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끔찍한 기억이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고, 되짚어 볼 수록 내 스스로가 역겨워지는 기억들이다. 건드리고 싶지 않던 그 기억들은, 아직 어른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그 어린 날의 기억은, 언제나 비가 내리는 시기가 되면 떠오르기 시작한다.

지우려고 애써 본들 어쩌리. 달라지는 건 없다. 그건 내가 실제로 저질러버린 것이고, 되돌릴 수 없는 '이야기'니까.


그날도 비는 지겹도록 내리고 있었다. 장마철이 된 도시는 그동안 묵혀두었던 더위들을 천천히 해소시켜 주었지만, 이건 너무 과도한 게 아닌가 싶을 전도로 비가 무지하게 쏟아진다.

이런 날은 되도록이면 나가고 싶은 날씨는 아니다. 어디 돌아다닐 곳도 없고.

보통이면 집에 박혀 영화 한편 보던지, 아니면 비에 걸맞게 파전이라도 부쳐먹으며 소주를 한잔 두잔 걸치고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애석하게도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질 않는다.

외롭다.

사람의 체온이 고파질 날씨다. 비까지 와서 그런가 기분이 너무나도 바닥이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울하다.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다.

"…인생 씨발."

기가 막히게도 배는 고프다. 마땅히 시켜먹기에는 이번 달이 꽤 아슬아슬하다. 아직 아르바이트비도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또 편의점이나 들려야 하네.”

한숨이 나온다. 이래서야 원, 있던 기운까지 날아갈 것 같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나 주머니를 뒤적이지만, 담배갑 속에는 담배 한 개비조차 들어있지 않다. 담배값도 없어서 담배갑을 채울 수 없다니. 웃프다. 나는 대충 외투를 챙겨입고, 밖으로 나섰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채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의 바닥은 완전히 젖은 채로 남아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미끄러지리라.

잠깐 동안의 감금, 그리고 그 감금으로부터 풀려나자마자 나는 뛰쳐나가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세가 아니다. 천둥번개가 여실히 치고 있다. 나는 외투를 여미고 품에 안고 있던 우산을 꺼내 썼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우산은 펴졌다. 나는 그대로 그것을 위에 받쳐 쓴다.

편의점까지 걸어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다. 눅눅하고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누르듯 퍼져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나는 한동안 폐인처럼 정처없이 걸었다. 분명 첫 목적은 음식을 사기 위함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정처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겠지. 이런 비오는 날에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어머니도 등짝을 한 대 세게 후리지 않을까.

큰 거리를 빠져나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쪽이 더 빠른 지름길이다.

“···어.”

문득, 무언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자리에 잠깐 멈춰 섰다.



꽤 커다란 골판지 상자. 그리고 그 안에 무언가, 들어있으면 안될 것 같은 게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상자 속의 것을 보기 위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다름 아닌 소녀였다.


검은 색의 긴 생머리를 하고, 완전히 온 몸이 젖은 채, 그 골판지 상자 안에서 무릎을 모아 안고 있는 자세로 벌벌 떨면서,

 요즘 학생들이 입을 듯한 체육복 져지를 입은 소녀는 나를 보더니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것은 글씨가 쓰여진 종이였다. 

아저씨라는 표현이 비수가 꽂히는 명칭이긴 했지만, 그건 둘째치고 어째서 이런 소녀가 여기에 있는 걸까. 그것도 비를 맞으면서.

“안녕.”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소녀에게 인사를 건냈다. 소녀도 덩달아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넌 뭔데 이런 골목에서 골판지 상자 안에서 놀고 있는 거니?"

나의 질문에 소녀는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또 무언가 종이를 들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쫒겨났어요. 집에서.」

···쫒겨났다고? 대체 뇌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으면 이런 어린 아이를 밖에 내쫒아 비오는 곳에 홀로 있게 한 걸까? 그것도 이런 장마철에 비 맞다가 얼어 죽으라고?

「부모님이랑 싸워서 쫒겨났어요. 나가서 살아라고 했어요. 그래서 가출했어요.」

소녀는 비 때문에 다 젖어버린,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힌 다른 종이를 들며 말을 이어갔다.

말이 가출이지, 사실상 아동학대다. 자기가 뭐라도 된 듯이 자기 자식을 쫒아보내는 부모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당연히 열이 받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소녀는 자신이 버려진 게 그닥 큰 문제가 아닌 모양인지, 그냥 평온한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경찰서에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게 어때? 이런 곳에서 비 맞으면서 떨지 말고···”

「싫어요.」

“집에 돌아가. 부모님이 지금쯤이면 걱정하시며 널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몰라.”

