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밀레이나는 널찍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계단을 몇 층인가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샤 아몬디네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어 조용한 성에서는 차갑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인적 없는 성을 돌아다니는 건 오귀스트 성에서도 종종 하던 일이었는데, 장소가 달라서인지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아몬디네 성은 화려했으나 어딘가 따뜻한 느낌이 결여되어 있었다. 황폐하고 서늘한 분위기에 몸이 식어서, 서쪽 탑의 돌계단을 오를 때는 굽힌 무릎이 뻑뻑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나선계단을 서른 개쯤 밟자 귓가에 얇은 소리가 울렸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소리는 생뚱맞게도 피아노 소리였다. 화려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다정한 선율이었다. 밝고 통통 튀어야 할 음이 조금 쓸쓸하게 들린 건, 탑의 창문을 두드리는 초봄의 바람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조금 빨라져서, 계단을 다 올라 연주를 더욱 선명히 들을 수 있을 때 즈음에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서쪽 탑의 꼭대기에는 사샤 아몬디네가 있었다. 새카만 피아노 앞에 앉은 그녀는, 사밀레이나를 보았으나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저 치고 싶은 만큼 피아노를 양껏 칠 뿐이었다. 사밀레이나는 가까이 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 곁에 있는 낡은 의자를—늘 반짝거리기만 하는 아몬디네 성이라던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낡은 것이었다. 의자도, 피아노도.—발견하고는 거기에 몸을 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삼십 분인지, 한 시간인지는 모를 일이다. 사샤는 다섯 개도 넘는 곡을 쳤고, 사밀레이나는 등받이에 몸을 가볍게 기댄 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그녀의 연주를 들었다.


“손가락이 휘었어요.”


사샤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손가락 말이에요.”

“…….”

“발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손발이 곱지 않아요. 음악을 좋아했어요. 가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어요. 그저 아름다운 걸 보면 마음이 설렜고, 슬픈 시를 보면 눈물이 났어요. 좋아하는 곡을 한 곡 다 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이 나라에서 저만큼 예쁘게 춤을 출 수 있는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 황국 최고의 무용수가 될 수도 있었죠. 그것도 아니라면 피아노 연주자? 소녀 합창단? 제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 관객의 얼굴이 황홀감으로 물드는 것이 즐거웠어요. 저는 아름다웠어요. 아름다움은 제 무기였어요. 그렇게 믿었죠.”

“아름다움이, 무기라고요.”


사밀레이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사샤의 말이 꼭 동화처럼 들렸다. 그녀가 그런 자유롭고, 소박하고, 거리낄 것 없는 어린애였다고?

사샤는 건반을 몇 개 누르며 말했다.


“사람들은 예쁜 제게 약하죠. 제가 웃기라도 하면 화를 내던 것도 잊어요. 제게 친절한 건 당연했어요. 모두가 저를 사랑했고, 탐냈고, 제가 사뿐사뿐 걸을 때면 탄식이 흘러나왔어요. 아직 다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이니 만개하면 어찌나 예쁠까. 설익은 저조차도 그렇게 고왔는데.”


그녀는 나쁜 농담을 하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런 제게 첫 혼담이 들어온 게 열다섯이었어요. 무려 친척 가문의 사람이었어요. 아무리 양자라지만, 제 숙부의 아들이었다고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제 인생을 열다섯부터 팔아넘기려고 했던, 그 대단한 이유 말이에요.”

“글쎄요…여자가 후작 가문을 잇는 게 모양이 좋지 않아서였을까요.”

“그 애가 생일선물로 저를 갖고 싶다고 했대요.”


터무니없다. 사밀레이나가 입을 딱 벌렸다.


“아름다움이 귀족 여자의 무기라고 믿었던 순진한 저는 열다섯 살에 세상을 알았죠. 반짝이는 무기가 아니라, 그럴싸한 도구였던 거예요. 부모님은 제게 약혼을 하라며 반쯤 위협했어요. 온갖 말을 들었죠. 어머니는 겁에 질려 있었어요.”


