 위가 아니면 같이 설 수없는 초월 속, 혜성이자 괴물이자 악마인.


 그렇지만 나 당신을


 텐쇼인 에이치는 와락 달려들어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은색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얼굴을 파묻은 등으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심장은 병약한 자신의 몸보다 훨씬 느리고 활기차게 뛰었다. 코를 묻고, 자존심과 오기와 용기로 가슴 앞을 더듬으면서, 그렇지만 닿을 수 없는 당신을 사랑했어.


 손가락이 만지작거렸다. 꿈틀거리는 육체가 증오스러울 정도였다.


 푸는 편을 좋아하시게 된 거군요.

 응.

 알겠습니다. 그렇면 그렇게 있을게요.


 황제라는 거구나, 네가 말하는 바로 이것이. 그렇지만 아주 옛날부터 신성과 제정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한 매듭으로 얽혀 있지 않았어? 히비키 와타루의 등에 코를 파묻은 채 자신의 품 안에서 손가락 끝들을 얽으며 텐쇼인 에이치는 생각했다. 풀어내린 머리의 와타루는 서서 탁자 위로 왼손을 뻗고 있었다. 손은 장미를 쥐었고, 황혼 이전에 사그라드는 마지막의 황금빛 햇살이 크림 빛 장미의 꽃부리 위에 쏟아져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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