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색 맥문동이 전부 져버릴 가을이 오고, 아카아시 케이지는 창밖에 핀 색색의 작은 꽃을 응시했다. 기다랗게 자라 흔들리던 여름꽃은 모두 어딜 갔는지 그 자리엔 가을의 정취가 대신했다. 맥문동은 고작 몇 달이 지나면 세상이 달라질 것을 알고 피었을까. 교토의 프라이빗 료칸은 두 사람이 시간이 날 때마다 즐겨 찾는 곳이라, 계절의 변화에 따른 차이를 알아보기 쉬웠다. 기억과 달리 바뀌어버린 풍경을 보고 있자 문득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보였다. 키는 그다지 더 커지지 않았지만, 머리는 약간 길어졌고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익숙한 모습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진다. 아카아시는 낯이라도 가리는 아이처럼 의지할 사람을 찾았다. 보쿠토 코타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료칸 부엌을 제집처럼 정리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찬장을 열어 꽤 묵직한 갈색 유리병을 꺼냈다. 비스듬히 그려진 리본에는 불어로 쿠엥트로라고 적혀있었다. 함께 프랑스 여행을 갔을 때, 현지에서 마시고 반해버린 뒤로 늘 찬장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는 술이다. 이번에도 미리 담당자에게 채워두라 일러둔 모양이었다.

 

엥트로는 굳이 말하자면 아카아시의 취향이다. 도리어 보쿠토는 낮은 도수로 다양하게 여러 잔을 마시는 편을 선호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술을 꺼내는 건 다분히 아카아시를 배려한 마리아주였다. 보쿠토는 작은 칵테일 잔에 술을 따랐다. 투명한 술은 황혼색 향이 났다. 두 잔이 채워지자마자 아카아시는 가볍게 컵을 부딪쳤다. 경쾌한 소리가 나고 잔잔하던 수면이 흔들린다. 첫 잔은 스트레이트지. 한 입에 털어넣으려 잔을 들던 참이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아귀에 있던 작은 잔을 가로채 자기가 한 모금 마셨다. 조금 거칠어진 입술 가에 술이 닿아 저 너머로 사라진다. 목이 탄다. 아카아시는 무심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보쿠토는 혀로 입술을 핥곤 방긋 웃었다. 과음은 안 돼, 아카아시. 눈 뜨고 술을 빼앗겼는데도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엇을 마시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갈증이 났다. 하지만 보쿠토는 장난이라도 치듯 등을 돌려 마저 싱크대 앞에 섰다.

 

막 내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돼지고기 덩어리는 얌전히 도마 위에 올라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쿠토는 칼등으로 경쾌하게 고기를 두어 번 두드리고, 두꺼운 무쇠 냄비에 버터를 듬뿍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거품이 생긴 냄비에 고기를 넣고 굴려 가며 익히자 부엌은 금세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찼다. 등만 보는데도 싱글거리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료칸이니 시간 맞춰 오는 만들어진 식사를 즐겨도 될 텐데, 보쿠토는 늘 한 끼 정도는 꼭 자기가 직접 만들곤 했다. 덕분에 담당자는 매번 조리도구를 점검하느라 더 바빠지곤 했지만 그 누구도 보쿠토를 말리지 않았다. 아카아시에게 밥을 먹이는 건 내 즐거움이라며 웃는 저 얼굴에 모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른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술을 홀짝이자 문득 보쿠토가 말했다. 신기하지, 난 우리가 이렇게 같이 술을 마시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어. 그건 아카아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가 보는 미래란 짧고도 얕은 법이라, 하굣길에 떠올릴 법한 막연한 상상은 언제나 휘황찬란해서 일상을 지탱하는 수수한 것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스모스가 그득 핀 하굣길에 서서 두 사람은 자주 미래를 이야기했다. 꿈과 상상이 뒤섞인 대화는 종종 꽃향기를 머금었고 꿀처럼 빈번히 달콤해졌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이 더해진 건 거의 당연한 순서였다. 가련한 우주처럼 오직 코스모스만이 흔들리던 가을날 밤, 시간의 무게를 미처 몰라 감히 영원을 맹세하던 두 사람은 분명 지금의 두 사람이 아니다. 이제 보쿠토는 함부로 전부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고 아카아시는 섣부르게 평생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있을 거라 다짐했지만 보쿠토는 오사카에 갔고 아카아시는 도쿄에 머물러있다. 싸우지 않겠다던 약속은 당장 저번 주만 해도 무색하게 깨졌다.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겠다기엔, 감정은 마치 졸여진 로스트포크 소스처럼 진득하고 깊어진다. 여전한 것이라곤 그저 어떤 미래가 온다 해도 서로의 손을 잡겠단 다짐이었다.

 

인이 된 과거를 돌이켜본다면 분명 미래 역시 지금과 다를 것이다. 사는 곳도, 입는 옷도, 좋아하는 음식도 모두 달라지겠지. 그걸 과연 같은 사람이라고 보아도 될까. 어찌 보면 과거와 현재는 이름만 같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끝없이 반하고야 만다. 매번 달라지는 저 사람에게 새롭게 반해 풋내나는 사랑을 한다. 거반 집착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이렇게 진득하고 질척한 마음을 가지고 풋사랑이라니,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방도가 없었다. 그저 영원히 서툴 수밖에. 어차피 늘 서로의 앞에만 서면 소년처럼 엉망진창이 되곤 했으니 이제 와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카아시가 약처럼 쓴 술을 삼키는 동안에도 보쿠토는 여전히 요리에 전념했다. 냄비에 와인 식초를 붓고 통후추와 각종 향신료를 으깨어 넣는다. 소스 속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깃덩어리를 살살 굴려 익히는 저 등을 누가 상상이라도 해봤을까. 요리는 능숙해져도 사랑만은 늘 익숙해지지 않는다니. 아카아시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그리고 보쿠토가 반짝이는 눈으로 몸을 돌려 외쳤다. 완성이야!

 

스트포크가 완성되었다. 안이 깊은 둥근 접시에 옮겨 담자 하얀 김이 폴폴 올라왔다. 보쿠토는 뿌듯한 얼굴로 음식을 식탁에 옮겼다. 금세 차려진 상에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카아시는 수저를 들며 장난스레 말했다. 일본에서 독일 음식에 프랑스 술이라니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네요. 보쿠토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도 맛있잖아. 뭐, 그게 정답이었다. 아무리 어긋나 보여도 사람이란 딱딱한 톱니바퀴가 아니라서 충분한 마음만 있다면 상대를 부드럽게 끌어안을 수 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향해 빙긋 웃었다. 보쿠토는 이끌리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분명 과거의 소년은 상상하지 못했을 시간이겠지. 하지만 그들은 현재의 사람이다.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기보단 당장 이 순간을 꽉 껴안고 싶었다. 아카아시는 칵테일 잔을 들어 보쿠토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변변찮은 건배는 이미 삼켰다. 세월이 지나도, 우리가 우리가 아니게 될지라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아카아시는 오래된 술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을 다시금 맹세하는 대신 그저 빙그레 웃었다. 여긴 여일히 온전한 사랑 오직 그뿐이라, 이젠 말조차 무익한 세계였기에.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스톡크

기원하건대 그대의 이름이 그대의 삶이 되기를. 생일 축하해, 보쿠토!

예쁘고 쓸모없으며 달콤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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