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센티넬버스 au입니다 예민하신 분은 피해주세요.

센티넬의 센도 나오지 않지만 느릿하게 진행중입니다

속으로 곪아가는 캡틴이랑 기억 조각을 찾는 버키가 나옵니다 취향탈 수 있어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선잠을 자다 깜짝 놀라 일어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았지만, 옛날엔 전쟁터에 내몰려진 처지라 깊은 잠을 자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긴 잠은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티브는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버키.”



몇 번이나 더 불러야 이 이름이 낯설지 않을까.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곤 했다. 누가 누군지. 나는 무엇인지. 어렸을 적에 실컷 고민했을 것이 분명한 의문이 자구 깊은 곳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스티브는 그저 버키랑 대화를 하지 않아서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이쪽이 편했다. 감정은 한낮 꽃잎 같아서 바람이 불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물론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꽃은 시들면 다시 자라난다. 하지만 그런 섭리를 거스르는 쪽은 항상 아슬아슬했다.



“으…….”



고통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던 스티브는 그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버키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버키? 버키? 당장 달려가서 바짝 붙은 채 어깨를 잡았다. 그것도 모자라 겨우 손을 들어 뺨을 만졌다. 거칠거칠하게 말라버린 뺨엔 고통의 흔적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또 손끝에서 피 냄새가 났다. 분명 몇 번이나 씻기고 약을 발랐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

“버키? 왜 그래.”

“난…….”



입술 끝에 달라붙은 단어는 그대로 말라갔다. 버석버석하게 마른 단어는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스티브는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불쌍한 친구는 과거의 자신을 찾고 있었다. 포로로 끌려간 후 캡틴 아메리카가 된 스티브를 처음 만났을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잔뜩 터져서 퉁퉁 부은 입술에서 익숙한 숫자가 들렸다. 스티브는 차마 그 숫자를 들을 수 없었다.



“버키.”

“…….”

“버키. 괜찮아.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

“버키…반즈. 3…2.”

“…….”

“그만. 버키 그만해.”

“…….”



초점 없이 반쯤 감겨있던 눈에 순간 또렷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푸르고 시린 눈은 여전히 스티브를 보면 예쁘게 휘어졌다. 지금 자기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자신의 친구를 찾고 있었다. 스티브. 입술 끝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린다. 말려 올라간 입술 끝에서 퉁퉁 터진 상처를 타고 흐르는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다.



“내 작은 친구가…이렇게 컸나.”

“…….”

“왜 그렇게 됐어?”

“…….”

“응? 스티브. 스팁. 내 친구.”

“…….”



울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 속에서 뭔가 울컥 솟아올랐다. 스티브보다 훨씬 많이 다친 주제에 자기는 돌보지 않고 눈앞에 있는 친구만 걱정한다. 사실 이래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이 녀석은 늘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티브를 먼저 챙기고 나서야 자신을 돌아보았다.



“왜 울어?”

“…….”

“이상하네. 여긴 천국인가.”

“…….”



결국 버키의 가슴에 코를 묻어버린 스티브는 정말 오래간만에 엉엉 울었다. 언제 이렇게 울어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자신에게 매달리자 버키는 약간 버거워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등이라도 토닥여 주려고 팔을 들었는데, 그 부분이 허전했다.



“…….”



아. 잠깐 돌아온 기억이 다시 부서지기 시작했다. 누워서 자신의 팔이 있어야 할 부분을 보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도 머리가 아팠다. 스티브? 스팁. 아니…넌…그러니까. 버키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그 소리에 허겁지겁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버키.”

“아, 스티브 아닌 줄 알았어.”

“…….”

“나…이제 너 알아.”

“…….”

“이제 알아.”



그런데 목소리가 왜 자꾸 갈라지는지. 버키는 이제야 생각난 기억을 다시 놓치기 싫었다. 그래서 잠이 들기 싫은데, 야속한 눈은 자꾸 감기기만 했다. 억지로 무서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완전히 나가버린 눈앞엔 흐린 인영만 보일 뿐이었다. 아까 울고 있었는데. 덜컥 걱정이 들었다.



“…….”

“울지 마.”

“…….”

“내가…눈이 잘 안 보여서. 이상하다. 이제 눈도 망가졌나 봐.”

“…….”



링거가 주렁주렁 달린 팔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스티브의 얼굴을 찾았다. 그런 버키의 손바닥에 스티브가 잠자코 뺨을 가져다 댔다. 손끝으로 얼굴을 더듬듯 쓰다듬어주던 버키는 입술로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들을 수 있었다. 잠깐 정신이 들었던 친구는 다시 먼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는 눈은 새빨갛게 변한 채 물기가 가득했다.


