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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후계자라고 해도 제단에서 저 더러운 제너럴 계집을 받아줄 거 같으냐!"

"그건 모르는 일이죠."

"단단히 미쳤구나. 당당하게 내 앞에 저 계집을 데려와?"

"저를 후계자로 정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 이...!"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죽을 거다!"

 



현이 여주의 손을 맞잡은 채, 걸음을 떼자 수장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목소리에 현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눈동자만을 굴려 여주를 내려다보면, 여주는 왜인지 멍한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 손 안의 여주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은 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어...? 어..."

"알고 있겠지. 제단이 거부한 자는."

"..."

"..."

"죽는다."

 



경고 짙은 마지막 말에도 현은 멈추지 않고 여주의 손을 끌었다. 현의 머릿속엔 제 아비의 분노에 대한 걱정도, 후계 자리에 대한 걱정도 아닌 여주의 걱정이 들어찼다. 현은 그저 허망할 뿐이었다. 자신이 이토록 울렁이는 이유가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 했다. 걱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파.”

“…미안.”

 



무의식 중에 억누르던 감정을 담아낸 힘이 현의 손바닥에 갇힌 여주의 손에 온전히 전해졌다. 그에 여주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손을 살짝 흔들어 신호하며 말하자, 현은 그제야 여주의 손을 쥔 제 손에 힘을 풀곤 여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여주의 표정을 살피는 현을 여주가 바로 캐치해냈다.

 



“방금 들었던 말에 내가 충격받았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

“좋다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나.”

“…”

“네가 말했잖아.”

“…”

“나 안 죽는다며.”

 



인적이 드문 마을 뒷편에 멈춰 선 둘은 서로를 가만히 마주보기만 했다. 미묘하게 시시때때로 변하는 현의 눈동자에 여주는 제 두팔을 팔짱꼈다. 그래, 언제부터였을까. 전혀 속내를 알 수 없던 현의 눈동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언제부터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여주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주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

“…”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야.”

 



수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함을 지울 수 없었던 여주는 현에게 말을 하려다 결국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하지 않을 뿐더러… 어디서 봤냐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추궁할 것이 뻔하다. 깊게 파고들 수록 끝은 결국 여주의 실체와 가까워질 것이 분명했다. 혼자 기억을 되짚은 후에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여주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잠깐 머리가 어지러워서.”

“진짜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니 말대로 너 죽을 일 없으니까….”

“…”

 



여주의 머리 위로 현의 커다란 손이 툭 내려앉았다. 전처럼 장난으로 꾹 누르는 것도 아닌 부드러운 손길로 여주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하지만 무언가에 탁 가로 막히기라도 한 듯 손은 거두어졌다. 현의 손길에 적잖이 당황하던 여주의 시선이 현을 향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툭 내뱉는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은 내가 아니라 현, 니가 더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런가?”

“답지 않게 왜 다정하고 난리야.”

“…난 항상 나름 다정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짓궂은 거야.”

 



종국에 현은 픽 웃음을 흘렸다.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던 지난 날의 다짐을 기억한 현은 또 다시 수긍하고야 만다.

 



“처음이야.”

“…어?”

“어쩌면 낯선 누군가를 이렇게나 걱정하고,”

“…”

“지키고 싶었던 적은.”

“…갑자기 무슨….”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현에 잔뜩 당황한 여주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은근히 가깝게 서 있는 현을 뒤로 밀어냈다. 순순히 뒤로 밀려나는 현은 여주의 눈을 바로 마주했다. 하지만 그 눈 맞춤마저도 여주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시선을 피했다.

 



“가, 가자. 제단인가 뭔가에 가야 한다며.”

“…그래.”

 



여주의 말에 현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발걸음을 뗐다. 현의 뒤를 따르면서도 여주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의문을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이터널의 수장부터, 현의 알 수 없는 행동까지. 하지만 무엇하나 섣부르게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현의 뒤통수가 나침반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주는 그저 뒤를 따를 뿐이었다. 현은 전처럼 옆에서 걸으라는 첨언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계속 앞장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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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응. 이제 거의 다 왔어.”