「싫어요.」

“너 이러다가 감기 걸린다. 응?”

「싫어요.」

내가 말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종이 한 장만 들고 매우 효율적으로 거절하는 소녀를 보며 담배 생각이 더더욱 고파졌다. 소녀는 입을 열지 않는다.

“경찰서로 가자. 안 가면 내가 지금이라도 부를 거야.”

억지로 끌고 가긴 뭐해서 간을 보려고 일단 말로만 얘기했다. 내 말에 잠깐 표정이 흔들리는 소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다시 종이를 들어 완강하게 거부한다.

…사이 되게 안 좋구나. 오지랖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오히려 이 아이가 궁금해진다.

“뭐 때문에 그런 거니? 왜 싸웠어?”

「갖고 싶은 옷이 있었는데, 안 사주셔서 가출했어요.」

…정말로 사춘기 때의 철 없는, 어린아이나 말할 법한 투정이다. 세간에서는 보통 이 나이때는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도 돌아가지 않는 걸 보면 보통 독한 소녀가 아니라고 생각도 들었다. 대체 얼마나 좋은 옷이길래, 가출이라는 투쟁을 하면서도 그렇게나 옷이 갖고 싶은 건가.

'하긴, 이 나이때의 아이들은 다들 꾸미고 싶어할 나이지.'

요즘 애들의 생각을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돌아가야 되지 않니? 어차피 곧 돌아가게 될 건데. 부모님이 실종신고 같은 걸 넣었다면 너도 너대로 곤란할 것 같은데.”

소녀는 콧방귀를 흥 뀌면서 말했다.

「여기서 죽던지, 아니면 말던지요. 집 나온 건 한두번이 아니라고요! 어차피 또 걱정할 때 쯤에 적당히 들어가면 돼요. 신경쓰지 마요.」

고집 한번 되게 쌔네.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은 건가? 이런저런 말로 훈계하고 싶었지만 나조차도 그럴 처지가 아닌지라 나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하··· 그래. 그렇게 도움을 거절하는데,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건 없겠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그녀도 더 나를 붙잡을 생각이 없는지, 도로 골판지 상자 안으로 푹 들어갔다.


필시 평소의 나였다면 딱 그 정도였을 것이다. 남에게 신경을 많이 쏟는 성격도 아닌 나였기에 아마 희한한 여자애네 하고 넘어갔을 일이였다.


"……."


하지만 편의점 문 앞까지 가자 어째서인지 더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심하게 떠나려고 했다. 날씨는 춥고, 여전히 비는 온다. 비에 젖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있어서 이렇게 거리에 서 있는 건 시간 낭비다.

하지만 몰려오는 축축한 추위와 습기에 젖어버린 소녀의 얼굴이, 

약간의 체온으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는 자그마하게 떨고 있는 몸이,

마치 자석처럼 끌어당기듯, 그 모습이 계속 밟혀서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아.”


…버려진 새끼고양이들을 동정하고 집으로 데려와서 돌보고 싶은 마음에는, 생명에 대한 책임과 그걸 기를 공간을 만드는 등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건 충분히 고민하고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멈추어서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에 가만히 서 있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는 나로서도, 어째서인지 그걸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어도, 몸은 부정하고 있다. 소녀의 그 표정과 몸짓은 그 어떤 사람보다 조용했지만,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 도움을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가출한 것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아했다. 기다리면 알아서 부모가 찾아올 거라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게 말이 안 되지.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그녀을 향해 걸어갔다.

"저기… 얘."

"?"

다시 돌아온 나를 보고 뭐지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소녀. 나는 살짝 용기를 내기 위해 일부러 헛기침을 내면서 입을 열었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는, 놀란 듯한 표정이 되더니, 이어 나에게 눈웃음을 보여온다.

「정말로, 따라가도 되요?」

"…그래. 이대로 그냥 두고가는 것도 뭐 해서. 너 어차피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잖아. 괜한 자존심 지키려고 이러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이거든."

「자존심 아닌데요? 아저씨가 괜한 오지랖 부리는 거 아니에요?」

"…됐고, 맘 바뀌기 전에 따라와. 하루 밤 정도는 재워줄 수 있으니까."

그녀는 이미 따라갈 기세로 골판지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앞머리를 가볍게 쥐어뜯으며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맛있어?"

