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끝날것처럼 추웠던 12월의 겨울이 지났고, 새해를 맞았다. 

여전히 날은 쌀쌀했지만 살을 에는 추위는 어느덧 잠잠해졌으며,


다시,

다니엘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 날 이 후 두번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매정하게 헤어졌던 우리었지만 결국 이주일도 못 가 다시 다니엘은 울며불며 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없이는 못 살겠다고. 형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차마 그때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솔직하게 내뱉으며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주일동안 그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고 홀쭉 살이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결국 성우는 다니엘을 다시 끌어 안았고 다니엘은 성우에게 입맞추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잤다.


헤어진 후 다시 만나게 되어 시작한 섹스는 유독 격렬했다. 이주동안 못보았던 한을 풀듯 그는 성우를 너무나 정성스럽게 애무했고 성우 역시 그런 그의 몸을 각인하듯 새겨넣었다. 다툰 뒤의 섹스라 왠지 모르게 더 달뜨고 흥분되었다. 한참의 정사가 끝나고 그는 정성들여 성우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었고 입맞췄다. 그리고 미안하다 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그는 자꾸 미안하다고 읊조렸고, 성우 역시 그가 자기에게 무엇을 미안해야하는지 몰랐지만 괜찮다며 끌어안았다.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다시 다니엘의 집에서 몸을 섞었고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듯 싶었다. 그는 여느때보다 더 성우에게 다정히 대했고 성우 역시 더 이상 다니엘에게 까탈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성우가 본격적인 영화촬영을 시작하며 다니엘의 불편한 기색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성우가  그의 몸에 꼭 맞는 회색 정장을 빼어입고 첫 촬영을 하러 나가기 직전, 다니엘이 성우를 불러 멈춰세웠다. 


"촬영가나."

"응"

"근데 왜그렇게 멋부리고 가는데."

"촬영전에 고사 지내야 해가주구.."

".........."


말은 안했지만 성우는 다니엘의 눈빛에서 질투어린 분노를 엿보았다. 틀림없이 그는 아직도 그 게이감독을 신경쓰고 있었고 그 분노를 꾹꾹 눌러담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던 것이었다. 성우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걱정마. 니가 우려하는 그런 일, 안일어나."

"...형이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걸 꼭 확신해야 알아? 내가 그런일 없도록 만들면 되는거잖아."


다니엘은 한참 성우를 노려보더니 옆에 있는 외투를 챙겨 입기 시작하며 말했다. 


"....같이가자. 촬영장."


성우는 그런 다니엘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미친거 아냐? 니가 같이 왜가?!"

"같이 가는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싫어! 내가 매니저도 있는데 너랑 왜 가!"


성우라고 모르는 법이 없었다. 지금 다니엘이 같이 가자고 한 것은 단순히 자기를 바래다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독을 을러대기 위한 것임을. 문득 사귀기 전 음악방송길에서 성우의 남팬을 경계하던 다니엘이 떠올라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나중에 사귀고 난 후에 알았지만, 다니엘은 그 남팬이 다시는 성우에게 들러붙게 하지 않기 위해 그 날 그 남팬을 붙잡고 다신 오지 말라며 조용히 협박했었더란다. 

한창 실갱이를 하던 둘은 결국 성우가 다니엘을 성내어 밀치며 종결됐다. 


"왜 이렇게 자꾸 집착이야!!!!!"  

".........."


다니엘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봤고 성우 역시 그런 다니엘을 식식대며 노려봤다. 그리고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다시,

헤어졌다.


그러나 이번엔 성우가 마음이 약했다. 일주일 뒤, 다시 성우는 다니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내가 밀쳐서 미안했다고. 아무리 화나고 흥분했어도 너의 몸에 손대는게 아니었다고. 그렇게 성우는 다니엘에게 용서를 빌었고 다니엘은 흔치않은 성우의 사과를 묵묵히 받아주었다. 다시 다니엘의 집에 갔다. 그리고 그의 집에 있는 함께 마련한 살림들을 보며 헤어지기엔 저 물건들이 아깝다고도 생각했다. 한동안 어색했지만 다니엘은 다시 성우에게 가만히 입맞췄고, 성우는 미안한듯 다니엘의 몸을 구석구석 애무했다. 그 날 성우는 다니엘에게 자신의 몸에 들어오라 말했다. 먼저 허락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니엘은 처음엔 놀란듯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이내 이성을 잃고 미친듯이 성우의 몸을 헤집었다. 생살을 찢는듯한 아픔이었지만 성우는 미안했기에 아프단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신의 몸으로 만족하고 기뻐했으면 그걸로 된것이었다. 마지막에 사정하며 다니엘은 성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했다. 진짜 많이 사랑한다고 했다. 성우는 그 고백을 들으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사랑.사랑. 사랑이란 뭘까.  

