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BGM / 넬 - 기억을 걷는 시간




3.





이별 노래를 부르면서도 마음으로 이해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무대에서 부를 때 처음으로 노래가 온전히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래서 다들 이별 노래를 그렇게 듣고 울고 하는 거였을까. 이래서 헤어지고 나면 모든 이별 노래가 자기 노래 같다고 하는구나. 오늘 무대 좋았다며, 감정이 살아 있다는 인사를 기뻐해야 하는 건지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기분이었다. 그저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더 정확하게는 우혁을 껴안고 집에서 쉬고 싶었다.
점점 더 가라앉는 내 표정에 매니저는 쉬는 게 좋겠다며 별다른 스케줄도 잔소리도 없이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집에 무척 가고 싶었는데 막상 집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으니 덜컥 겁이 났다. 이제 아무도 없을 텐데.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데. 네가 없는데.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 현관문에 기대어 웅크리고 앉아 서늘한 복도만 멍하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기다리면 와주려나. 그럴 일 없다는 거 알면서 버릇처럼 기대를 하고 희망을 못 버리는 내가 참 한심했다.



“ 야, 안 승호. 너 안 들어가고 뭐 해? “


정신 놓고 다니는 안 승호가 차에 흘리고 온 물건이 있었는지 매니저가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나타난 것이다. 대답 없이 매니저 형을 올려다보자 청승도 이런 청승이 없다며 집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신발 벗고 거실로 향하는 것까지 지켜보고는 몸을 돌려서 집에서 나간 형이었다. 형이 나가기 전에 계속 무어라 말을 한 것 같았는데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집 안의 구석부터 점차 야금야금 좀먹어가는 것 같아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분명 불이 전부 켜져 있었음에도 집안의 모서리부터 시커먼 어둠이 내 발밑까지 몰려오는 환각이 보였다. 그 어둠이 내 발목을 콱 잡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급히 리모컨으로 티비를 틀어 약간의 소음을 만들어 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은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이 공간에서 비정상적인 건 숨을 몰아쉬는 안 승호, 한 명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표현하더라. 엎친 데 덮친 격? 티비를 틀었더니 나오는 건 장 우혁의 얼굴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기쁨과 그것이 화면 속이라는 절망감. 화면 속의 그는 여전히 내 사랑이었고 나의 세상이었고, 내 이상향이었다. 하지만 내가 잡을 수 없는 그 속의 장 우혁. 티비를 켜자 보이는 나의 설국. 지금의 안 승호가 닿지 못하는 그곳. 며칠 전까지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였는데 이제 그 존재가 자꾸만 나에게서 가장 멀어지는 것 같아 심장부터 싸하게 온몸으로 가시가 퍼져나갔다. 가시일까, 너라는 설국에서 날아온 얼음조각일까.



“ … … 보고 싶어… “



-




일 할 의욕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머릿속은 우혁이와 헤어지던 그 순간에 멈춰서 조금도 굴러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기계처럼 영혼 없이 시키는 일만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비어버린 건 아니었다. 나는 지금 길을 잃은 것이었다. 우혁이 손을 놔버리자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덩그러니 세상 한복판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이건 내가 자립성이 없어서도 능력이 없어서도 아닐 것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쏟던 마음 줄 곳을 잃었다는 뜻일 테니까.



“ 승호야, 커피 좀 마실래? 사다 줄까? “

“ …아니. “

“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필요한 거나. “

“ … … 없어. 화장실 다녀올게, “


나에게 필요한 게 장 우혁 말고 뭐가 있겠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선 대기실을 나왔다. 누가 내 심장에 쇳덩이를 둘둘 감아서 매달아 둔 건지. 발걸음도, 마음도 너무 무거워서 이러다 기어서 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대기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움직이니 숨이 자꾸 차오르고 가슴이 답답해서 자꾸만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손을 꾹 쥐고 가슴팍을 툭툭 치며 화장실에 들어가 비어있는 칸에 들어갔다. 멍청하게 앉아서 멍 때리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퍼득 고개를 들고 칸 밖으로 나갔다. 잠깐 있었는데 30분이나 지났다니, 매니저 형이 또 한 소리 하겠다. 부지런히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들어오는 사람과 방향이 같아 걸음이 멈춰졌다. 피해서 나가려고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상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오른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 아… 죄송…합… “



딱히 내 잘못도 아니지만 튀어나오는 사과를 하며 고개를 들었고 내 앞에는 장 우혁이 서있었다. 상황 파악도 안 된 나는 멍청하게 행동을 멈췄고 그런 나를 무심히 내려보던 장 우혁은 그냥 나를 스쳐 지나가버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벌어진 내 입술이 무색해져 나는 그저 다시 입술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우혁이를 잡는다거나, 이름을 부른다거나. 그런 행동들은 나오지도 않았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정말 그냥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작게 뛰던 심장은 점점 더 소리를 키워서 이젠 뇌 대신에 심장이 자리를 잡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크게 쿵, 쿵. 소리를 내고 있었다. 땅에 박혀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내 대기실로 도망쳐왔다. 문에 기대어 주르륵 주저앉는 나를 보고 매니저 형이 달려와 잡았지만 형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침묵만 가득한 세상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래,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다시 나오는 장 우혁이 또 나를 그렇게 스쳐서 지나가 버릴까 봐. 모르는 사람을 보듯, 정말 완벽한 남이라는 확인사살을 받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도망쳐왔다. 현실을 도피하는 거면 어때. 나는 아직 장 우혁이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이라도 필요했다.













4.




