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LA

2. 무더위가 끝나갈 때

by Jack







      이안 화이트는 자신을 RHD (Robbery-Homicide Division, 강도살인과) 소속 형사라 소개했다. 허연 털이 듬성듬성한 손을 불쑥 내밀며 “이야. 소년과에서 이놈을 찾아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고맙게 되었수다.” 한다. 멋쩍게 웃으며 “별말씀을요.”하고 마크 리가 대답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이안 화이트가 말했다. “나이트 스토커 새끼. 이렇게 허무하게 뒤져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새끼는 꼭 내 손으로 잡아 처넣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마치 소년과가 자신들의 공로를 낚아채갔다는 투로 남자가 책망하듯 말했다. 게다가 그 나이트 스토커를 최초로 발견한 게 나이 서른도 안 된 동양계 형사라니 꽤나 분할 것이다. “그러게요. 저도 그 시체가 나이트 스토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걸요.” 빈정대는 마크 리의 말에 “아무튼 수고 많으셨습니다. 데리고 계시는 꼬마 녀석 심문 다 끝났으면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따로 심문을 해야 하니까요.” 이안 화이트는 억센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애초 RHD 형사들이 소년과를 몹시 무시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죄송하지만 심문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약간 걸릴 것 같은데요. 아동보호국 쪽하고도 처리해야 할 절차가 약간 있고…….” 마크의 말에 이안 화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며칠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하고 물었다. “글쎄요. 이런 일은 절차가 약간 복잡해서…….”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제기랄, 짧게 내뱉고는 “그럼 최대한 빨리 넘겨주시죠. 나이트 스토커는 워낙 큰 건이라 그 새끼가 뒤졌어도 수사 종결 할 생각 없으니까. 아직 발견되지 못한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는데 데리고 계시는 꼬마가 중요한 단서라고 저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 꼬마 녀석은 저희가 조사를 꼭 해야 한다고요. 아시겠습니까?” 자기가 할 말 만을 쏟아내고 이안 화이트는 쿵쾅거리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대화를 지켜보던 동료가 의외라는 듯 “뭐야. 귀찮은 거 아니었어? 의욕이 넘치네? 그냥 넘겨주고 끝내지?” 한다. 마크 리가 “넌 저 새끼 말하는 태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하니 “야, 우리가 무시당하는 게 한두 번이냐. 애새끼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베이비시터 취급,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타이르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검은 가죽 재킷을 대충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야, 어디가! 너 오늘 당직…….” 자동차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쟤, 말도 못하고, 대화도 안 돼. 아는 전문가 데리러 간다. 금방 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하며 서를 빠져나가는 뒤통수를 향해 “누가 너 찾으면 어떡하라고!” 꽥꽥거리는 소리를 못들은 척 했다.


      시뻘건 칠을 한 싸구려 간판과 홍등이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거리에 들어선다. 복(福)자를 거꾸로 매단 철문 앞에 서서 담배를 빼물었다. 노크를 세 번 한다. 한참을 기다리니 문틈으로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인 여자가 “무슨 일이시죠?” 강한 중국 억양이 밴 영어로 묻는다. “황 선생 안에 있습니까?” 하니 “들어오세요.” 얼러놓은 빗장을 풀고 여자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뜰을 지나 좁은 회랑을 통과한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향 태우는 냄새가 점점 진해진다. 빨간 물감을 처바른 나무문을 여자가 연다. “황 선생님, 손님 오셨습니다.” 