결국 둘은 그 날도 녹초가 된 채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침대에는 가쁜 숨만이 떠돌아다녔다. 고요했다. 


카톡-


그리고 그 정적을 깬건 다니엘의 카톡소리였다. 다니엘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둠 속에 다니엘의 얼굴이 핸드폰 화면 불빛에 파랗게 번졌다. 그는 문자를 읽더니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이내 문자와 성우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가며 보기 시작했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엄마 우리 집에 와도 괜찮냐는데..반찬 주러.."

"........."


한참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던 성우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욱신욱신 쑤셨지만 더 이상 다니엘과 나란히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엄마는 다니엘을 너무나 사랑했고, 다니엘 역시 엄마를 죽을만큼 사랑했다. 

그러나 성우는 그의 엄마만큼 다니엘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 다니엘 역시 그럴것이다.


성우는 아무말도 않고 조용히 침대에 널부러진 옷을 입고 밖을 나섰다. 뒤에서 다니엘이 붙잡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쾅-!!!!!!!


있는 힘껏 세게 현관문을 닫았다. 귀를 찢는 굉음이었다. 저 현관문은 올해 몇번이나 거칠게 문이 닫혔던가. 

그 횟수만큼 우리의 마음도 닫혔고, 우리의 끝도 더욱 선연해졌다. 

몇번이나 깨어진 유리잔을 붙이려 했지만 결국 그것만큼 바보같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감쪽같이 붙여도 그것은 결국 붙여진 틈으로 물이 새어버릴것이기에. 손을 베어가면서까지 붙지않는 유리잔의 조각을 짜맞출 바에는 차라리 미련없이 버리는 편이 나았다. 


성우는 외투의 지퍼를 올려 목끝까지 덮었다. 아직 혹독한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밖을 나가보니 세상은 하얗게 눈이 덮여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겨울이었다. 잠시 걷다보니 운동화 바닥에 눈이 지저분하게 엉켜있었다. 눈은 멀리서 봤을때 숨막히도록 아름다웠지만 가까이서 보니 사람들의 발에 채여 어둑하게 번져가고 있는 상태였다. 더러웠고 질척했다. 


성우는 운동화 바닥에 달라붙은 눈을 툭툭 털어내며, 문득, 이제 정말 모든 것을 떨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겨울이 아름다울때, 아직까지 눈이 하얄때, 아직까지 그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을때,

이 질척하게 이어온 관계의 정리를 끝내야했다. 

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였고, 배려였으며, 마지막 연모의 마음이었다.



몇일 뒤 다니엘은 다시 성우에게 연락했다. 몇번이나 다시 지속된 만남인지 모르겠지만, 성우는 응했다. 다시 성우의 차안이었다. 다니엘의 맨션 주차장에서 다니엘을 기다리며 숨막힐것 같은 그 날이 떠올랐다. 사력을 다해 헤어짐을 고했지만, 결국 몇번이나 다시 만나버렸고, 몸을 섞었고, 사랑을 속삭였다. 과연 대체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사귀는 연인과 헤어진 연인사이. 누군가 우리 관계를 묻는다면 저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바닥에 내려앉은 눈만큼이나 불완전한 관계였다. 얼마든지 사라지고 얼마든지 더러워질 수 있는, 그런 눈이었다. 우리는. 


잠시뒤 다니엘이 그날처럼 차문을 열고 성우 옆에 앉았다. 두터운 회색 목폴라 니트에 검은색 모직 코트를 걸친 그였다. 그 날은 모자도, 마스크도 하고 나오지 않았다. 사실 먼저 만나자 했지만, 그라고 해서 성우에게 굳이 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마 성우가 막연히 보고싶었을 것이다. 한참의 침묵 뒤에 다니엘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내일부터 일본 콘서트 돔투어간다."