꿈을 꿨다. 사방이 어두웠고, 내 몸은 바닥이 아닌 어딘가에 붕 떠있는 것 같았다. 하나, 둘,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고 이내 내가 있는 곳이 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모든 산소가 사라진 듯 숨이 들이마셔지지 않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내 목을 잡아도 보고 발버둥을 치며 가득 고인 눈물이 흘러내릴 즈음 눈을 번쩍 뜨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격하게 안무 연습을 하고 난 것처럼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니 내 방이었다. 본능적으로 너를 찾으려다 네가 이제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절망했다.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는 이 상황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인 네 옷을 끌어안고 다시 눕는 것뿐이었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네 옷에서 풍겨나는 네 냄새 덕분에 조금씩 그 속도를 줄여갔다.
나는 이제 네 옷에서도 안식을 찾아, 우혁아. 이런 나를 어쩌면 좋을까.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들을 때 그 노래와 함께 했던 기억도 같이 떠올린다. 침묵이 집안을 잡아먹는 것이 싫어 틀었던 노래도 네가 있었다. 이 노래는 너와 밥을 먹으며 들었던 노래. 이 노래는 너와 드라이브를 하면서 들었던 노래. 이 노래는 너와 싸우고 방에서 혼자 듣던 노래. 침묵을 피해 틀었던 건데, 내 공간은 또다시 너로 잠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숨이 막혔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거리에 너와 내가 걸어가고 있었고, 너와 내가 좋아하던 음식점에선 우리가 장난을 치며 밥을 먹고 있었다. 주차장에 내려가면 너와 내가 몰래 입을 맞추고 있었고, 하다못해 집 앞에서는 사이좋게 집을 나서는 우리가 있었다. 내 발길이 닿는 곳곳에 네가 존재하고 있어서 너에게 벗어나기는커녕 차곡차곡 깊은 곳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내 세상에 온통 너였어서, 뭘 해도 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잔인한 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도 않을 거면서 나를 바닥도 없는 곳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추억으로 가득한 노래와 공간을 바라보면 그 꿈처럼 나는 숨을 쉬지 못했다. 마치 장 우혁이란 사람이 안 승호에게 준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이제라도 느끼라는 것처럼 나는 너를 떠올릴 때마다 막혀오는 숨을 부지런히 내쉬기 바빴다.

나는 네가 없어서 숨을 쉬지 못한다. 나는 너를 떠올려야 숨을 쉰다. 내가 널 떠올리며 서른다섯 번의 눈물을 흘리고 난 후에야 나를 놔줄까, 너는 어때, 우혁아. 네 기억에 같이 사는 나는 벌써 너를 놔줬을까. 너도 나만큼 슬플까. 못해준 사람이 헤어지면 그렇게 힘들어한다던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 힘든 걸까. 그럼 너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다. 너는 나에게 과분하게 잘해준 사람이었으니까.

바빠야만 했다. 조금의 틈만 있으면 썰물처럼 몰려오는 네 생각을 막기 위해서는 틈도 없이 바빠야만 했다. 그래서 들어오는 모든 일들을 하겠다고 했다. 작은 것도 큰 것도 내 시간을 너 대신 빽빽하게 채워 넣을 수만 있다면 다 좋았다. 무리하는 거 아니냐며 주변에서도 팬들도 모두 나를 걱정하는데 그 걱정 속에 장 우혁, 너는 없었다. 내가 기다리는 너의 걱정은 나에게 닿지 않았다. 마음이 닿지 않을 만큼 너무 멀어져 버린 걸까.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일지도 모른다. 더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멀쩡하게 변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혁이를 보고 멀쩡하게 웃을 수 있는 그 언젠가를 바라보며 살아가기엔 지금 당장의 내 우울이 너무 버거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어떻게든 하루를 가득 채워 네가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너의 소식을 내가 피하기가 쉬울리는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물어오는 우혁의 소식도 이제 너무 버거웠고, 내가 대답을 피하면 왈가왈부 늘어나는 이야기들도 너무 지쳤다. 그렇다고 이제 너를 떠올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었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네 옷에서 안식을 찾았고, 너와 듣던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걸었다. 이런 나와는 달리 너는 점점 더 멀어졌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사람이었다. 마치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차곡차곡 나와 더 멀어져만 갔다. 나는 그게 그렇게도 억울하고 서러웠다. 안 승호는 아직도 과거에 사는데 혼자 미래로 걸어가는 장 우혁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너처럼 빠르게 털어내지 못하는 것도 느린 내 탓일까. 너를 떠올리면 행복한데 우울했다.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절반은 여전히 너와 사랑을 하던 그때에 두고 절반은 우울에 잠겨서 장 우혁보다 느리게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다.


너란 존재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를 사랑했었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게 살아가려고 한다. 지금처럼, 지금보다 바쁘게 살아가며 우울에 잠긴 나에게 숨을 불어 넣을 것이다. 내가 아는 장 우혁, 너라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를 누구보다 먼저 알겠지. 내가 너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걸. 온전히 내 안에서 너를 다 보내고 오롯이 친구로서 너를 마주 보는 날, 그런 날에 우리가 다시 같은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이기적이지만, 네가 나를 조금 천천히 보내줬으면 좋겠다. 우혁아.
1년 연애하면 잊는 게 2년이 걸린다는데, 우리의 긴 시간을 네가 잊기까지 평생이 걸렸으면 해.

장 우혁은 안 승호에게만 허락된 세상이어야 하니까.








톤혁(톤수혁공)합니다. 리버스절대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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