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내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강하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었고 가지고 싶은 것은 일단 가져야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생각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정말 그럴 수 있는, 실행 가능한 욕망이었다. 내 말 한 마디에 수 십의 무리가 흔들리고 내 웃음 한 번에 수 백의 사람들이 열광하며, 내 눈물 한 번에 수 천의 사람들이 흐느끼던 순간들. 그래서 무서울 게 없고, 돌아볼 필요가 없었던 오로지 직진만이 내 것이었던 모든 시간.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영원히 강하고, 영원히 단단하며, 영원히 깨지지 않을 줄 알았다. 내가 스스로 내 영광을 놓지 않는다면 난 내내 그 영원에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무턱대고 강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추락한 뒤에야 깨달았다. 고통을 알고, 아픔을 알고, 괴로움을 아는 인간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제가 가진 모든 것에 철갑을 둘러야만 했다. 돈일수도, 명예일수도, 혹은 사람일수도 있는 방패를 가지지 못한 인간은 조금 세게 부는 바람에도 부러질 수 있고,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에도 꼼짝하지 못하는 한낱 나약한 미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


그 모든 걸 몸소 경험으로 겪긴 했어도,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인내가 없는 인간일 줄은 나도 정말 몰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약하고 물렁한 젤리 같은 인간이었는지는.


“이봐요.”

“뭐요, 왜요.”

“....”

“불렀으면 말을 해요, 왜, 부르는데요, 왜.”

“.....”


주어진 시간이라곤 고작 일주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촬영 당일을 제외한 6일의 시간이 내 세상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반항 한 번 못하고 굴러 떨어진 나를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마련된 시간의 전부였다. 마음의 준비랄 것도 없이 뭐든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눈앞에 닥친 시간에 나를 조금 더 잘, 좋게 가꿀 여유 같은 건 부릴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애초에 가꾸고 다듬는다는 말보다 새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왜 그렇게 보는데요.”

“그러는 최민기씨는 나를 왜 그렇게 봐요?”

“내가 뭘 어떻게 봤는데요?”

“나랑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게 뭔데요?”


몰라서 물어요? 꼭 그런 얼굴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상체를 뒤로 빼는 김종현을 빤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대로 앞에 놓인 방울토마토 한 알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이내 우적우적 씹어댔다.


“뭐가 불만인데요, 도대체.”

“불만 아닌데요.”

“그럼 뭐 때문에 나를 쓰레기 보듯 보는 겁니까.”

“아, 짜증나서 그랬어요! 짜증나서!”


계획을 해서 단장을 하고 그 어떤 모습으로든 모두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풀어져 있던 나사를 조이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일주일은 애초에 납득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상식, 최소한의 사고도 불가능하게 주어진 시간동안 적어도 카메라 앞에서 흐릿한 존재가 되지만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평소에 먹던 것을 멀리하는 것 정도뿐이었다.


“내가 짜증이 난다는 겁니까?”

“그럼 여기에 나 말고, 그 쪽 말고 누가 있는데요.”

“내가 왜 짜증이 나요?”

“그럼 짜증이 나지 안 나겠어요? 어? 누구는 일주일 내내 풀떼기만 먹고 있는데 누구는!”


그 최소한이 절대치의 짜증과 분노로 돌아올 것은 내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10동안 늘 습관처럼 해왔던 일이, 당연히 내 몫이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익숙했던 일이 갑작스레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마음먹고 해야 할 일이었나. 배가 고파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벌떡 일어나 앉았던 밤, 도대체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던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꼬박 날을 새기도 했다.


“내가 밥 먹지 말라고 한 적 없는데.”

“일주일 뒤에 프로필 찍자고 한 게 누구였더라.”

“그거랑 밥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게 그 소리지 뭐가 달라요? 그럼 물에 불은 호빵같이 빵빵해져서 찍으라구요?”

“아닌데, 최민기씨.”