"......"

"이번엔 좀 오래 다녀올것 같다. 한 3주?"

"......"

"..그래서 얼굴 보려고 가려고.."


여전히 바쁘고 유명한 그였다. 다시금 솟아오르는 박탈감이 성우의 마음을 적셨다. 얼굴을 보려 만났다는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자신은 한낱 영화촬영 한편에 이렇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는데, 그는 그 어렵다는 일본 돔투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워너원 활동 시절때 그토록 많았던 팬들은 어느새 몇몇 코어팬만이 남아 성우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다니엘은 한국을 넘어 미국, 아시아까지 그의 팬들이 대거 생겨나 버렸다. 못난 자존심이 다시 뿔을 세웠다.


아무말 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는 성우를 다니엘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성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니엘 역시 충분히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위로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쳤다. 우울에 빠져 있는 그를 또 달래주기에 지쳤고, 자신의 성과를 일일이 숨기는 것도 지쳤다. 


카톡-


정적을 뚫고 다니엘의 카톡이 왔다. 다니엘의 핸드폰은 마침 성우와 가까이 있었고 성우는 다니엘의 핸드폰을 집어 그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 순간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3년전 다니엘과 스캔들이 났던 그 누나였다. 순간 성우의 심장이 싸하게 굳었다. 


"............너 이누나랑 아직도 연락해?"

"...아. 폰 도. 뭘 남의 문자를 보고 그러노."


다니엘은 다급하게 성우가 쥐고 있는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당황해하는 다니엘의 얼굴을 본 성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직도 만나?"

"만나진 않고 연락만 하는거다. 새해복 많이 받으란 그런 문자겠제."

"........"


성우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3년전에 끝난 줄 알았던 인연을 아직까지 놓지 않고 있는 다니엘이 원망스러웠고 그런 다니엘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제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역시, 다니엘은 여자에게로 돌아갈 모든 채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어짜피 여자에게로 돌아갈 사람이었다. 결국, 종래에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할 사람이었다. 

사실 모든 답은 다 진작에 나와있었다. 오직 성우만이 그 답을 외면하고 다니엘의 뒤에 남아 전전긍긍 갈피를 못찾고 있었던 것이다. 제 자신이 안타깝고 한심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걸까, 누가 문제인걸까 


스스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원래 모든 것이 그럴 뿐이었다. 

해가 뜨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울고, 꽃이 피면 지고, 봄으로 시작해 겨울로 끝나는것처럼, 

모든 것엔 시작엔 끝이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성우는 입술을 깨물고 스스로에게,


그렇다면 이건 사랑일까.


다시 되물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 좋아했기에 함께 있고 싶었다.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었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영원에 대한 집착은 괴로움을 만들었고 고통을 만들었다. 




역시, 

모든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오직 그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자신을 응원하던 팬들 역시 변했고, 다니엘과 자신의 위치 역시 변했다.

불같은 사랑을 읊조리던 다니엘도 변했고, 영원함을 맹세하던 성우도 변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차례였다.

역시 모든건 시작과 끝이 있고 영원한건 없었다. 


성우는 한숨쉬듯 내뱉었다. 작년의 겨울처럼 입안이 괴롭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히 숨을 내뱉듯 툭 말했다.







"역시..이제 그만하자 우리."






정말로 헤어졌다.

다니엘과.






***





그 이후로 다니엘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성우 역시 연락하지 않았다. 

우연히 길에서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미 다니엘은 3주간의 일본돔투어 중이었다.

그 사이 성우는 다니엘의 집에서 제 짐을 빼었다. 정들었던 모든 것과의 이별이었다. 다니엘과 처음으로 뒹굴었던 싸구려 회색 이케아 쇼파,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침대, 함께 밥을 먹었던 식탁..그리고 마침내 다니엘이 소중하게 꽂아놓은 도종환의 시집에 눈이 갔다. 시집을 펼치니 재작년에 자신이 주었던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시간에 박제된듯 그대로 남겨져 있는 단풍잎을 보며 성우는 눈물을 툭 떨구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자신과 다니엘만 변한것 같았다. 영원한건 없다지만 시집에 꽂힌 단풍잎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것 같았다. 다시 그와 잘해볼수 없을까, 단풍을 주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순 없을까, 다시 영원을 맹세할순 없을까. 한참을 울며 책장을 넘기던 성우의 눈에 도종환의 또다른 시가 눈에 들어왔다.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돌아가는 꽃, 도종환




성우는 시에 고개를 파묻고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그렇다. 다니엘로 인하여 온 것들은 다니엘로 인하여 돌아갔고, 나의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뿐인 것들이었다.