“아니, 그런 게 아니,”

“쉿-”

 



현은 쉼 없이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제 옆으로 와 두리번거리는 여주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 행동이 마치 가만히 있어 보라는 말 같아, 여주 또한 움직임을 멈추곤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아니야. 가자.”

“왜, 뭔데?”

“아니. 잘못 들었어.”

“뭘 잘못 들었다는 거야.”

“쓸데없는 질문 그만하고, 따라와. 이제 정말 다 왔으니까.”

“내 질문이 쓸데없는지 있는지 니가 어떻게 알,”

 



여주는 현의 말에 또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금방 다시 걸음을 멈추는 현에 그대로 현의 등에 얼굴을 부딪쳤다.

 



“왜 또.”

“…아무래도….”

“어?”

“들개 새끼 한 마리가 따라붙은 모양이야.”

 



현은 낮게 읊조렸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낮은지, 여주가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바로 옆에 서 있어도 듣지 못할 소리였다. 들개? 누군가의 미행이 붙었다는 소리인가.

 



“…뭐, 상관없나.”

“지금… 미행이 붙었다는 거야?”

“니가 아무리 작게 말해도 쟤한테는 들려.”

“…”

“공격할 생각은 없는 거 같으니, 가던 길 마저 가.”

“그냥 이대로 가자고?”

“응. 오히려 잘됐어.”

 



미행이 붙은 것이 오히려 잘됐다는 현의 말의 속뜻은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현은 마치 미행하는 자가 누군지를 이미 알고 있는 듯이 얘기했다. 이대로 미행이 붙은 채 가자는 현의 말에 여주 또한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절대 지는 내기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이후로 현을 따라 다시 걷길 5분 정도 흘렀을까. 곧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사이를 헤집고 조금 더 들어가니 빛의 근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긴….”

“제단.”

 



여기가 어디냐는 여주의 질문에 짧게 제단이라 답한 현은 여주의 손목을 붙잡곤 끌어당겼다. 여주는 눈 앞에 펼쳐진 웅장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숨을 참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무슨 이유에서인지 보이지 않았던 현의 꼬리가 서서히 나타나 그 유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늘을 뚫을 듯한 절벽 아래로 원을 그려 세워진 7개의 비석. 그 중심엔 맹렬히 이터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주한 절벽의 하단에는 안쪽으로 깎여 들어간 듯 움푹 파여있었고, 그곳엔 여주의 허리춤 정도의 기둥이 존재했다. 낮은 기둥의 원판에는 역시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현의 가슴팍에 새겨진 그 문양이.

 



“긴장돼?”

“…어?”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벌써 긴장을 해.”

“뭘 시킨다고?”

 



여주와는 다르게 현의 표정에선 여유가 흘러넘쳤다. 역시 수장의 후계자는 달라도, 한참 다른 걸까. 제단에 온전히 발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조여오는 압박에 여주는 온몸에 힘이 쭉쭉 빠지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 무슨 일을 벌일 듯한 현의 말에 여주는 적잖이 당황해버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날 여기 왜 데려온 건지나 얘기해.”

“이터널의 제단은 태어난 지 스무 해가 되는 때, 성인식을 치르는 곳이야.”

“성인식?”

“그래. 진정한 이터널으로 인정받는 의식 같은 거지. 제단에서 성인식을 마친 자는 그때부터 삶을 시작하는 거야.”

“어째서 그 전의 삶은 인정해주지 않는 건데?”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기보다는… 성인식을 치르기 전까지 살아남는 자만이 이터널의 자격을 받을 수 있어.”

“…”

“나약한 자는 이터널이 될 수 없다.”

“…”

“하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성인식 전에 죽은 자는 성인식을 할 수 없어. 살아있다면 당연히 성인식을 하는 거고. 단지, 성인식이라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지.”

“어렵네.”