겨우 배고픔하나 이기지 못하고 모든 바이오리듬까지 깨져버린 최악의 상황에 다시 입 안으로 들어가는 빨간 토마토가 맛있을 리 없었다. 토독토독 터지는 감각까지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맛없는 토마토만 먹고 사는 인생이라니. 짜증 다음에 오는 것은 자연스레 설움이었다.


“..아니면, 뭔데요.”

“물에 불은 호빵은 아니고.”

“.....”


남은 토마토만 털면 앞으로 평생 토마토 따윈 먹지 않으리라 마음 먹으며 옆에 놓인 맛대라기 없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던 나는 곧 나를 향해 의아한 얼굴을 하는 김종현을 바라보았다.

“그냥 호빵?”

“아, 진짜.”

“싫으면 미니 호빵해요.”

“왜 저래 진짜? 재밌어요? 네?”

“재미없어요?”

“그럼 이게 재밌겠어요?”


말 같지도 않은 말로 안 그래도 분노밖에 남지 않은 사람을 들쑤시는 얼굴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려 앉은 나는 이내 당장이라도 김종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런 내 눈빛에 조금의 미동도 흔들림도 없이 눈을 마주하고 있던 김종현은 평온하다 못해 나태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럼 그걸로 해요.”

“뭘요?”

“나한테 짜증내는 이유.”

“네?”

“이유도 없이 그쪽한테 미움 받고 싶진 않으니까.”


이 정도면 꽤 그럴싸하고 정당한 이유인 것 같다며 제멋대로 만족스러운 결론과 함께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김종현을 나는 그저 바라보다 기가 막힐 때 내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숨 한 번만 내뱉었다.


“내가 지금 이게 김종현씨를 미워하는 걸로 보여요?”

“예뻐하는 사람한테 그런 얼굴을 하진 않죠.”

“나는 지금 내 상황이 매우매우 짜증이 나는 것뿐이거든요? 아, 그쪽도 일주일 내내 풀떼기만 먹어봐요! 화가 안나나!”

“고기도 먹던데.”

“닭가슴살이 고기라고 누가 그래요, 종잇장을 씹어 먹고 말지.”


염소도 그 퍽퍽한 건 안 먹겠다며 바짝 신경질을 내고 토마토 하나를 더 집어 든 나는 그런 나는 안중에도 없이 여전히 입 안으로 밥을 잘도 밀어 넣는 김종현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밥이 잘도 들어가나 보죠? 어? 자기 배우는 쫄쫄 굶고 있는데?”

“난 분명히 밥 먹으라고 말 했어요.”

“아, 그래도 좀 같이 굶어주고 그럼 덧나요? 원래 보통 매니저들은 다이어트 하는 배우 앞에선 물 한 잔도 조심하는 법이거든요? 근데 아침부터 어? 이렇게 거하게 차려 놓고 먹어요? 의리 없이?”

“이게 거하게 보여요?”

“그럼 안 거해요? 무려 김에 참친데?”


나도 짠 거 먹고 싶다. 단 것도. 무슨 맛인지도 모를 퍽퍽하고 새큼한것만 가득 담아 넣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이내 들고 있던 토마토를 그대로 다시 내려 놓은 나는 곧 김 한 장을 집어 하얀 즉석밥 위로 가져가는 김종현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면 안 먹는 시늉이라도 좀 하지. 매정한 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 대신 그저 날카로운 시선만 던지던 나는 곧 더는 못 먹겠는 토마토 대신 배나 채우자는 생각으로 이제는 다 식어 차가운 커피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을 집어 들었다.


“힘들다면서요, 그쪽이.”

“그걸 아는 사람이 다이어트 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걸 먹어요?”

“말고.”


그런 나를 의식도 않고 입 안으로 제 일용한 양식을 밀어 넣던 김종현이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곧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덩달아 눈만 치떠 시선을 옮긴 나는 곧 돌아서서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내 드는 김종현을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신호로.


“다정한 거.”

“.....”

“힘들다면서요.”

“아니.. 그건.”