‘사샤. 누구랑 결혼한들 다를 것 같니? 응?’ 그녀는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떨리는 눈동자로 악다구니를 쏟아내던 어머니의 표정이, 그 악의가 선연해서 여전히 그 순간을 꿈에서 본다. ‘똑같아, 사샤, 똑같다고. 결혼해. 그 애가 후작이 되어야 해. 숙부의 권력과 돈이 있어야만 우리는 지금의 유명세를 유지할 수 있어. 밉보이는 순간 우린 끝나. 사샤. 네가 잘못하면, 우리 가문이 무너질 거야. 너, 우리 삶을 모두 망칠 거니?’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두려웠거든요. 그냥 그 모든 게요. 저는 그냥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고 싶었어요. 작은 손으로 억지로 건반을 누르겠다고 어린 시절 내내 손을 펴서 새끼손가락이 바깥으로 휘었어도, 발레를 배우느라 발톱이 빠지고 핏줄이 튀어나와 농담으로도 곱다고 말할 수 없는 발이 되어도.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저는 저로 충만했으니까요. 저를 완성할 수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잘 완성된 제가, 머리에 리본을 달고, 누군가의 ‘선물’ 따위로 가는 그 현실을. 어때요. 당신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사밀레이나.”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끔찍한 일이에요.”

“귀족들의 삶은 끔찍해요. 대부분.”

“그래서 약혼했어요?”

“공식적으로 그럴 수 없는 사이였어요. 그래서 무슨 수를 쓴 줄 아세요?”


사밀레이나는 이어지는 사샤의 말이 두려웠다. 그녀가 연 상자에서 무엇이 나올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 같았다.


“우리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을 퍼뜨린 거예요. 아이라도 생기면, 입양된 은혜를 갚고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여자와 아이를 책임지고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짠 거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아이라도 생기면, 이라는 전제조건에 사샤 아몬디네의 뜻은 없었다. 그녀가 이룬 것, 이루고 싶은 것, 그녀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사밀레이나는 침묵했다. 그 사촌은 사샤를 겁탈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이를 갖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직접 듣지 않았으나 사밀레이나는 확신했다. 사샤는 차갑게 웃었다. 그 모든 끔찍한 일에 닳고 식어버린 미소였다.


“그 남자가 혹시….”

“황실 근위대장, 에멜드 퀜렌 경이죠. 검을 뽑지도 않을 텐데 ‘경’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의 눈을 보신 적, 있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멜드 퀜렌이라면, 일전에 한 번 오귀스트 성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사밀레이나의 아버지가 상단 일을 할 때 기사단 쪽으로 물품을 납품한 적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오만방자한 에멜드 퀜렌은 사밀레이나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은 더 많았다. 에멜드는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아서 직접 검을 휘두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는 대체로 제 또래인 황자의 뒤를 따라다니거나 서류 업무를 한다는 핑계로 돈을 횡령하곤 했는데, 오귀스트 백작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진땀을 뺐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왼쪽 눈은 늘 안대를 하고 있어서 어떤 상태인지 볼 일도 없었고, 사실 사밀레이나는 그에게 그리 관심이 없었다.

사샤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제가 찔렀답니다. 그가 선물한 황금 비녀로요. 선물이라고 부를 것도 없네요. ‘화대’라고 정정할까요?”


사샤가 에멜드를 공격했다. 한쪽 눈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 사실로 사샤를 벌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사샤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진실이 알려지면 근위대장이 될 청년의 앞날이 어그러졌을 것이다.

그 괴이한 날을 사샤는 기억한다. 그 남자는 눈에서 피를 흘리며 무어라 거친 욕을 했다. 내용이야 진부해서 더 들어줄 것도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역겨웠다. 사샤는 그의 눈이 아니라 심장을 찔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쁘고 좋은 것만 보는 시절은 끝났다. 아무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다. 사샤는 강해져야 했다. 아니, 강해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뾰족해져야 했다. 온몸을 바쳐 저를 위협하는 이를 찔러버릴 수 있을 만큼.

