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어찌나 진상들이 많은지. 컵라면 먹고 안치우고 가는 손님이나, 쓰레기 분리수거 안하고 막 집어넣는 손님이나, 돈 던지는 손님이나, 안에서 술을 꼭 마셔야 겠다고 진상부리는 손님이나. 그러니까 언제나 한 둘씩은 꼭 있지만, 이렇게 하루에 가득 채워서 오면 아주 그냥 최악이라는거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지친 지민이 얼른 정국이 와주길 기다리며 문을 힐끗거렸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이 보였다. 겨울이라 특히 더 어두운 것 같기도 하고. 정국은 언제나 그렇듯 정확히 교대시간 10분 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민이 오늘따라 더 반가운 정국에게 손을 미친듯이 흔들었다. 이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지.

“형, 왜 이래여... 징그럽게...”
“어쭈. 형보고 징그럽다가 뭐냐.”

정국은 지민을 보며 웃다가 말고 창밖을 응시했다. 지민도 그런 정국의 시선을 따라서 창밖을 요리조리 둘러봤다. 지민의 눈에는 딱히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정국의 눈은 딱 한곳만 보고 있었다. 지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국에게 물었다.

“밖에 뭐 있어?”
“오는데 여기 앞에 이상한 사람 있더라구여. 모자 푹 눌러쓰고, 마스크에 아주 그냥 무장을 했던데. 조심하라구여.”

요새 무서운 일 많으니까. 그래도 형은 얼굴이 무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여. 마지막 말에 정국을 콱 쥐어박은 지민이 겉옷을 챙겨입었다. 가방까지 챙겨든 지민이 씩씩하게 왼팔과 왼다리,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함께 들며 로봇처럼 걸어갔다. 하여간 무서운 거 정말 싫어하는 형이었다. 지민은 문 앞에서 밖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정국에게 인사했다.

지민이 편의점에서 나와 급하게 걸어가는데, 어느순간 지민의 어깨위로 커다란 손이 올려졌다. 묵직한 무게감에 놀란 지민이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가 있었다. 그냥 모자에 패딩 모자까지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어둠도 거기에 한 몫했다. 아까 정국이가 말한 들어오다가 본 사람인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킨 지민이 그대로 뛰려고 하자, 그 사람이 빠르게 지민의 허리를 붙잡아왔다. 울상이 된 지민의 눈가가 빨갰다.

“저번에도 그렇고... 너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낮은 목소리가 귀를 울리자 버둥대던 지민이 잠잠해졌다. 뒤를 돌자 그가 겹겹이 쌓인 모자를 벗었다. 어두운 거리에서도 그는 빛이 났다.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곤 태형의 가슴께를 펑펑 두드렸다. 

“진짜 놀랬자나!”
“난 너 마중나왔지. 요새 밤길 무섭다면서. 인제 내가 시간되면 데리러 와줄게.”

다정한 태형의 말에 사르르 풀린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 하면 괜히 매일 기대하게 되는데. 마칠때 쯤이면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태형은 추우니 얼른 집에 가자며 지민의 손을 이끌었다. 얼마나 기다린건지 태형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밖에서 기다릴 생각만 하고 안에서 기다릴 생각은 안했나보다. 김태형, 바보.

집으로 오는 길에 태형은 계속 지민의 이야기만 반복했다. 겁이 많아서 귀엽다느니, 겁먹은 표정 너무 귀여웠는데 다시 보여주면 안되냐는 그런. 겁이 많은건 사실이었지만, 뭔가 놀림받는 것 같아 점점 지민의 입술이 부리처럼 톡 튀어나왔다.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치는 지민의 뒷통수를 보던 태형이 눈치없이 또 입을 열었다.

“처음 본 날 기억나? 그 날 너 놀라서 머리로 내 턱 펀치날렸잖아. 조금 아팠는데 인제 지금은 또 괜찮아.”
“야. 김태형... 너어... 나 놀리니까 재밌어?!”
“어어?! 짐나, 내가 너 언제 놀렸다고 그래?”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지민을 쳐다봤다. 진짜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순수한 눈빛이었다. 까만 뒷통수만 보여줄뿐, 지민은 돌아서지 않았다. 문을 활짝 연 지민이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채로 태형을 노려보곤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복도에 남은 태형은 문이 점점 닫히는 것도 잊은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형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꼭 필요한 순간에서 눈치가 없었다. 이게 눈치가 없는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그래서 눈치가 없어서 솔직한 경향도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은 다 내뱉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그냥 그렇구나 태형이는 좀 솔직한 편이구나, 하고 아무렇지않게 넘어갔고, 태형은 그게 익숙하고 당연했다. 그래서 지금 지민이 화난듯이 돌아선 원인이 뭔지 모르는거다. 겁이 많아서 귀엽다고 한 건데? 칭찬한건데? 대체 어디가 화남 포인트인건지 이해하지 못 한 태형이었다.
'얼른 화해하고 짐니랑 내일 맛있는거 먹으러 가야하는데.'