“아, 단 한 가지. 스무 해가 되어 성인식을 치러도 이터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현의 말에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아남은 채로 이터널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 그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게 뭔데?”

“이터널에 파멸을 불러일으킬 자.”

“…”

“우리는 그런 자를 빛을 잃은 자라고 부르지.”

“빛을 잃은 자?”

 



현의 말에 여주는 불현듯 이터널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명의 빛. 장로와 현 사이에서 오가던 생명의 빛에 대한 이야기들. 현과 장로는 여주에게서 빛을 보았다고 했다. 특히나 장로는 그 빛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의 빛과 닮았다고 했다. 그 말에 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생명의 빛이라는 건 대체…

 


다시 생각해보면 언젠가 이터널과 관련된 역사서에서 생명의 빛과 관련된 글을 본 적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 피가 흐르듯, 이터널에게는 생명의 빛이 흐른다고. 그 빛은 그들에게 혈관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역사서에는 그 빛이라는 것이 마치 이터널이 숭배하는 신과도 같은 것처럼 기술되어 있었으며, 하나의 종교라 칭하였다. 서적의 말대로라면 여주의 눈 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제단은 그 빛이라는 것을 숭배하는 곳이란 말이 된다.

 



“그 빛이라는 거 말이야. 그건 이터널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거야?”

“정확하게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

“어째서?”

“반도 그 빛을 볼 수 있거든.”

 



현은 무심하게 힐긋 쳐다보곤 말했다. 반은 제너럴과 이터널의 혼혈아. 즉, 온전한 이터널이 아니더라도 그 빛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터널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는 자는 그 빛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것 또한 확실하지 않다.

 



“혼혈아가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이터널의 순수한 혈통만이 빛을 볼 수 있고, 빛이 존재한다고 믿었어. 하지만 그것 또한 이제는 불분명해졌지.”

“나는 그 빛을 보지 못해.”

“너는 제너럴이니까.”

“니 말대로 난 제너럴이니까 빛을 보지 못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장로님은 내게 빛이 보인다고 했어…. 그건 대체….”

“그래서 말했잖아. 이제는 그 사실들이 모두 불분명해서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어.”

 



현은 그렇게 말하며, 여주의 손목을 잡아 어중간하게 제단에 걸쳐 있던 여주의 몸을 제단 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버틸 새도 없이 제단 안으로 몸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제단의 기운에 억눌린 폐부가 확 뚫리는 듯했다. 여주는 그 홀가분함에 숨을 토해내듯 내쉬었다. 긴장이 탁하고 풀린 듯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주를 빤히 내려다보던 현은 종국엔 픽하고 웃어버리곤 만다.

 



“갑자기 왜 웃어? 그리고 갑자기 끌어당기는 게 어딨어!”

“어때. 이제는 좀 안심이 돼?”

“뭐?”

“안 죽었네.”

“…”

“여주 넌, 보면 볼수록 재밌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하나도 재미없거든? 아까는 자기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걱정하더니.”

“그건 여주, 네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얼굴?”

“그래. 마치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거든. 그 표정을 보고는 순간, 제단에서 네가 정말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 그건 아마 여주의 기억 속 어딘가 존재하는 듯한 수장의 얼굴을 본 이후였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본 건지도 모르는 수장의 얼굴에 찰나의 두려움이 얼굴에 그대로 떠오른 모양이었다.

 



“제단이 거부한 자는 죽는다. 수장의 말은 사실이야. 제단은 자신이 거부한 자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고통을 안겨주지.”

“그럼… 제단이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거야?”

“니가 지금 멀쩡하다면 말이야.”

“난 멀쩡해. 하지만… 제단이 왜 날 거부하지 않는 거지? 나는 이터널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제너럴인데.”

“…아마 너에게서 빛이 보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현은 애매한 답변만을 늘여 뜨려 놓을 뿐이었다. 여주의 머릿속을 어지럽혀 놓고는 태연하게 제단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에 여주는 반사적으로 현의 뒤에 바짝 따라붙는다.