내일이면 괜찮을까. 아니면 며칠 더 있어야 할까. 스티브는 어떤 버키라도 버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긴 여행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이미 궤도를 이탈해버린 우주선은 새로운 항로를 찾아 원래 목표하던 곳으로 가야만 했다.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꼭 우주에서 미아가 된 것 같네. 이제야 자신의 얼굴이 엉망이란 사실을 자각한 스티브는 허겁지겁 수건을 찾았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며 괜히 헛기침한다. 버키가 보이는 바로 옆자리에 침대를 끌어다 놓았다. 그리 편하지 않은 잠자리지만, 전쟁터보다는 훨씬 나았다.



“잘 자. 버키.”

“…….”

“내일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

“옛날 생각이 난다.”



이럴 때마저도 과거를 기억해야 했다. 버키는 항상 아픈 스티브 옆에 붙어 앉아서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그냥 자고 오란 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창문을 다시 닫아주고 베개도 푹신하게 다시 만져주고, 이불도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준 다음 옆에 있는 의자에 냉큼 올라앉았다.



‘이제 가. 나 괜찮아.’

‘자는 거 보고 갈 거야.’

‘내가 애야?’

‘내 친구지.’

‘…….’

‘너 아픈 거 싫단 말이야.’

‘…….’



스티브의 볼이 불퉁하게 부어올랐다. 한 살밖에 안 많은 주제에 어찌나 형 노릇을 하려고 하는지. 스티브는 내내 그것이 불만이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마저 자신이 해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굴었다. 자존심이 빳빳한 스티브는 그런 친구의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약하고 아프므로 괜한 신경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밀어내도 친구는 느물느물 웃으면서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젠 포기할 때도 됐는데, 둘은 죽어라 밀고 당기기만 했다. 친구 중 한 명은 자존심이 셌고, 한 명은 오지랖이 넓었다. 맞는 듯 맞지 않는 둘을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랬었지. 그땐 항상 네가 먼저 잘 자라고 인사를 해줬던 거 같은데.”

“…….”

“그때 일도 기억할 수 있을까?”

“…….”

“많은 걸 바라진 않아. 네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다행이니까.”

“…….”



잘 자. 버키. 똑같은 말을 씹어 삼켰다. 아까 몇 마디 나눈 것도 꼭 꿈같았다. 달콤한 것을 먹으면 그 뒤에 바로 두려움이 따라온다. 세상은 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을 함께 보내주곤 한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불안했다. 눈을 뜨면 버키가 사라질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버키의 살이 닿았다. 그러자 이상할 만큼 마음이 차분해졌다. 완전히 잘려나간 메탈암을 보는 건 아직 마음이 아팠지만, 적어도 잠시 눈을 붙을 정도로 진정이 된 것 같았다. 며칠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순 있지만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돌아누웠다. 낮게 깔리는 익숙한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으니 청각이 예민해졌다. 온갖 기계 소리에 섞인 버키의 숨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솔솔 몰려오던 잠이 모두 달아날 지경이었다. 애써 청각을 무시하자 이번엔 쓸데없이 촉각이 말썽이었다. 버키의 살에 닿았던 손가락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



이럴 땐 이 형질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물론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고마운 녀석이긴 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감각이 날뛰면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자체적으로 가이딩이 가능한 스티브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보통 센티넬은 가이드를 옆에 붙이고 살다시피 했다. 조금이라도 잠이 들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버키가 옆에 있어서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나도 아직 모자라.”



꾹꾹 참으며 눈을 감았다. 불안함이 사라지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렇게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스티브의 몸속에 든 불을 품은 짐승은 새벽이 다 되도록 쿵쿵 뛰었다. 겨우겨우 그 짐승을 잡아넣자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꿈을 꾸지도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진 스티브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그런 스티브를 또렷하게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푸른 눈은 어둠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움직이지도 않고,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꼭 인형 눈 같았다. 그 순간 느리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땐 조금 피곤함이 감돌았다.



“안 돼.”



누구한테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스티브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명이 안 그래도 잔뜩 시달릴 신경 줄을 갉아먹었다. 귓가에 비명이 들릴 때마다 신경이 툭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아득해지면 다른 누군가가 몸을 움직이려 했다.



“…아니야.”



대답할 사람이 없는 혼잣말을 들은 핏빛 이명이 깔깔거리며 비웃었다. 버키는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겨우겨우 귀를 막았다. 피부를 뚫고 들어간 바늘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감각이 곤두서는지 알 수 없었다. 이명이 사라질 때까지 숨도 내쉬지 않고 죽은 듯 누워있었다. 이명에 정신이 팔리면 그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고 만다. 버키는 뇌가 망가진 탓에 자주 기억을 잊어버렸지만, 이것만큼은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더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숨죽인 채 고통스러워하던 버키가 까무룩 기절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울부짖던 이명은 그대로 녹아내려 침대 밑에 고였다. 해가 들면 그대로 말라버릴 녀석은 끝까지 침대 밑에 들러붙어 버키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쩜오 연성 창고 트위터 : @hwanwol_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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