그건 그런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 덧붙이려던 변명은 그러나 금세 입 안에서 막혀 터질 수 없었다. 그것이 이런 종류가 아니라면 어떤 종류인지 설명할 수 있을리 없었다. 다정의 범위는 너무도 제각각이라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넘칠 줄 몰랐던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먼지 하나를 나눠주는 것도 다정이라 느낄 수 있었다.


“내 선의가 그쪽을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

“.....”

“안 할 겁니다, 아예.”

“.....”


단 한 번도 진득한 연애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나를 향한 달콤한 말이 모조리 애정인 줄만 알았던 언젠가의 나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상 안에서 각자의 기준대로 다정하고, 매정했다.


“그러니까 최민기씨는 최민기씨대로, 나는 나대로.”

“.....”

“서로 해야 할 일만 해요.”

“.....”

“출근합니다.”


내일까지는 컨디션 조절해요. 그게 네가 할 일이라는 듯 제 할 말을 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김종현의 뒤통수를 향해 그 어떤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곧 입안을 가득 채우는 쓰다 못해 타는 것 같은 커피를 겨우 삼키고 공기마저 침묵한 허공만 빤히 응시했다.


“그래도...”


살이 많이 빠졌다고, 그렇지만 힘들겠다고, 너는 괜찮냐고. 그런 말이라도 한 번 해주지. 그건 다정이 아니라 격려인데, 그게 대표가 해야 할 일 아니냐고 입 밖으로 할 말은 많았지만 그걸 꺼내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이 사람이라서였다.


“...해주지.”


정말로 김종현이 그런 말을 하면 그걸 다정이 아닌 격려로만 내가 여길 수 있을까. 선뜻 확신이 서지 않는 머리가 분주한 마음을 먼저 진정시켰다. 다녀오겠다는 말 한 마디에 1분 1초를 전전긍긍했던 내가, 뭐든 들고 오느라 늦었다는 김종현을 보자마자 괜히 안심해버린 내가, 아무도 찾지 않는 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얼굴을 보자마자 결국 시작하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이 모든 일을 저질러 버린 내가.


“......”


선을 긋고 돌아서는 김종현이 벌써 섭섭한, 나약하고 나약한 내가.







침대에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은 꿈을 꿀 수도 있겠구나. 내내 현실에 치여 꿀 겨를도 없었던 꿈이 오늘은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 처음 나를 두드리기 시작했던 꿈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아주 적당하고, 좋은 날이었다. 염치없이 원치 않는 내게 찾아와 면박만 당하던 것이 당당하게 먼저 열리는 문 안으로 노크 없이 들어오기에.


“들어갑니다.”

“이미 문 열고 그런 말은 왜 해요.”


그러나 기다리던 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찾아 올 틈이 없었다는 게 맞았다. 나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배가 고파 바이오리듬이 깨진 탓도, 신경이 예민해진 탓도 아니었다.


“노크 했는데, 못 듣는 것 같아서.”

“꿈인지 아닌지 잠깐 고민 좀 했어요.”

“꿈이요?”

“그런게 있어요.”

“.....”


두려웠다는 게 맞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들어가 눕는 순간 쏟아질 것처럼 눈앞에 내려앉은 천장이 당장이라도 숨통을 조일 것만 같았다. 낮춰 두었던 조명을 밝히고, 은은하던 시야가 환하게 확보되자 그제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높이를 한참이나 가늠하던 나는 선뜻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봐요?”

“한 시간 후에 출발할겁니다.”

“바로 스튜디오로 가는 거예요?”

“네.”

“알았어요, 준비 할게요.”


무슨 기분이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할 수가 없지만, 어쩐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굴러 떨어진 곳에서 3년을 매일 오늘 같이 특별한 이슈라곤 없이 지냈던 평범하고 아무것의 삶이 다시 하루아침에 바뀌게 될 수도 있는 것은 죽음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보다 더 낮은 곳으로 다시 떨어져 아예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갑작스레 눈앞에 닥친 현실이 내 것이 아닌 느낌에 온 몸의 감각이 서서히 빳빳하게 굳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

“보고 있을 거예요? 안 나가고?”

“.....”

