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 한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노라니 나의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널부러진 소주병. 이미 산처럼 쌓인 담배꽁초. 또 한번 한숨이 나온다.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구. 이 바보녀석 같으니라구, 끝없는 자책과 대상없는 원망이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핸드폰의 폴더를 연다. 사랑'했던’, 아니, 그랬으리라 믿었던 그녀와 나의 사진. 다시금 열이 올라 핸드폰을 던져버린다.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구. 갈보년 같으니라구. 욕설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내 힘이 쭉 빠져버린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나한테서 얻어낼 것만 얻어내고 쏙 빠져나갈 계획이었겠지.

술병을 집어든다. 아직까지 찰랑거릴 정도는 남아있다. 술을 들이킨다. 취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 누구야. 여자가 남자보다 술이약하다고 한게. 취하질 않잖아 취하질. 취하면 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어차피 나한테 남은 거라고는 몸뚱아리와 두어평 남짓한 자취방 뿐이다. 아. 그리고 그 년이 나한테 남겨준 엄청난 빚. 남아있는 돈도 술과 담배를 사느라 이미 다 써버렸다.

그년의 말을 믿는게 아니었는데… 후회한들 늦었다는, 지극히 간단한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힘이 없다. 차라리 죽는게 나을까. 하. 그럴 배짱이나 있던가 나한테. 두어병 남은 따지 않은 술병은 딴다. 물처럼 들이켜도 정신은 또렷해져만 간다. 울분이 올라온다. 소리를 지른다. 술병을 던진다. 와장창. 술병은 깨지고, 술은 바닥을 적신다. 둑이 터지고,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배신감. 그래. 이건 배신감일거야. 그럴거야.

전화벨이 울린다. 고개가 홱 돌아간다. 정신없이 던져놓은 핸드폰에 기어간다. 깨진 술병이 무릎과 다리, 손을 찔러 피가 흐르지만 개의치 않는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일까. 그년인걸까. 용서? 용서를 비는걸까? 용서해줄까? 그래. 그녀가 다시 돌아온다면 용서해주자.

“여…보세요?”

-야! 이년아! 왜 출근을 안해! 뒈지고 싶냐! 이년이 이쁘다 이쁘다 해주니 아주 지룰이 났네?

“…….”

-왜 말이 없어! 왜, 기둥서방이라도 도망쳤냐? 하! 네년이 지명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갈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닥쳐!”

-….뭐라 씨부렸냐?

“닥치라고! 니가 뭘 아는데! 그래! 죽여라 죽여! 찾아와서 배때지 찔러보라고! 이 양아치새끼야!”

-이년이 미쳤나. 너 지금…

그래. 내가 미친년이지. 그년이 돌아올리가 없잖아. 웃음만이 흘러나온다. 손과 다리, 무릎에서 시큰거리는 감각이 올라온다. 무시한다. 하. 술병을 하나 더 까서 입에 들이 붓는다. 서서히 잠이 오기 시작한다. 아아. 차라리 잠이라도 들어버리면 되겠지. 이 빌어먹을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겠지.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시간을 보려 했지만 고개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아아. 피곤하다. 눈이 감기는구나.

며칠 뒤.

오늘 낮 1시경, 서울의 한 원룸촌에서 20대 여성 최모씨가 숨진채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최씨는 말라붙은 피투성이로 웅크린채로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출혈과다와 급성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쇼크사로 판명되었습니다. 최모씨는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사망전 업주와 통화를 한 기록이 남아있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어설픈 글쟁이. 여러가지에 굶주린 녀석. (프로필 사진은TUMBLR의 MAYHEM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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