후작 부부와 사샤는 그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숙부와 사이가 틀어진 아버지는 사샤를 천덕꾸러기로 취급했고, 어머니는 지독한 것을 보듯 보았다. 사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는 그들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후작 부부는 사샤를 완전히 배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샤는 악착같이 가문에 남았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그렇다면 후작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딸까지 팔아넘기면서 갖고 싶어 했던 힘을 그녀의 손아귀에 쥐고 싶었다. 똑같이 되돌려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피아노와 발레를 좋아하던 열다섯짜리는 그렇게 독해졌다.


“…잠시만요.”


사밀레이나는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깨닫고 손을 뻗어 사샤의 옷자락을 쥐었다. 연적색 눈동자가 사밀레이나를 뚫어지게 바라고 있었다. 이해를 바라듯, 혹은 동정을 바라듯 흔들리는 그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사샤는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삼켰다. 지난 일이다. 후회하지 않았고, 바꿀 수 없었다. 약해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사샤는 사밀레이나가 현명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설명을 길게 반복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사샤가 후작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아챈 부부는 새 후사를 낳기로 했다. 사샤에게 후작 작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노산을 강행했다. 아들을 낳기만을 고대했을 것이다. 그래야 역시 가문을 물려받는 건 사내가 좋지 않겠느냐는 ‘전통적인’ 이유를 들 수 있을 터였다. 사샤가 후작 부부와 틀어진 것이 열다섯, 그리고 사라가 태어난 것이 그로부터 이삼 년쯤 뒤의 일이다. 그동안 부부는 아이를 낳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젊지 않은 몸에 아이를 품으려니 유산도 쉬웠다.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아들만 태어난다면. 아들만, 태어나 준다면.

그리고 태어난 것이 사라였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사라 아몬디네였다. 미숙아로 태어나, 태어나자마자 열병을 앓고, 혀와 코가 망가져 단 맛과 쓴 맛도 구분하지 못하는 깡마른 여자아이.


“여기, 이 피아노가 있던 곳. 원래는 산실이었답니다.”


사라가 태어난 날 이 탑이 떠나가도록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작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는 너무 작아서 아이가 정말 태어난 건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사샤는 복잡한 기분으로 계단에 쪼그려 앉아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것 같은 그 비참한 시간의 끝에는 어머니의 절규가 있었다.

허망했다. 차라리 사내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랐던 건가? 그런 생각도 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 그 애를 짓누르고 일어선다면 누구도 그녀에게 감히 예전 같은 짓을 하려고 하지는 않겠지. 차라리 그런 증명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태어난 건 너무도 연약하고 초라한 여자아이였다. 다 자라 봤자, 아무리 아름답게 자라 봤자 저와 비슷한 삶을 살아갈. 누군가의 도구가 되고, 장식이 될. 그런 어린아이.

포대기를 안고 내려가는 시종을 계단에서 밀어버릴까 고민도 했었다. 이 까마득하게 긴 나선계단에서, 툭, 저 등을 걷어차기만 한다면. 그리고 숨어버린다면. 태어나기도 전에 제 대적자로 점찍힌 그 가여운 아이가 현실을 알기 전에 죽여버리는 게, 차라리 그 아이를 위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사샤는 예쁘게 웃으며 시종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미소에 잠시 넋이 나간 시종이 어물거리는 새에, 사샤는 발돋움을 살짝 하고 포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더욱 허망했다.


“여기에만 있으면, 자꾸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피아노를 놨죠. 피아노를 치면 좀 나은 것 같아서.”


그 안에 있는 애가, 피도 멀끔하게 닦지 못해 얼룩덜룩한 피부에 눈도 뜨지 못한 쪼글쪼글한 핏덩이가. 저게 정말 자라기는 하는지 의아할 만큼 작고 초라한 손가락 열 개와 흔적만 겨우 있는 듯한 조그마한 코가.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사랑스러워서.


“이 사랑이 잘못됐어요?”


사샤는 억울한 말투로 물었다.


“정말 이 사랑이 잘못됐어요, 사밀레이나? 저는 이 애를 죽이지 않았어요.”