마크 리가 손 부채질을 하며 안으로 들어서고, 황 선생이라고 불린 남자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네. 고마워요, 메이. 나가보도록 해요.” 한다. “마침 차를 우리려던 참이었는데 딱 알맞게 오셨네요.” 하며 남자가 웃었다. “얼마 전에 정말 귀한 차를 구했답니다. 형사님과 같이 마시면 좋을 것 같군요.” 아무 말 없이 남자가 손을 놀려 다기에 물을 붓고 차를 우려내는 동작을 본다. 날뛰는 여름 태양의 이글거리는 열기로 잔뜩 달궈진 바깥세상과는 달리 이곳에는 이곳만의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마크 리가 황 선생이라 부른 황런쥔이라는 남자는 이 고요한 공간의 중심에서 늘 그에게 차를 내어주었다. “런쥔. 부탁이 있는데.” 느릿느릿 여유롭게 움직이던 황런쥔의 손가락이 멈칫하다 다시 물 흐르듯 움직인다. “또 누가 총에 맞기라도 했나요?” 질문이라기보다는 조소에 가까운 말이라는 것을 마크 리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죽은 연쇄살인마 집에서 발견된 말 못하는 열일곱 살짜리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앞으로 들이밀며 런쥔이 말했다. “세상에. 차라리 총 맞은 사람이 낫겠는 걸요.” 따듯한 찻잔을 들어 차의 향을 음미하며 “걔랑 대화 좀 해줘. 그런 것도 할 수 있지?” 마크 리가 물었고 “형사님, 저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지, 청소년 심리상담 전문가가 아니랍니다. 그런 건 CII (Children's Institute International)에 맡기셔야죠.” 런쥔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형사님께는 늘 신세지고 있으니까, 해보는 데 까지는 해볼게요. 차 맛은 어떠신가요?” 단숨에 들이 키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저 그러네.” 마크 리의 말에 “역시.” 황런쥔이 짧게 대답한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고 가야 할 것 같군요. 차는 얼마든지 더 드셔도 돼요.” 찻잔을 가득 채웠다. 런쥔을 기다리며 마크 리는 천천히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황런쥔과 마크 리가 서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일곱 시 무렵이었다. 심문실에 앉아있던 소년은 낯선 사람의 등장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런쥔과 소년을 방 안에 내버려두고 마크 리는 한숨을 쉬며 제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쓰러졌다. “뭐야, 저 사람.” 마크 리가 없는 동안 자질구레한 서류 작성에 시달려야 했던 동료는 잔뜩 성이 나있었다. “아까 말했잖아. 아는 전문가라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전문가 맞아? 진짜로?” 채근하는 물음에 “그렇다니까.”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책상 위로 고꾸라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게 왜 괜히 고집을 부려가지고. 커피는 정말 맛이 없었다. 황런쥔은 약 세 시간 넘게 소년과 씨름했지만 소년에게서 그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사님. 저로는 역부족이에요.” 하며 런쥔이 돌아갔다. “전문가도 별 거 없네. 나, 간다.” 동료도 떠나, 사무실에는 마크 리와 소년 둘만 남았다. 반쯤 잠이 들었던 마크 리가 비적거리며 일어나 심문실 문을 열었다. 소년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앉아있다.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오늘은 이걸로 끝. 어떡할래, 여기서 자도 상관은 없긴 한데…….” 어차피 대답 따위 돌아올 리가 없었다. 피곤이 몰려온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책상 위에 단정히 놓인 (런쥔이 정리해놓고 간 것이 분명한) 노란 서류 파일을 집어 들고 “일어나. 일단 우리 집에 가자. 뭐, 하루 정도야 상관없겠지.”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니 소년은 순순히 뒤를 따라온다. 난삽하게 흩어진 종이 더미 위로 아무렇게나 파일을 던져두고 뭐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불을 껐다. “주차장에서 차 빼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소년이 와락 껴안아온다. 어둠이 덮친다. 옅은 땀 냄새가 난다. 아까 마셨던 녹차의 풋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맛이 그저 그렇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 차는 정말로 귀한 차였고, 아주 맛있었다.