 



“그래서 서론이 그만큼 길었던 이유가 있겠지? 제단에 나를 데려온 이유를 빨리 말해.”

“내가 너를 완벽하게 신뢰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다고 생각해.”

“…”

“여주, 니가 항상 내 속을 알 수 없단 소리를 밥 먹듯이 하는 것처럼 나도 니 속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아.”

“…”

“하지만 너랑 나는 앞으로 함께 싸워야 할 동료야. 그런 동료에게 배신을 당하는 건 너도 싫을 거잖아?”

 



현은 아주 치밀했다. 여주를 시험해봤다는 아주 파렴치한 얘기를 당당하게 하면서도, 그에 대해서 여주가 불만을 내세울 수 없도록 근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여주는 현이 저를 시험했다는 사실에 화가 올라오다가도, 그 화를 도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등을 내어주고 싸워야 하는 동료끼리 신뢰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라는 것을 이해하니까.

 


하지만… 여주는 아직 마음 한쪽에 걸리는 무언가를 쉽사리 지워낼 수 없었다. 자신이 제너럴의 황녀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현은 모른다. 제너럴의 황녀라는 타이틀이 현의 계획에 큰 이슈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 또한 지금의 여주이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양날의 검이 되어있을지도… 아마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이터널과 제너럴의 전쟁을 막을 수 없을 때일 것이다.

 



“대충 이해한다는 표정이네. 심각한 얼굴이긴 하지만.”

“… 기분 나쁜 소리를 잘도 한다?”

“기분 나빴어?”

“널 내가 시험해봤다 하면, 기분 좋겠냐?”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것 같네.”

“됐어. 말을 말자.”

 



여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고, 현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절벽 최하단부의 안쪽으로 파인 공간 안의 낮은 기둥 앞이었다.

 



“잘 봐. 여주, 니 옆에 있는 게 누군지.”

“그게 무슨,”

 



현은 제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기둥의 윗면 위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러자 현의 손바닥 아래로 자리한 문양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낮은 원기둥의 틈새를 타고 흘러내려, 곧 제단의 중심의 문양으로 퍼져나갔다. 문양에 빛이 가득 고여 들자, 그 빛은 곧 하늘로 솟아오를 듯한 기세로 제단에 세워진 7개의 비석을 물들였다. 마치 예술을 하듯 유영하던 빛의 움직임이 멎는 듯했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듯이 빛이 기둥 위로 번져나갔다. 바닥을 파고들고, 하늘을 갈라놓을 듯했던 빛은 그대로 쏟아져 내려 제단 주위로 돔 형태의 경계를 만들어냈다.

 



“이게, 무, 무슨….”

 



푸른 빛이 쏟아지는 제단 안에서 여주는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토록 웅장하고, 경이로운 장면을 보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생겨난 돔 형태의 경계는 마치 푸른 달빛을 갈아 마신 듯, 푸른 빛의 결정을 흩뿌렸다.

 



“이제는 완벽하게 인정하겠지. 내가 이터널의 후계자라는 걸 말이야.”

“…”

“그리고 그에 걸맞은 동료라는 걸, 너도 이 자리에서 보여줘.”

“…그게 무슨 말이야….”

“너를 제단에 데리고 온 이유야.”

 



현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여주를 내려다보았다. 기둥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여주에게 다가왔다. 여주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뒷걸음질 쳤다. 마치 처음 현과 만났을 때처럼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에 금방이라도 먹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물론 난 김여주를 믿어.”

“그, 그럼… 그럼 난… 이런 거 안 해도….”

 



여주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흠뻑 젖은 채, 가늘게 떨려왔다. 현은 제단을 통해 자신이 이터널의 후계자임을 보여주었다. 가령 말뿐인 거짓이라 해도, 방금 전의 광경을 본 자라면 절대 거짓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대에 이번엔 제 자신이 아닌 여주를 세우려 하고 있다. 두려움과 함께 불안이 몸을 휘감았다. 이대로 시험대에 올라 자신이 거부당한다면? 제너럴의 황족인 것이 탄로 나버린다면? 제단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현에게 처형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절망스럽게도 둘 중 어느 하나의 결과에서도 여주 자신이 살아남을 길은 없었다.