워너원도 잠시였고 다니엘도 순간이었다. 꽃은 피면 지고, 아침 햇살로 아름다운 것들은 저녁 햇살에 그늘지기 마련이었다.


모든건 순간이었고

모든건 잠시였다.


이렇게 잠시일줄 알았다면, 이렇게 순간일줄 알았더라면, 더 그에게 일찍 내마음을 전할껄. 더 일찍 그와 사랑할껄. 못난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더 먼저 미안하다 말할껄. 고맙다 말할껄. 사랑한다 말할껄. 

모든 순간들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모든것이 변하는 세상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




3월이 되고, 성우는 모든걸 다 정리했다.

다니엘의 집에 있는 자신의 짐도 정리했고 모든걸 집어삼킬 듯한 슬프고 격정적인 감정도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향한 연모의 마음도 정리했다. 과연 정리가 된걸까 싶었지만 더 이상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으니 이 정도면 괜찮아진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 그래야 했다.   

아무도 없는 뉴이스트 숙소에서 민현을 만났다. 민현에게 처음 시작을 고백했던 만큼 마지막 순간 역시 전해야 할것 같았다. 민현의 숙소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민현이 바로 성우를 현관에서 맞이했다. 민현은 그새 더 살이 빠져버린 성우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별 발 없이 숙소의 식탁으로 안내했다. 커피라도 줄까. 아니. 그럼 물은. 괜찮아. 바싹 메마른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하는 성우를 바라보며 민현은 걱정된다는 듯 성우의 앞에 앉았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민현은 아무것도 채근하지 않고 묵묵히 성우를 기다려주었다. 사실 민현 역시 모든 것은 대략 눈치채고 있었을것이리라. 눈보라가 치던 그 날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섪게 울던 성우를 민현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이유조차 모르겠다며 엉엉 울던 그날의 성우는 분명 모든 것을 마음에서 정리한 상태였다. 

 

한참동안 민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던 성우는 그제서야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  결국 헤어졌어."



처음으로 타인에게 '헤어졌다'고 말하니 정말로 완벽하게 다니엘과 이별한것 같아 성우는 다시 마음 한켠이 뻐근해졌다. 아무리 모든 마음의 정리를 마친 상태였지만 그것을 입으로 내뱉는 순간의 느낌은 또 다른 법이었다. 

민현은 성우의 말에 놀라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그저 물끄러미 성우의 마른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민현의 시선이 무거워 더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한참의 침묵 뒤에 민현 역시 고개를 떨구며 나즈막히 말했다. 




"해피엔딩이길 바랬는데 성우야."

"......."

"다니엘과 계속 행복했으면 했는데..."




성우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현아."

"응."




민현은 고개를 들어 성우를 보았다. 성우는 여전히 민현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지만 내리깐 그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성우는 민현을 부른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그 말들을 그 작고 얄팍한 입술에 담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잠시의 침묵 뒤 마침내 성우는 생각을 정리한듯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있잖아. 나는 요 몇달간 해피엔딩이 뭘까 고민해봤어."

".........."





민현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성우는 고개를 들어 민현의 눈을 바라본 뒤 다시 나즈막히 입을 떼었다. 




"우리가 모든걸 포기하고 캘리포니아에 가가지구 합법적인 동성결혼을 하고, 서로가 백발이 될때까지, 늙어죽을때까지 옆에서 지켜보구.. 그런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

"그리고 우리는 과연 정말, 진짜, 리얼.. 그런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모든 것이 메마른 건조한 눈동자였다. 종잇장처럼 갸녀렸지만 서릿발처럼 단호한 성우 앞에서 민현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2년동안 치열하게 고뇌해온 고통의 흔적 속에서 타자인 민현이 그의 엔딩을 논할 자격은 없었다.감히 그의 괴로움을 짐작할수도 없었고 감히 그에게 위로의 말도 건넬수 없었다. 모든 것은 온연히 그가 안고 가야하는 고통이었고 그의 손에서 종결해야 하는 서사였다. 