      주차장 한 구석에 덩그러니 세워진 회색 혼다 어코드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마크 리의 등 뒤로 소년이 두리번거리며 따라간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고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니 소년이 엉거주춤 차에 올라탄다. 차 시동을 걸려다가 "그, 저기. 안전벨트 매." 마크 리의 말에 소년의 멍한 눈이 무슨 소리냐는 듯 마크 리를 쳐다본다. 몸을 굽혀 먼지가 허옇게 앉은 버클을 잡아당겨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차는 돌덩이가 철판 위를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앞으로 서서히 나아갔다. 피곤한 하루였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마크 리가 라디오를 켠다. 요란한 신디사이저와 비트, 끈적끈적한 목소리의 디스코가 흘러나온다. "아 진짜……."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 싶어서 오른손으로 사이드 브레이크 옆 온갖 종이 쪼가리들과 빈 담뱃갑이 뒤섞여있는 쓰레기 더미를 뒤진다. "아 그거 어디 갔지. 야, 꼬맹아. 그 앞에 글러브 박스 열어보면 안에 카세트테이프 있어. 아무거나 좀 꺼내봐." 멀뚱멀뚱 거리고 있는 소년에게 손가락으로 글러브 박스를 가리키며 열어보라는 시늉을 하니 곧잘 따라서 글러브 박스를 연다. "좋아. 그 안에 카세트테이프 있지? 하나만 줘." 말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소년이 테이프 하나를 건넨다. "오우, 퍼블릭 에너미. 나쁘지 않네." 열린 창문으로 후덥지근한 여름 밤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101번 국도를 따라 질주하는 차들의 불빛이 어지럽게 어른거리고 둔탁한 베이스 킥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린다. 다섯 번째 트랙이 끝나갈 때 쯤 차를 오른쪽으로 돌려 벨뷰가로 빠져나간다. 약간 배가 고픈 것도 같아 집에 가는 길에 간단하게 요깃거리라도 사갈 참이었다. "야. 너 배 안 고파? 뭐 좀 사갈 건데, 너도 먹을 거지?" 묻는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주택가의 제일 끝 왼쪽에서 두 번째, 볼품없는 랜치 앞에 혼다 어코드가 선다. 차고 딸린 집을 살 만큼 형사 봉급이 넉넉한 편도 아니고 그럭저럭 이만하면 혼자 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집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코리아타운 근처에 집을 알아봐주겠다고 했지만 마크 리 쪽에서 한사코 거절했다. 커뮤니티 칼리지 겨우 나온 한국계 미국인이 LAPD 형사가 되었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자랑하고 다닌 인간들인데 코리아타운에 살기라도 해봐,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오라는 둥 김 씨네 딸을 소개시켜주겠다는 둥 온갖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뻔했다. 그렇다고 집값이 싼 차이나타운 쪽에 살자니 그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 중간 쯤 되는 실버레이크였고 집 전체에 하늘색 페인트를 대충 바른 거실 하나, 방 두개짜리 랜치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계약해버렸다. 편히 잘 수 있는 공간 정도만 있으면 족했고 그나마도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으므로 어찌되든 좋았다. "나 혼자 사는 집이라 약간 더러운데 상관없지?"라 말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맥주병을 대충 발로 밀어두고 (살짝 민망하긴 했다) "여기 앉아있어." 옷가지로 뒤덮인 소파를 가리켰다. 소년은 냉큼 티셔츠 뭉텅이를 옆으로 밀어두고 소파에 앉아 발만 달랑거렸다. 마크 리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물기를 대충 털면서 비적비적 걸어 나올 때 까지도 소년은 발을 흔들거리며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소년 옆에 털썩 앉은 마크 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화들짝 놀랐다는 듯 "오우, 야. 너 냄새. 좀 씻어야겠다." 소년은 그새 땀을 꽤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소년을 일으켜 세워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이건 샴푸고, 이건 비누. 이건 바디 워시. 그......어......몸 씻는 비누야. 알겠지?" 하고는 문을 닫았다.
      곧 나오겠거니 하고 사온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려는데 우당탕탕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아, 또, 왜. 왜"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니 세면대 앞 유리 선반에 얹어두었던 각종 병들이 죄다 넘어져있고 타일 바닥 위엔 스프레이와 플라스틱 통 대 여섯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난장판 한가운데 서서 소년은 멍하니 마크 리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크 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헛 웃고 말았다. 소년의 옷을 벗기고 샤워기 물줄기가 쏴아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비누 거품을 잔뜩 낸 스펀지를 소년에게 건네주고 "이걸로 몸, 이렇게 문질러." 하니 곧잘 따라한다. 소년이 천천히 몸에 비누칠을 하는 동안 마크 리는 소년이 저질러놓은 난장판을 치우기 시작했다. '진짜 나 약간 베이비시터 같네.' 속으로 생각하며 등까지는 손이 닿지 않아서 끙끙거리고 있는 소년을 본다. "그거 이리 줘. 내가 해줄게." 까무잡잡한 피부 군데군데 검붉은 흉터가 있었다. 불로 지지고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엉망으로 아문 상처들은, 미루어보건대 누군가 소년에게 고통을 주려는 목적으로 낸 것이었다. 상처의 크기가 일정한 것으로 봐서 아마 담뱃불로 지졌을 것이다. 소년이 학대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거 보여주면 RHD 새끼들 덜 귀찮게 굴겠네.' 하는 생각에 마크 리는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샴푸를 쭉 짜서 소년의 머리를 벅벅 감겨주었다. '아, 거 증거도 없는데 그 꼬마 너무 오래 잡아두는 거 아닙니까? 소년과 관할이라는 증거라도 있냐고.'거리던 형사가 이 흉터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통쾌했다. 