 



“하지만 보여줘야지 않겠어?”

“어…?”

“니가 나를 도와, 대단한 힘이 되어줄 인물이라는 걸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현의 눈동자는 여주와 현이 들어온 제단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빛의 아지랑이로 경계의 밖은 흐릿하게 보였지만, 현은 마치 누군가를 특정하여 보고 있는 것처럼 시선을 분명히 했다. 제단으로 향하던 여주와 현에게 어느 시점부터 붙은 미행을 얘기하는 듯했다.

 



“다시는 너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보여줘.”

“…만약, 만약 내가 거부당한다면…?”

“글쎄, 그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어떻게 그걸 확신해.”

 



죽음을 문턱 앞에 놓인 듯 두려움에 잔뜩 질린 여주의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현은 평정심을 잃지 않은 얼굴로 여주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오히려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현을 확신에 차게 만든 것인지는 여주 또한 의문이었다. 제아무리 현이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여주 본인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여주에게는 그 무엇과 바꾼다 해도 털어낼 수 없는 비밀이 있으니까.

 



“날 믿으니까, 넌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 그건.”

“두려운 거야?”

“…”

“죽을까 봐?”

“…”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던 말은 객기였나?”

“…”

“아니면… 뭔가 켕기는 게 있거나.”

 



집요하게 여주의 눈을 쫓는 현의 시선에 여주는 도무지 숨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들숨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듯했고, 날숨엔 폐가 잔뜩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미 현에게 모든 걸 다 간파당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여주는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입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다만 추측에 불과하니까. 눈앞에 칼을 들이민다 해도, 결코 내뱉을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회피하고 싶은 현실이다.

 



“그래. 강요하지 않을게. 니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널 이 자리에서 죽이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

“나와 함께 하기로 한 이상, 넌 죽지 않는다고 말한 건 나야. 뱉은 말은 지켜.”

 



현은 강요하지 않겠다 말했지만, 그 말은 여주에게 더욱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선택의 자유를 주는 듯, 어떠한 선택을 해도 불이익은 없다고 얘기하는 듯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것들은 정말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 않아도 죽이진 않으나, 신뢰를 잃는다. 이것이 어떻게 모순이 아닐 수 있는가.

 


여주의 선택을 기다리기로 한 듯, 한발 물러선 현은 더이상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여주는 그런 현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저 자신이 올라야 할 시험대를 바라볼 뿐이다. 대체 현은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표정을 보인 것일까. 여주가 시험대에 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눈빛과 말투. 그것은 단순히 여주를 믿는 것을 뛰어넘어, 무언가를 예지하지 않은 이상 보일 수 없는 태도다. 여주는 이 총체적인 문제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곧,

 



“…현.”

“응.”

 



무언가 결심에 선 듯,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여주에 현은 즉각 답했다. 마치 어떤 질문이라도 대답해줄 수 있다는 듯이.

 



“만약 제단에서 날 거부해도… 내가 죽지 않는다고 말해.”

“…”

“내가 죽을 일, 없다고 했잖아.”

“그래.”

“그리고…”

“…”

“이 시험 같은 거 말이야. 나는 딱 질색이야. 난 나만 손해 보는 거 안 해.”

 



여주가 씨익 웃으며 현의 눈을 마주한다. 그러자 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픽 흘리고 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 거지 같은 시험에서 인정받으면.”

“…”

“그때는 나도 인정받을 수 있는 거지?”

“당연하지.”

“…”

“이터널에서 김여주로서 인정받을 수 있어.”

“…”

“내가 그렇게 해줄게.”

“…그래. 너는 틀린 말을 한 적 없으니까.”

“…”

“지는 내기도 하지 않고 말이야.”

“잘 아네.”