“각자 할 일 하자더니 그게 대표님 할 일은 아니잖아요?”

“최민기씨.”


그래서 말똥말똥 눈을 뜬 채 어떻게든 시간을 버티던 나는 겨우 새벽이 어둠을 살라먹고 어슴푸레한 빛을 머금었을 때 눈을 감았다. 오늘이 됐으니까, 괜찮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왜요.”

“하루만 참아요.”

“뭘요?”

“촬영 끝나면 곱창 먹어요.”

“난 또 뭐라고.”


걱정마요, 곱창이 아니라 아주 소든 돼지든 통 채로 뜯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듯 입고 있던 잠옷의 단추를 붙잡은 채 중얼거리던 나는 그래도 여전히 나가지 않고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김종현의 향해 팔을 늘어뜨리며 완전히 돌아섰다.


“김종현씨.”

“네.”

“나는 잘못 없어요.”

“.....”

“결국 각자의 이익 때문에 한 계약이지만, 어쨌든.”

“.....”

“날 먼저 끄집어 낸 건, 그쪽이니까.”


아직은 편안한 차림으로 정돈되지 않는 머리칼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종현의 얼굴도 그다지 편해보이진 않았다. 오늘이 낯설고 어색한 건 김종현도 다를 바 없었다. 무엇 때문에 굳이 이미 바닥을 친 내가 필요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각자의 이유로 오늘을 맞이하게 된 우리는 각자의 각오가 필요했다. 편할 리가 없는 길을 가려는 마음가짐이.


“그러니까 아주 혹시라도 내가.”

“.....”

“당신에게 손해만 된다고 하더라도.”

“.....”

“후회하지 말아요.”

“....”

“당신이 손해를 보는 만큼 나는.”

“.....”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최악이 될 테니까.”


김종현이 후회한다는 것은 결국 내 실패를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엄살이 아니라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겨우 잠이 든 순간에도 찾아올 틈이 없었던 꿈을 나는 굳이 꿀 필요가 없었다. 그 꿈속에서 서툴고, 헤매고, 엉망이던 내가 지금 여기 있으니까.


“싫은데.”

“.....”

“후회 할 건데, 나는.”

“.....”

“더 완벽하게, 더 잘, 더 멋지게 최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나를.”

“.....”

“그게 내가 해야 했을 일 일 테니까.”

“.....”


단지 다른 것은 내게 손을 내민 사람의 얼굴 뿐이었다. 꿈 속의 얼굴은 서툴고, 엉망으로 헤매고 있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괜찮다 말을 해주는 얼굴은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편안하고, 행복해보였다.


“그러니까 최민기씨도 최선을 다해요.”

“.....”

“더 잘 할 걸, 후회하지 말고.”

“.....”

“최민기씨가 후회하는 순간에는.”

“.....”

“대신 원망할 내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의 내 앞에 있는 얼굴은 손이 아닌 계약서를 내민 김종현은 편안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서툴고, 엉망으로 헤매는 나약한 나처럼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나약에 나약을 보탠다고 강해 질 수 있을까. 혼자 버티던 곳에 둘이 버티면 결과는 뻔했다.


“준비해요.”

“.....”


무너질 수밖에 없다.






너무 힘 준 거 아니에요? 대단한 작품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겨우 프로필 사진 찍는 걸로 유난을 떠는 건 그래도 명색이 한 때는 잘나갔던 톱스타의 체면이 아닌 것 같아 최대한 안 꾸민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채우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나는 그대로 미간을 구겼다.


“어디 싸우러가요?”

“왜요, 이상해요?”

“네.”

“아닌데, 댄디한 스타일인데.”

“대단한 스타일이겠죠.”


수수하다 못해 애 같았던 머리칼을 잘도 쓸어 넘겨 훤히 드러난 이마엔 바짝 핏줄이 솟아있었다. 그 아래로 온통 까만 것들의 향연을 주욱 들여다보다 곧 번떡거리는 구두에 나는 곧 헛허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내가 아무렇게나 하고 가면 최민기씨가 기죽을까봐.”