고개를 다시 푹 떨구는 민현을 바라보며 성우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지금까지 2년간 함께 하면서 행복했지만, 많이 괴로웠고 아팠어."

"..........."





성우는 눈을 꾸욱 눌러감았다.

행복했다. 

행복했다.

분명 다니엘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노을에 붉게 달아오른 그가 진심을 다해 고백해왔을때,

그에게 떨리는 첫 문자를 받았을때,

아파트 뒷화단에서 수줍은 첫 키스를 했을때,

가구 하나 들어오지 않은 텅 빈 집에서 밤새 껴안고 사랑을 속삭였을때,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그러나 괴로웠다.

행복한만큼 괴로웠다.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웠고 사랑하기 때문에 집착했다.

그를 너무 사랑했기에 그의 어미가 아파하는건 보고싶지 않았고

그를 너무 사랑했기에 그가 다른 여자와 연락하는걸 용납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 역시 나를 사랑할거라 생각했기에 괴로웠다. 

나를 사랑함에도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고  

나를 사랑함에도 다른사람을 질투하는 것이 괴로웠다.

모든 순간이 괴로웠다. 

함께 있으면 더욱 행복해져야 하는데, 함께 있을수록 괴로운 시간들이 커져만 갔다.


그 역시 그랬을 것이다.





성우는 간신히 마지막 진심을 민현에게 읊조렸다. 




"나는, 다니엘이 행복해졌으면 해."

"......."




진심이었다.

헤어진 연인의 알량한 자존심이 아닌,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바랬다. 

태양처럼 선량하게 빛나는 그는 행복해질 권리와 자격이 있었다.


한참의 침묵 뒤에 성우는 다시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행복해졌으면 해."

"......."




그것 역시 진심이었다. 


모든 고통을 헤아려 끝을 내린 지점에는 바로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다니엘을 사랑해도 그 종착지점에는 다니엘보다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는 옹성우가 있었다.

다니엘이 상처받지 않길 바랬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아픔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성우는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랬다.

어쩌면 그것이 다니엘과 헤어진 진짜 이유였을런지도 모른다.


성우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민현을 향해 작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나즈막히 내뱉었다.










"...다니엘과 내가 행복해지는거.. 그게 진짜 해피엔딩이야."











가벼운 미소였지만 그 속에는 수개월간 담아왔던 그의 무거운 진심이 묻어있었다.

  

민현은 순간 멍해졌다.

그렇다. 

무엇이든 그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었다. 동화속 해피엔딩은 없었다. 입맞추며 결혼하는 엔딩은 그 당시의 행복한 순간일뿐이었다. 어쩌면 진정한 해피엔딩이란 주인공 스스로만이 알수 있는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우는 지금 스스로의 해피엔딩을 찾아 첫발을 내딛었다. 


민현은 그제서야 작게 웃었다. 그리고 다니엘과 성우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민현의 웃음을 본 성우는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식탁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 뉴욕에 간다."

"아 진짜? 왜?"

"그냥. '해' 보러"

"뭐?"


알수 없다는 표정의 민현을 남겨두고 성우는 민현의 집을 나섰다. 마음씨 고운 민현은 뒤따라오며 계속 성우가 걱정되는지 엘레베이터앞까지 데려다주었고 집밖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를 애써 말리고 작별의 인사를 했다. 민현은 성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해 라고 이야기했고 성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민현을 향해 옅게 웃어보였다.


엘레베이터문이 열리고 민현의 숙소밖을 나서며 성우는 뺨을 감싸오는 따뜻한 온기에 눈을 감았다. 3월이 되자 어느덧 겨울은 성큼 물러났고 세상은 다시 포근해졌다. 성우는 천천히 민현의 숙소아파트 앞에 있는 화단을 거닐었다. 아파트를 나오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얇아졌고 길거리에는 다시 아이들과 연인들의 풋풋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나목들은 어느새 연둣빛의 싱그러운 봄기운을 품으며 푸르게 반짝였고 화단 곳곳에는 노란 개나리들이 만개해 봄바람에 흔들거렸다. 분홍색 꽃무늬를 입은 꼬마 여자아이가 쪼그려 앉아 화단에 낮게 핀 민들레꽃을 꺾으려 하자 그의 어머니는 다정히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엄마를 보았고 다시 꽃나무가 만개한 화단 사이를 평화롭게 거닐었다. 화단 한구석 벤치에는 하늘하늘한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꽃다운 아가씨가 이름모를 하얀 풀꽃으로 꽃반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고 그의 남자친구는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성우는 슬프게 웃었다.