       소년의 손에 헤어드라이어를 들려주고 머리를 말리라고 한 다음 아까 데우려다 말고 내팽개친 음식을 비닐봉투에서 꺼낸다. 하얀 종이 상자를 뚜껑만 대충 까서 열어 렌지에 모조리 넣고 돌렸다. 오렌지 치킨, 비프 차오멘, BBQ 볶음밥 냄새가 한데 뒤섞여 맹렬한 기세로 텅 빈 위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무엇이든 주는 대로 잘 먹었고 마크 리도 소년도 몹시 배가 고팠던지라 종이 상자가 텅 비기 까지는 채 십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마크 리는 커피 테이블 위 잡동사니 더미에서 네모난 담배 롤링 페이퍼를 꺼냈다. 희고 얇은 종이 한 장을 뽑아 잡지 위에 올려놓는다. 테이블 밑에서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마리화나 봉오리 하나를 꺼내 손톱으로 잘게 찢어 종이 위에 대충 얹어둔다. 그 옆 종이 파우치를 열어 잎담배를 조금 덜어내어 초록 부스러기들과 잘 섞어주고 종이를 톡톡 쳐서 가지런히 한 줄로 정렬시킨다. 대충 돌돌 말아 혀로 종이 가장자리를 쓱 한 번 혀로 핥아서 붙인다. 끝을 손가락으로 비벼 마무리 한 다음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노란 연필을 집어 다른 한쪽 끝 구멍 사이로 넣고 두어 번 꾹꾹 눌러 다진다. 소년은 잔뜩 끌어안은 쿠션에 턱을 괴고 마크 리가 조인트를 마는 동작 일체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자기도 날름 롤링 페이퍼 한 장을 꺼내어 마크 리가 한 동작을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해내었다. 마크 리의 손목을 잡아 끈 소년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말은 조인트를 손바닥 위에 착하고 가뿐히 올려놓았다. 다시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소년은 빠끔히 눈알을 굴려 마크 리의 얼빠진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오우, 야. 너 이거 누구한테 배웠어. 나 이렇게 잘 만 거 처음 봐." 고맙다, 하며 마크 리는 소년의 동그란 머리통을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텔레비전을 켜고 조인트에 불을 붙인다. 연기를 최대한 폐 깊숙한 곳까지 담갔다가 천천히 뿜는다. 채널을 이리저리 휙휙 돌려보지만 늘 그게 그거라 재미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다시 조인트를 한 모금, 이어서 맥주 한 모금,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한다. 적당히 멍한 기분. 사지 말단에서부터 서서히 감각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웅크리고 앉아 번쩍이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 위로 형형색색의 텔레비전 불빛이 어른거린다. 많이 피곤했겠지. 이내 소년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몸이 기우뚱, 오른쪽으로 고꾸라진다. 물기가 옅게 남아있는 소년의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이 마크 리의 허벅지께 닿았다. 닿은 부분에서부터 저릿한 전기 알갱이들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마크 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뒷목덜미를 슥슥 몇 번 문질렀다. 이 집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손가락을 뻗어 소년의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레 휘저어본다. 타들어가는 조인트가 손톱 길이만큼 남았다. 맥주는 진작 다 마셨다. 머릿속 압력이 서서히 차오르고 몸이 무거워 바닥에 아무렇게나 뭉쳐있던 담요를 겨우 집어 올렸다. 마크 리는 태아처럼 웅크린 소년의 위에 물 빠진 담요를 덮어주고는 휘적휘적 침실로 향한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졸릴 뿐이어서 마크 리는 저 아래 어두운 공간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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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지명과 도로명 등은 모두 실재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써뒀던 글 리네이밍은 끝났습니다. 

마크와 해찬이에게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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