가까운 분식집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치즈라면과 참치김밥이 먹고싶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바로 음식을 주문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옷이 몽땅 젖었는데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있는 걸 보면 멘탈이 보통이 아닌가 보다. 이미 비에 젖어서 몸이 훤하게 들어난 그녀는 주위 시선 따윈 아랑곧않고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맛본다.

「배고플 때 먹으니까 맛있네요. 역시 이렇게 추운 날에는 국물이 딱이죠!」

"알았으니까 천천히 먹어. 체할라."

나는 물을 떠다가 그녀에게 주었다. 고맙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소녀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얼마나 밖에 가출하고 있던 거야? 너."

「3일. 이요.」

"3일?! 이 날씨에 3일 동안 밖에 있었다고?"

이런 장마철에 용캐 3일 동안이나 있었다.

「그래도 간간히 지나가시던 분들이 음식이랑 물 같은거 나눠주셔서 버틸 만 했어요.」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가출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정말 한 두 번이 아닌 건가?

「이상한 아저씨들이 마구 왔어요.」

그거야 그렇겠지. 이 마을, 전체적으로 퇴폐적인 분위기가 강하니까. 모텔 등이 반짝이는 이 마을에서 용캐도 험한 일을 안 당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하루 밤만 자게 해 달라고 했어요.」

소녀는 노트를 가지고 글자를 적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필담?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그녀를 쭉 보아왔지만, 한 번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청각에 문제가 있는 아이인가 생각했지만, 내 말에 일일이 반응하며 대답을 하는 걸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너, 혹시 말을 안 하는 이유라도 있니?"

단순한 질문에 불과했지만, 소녀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본 것 같은 느낌이 쎄하게 들었다. 그녀는 펜을 들어 노트에다 끄적인다.

「독순술이에요.」

"뭐? 저, 정말로?"

독순술이라면, 입술 모양으로 상대가 말하는 걸 알아맞추는 거 아닌가. 인터넷 상에서나 들어본 걸 들어보게 될 줄이야. 신기한 표정으로 내가 바라보자, 그녀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불쾌하네요.」

"미, 미안해."

소녀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저 너머로 돌려버린다. 뭐야, 삐진 건가? 묘하게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고마워요.」

"···."

맹랑한 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그런 행동이 그 나이 때 애들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김밥 두 줄을 먹어치우고 라면 국물까지 호로록 마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요.」

"어, 그래."


나와 그녀는 집으로 걸어갔다. 훤히 드러난 옷을 그냥 놔두기도 뭐해서,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덕분에 추워서 몸이 부르르 떨린다. 몸을 떨고 있는 와중에 그녀는 노트에다 계속 무언가를 끄적였다. 힐끔 보려고 하자 그녀가 불쾌하다는 눈초리를 하며 노트를 가린다.

"…알았어, 미안해. 프라이버시, 존중할게."

내 말에 그녀는 노트에게 글을 적고는 한 장을 찢으며 말했다.

「쓸데 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도와준다고 해서 따라가는 것 뿐이니까요. 변태 같은 생각 했다간 곧바로 신고할 테니까요.」

거참, 까탈스럽기는. 도와주는 건 난데 왜 당당한 건 그 쪽이냐고.

"경찰은 안 간다면서? 집에도 안 갈거고."

「아저씨가 절 집에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얘 설마 날 진짜 호구로 보고 있는 건가 생각했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괜한 짓을 했다가 손해를 보는 건 나였다. 이 여자애가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나는 잡혀가서 전자발찌를 찰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서, 일단 내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는 했지만, 역시 바깥의 눈치가 너무 보인다. 딸이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나마 경찰이 물어보면 사촌 여동생 정도라고 우기면··· 아니지, 아니지. 어느 쪽이나 끔찍한 건 마찬가지다.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갔다가 주민신고 받고 다음 날 아침 1면에 대문짝하게 '아동 성폭행범 박모 군' 하면서 나오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다.

「다리 아파요. 업어주세요. 그리고, 그냥 아저씨 집에 가면 안 돼요? 죽어도 집이랑 경찰서로는 가고 싶지가 않아요.」

"하아, 알겠다 알겠어···"

나는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서, 평범하게 소녀를 안아 등에 업혔다. 의외로 소녀의 몸은 굉장히 가벼웠다. 마치 솜털을 들어올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도 참, 무슨 바람이 들어서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선 거야?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고 약간 후회되기 시작되었다.


장맛비는 여전히 그칠 기세 없이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한다.

XeneSynth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