지민은 방으로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 잠시 생각해보니 괜히 쪼잔해 보이게 화를 낸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소심해서 항상 뱉어놓고 후회한다. 태형과 어떻게 쌓은 관계인데, 이게 쉽게 무너져 버릴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벌써 물은 엎질러졌고, 지민은 이제 그 엎지른 물을 치워야한다. 이걸 어떻게 치운담? 그런 생각을 하다 지민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꿈에는 태형이 나왔다. 꿈에서 태형은 지민과 사이좋게 놀다가 갑자기 불현듯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짜증나는 악몽이었다.

눈을 뜨자 어제 씻지도 않고 잠에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씻으려고 거실로 나오자 집이 죽은듯 고요했다. 이렇게 조용하다면 태형은 잠을 자고 있거나 스케줄이 있어 나갔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개운하게 씻고 나오자 비몽사몽한 상태로 쇼파에 앉아 졸고있는 태형이 보였다. 그러다 샤워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지민이 머뭇거리며 말을 걸까말까 고민할 때, 태형이 선수쳤다.

“짐나, 어제는,”
“기, 김태형! 오늘 스케줄 없으면 나랑 놀러가자.”

태형은 지민을 잠시 쳐다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둘 다 무언의 사과 표시였다. 태형은 무언이라기 보다는 타의로 막힌 것이었지만. 방으로 돌아온 지민은 열심히 드라이를 하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작은 패션쇼도 했다. 푸른 셔츠에 블랙진, 그 위에 검은 코트를 입은 지민이 빼꼼 밖을 내다봤다. 태형은 벌써 다챙기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화려한 금발 위에 빵모자를 푹 눌러쓰고 롱코트를 입은 모습은 모델같았다. 화보촬영 현장인가 싶어 사진이라도 찍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지민의 시선을 느낀건지 태형이 고개를 들어 지민을 쳐다봤다. 그에 놀란 지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

엘레베이터 앞에 선 태형은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잘생긴 얼굴을 가려버려서 속상했지만 불가항력임을 알고 있었다.

“오늘 어디갈,”

태형의 베이지색 코트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고 있는데, 태형이 뒤를 돌았다. 얼굴이 코 앞에서 보였다. 눈이 마주치고 빤히 마주한 시선을 먼저 피한것은 지민이었다. 태형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볼 생각은 하지못했다.

“오늘 만화방 가자. 어때?”
“완전 콜이지.”

그나마 근처에 위치한 만화방에 들어오자 태형은 만화를 고를 생각도 안하고 좁은 방에 누워버렸다. 그걸 멀뚱히 보던 지민은 비어있는 옆방을 보았다. 좁아서 태형 혼자 누우니 적당해 보였는데, 저기에 성인 남성 둘이 있기에는 좁아보였다. 지민이 옆방으로 가려는걸 본 태형이 옆자리를 손으로 통통 치며 재촉했다. 잠시 고민하던 지민은 결국 태형 옆으로 앉았다. 비좁긴 했지만 못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뒤, 태형과 함께 만화책을 고르러 나온 지민은 당황했다. 딱히 관심있거나 챙겨보는 만화책이 없기에 무엇을 봐야할지 몰랐다. 벌써 고른건지 태형은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지민은 발만 동동 굴리다가 유명한 만화책을 두어권 꺼내들었다. 추억을 되살려 읽기에는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누워서 책을 읽고있는 태형의 모습이 보였다. 방은 얇은 커텐을 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형은 모자를 벗고 편하게 있었다. 집중해서 읽고있던 태형은 지민이 들어오자 무슨 만화책을 골라왔냐며 물었다. 그 이후로 지민은 이 만화책 내용의 대부분 스토리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책이 아니라 태형의 입을 통해서. 만화방에 누워 여유롭게 책보는게 소원이라더니 확실히 즐거워보였다. 태형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니 훨씬 눈에 쏙쏙 들어왔다. 스포를 좋아하는 박지민의 특성상 모든 스토리가 지민의 손안에 있어야 읽을때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쑥쑥 흘러갔다. 들고 온 책을 다 보았을쯤, 너무 조용해서 옆을 보니 태형은 잠에 빠져있었다. 꼭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 같았다. 오똑하게 솟은 코를 손가락으로 톡 만져보고 싶었다.

“지금 몇 시야?”
“아, 안자고 있었어?”

스륵 눈을 뜬 태형이 물어왔다. 얕게 잠을 자긴 했는데, 거의 눈을 감고 있었다고 했다. 진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민이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일곱시 사십분.”
“헐, 벌써? 짐나, 미안한데 나 지금 바로 나가봐야 할 것 같아.”

태형이 핸드폰을 힐끗 보며 이야기했다. 여덟시까지 누구를 좀 보기로 했다며 초조해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리고 불안했다. 평소와 다른 태형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지민을 본 태형은 미안하다고 다시 한 번 말하며 옷과 모자를 챙겨들었다. 그렇게 좁았던 공간인데, 태형이 가버리니 너무 넓었다. 지금 지민에게 태형은 신데렐라 같았다. 잡을 수 없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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