나의 모든 일상은 부서져버렸는데 여전히 일상은 너무나도 평화로웠고,

나의 모든 세상은 무너져내렸는데 여전히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성우는 눈을 감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꺼야.

 나도 다시 평화로워질꺼야. 

나도 다시 아무렇지 않아질꺼야. 








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꽃향기가 성우의 코에 닿았다.   










복숭아꽃향이었다.












-그 향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쓰는 향이라 카더라












어디선가 날아든 그 첫말이 쨍하게 귀에 박혔다. 

성우는 귀를 막았지만 다음말이 가만히 성우의 귓가를 울렸다.




-부담스러워하지마라. 대충고른거다.




성우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 다음말도, 다음말도 성우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런가. 복숭아꽃이랬으니 벚꽃향이 날수도..

-여름에도 뿌리고 다니고 가을에도 뿌리고 다니고 겨울에도 뿌리고 다녀라.





그리고 그 수줍게 웃는 얼굴까지 퍼뜩 떠올랐고, 





-다 쓰면 또 사줄게

-진짜 이 향 좋다. 왠지 벚꽃에서 향이 난다면 이런 향일것 같다.






마침내 그 얼굴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던 자신의 지난 얼굴까지 떠올라버렸다. 








- 내 향이 너에게 물들었나봐. 아까 첫 단풍잎 물든것처럼











결국 성우는 길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모든게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괜찮아진건 아무것도 없었다. 


화단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성우를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상관없었다.

너만이 지금 이 순간 엉망이 된 나를 보지 않으면 되었다.

너만이 나를 보지 않으면 그걸로 된것이다.



어디선가 후각은 뇌와 바로 연결된다는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도 냄새는 바로 기억신경과 직결되기에 많은 연인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기 위해 향수를 선물하는 것이고 자신의 체취를 연인에게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나에게 이 향을 선물해주면 안되었다.

나는 꽃향기를 맡을때마다 너를 떠올릴 것이고, 

봄이 올때마다 너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에.

너는 내 옆에 없지만 네가 남긴 향은 해마다 돌아올 것이기에.



너는 이 향을 선물하면 절대 안되었다.



그 날 결국 성우는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다니엘의 선물을 버렸다. 

그리고 그를 완벽히 마음속에서 지우기로 결심했다.





***





3년만에 다시 찾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그곳은 여전했다. 여전히 사람들로 벅적였고, 여전히 뉴욕의 장대한 풍경을 광활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이 곳은 그대로인데 우리만 변했구나. 어쩐지 마음 한켠이 저며왔다. 성우는 3년전 그날 자신과 다니엘이 껴안았던 그 기둥뒤로 향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외진 그 기둥 뒤에서 사랑을 고백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 날 다니엘은 함께 태양으로 같이 가자고 속삭였다. 자신과 끝까지 함께 가보자고 성우의 손을 잡았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불탈걸 알았고, 눈이 멀걸 알았고, 녹아내릴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 순간이 소중했기에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결국 함께 날아오르기엔 벅찼다. 우리는 모든게 맞지 않았고, 서로가 달랐다. 날아오르기도 전에 아마 싸우다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태양을 못본건가 우리는.


"아. 생각하지 말아야지."


성우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두번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의 얼굴이었다. 생각만으로 힘들고 아팠다. 그러나 아무리 지워보려 노력할수록 그의 얼굴은 선연하게 떠올랐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그 생각조차 집착이었다. 집착은 괴로움을 불러왔고 또다른 아픔을 불러왔다. 성우는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Wow!"


순간 사람들의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성우는 고개를 들어 가만히 빌딩숲뒤로 저물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지평선 저 너머로 추락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지막 광휘를 내뿜으며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뉴욕의 노을이었다. 다니엘도 봤을까 저 풍경을.


문득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그 황금빛의 반짝이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다니엘도 그 순간 같은 노을아래 있었다. 


"함께 봤구나.."