죽이지 않을 뿐일까? 사랑했다.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다. 저처럼 되지 않길 바라며 금처럼, 비단처럼, 보석처럼 귀하게 보호했다. 제 어린 시절을 투영한 비겁함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좋았다. 적어도 저처럼 비참하고 고단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제 자리를 내어줄 뿐만 아니라 곁을 내어주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려고 했다. 이 어린 새가 스스로 날아오를 수 있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어떤 괘씸한 매도 날개를 물어뜯지 못하도록,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날개가 젖지 않도록 새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애가 스스로 문을 열었다. 열다섯이 되자마자.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걸로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둘 사랑이 아니었다. 괜찮았다.

사라는 후작 부부를 죽인 것이 사샤임을 알아차렸으면서도 묻지도 않았다. 왜 죽였는지.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토록 열심히 조사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직접 질문하지 않았다. 사실 그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솔직해질 수는 있었을까? 그 아이에게 그 가혹한 현실을 알려, 고운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싶기는 했을까? 그러니 그 또한 괜찮았다.

그러나 사라가 말했다. 사랑이 잘못됐다고. 우리가 잘못됐다고.

사샤는 그 말이 아팠다.


“…….”


사밀레이나가 조용히 일어나 섰다. 사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사샤가 일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동정해요?”


사밀레이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금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네요. 정직하고 싶어서인가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솔직했으니까요.”

“저를 이해해요? 사밀레이나.”

“아뇨, 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회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제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누가 감히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사밀레이나. 그러나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이죠. 여전히 저는 사라를 보내고 싶지 않아요. 새장 밖이 위험하다는 걸 그 애는 몰라요. 사라는 고작 열다섯이에요. 너무 어리고, 착각하기 쉬운 나이잖아요.”

“그렇다고 영원히 가둬둘 수는 없어요. 가두는 게 지키는 건 아니에요. 사샤.”

“…….”

“사샤. 사라는 당신의 어린 시절이 아니에요. 그건 그 애의 삶을 무시하는 행위에요. 당신의 삶이 도구로 쓰이는 것이 괴로웠다면, 그 애의 삶을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도구로 써서도 안 돼요.”

“이건 정당한 보호에요.”

“정당한 보호가 아니에요.”

“당신은 몰라요. 그런 적이 없으니까. 제가 독단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당신도 제이드가 차기 백작이 될 거라고, 본인의 의사를 묻기도 전에 결정했으면서? 그게 당신의 임기응변이었다는 걸 제가 모를 것 같았어요?”


사샤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이자 사밀레이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처음에는 궁금했어요, 사샤.”

“뭘 궁금해했죠?”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사밀레이나에게 사샤가 너무 어렵고, 복잡고, 두렵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 격차는 이해로 메꿔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정반대의 선택을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슷한 곳에 서 있었으나 정반대를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이 보는 쪽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사샤는 슬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렇겠군요. 후회할지도 몰라요.”

“그러지 않을 것을 아시잖아요.”

“아쉽네요. 정말.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방금까지 저를 타박하셨잖아요.”

“별개의 일이에요. 대신 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었던, 제 구구절절한 개인사를 당신에게 털어놓았어요.”

“그걸 제가 소문이라도 낸다면?”

“제거하겠죠, 당신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

“잔인해요? 저는 원래 그렇게 살았어요. 그렇게 살아남았어요.”

“그러지 않을게요.”

“제가 당신을 죽이려 해도?”

“네.”

“왜요?”


사밀레이나는 똑같은 말을 사샤에게 돌려주었다.


“별개의 일이니까.”

“내가 가여워요? 사밀레이나.”

“저는 잘 몰랐는데, 저는 사람을 쉽게 가여워하더라고요.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사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이만 내려갈게요. 사라에게는 당신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전할 거예요. 동생의 사과를 바라시지 않을 테니까요.”

“오귀스트 가에 둘도 없는 현명한 이가 태어났는데, 하필이면 왜 여인일까. 여신도 무정하시지.”


사밀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글 :: 사나 (@sanawrite), plea00@naver.com
그림 :: 사윤 (@Sayun_0712), skysky4041@gmail.com

디자인 :: 장미 (@BeYour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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