 



여주가 마음을 굳힌 것은 제 존재의 가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물론 현의 완고한 모습에 영향을 없지 않아 받았지만, 이에 비롯된 산물 또한 김여주라는 인간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제단에 발을 들인 자신은 여전히 숨을 붙이고 살아있으며, 현 또한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서워할 것이 없다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잘 봐. 여주, 니 옆에 있는 게 누군지.’

 



현의 말대로 현이 어떤 인물인지는 이제 누가 구태여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것도. 그러니 그를 믿어보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다고. 자신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현에게 걸맞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이제는 오필리아가 아닌 김여주의 인생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현과의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현에게 신뢰를 잃는 것이… 싫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결정을 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여주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했고, 답과 그에 대한 근거가 명확해졌다. 제너럴인 주제에 이터널에 발을 딛고 있는 상황과 그런 상황에서 믿기 싫어도 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여주 또한 결국 현과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믿고 싶다면 믿으면 된다.

 



“여기에 손을 올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는 조심스레 자신의 오른손을 문양 위로 가져다 댔다. 여주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고, 곧 차가운 돌덩어리의 기운이 여주의 손바닥을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 현이 손을 댔을 때와 마찬가지로 빛이 일었다. 순식간에 제단을 감싸던 현의 빛이 거두어지고, 새로운 빛이 제단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여주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제 빛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으니.

 


푸른 계열의 빛. 정확하게는 보랏빛을 품은 푸른색이었다. 흔히 바이올렛이라 불리는 색이었다. 제단을 가득 물들이고, 비석 위로 뻗어 나간 빛은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솟아오르던 현의 빛과는 달리 은은하게 감싸는 듯 제단 위로 큰 원을 그려냈다. 현의 빛은 제단을 감싸던 보호막과도 같은 돔 형태의 빛의 막이었다면, 여주의 빛은 하늘 위에서 땅에 빛을 내려주는 원판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제… 된 거야?”

“…”

“왜 아무 말이 없어.”

“…”

“현.”

“…어.”

 



의식이 끝이 난 듯한 느낌에 여주는 손을 거두었다. 현은 멍하니 제단 위로 쏟아지는 오묘한 푸른 빛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마치 신기한 광경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선 말이다. 여주는 대답이 없는 현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현을 재촉했다. 생명의 빛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여주로서는 도저히 이 상황을 해석할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빨리 말해.”

“…”

“어떻게 된 건지 나한테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여주는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듯한 현에게 소리쳤다. 여주의 높아진 언성에 현은 마침내 여주의 눈을 마주했다.

 



“여주, 너….”

“나 왜.”

“너 말이야. 제너럴인 거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히… 제너럴이지.”

 



뜬금없이 떨어지는 현의 질문에 여주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쩌면 이 모든 행위를 통해 자신이 제너럴 황실의 황녀라는 것을 현이 눈치챈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일말의 의심의 여지라도…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순식간에 여주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니 빛은… 이터널과 같으면서도 달라. 나나 할아범이 육안으로 봤을 때완 달라.”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현, 니가 하는 말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

 



이어진 현의 말에 의하면 결론적으로 여주는 제단에 인정을 받은 것이다. 제단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여주는 이터널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끝내 여주의 빛의 오묘함과 그에 대한 의문은 현도 여주도 풀어낼 수 없었다. 전례 없던 현상에 현은 한동안 처음 여주와 만났을 때처럼,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흘려댔다.

 


여주는 죽음의 문턱에서 죽음을 피해갔다는 안도와 함께 수많은 의문과 불안을 느꼈다. 제너럴인 자신이, 그것도 제너럴의 황녀인 자신이 이터널의 제단에 인정을 받았다. 그건 이터널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자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이 대목에서 여주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안심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자신은 분명 지금 현을 속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혹여나 제너럴이 잘못될 시에는 다시 황실로 돌아가려는 생각도 서슴지 않아 했다. 그런 자신이 이터널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을 거라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결과였다.

