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맞이한 장면은, 자신을 코앞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블레이즈의 모습이었다.


 “오, 기절한 거 치곤 빨리 일어났네.” 

 “으아아악!?”

 “비명까지 지를 일이야? 어디서 귀신 봤어?”

 “블레이즈 씨 살아 있었어요?”

 “그걸 이제 설명까지 해야 하냐고! 너도 좀 익숙해지는 게 좋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냐가 마지막으로 봤던 블레이즈의 모습은 피범벅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에서 죽는 게 당연하지만, 블레이즈의 아츠는 혈액을 이용하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 로도스에 복귀하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 바냐는 블레이즈의 그런 모습에 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실, 누구라도 피를 줄줄 흘리며 걸어오는 블레이즈를 처음 본다면…… 로도스 아일랜드의 외부에서 침입한 괴물이거나, 죽지 못한 시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관측된 블레이즈의 출혈량은 오늘따라 더욱 심각했다! 바냐는 이를 보고 냅다 실신해버려서, 의무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셈이었다.


 “나는 또 같이 놀러 가자고 하는 게 싫어서 쓰러진 줄 알았지 뭐야! 아니면 ‘아기 햄스터’라는 죽여주는 별명 때문에?”

 “아기 햄스터는 또 뭔가요?”

 “저번에 ‘햄돌이’라고 부를 땐 반응이 없길래.”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바냐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블레이즈를 밀어냈다. 물론, 밀리지 않았다.


 “그럼 못 들었던 것 같으니까 다시 말할게. 아기 햄스터야, 나랑 같이 용문에 놀러갈래?”

 “네……. 네……?”

 “오우. 결단력 제법 좋은걸.”

 “지금요?”

 “너 진도 빼는 게 제법 빠르다. 하지만 맘에 드니까 지금 가자!”


 블레이즈가 킥킥 웃으면서 누워있는 바냐를 가볍게 둘러업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의무실 밖으로 나가는 블레이즈를 향해, 의료부 오퍼레이터가 두 분 다 안정을 취하는 편이 낫다고 눈물겹게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블레이즈는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물리는 데 바빴다. 들쳐 업힌 바냐도 좀 쉬는 게 낫지 않겠냐고 투정을 부렸지만, 오늘따라 진심이 닿는다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갑자기 왜 용문인가요?”


 용문 외곽, 한적한 공원에서 바냐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옹졸하게 핥으면서 말했다. 머리 위에는 유치한 스프링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쓴 채였다. 블레이즈의 한참 높은 머리 위에도 똑같은 머리띠가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진즉 콘까지 다 먹어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응. 먹고 싶은 게 있는데 커플 세트더라고.”


 이 말을 듣자마자 바냐는 자신이 잡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상태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블레이즈는 누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 바람은 정말 상쾌하다고 덧붙였다. 

 커플…… 이 뭐더라. 단순히 사람 한 쌍을 칭하는 데도 커플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었지……. 


 “커플이라는 건 어떻게 증명하게요.”

 “일단 우겨보고 안 믿어주면 키스라도 해보게.”

 “우…….”

 “마음에 안 들어? 죽여주게 맛있다더라. 나랑 키스하는 거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맛있을  걸.”


 바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남의 마음을 몰라주는 바보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사람과 어울려 다닌 자기 잘못이었다. 바냐는 녹아서 전부 줄줄 흘러내리기 직전인 아이스크림을 입에 완전히 구겨 넣어 얼굴을 식히려고 했다. 그런데도 화끈거리는 느낌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 얼굴은 따뜻한 편이 좋다고 블레이즈가 그랬지만, 지금 이마로 체온을 재면 36.5도를 훨씬 웃돌 것만 같았다. 


 “앗, 이럴 수가……!”

 “왜요……, 키스해도 증명서 없으면 안 팔아준대요?”

 “시즌 한정 메뉴였대. 치사하다, 치사해. 치사해서 안 먹는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라는 듯 이를 꽉 깨문 블레이즈가 단말기의 화면을 내밀었다. 잘 모르겠지만 한 달은 지난 날짜가 표시되어 있었다.


 “커플 한정에다가 시즌 한정까지 걸어두다니 얼마나 장사가 잘되길래 그러는 거야?”

 “이 정도로 날짜가 지났으면, 그냥 저랑 커플인 척 하고 싶어서 온 줄 알겠어요.”


 블레이즈의 귀가 팔락팔락 흔들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네?”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만 메뉴를 먹어보고 싶다는 것도 진짜야. 솔직히 궁금하지 않아? 커플한테만 내놓는다는 전설의 음식.”

 “블레이즈 씨는 정말, 정말……!” 바냐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아~, 혹시 나랑 키스도 해보고 싶었어?”


 그 물음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바냐는 할 말을 잃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 옷을 꾹 쥐어 잡았다. 지금 말해봤자, 바보처럼 옹알이밖에 할 줄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둔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피차일반이었다. 이런 상황이 닥쳐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계속 이렇게 놀러 다니다가 이런 파국을 맞이한 게 틀림없었다. 대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일을…….


 하지만 눈을 감지도 못한 채로, 얼굴이 블레이즈의 양손으로 붙잡혔다. 그리고 갑작스레 덮쳐오는 키스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건 무척이나 짧았고, 그저 입술이 닿는 게 고작인 얕은 입맞춤이었다. 자세히 생각하고 싶어도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서 뭐라고 첨언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건 바냐가 바라던 일이면서, 동시에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직도 눈앞에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리가 없었다. 블레이즈가 허리를 다시 필 때까지도 바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얼굴이 지금 이상하다고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어어, 이게 뭐지. 방금 내가 뭘…….’


 표정이 바뀌는 걸 보면서 블레이즈가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얼굴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 정작 키스한 본인은 하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 좀 이상하다. 체온이 나보다 높은 건 흔한 일이 아닌데…….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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