성우는 중얼거렸다. 분명 다니엘과 나는 함께 태양을 보았다. 그 순간 우리는 함께였고 같은 시간속에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태양을 보고 내려온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태양은 용암처럼 뜨거웠고, 빙하처럼 차가웠으며, 텅 빈 사막처럼 고독했다. 그렇다. 우리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함께 모든 것을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고 찬란했으며, 죽을만큼 행복하고 괴로웠다. 

성우는 문득 옛 워너원 시절을 떠올렸다. 짧은 2년의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별처럼 반짝였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지지만, 그 순간 순간을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문득 다니엘이 이곳에서 한말이 떠올랐다.


-잘들어라. 모든건 끝이 있고 영원한건 없다. 그건 형말이 맞다. 


그때 다니엘은 성우를 지긋이 바라보며 다음말을 읊조렸다. 

- 근데...중요한건 현재고 순간이다. 우리는 '지금'을 살고있다 아이가.


그렇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모든 것은 사라지며 모든 것은 변한다. 생은 유한하고 우리는 순간과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다. 너와나의 마음도 결국 변했고, 너는 사라졌고, 우리의 사랑도 결국 영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니 말대로 나는 여전히 현재와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너는 없어도 지금 나는 이 순간 숨쉬고 있으며 이 찰나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순간..현재.."






성우는 다니엘이 한말을 그대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걸까. 현재 내 모습은 어떤걸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싶은걸까,


성우는 눈을 감고 가만히 마음안을 관조해보았다.


그 안에는 다니엘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뒤엉켜있었으며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사랑과 아쉬움이 자신을 끝끝내 붙들고 있었다. 다니엘이 보고 싶었고 그리웠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제 자신이 깃들어 있었다.


성우는 가만히 눈을 떠 읇조렸다. 





"그렇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구나.

여전히 보고싶어하구..그리워하는구나.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는 뭘 원하는걸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에게 다시 연락해보고싶니.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그리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다시 상처받기 싫었고 다시 아파하기 싫었고 다시 그를 괴롭히고 싶지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가만히 슬퍼하며 그를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성우가 가장 원하는 바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니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졌다. 


성우는 우두커니 서서 낮게 사그라드는 해를 바라봤다. 그리고 도종환의 시를 떠올렸다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 언제나 잠시 /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그렇다. 어짜피 잠시뿐인 인생에서 더 사랑한다 말할껄 미안하다 말할껄 후회는 늦은것이라는걸 성우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뭘해야 가장 후회하지 않을까...."





성우는 생각했다. 

다니엘은 그때 저에게로 달려와 제 마음을 솔직히 부딪혀오며 자신의 순간에 최선을다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다니엘이 했던것처럼 이 찰나에 드는 감정과 생각들을 최선을 다해 표현해야했다. 울고싶으면 울어야했고 웃고싶으면 웃어야했으며 화내고싶으면 화내야했다. 그것이 

지금의 생을 아낌없이 꽃피워내는 길이었고, 성우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법이었다. 


성우는 제 마음을 가만히 바라봤다. 더이상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가 보고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으려 하지 않았다. 




"끅..끅.."




성우는 소리내어 울었다. 그렇게 눈물 지은 뒤에 성우는 그와 재밌는 추억이 생각나면 빙그레 웃었고 그와 다툰 추억이 생각나면 주먹을 그러쥐었다. 성우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해 그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를 생각하니 오히려 서서히 그가 희미해졌다. 





"역시..모든건 사라지고 모든건 변하는구나.." 





성우는 그제야 가슴을 찢는 이 고통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고 생살을 저며내는 이 아픈 마음 역시 변할것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괴로움과 슬픔 역시 영원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 역시 모두 순간과 잠시일뿐이다. 






그 순간 성우는 마음이 편해졌다.





모든 집착과 상념이 끊어졌고,

이내 아득한 평화가 찾아왔다. 





더 이상 다니엘이 생각나지 않았다.