“나 쪽팔릴 건 생각 안하죠.”

“내가 쪽팔립니까?”

“그럼 안 쪽팔려요? 이 꼴이?”

“.....”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뭐 이렇게까지 힘을 준 거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곧 그대로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빼는 것을 반복하다 이내 부르르 떨며 시동이 걸리는 것에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 깜짝이야.”

“진짜 쪽팔린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런 건 좀 알아서.”

“.....”

“아, 오해 하지 마요. 이건 다정한 거 아니니까.”

“말 안 해도 알거든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훅 다가오는 몸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쭉 빼낸 나는 그대로 내 옆에서 안전벨트를 쭈욱 잡아 뽑는 얼굴을 흘끗거리다 이내 김종현이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가 슴팍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앞에 열어봐요.”

“왜요.”

“열어보면 알겠죠.”

“.....”


그냥 해주면 고맙다고 하고 끝날 걸 꼭 한 마디 더 붙여서 사람 빈정을 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김종현을 한번 툭 쏘아 본 나는 다시 붓기를 빼기 위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숨을 빼는 동작을 반복하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눈앞의 글로브 박스를 꾹 눌렀다.


“간단히 안 끝날 겁니다, 오늘.”

“그렇겠죠. 정지수씨 원래 일 길게 하기로 유명하니까.”

“..정지수?”

“아, 피터 한국 이름이에요. 정지수.”

“그걸 어떻게 알아요?”

“주 전무랑 피터가 미국에서 학...”


당장 먹기에 부담 없는 단백질바와 사탕 몇 개가 바로 눈 앞에 들어왔다. 뭐라도 좀 먹어요. 간단하게 준비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들 뿐이었다며 제 옆에 놓인 물을 건네던 김종현의 손이 멈추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입을 다문 나는 곧 사탕이 들어있는 상자를 냉큼 집어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이내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안해요.”

“뭐가요?”

“정 작가가 그 사람이랑 가까운 사이인지 몰랐어요.”

“그게 왜 그쪽이 미안해요. 대한민국 땅에서 그 인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특히 이 바닥에 그 바퀴벌레 같은 인간이 발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굳이 그런 상황까지 파악하지 못한 김종현은 아무 죄가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순간 굳어져버린 미간은 어쩐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아니, 나 진짜 괜찮은데.


“저기 김..”

“.....”


그 쪽이 신경 쓸 일이 전혀 아니라는 듯, 그러니 마음 쓰지 말라는 말을 하려던 나는 그보다 먼저 들리는 벨소리에 서둘러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귓가로 가지고 갔다.


“어, 민현아.”

“.....”

“지금 가는 중이야. 어, 통화 괜찮아.”

“.....”


핸들을 한 번 툭, 그리고는 곧 짧은 한숨과 함께 무언가 복잡한 듯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을 오롯이 응시하던 나는 곧 무어라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계적으로 대답을 하다 이내 팔을 뻗어 사탕이 든 동그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어, 좋아. 다, 기분도 좋고.”

“.....”

“컨디션도 좋고.”

“.....”

“오랜만에 촬영하니까 설레기도 하고.”

“.....”


그리고 곧 전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그것의 뚜껑을 연 나는 동그랗고 빨간 것을 그대로 집어 들고 곧 다시 나를 향해 묻는 목소리에 대답을 했다. 그래,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걱정 마.”

“.....”


그리고 손에 든 것을 잠시 신호가 걸려 핸들을 놓고 있는 김종현을 향해 내밀었다. 그 손길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곧 빙긋 웃으며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며 미안하다 말을 하는 황민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민현아.”


김종현씨.


“나 진짜 괜찮아.”


나 정말 괜찮아요.


“네가 왜 미안해.”


그러니까 미안해 하지마요.


“.....”


그렇게 나와 내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 바라보던 김종현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멈추었던 것이 움직이고 곧 구겨졌던 김종현의 얼굴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미안할 일 없는 사람처럼.