 


그렇다면 제너럴과 이터널 사이에는 어쩌면 우려했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까?

 



“어쨌든, 축하해.”

“…뭘?”

“온전하게 스며든 것에 대해서 말이야.”

 



현은 여주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여주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밀어진 현의 손을 잡았다. 축하해야 할 일이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제 목숨을 건진 것이라도 자축하자는 마음이었다.

 



“이제 이터널에서도 온전히 김여주라는 존재를 인정받은 셈이야.”

“…그래.”

“아마 곧 소문이 떠돌겠지.”

“소문?”

“우리 둘만이 이 모든 걸 본 게 아니니까.”

 



현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아마 이번에도 둘을 미행한 자를 칭하는 듯했다. 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눈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놈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었으니. 하지만 이러한 진실은 신호탄이 될 것이다. 더이상 유치한 소꿉장난이 아닌, 더럽고 치사한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 뻔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어딜?”

“어디긴. 우리 집이지.”

 



여주는 아까의 의식에 대한 것을 포함해 여러모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우선 말을 아끼기로 하였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여전히 어디선가 둘의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현과 함께 제단을 빠져나오자, 제단을 가득 채웠던 빛이 거짓말처럼 거두어졌다. 마치 지금껏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한 여주였지만, 어쩐지 걸음을 재촉하는 현에 여주 또한 뒤따르는 발걸음에 속력을 가했다.

 







 





시간은 또 하염없이 흘러, 제단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현은 제단에 다녀온 이후로 한동안 마을에 나가지 않았다. 왜 외출하지 않냐는 물음에 현은 그저 마을에 갈 일이 없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제단에서의 일이 있고,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여주가 종종 꾸던 악몽을 매일 같이 꾼다는 것이었다. 악몽은 항상 같은 결말이었다. 제너럴과 이터널의 전쟁이 시작되고, 그 전쟁은 이터널의 승리로 끝난다. 꿈속에서 여주가 보는 것은 온통 피바다인 대지였고, 그 중심에는 항상 현이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여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숨이 턱 막혀 그 상태로 달아나듯 꿈에서 깨어난다.

 


제단에 다녀온 뒤, 현은 은근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여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니가, 제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건. 우리의 계획이 적어도 대망하지는 않는다는 거겠지.’

 



여주의 불안감을 덜어 주기 위해 한 현의 말에 여주는 더욱 깊은 생각에 빠져들 뿐이었다. 제단의 뜻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초래되는 결과는 두 가지뿐이다. 제너럴과 이터널이 전쟁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전쟁에서 이터널이 승리하는 것. 만약 전자라면 현이 그리는 이상적인 미래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그건 아마 재앙과 가까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반된 두 결과를 두고, 마냥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주.”

“…”

“김여주.”

“…어?”

“제단에 다녀온 이후로 생각이 많아진 건 이해하지만, 너답지 않아.”

“나, 나답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쯤 되면 한 번쯤 마을이든 어디든 나가자는 소리 한 번 정도는 할 만한데 말이야.”

“…”

“제단의 뜻이 믿기지 않는 거야. 아니면 믿기 싫은 거야.”

 



현의 질문이 여주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마치 여주의 고민이 무엇인지, 여주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는 듯한 질문에 여주는 그저 입술만 달싹거렸다. 사실 요 며칠간,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군 것은 자기 자신도 인정하기에 현의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여주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현의 질문을 빠져나올 수 있는 돌파구를 찾으려 애를 썼다.

 



“무슨… 그야… 니가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니까 잠자코 있는 거지. 안 그래도 몸이 근질거려 죽겠거든? 잘 참고 있는데 괜히 헛바람 불어 넣지 마.”

“그래?”

“그래. 그리고 나답지 않다니. 마치 나를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한다?”

“김여주?”

“나도 궁금하네. 나다운 게 뭔지.”

 



현은 여주의 말에 잠깐 고민을 하는 듯했다.

 



“넌 강해.”

“그건 나도 알아.”