마침내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







 

빌딩 뒤로 저문 해를 본 성우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내려왔다. 해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맨하탄 시내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곧 내려앉을 어둠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성우는 언제 다시 또 올지 모를 맨하탄의 풍경을 더 눈에 담아가고싶었다. 문득 강건너편에서 보는 맨하탄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늘 가까이서만 보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멀리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성우는 발걸음을 트램쪽으로 틀었다. 뉴욕의 공중트램을 타면 허드슨강 건너편에 있는 루스벨트 아일랜드 지역에서 맨하튼을 한눈에 볼수 있었다. 메트로카드를 찍고 빨간색 트램에 올라탔다. 잠시뒤 트램은 두둥실 뜨더니 뉴욕의 공중을 헤집으며천천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뉴욕의 시내는 장관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맨하탄 건물들은 마치 작은 성냥갑과 같았다. 성우는 케이블카를 처음타본 어린아이처럼 트램 끄트머리에서 맨하탄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작게 감탄을 내질렀다. 다시 기분이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아까까지 울고 화냈던 모습과는 반대로 어느새 뉴욕의 풍경에 즐거워하고 신기해하는 제모습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10분쯤 앞으로 나아가던 트램은 이윽고 속력을 천천히 낮추더니 낮게 하강했다. 퇴근하는 뉴요커들에휩쓸려 성우 역시 트램에서 내려 허드슨강쪽으로 향했다.

확실히 맨하탄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맨하탄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맨하탄 시내 안에 있을때는 그 높은빌딩들이 매우 웅장하게 다가왔다면, 강건너편에서 멀리 그 모습을 보니 그보다 더 서정적일수 없었다. 강에 반사된 건물들의 풍경은 숨막히게 반짝였고 그 사이로 해의 붉은 여운이 젖어들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성우는 천천히 수변을 거닐었다. 오른편에는 허드슨강을 사이에 둔 맨하튼 시내가 한눈에 펼쳐졌고 왼편에는 분홍빛 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연인들은 삼삼오오 초저녁의 벚꽃풍경을 즐기며 데이트를 하고 있었고 몇몇은 강을 따라 조깅을 하며 완연한 봄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얕은 바람이 불때마다 살랑살랑 벚꽃잎이 흩날려 잔잔한 수면에 몸을 뉘였다. 붉게 물든 강가에 분홍빛 벚꽃잎이 젖을때마다 물결이 살며시 일렁였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성우는 그 광경을 보며 문득 첫녹화를 하러 파주 스튜디오로 향하던 2017년의 버스 안을 떠올렸다. 차창밖으로 흩날리던 벚꽃을 바라보며 몽글몽글 마음이 달아오르던 나날이었다. 읽던 시집을 덮고 한참 그 벚꽃저무는 풍경을 보니 괜히 마음이 서러워지던그였다. 어짜피 시간이 지나면 저물 꽃인데 왜저리 공연히 피어내려 애쓰는걸까. 그때 성우는 공중으로 흩어지는 벚꽃을 보며 봄의 끝을 슬퍼했다. 그리고 어짜피 탈락할수도 있는데 과연 프로듀스 101을 시작하는게 맞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결국 시작과 끝은 없었다. 봄이 되고 겨울이 왔지만 다시 봄이 왔다. 프로듀스 101은 끝났지만, 워너원 활동이 시작되었고, 워너원은 끝났지만, 다니엘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다니엘과 끝이 났지만..  




성우는 핸드폰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지금 이 순간 가장 듣고싶은 노래를 틀었다. 그것은 브루노 마스의 That's what I Like 였다. 성우가 프로듀스 101을 시작했을때 제일 처음 불렀던 노래였다. 




I got a condo in Manhattan
Baby girl what’s happening
You and your ass invited
So go and get to clapping



 

성우는 리듬에 맞춰 고개를 살짝살짝 흔들었다. 분홍빛 벚꽃나무 역시 바람이 불때마다 몸을 작게 흔들며 벚꽃잎을 흩뿌렸다. 뺨에 살짝살짝 벚꽃잎이 닿았다 흘러내렸다. 세상을 감싸는 공기가 포근해져도, 길거리에 봄노래가 울려퍼져도, 우리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때야 우리는 비로소 봄이라 느끼는 것이다. 성우는 봄의 공기를 한껏 들이 마셨다. 


눈을 감았다. 





맨하탄의 봄이었다. 

































누군가 성우의 등을 톡톡 쳤다.

성우는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의 남자였다.

그는 수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Hello, My name is Patrick." 



























봄은 벚꽃을 타고 온다. 









다시,

봄이 왔다. 











-사계(Four Seasons) Fin.-




RPS 기반/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립니다. https://twitter.com/gomchu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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