누나? 바로 보이는 얼굴에 반사적으로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는 얼굴은 곧 호탕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뒤에 섰다. 김 대표가 얼마나 나를 귀찮게 했는지 알아? 아주 사람을 들들 볶았다며 눈썹을 꿈틀거리는 얼굴을 거울 속으로 바라보던 나는 곧 여전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얼굴에 그대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너도 내가 신기하냐?”

“애들 가르친다면서.”

“죽어도 현장 안 나간다는 사람 밤낮으로 쫓아다니고 설득하고 쟤 뭐냐, 진짜.”

“.....”

“나 말고 괜찮은 애 소개 해주겠다고 해도 죽어도 나여야 한다고.”

“.....”


그래도 쩐은 두둑하게 챙겨주기로 했다며 걱정말라는 듯 내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려 앉히는 손길에 나는 이내 눈만 깜빡거렸다. 처음 오는 곳은 아니었다. 숱하게 드나들었던 스튜디오는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하고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그러나 그 안의 모든 것은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팽팽하게 선을 치고 있었다. 아직 쏟아지지 않는 조명도 하얀 벽도 부스럭거리는 바닥의 질감마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공간에 점점 움츠러들었던 나에게 익숙한 얼굴의 등장은 꿈같고, 거짓말 같았다.


“일을 잘한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할지.”

“좀 건방지죠.”

“싸가지는 있던데. 싹수 괜찮아.”

“...진짜요?”

“왜, 너한텐 아니야?”

“...뭐 싸가지는 모르겠고 재수는 좀 없죠.”

“원래 대표치고 재수 있는 사람 없어.”


그래서 누나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내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인 손이 곧 익숙하게 내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뭐를 해야 좋을까,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얼굴을 똑같이 바라보던 나는 곧 싱긋 미소를 머금는 얼굴에 그대로 같이 웃어보였다.


“재수는 없지만 고마운 사람이긴 하다.”

“김종현이요?”

“무식하고 용감한 김 대표 아니었으면 누가 널 다시 여기 앉혔겠어.”

“....”

“막말로 알만한 인간들은 너 왜 관뒀는지 다 아는데.”

“....”


그건 부정할 생각 없다는 듯 그대로 시선을 끌어내린 나는 곧 감을 잡았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양새에 살짝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근데 어디 출신이야? 저 무식하게 일 잘하는 놈은.”

“재벌이예요, 태한그룹.”

“태한? 태한에서 배우를 키워?”

“나도 몰라요.”

“모르는데 계약을 했어?”


뭐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자세한 사정까진 말 할 수 없어 대강 얼버무린 나는 어쩐지 그러니까 무식했구나? 하며 상황을 납득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얼굴을 그저 힐끗 바라보았다.


“아, 태한이 배급사 가지고 있지 않아? 그 뭐야, 너 데뷔작 거기.”

“아, 거기.”

“그거 버리는 카드라는 말 많던데 그거 키우려나보네.”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래서 1년인 건 가. 문득 떠오르는 묻어 놓았던 기억을 이야기에 짜맞추던 나는 곧 앞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근데 이 인간은 어딜 간 거야. 잠깐 있어요. 그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던 얼굴이 벌써 한 시간 째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게 잠깐이냐고.”

“어?”

“아, 아니에요.”


김종현의 잠깐은 도대체 얼마인건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김종현의 금방이, 잠깐이, 나와는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은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나를 이렇게 매번 기다리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근데 태한에 김씨가 있어? 지금 건설 대표가 한 씨 아닌가?”

“내가 재벌 집안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뻥 아니지?”

“뻥이면 누나를 어떻게 잡아와.”

“하긴, 피터까지 잡아온 거 보면 구라는 아닌 것 같고.”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어디예요? 막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던 손이 곧 내게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멈추었다.


“뭐라고요?”

“잘생겼잖아, 너네 대표.”

“.....”

“머리 까니까 진짜 남자답던데. 완전 배우.”

“배우는 무슨.”