“뻔뻔한 것도?”

“…장난해?”

“두려운 게 없지.”

“…”

“아니다. 두려워하지 않은 척하지.”

“…”

“그래서 넌 강해.”

 



모순된 현의 대답에 여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두려워하지 않는 ‘척’하지만, 강하다고? 내가? 현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여주 자신은 항상 누구의 눈에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두렵고, 무서워도 그렇지 않은 척했다. 강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혼자서도 잘한단 소리를 들을 때면 자신이 가치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제단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

“…”

“하긴, 제단이 널 인정했다는 의미는 너로 인해 이터널이 멸할 일은 없다는 거니까.”

“…”

“너도나도, 결국은 모 아니면 도라는 거야.”

 



모 아니면 도. 현의 말이 맞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너럴은 멸망할 수도 있어.”

“!!”

“그걸 두려워하는 거잖아. 지금”

“…”

“사실 말이야. 제너럴이 멸망하든 멸망하지 않든 상관은 없어.”

“…”

“내가 전쟁을 막으려는 이유는 딱 한 가지야.”

“그게 뭔데.”

“이터널의 평화를 위해서지.”

 



지금 이 시점에서 제단의 뜻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예지한다면, 사실 현은 어떻게 되든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현이 바라는 것은 이터널의 평화. 제너럴이 어떻게 되든 사실상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이 전쟁을 막으려는 이유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기 싫어서. 마치 소모품처럼 이터널인이 소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왜?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해?”

“…”

“하긴 제너럴인을 앞에 두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웃기긴 하지.”

“…”

“여주야.”

“…”

“나는 제너럴에는 관심 없어.”

“…”

“내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전쟁을 막는 거야.”

 



제너럴이 멸망하든 말든 관심은 없지만, 전쟁을 막는 것. 그것이 현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제껏 흔들리는 눈동자로 현을 바라보던 여주의 눈이 현의 마지막 말에 안정을 찾는 듯했다. 전쟁을 막는 것. 여주에게 모 아니면 도의 ‘모’였다.

 



“어때? 아직도 두렵나?”

“…”

“니가 죽을 일이 없어도?”

“…”

“너와 나의 뜻이 같아도?”

 



현의 눈동자가 푸른색을 띠며 짙어지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집요하게 달라붙는 현의 시선에 여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감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미래를 단언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이니까. 하지만 여주는 다시 한번 현의 말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제너럴의 멸망과 황실의 몰락을 지워냈다.

 


궤도를 따라 도는 행성은 같은 궤도가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하여 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당연하게 같은 궤도를 도는 행성이 내일도 모레도… 평생 같은 궤도를 똑같이 돌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하나의 규칙이 깨지는 순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 행성은 궤도를 이탈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상식은 없다. 전쟁이라는 궤도 안에서 연속적인 변화를 반복한다면, 규칙이 깨져 결국엔 그 궤도를 이탈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현과 여주가 바라는 이상.

 



“두렵지 않아.”

“…”

“아, 아니다.”

 



두렵지 않다 말하던 여주는 이어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곤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두려워하지 않을래.”

 



여주의 말에 현은 턱을 괴곤 한동안 뚫어져라 여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 아무런 반응 없는 현에 여주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뭘 그렇게 봐. 부담스럽게.”

“아니.”

“뭐가 아니,”

“이제야 김여주 답길래.”

 



마지막 말을 마친 현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띠어 보였다.










흠냐...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ㅎㅎ

변명 생략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궤도 회당 분량은 이대로 쭉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원래는 회당 약 2만자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조금 줄이기로 했습니당

아무래도 연재텀도 짧지 않은데 줄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독자님들은 체감이 어떠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또 하나의 채널에는 팬창작이 아닌 웹소설도 함께 연재할 예정이랍니다?

공모전 참여도 있고, 포폴 등을 위해서 쓰는 채널이니 혼동 없으셨으면 좋겠어용 


항상 기다려주셔서 넘나리 감사하구... 또 금방 찾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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