근데 김 대표 노선이 틀렸어, 본인이 배우를 했어야 해. 너랑 계약 할 게 아니라 스스로 했으면 아마 훨씬 더 잘 됐을거라고 자기가 더 아쉬워 하는 얼굴을 보다 다시 휴대전화로 시선을 떨어뜨린 나는 곧 보내지 못하고 남겨두었던 메시지를 그대로 지워버렸다.


「주스 마시고 싶어요. 자몽.」


선을 넘을 순 없었다. 필요하지 않는데 김종현을 찾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어디냐 물었을 때 왜냐고 묻는 다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


그냥 해봤다고, 잠깐이라더니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


보고 싶다고, 옆에 있어 달라고.


“.....”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이 아닌 요구였다. 그러면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돌아올 김종현을 나는 기다리면 된다. 여기서, 가만히.


“아, 왜 안와.”


그러나 그렇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는 김종현이 나타나지 않는 건 예상은 했지만 순간 울컥 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여튼 말을 듣는 법이 없어요.


“아, 네.”


이제 들어갈게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휴대전화만 붙잡고 있는 나를 향해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목소리에 순간 온 몸의 기관이 다시 멈춰버린 것처럼 뻣뻣해졌다. 이번에는 마주 한 벽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엉망으로, 어설프게 헤매고 있던 꿈 속의 나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붙잡아 주는 손은 없었다.


“...아, 진짜.”


크게 심호흡을 하며, 굴러떨어진 그곳에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킬 준비를 하는 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것처럼 부들부들 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던 몸은 파스스 낙엽처럼 부서질 것만 같았다.


“꼭 이럴 때 없어, 진짜. 도움이 안돼, 진짜.”

“....”


내 불안과 비례하여 소란스러워지는 공간으로 가기 위해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믿지 않는 세상의 온갖 신을 소환한 나는 이내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누군가를 향해 중얼거렸다.


“김종현, 진짜.”

“왜요.”


제발, 나 혼자 들어가게 하지 말아요. 김종현씨.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반드시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마지막 기도와 함께 닫힌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던 나는 그보다 먼저 열리는 문 너머로 나타나는 얼굴에 이내 그대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이제와요, 어디 갔다가!”

“이것저것 필요한 것 좀..”

“이것저것 뭐요. 지금 그쪽한테 나보다 중요한게 뭔데.”

“.....”

“내가 제일 필요한데.”


다가오던 벽을 막아선 채, 내 불안과 내 초조와 내 걱정을 일단 가로 막아 선 김종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터지는 원망을 중얼거리던 나는 이내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울지마요, 촬영해야하는데.”

“내가 바보예요? 여기서 울게?”

“.....”

“어디 가지 마요. 이런 날 매니저 찾을 일 많으니까.”

“.....”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김종현을 바라보던 나는 곧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풀며 몸을 돌려섰다.


“최민기씨.”

“네.”

“오늘 멋있어요, 예쁘고.”

“.....”

“고생했어요, 그리고 미안합니다.”

“.....”

“급하게 준비하느라 힘들게 해서.”


이제 나가야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이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심드렁하게 돌렸던 고개를 다시 돌리지 못한 채 김종현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듣지 말아야 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나만큼 긴장된 얼굴로 하는 김종현을 묵묵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대답 대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

“....”


그러나 이내 내 손을 붙잡아 오는 온기에 걸음을 멈춘 나는 곧 어느새 내 옆에 서있는 김종현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긴장 풀고 하던 대로 해요.”

“....”

“그래도 불안하면 앞에 봐요.”

“....”


내 손을 붙잡은 채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김종현의 얼굴만 들여다보며 그 걸음을 따라 걷던 나는 이내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에서 멈춘 김종현을 따라 같이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공간을 둘러보다 나를 향해 돌아서는 김종현을 향해 몸을 돌려 선 나는 이내 잡은 손에 더욱 바짝 들어가는 힘을 느끼며 올곧게 김종현을 응시했다.


“내가 있을게요.”

“.....”

“당신 앞에 계속.”

“.....”


너의 불안과 너의 초조보다 더 앞에. 너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짧은 기계음과 함께 모든 조명이 살아났다.




&

너무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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