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아..."

  원의는 현이 비운 자리에 앉아 멍하니 명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아버님도 이리 돌아가시고... 이제 무얼 위해 살아가야할까? 너는 이미 다른 여인의 사람이 되었고, 아버님은 복권을 하시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이제 난 누구를 바라보며 살아가야할까? 명아..."

  명의 머리를 쓰다듬는 원의의 손길은 작은 떨림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소리없이 눈물줄기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씨... 울지마요."

  어느 새 깨었는지 명이 손을 들어 원의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원의는 제 눈에 닿은 익숙한 손길과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 먹고 있으려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함에 마음이 내려 앉았다.

  "예쁜 우리 아씨... 그렇게 울면 못나서 시집도  못가요. 그러니 그만 울어요."

  명의 힘없는 미소와 목소리에도 여전히 원의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왜... 왜 나 때문에..."

  그녀는 말하였지만 울음과 뒤섞인 흐느낌에 말을 맺지 못하였다.

  "그야... 아씨가 없으면... 못살아갈 것 같으니까요."

  "바보야... 나도... 나도 네가 없으면... 어찌 살아가라고..."

  "에이... 거짓말..."

  힘없이 말하던 명은 마치 꿈 속인 양 초점없는 흐릿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깊은 수면 속으로 의식을 흩어버렸다. 원의는 깊이 잠든 명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만 계속 흘리고 있었다.

  '너를 두고 내가 어찌 혼자 살아가겠니. 아버님이 좋은 곳에 혼처를 마련한다 하셨지만, 내심 그 날이 올까 싶어 애써 외면했는데... 그날이 오면 이 마음도 접어질 것이라 생각해봤지만, 오늘 알았어. 그 마음 부러지면 부러지지, 절대 접어질 것은 아니라는걸... 어떻게 해야 너를 잡을 수 있을까...'

  원의는 선이 고운 명의 손을 조용히 잡고는 반듯한 그의 이마에 제 입술을 천천히 갖다 대었다. 



  성철의 사랑채에 은밀히 방문한 손님은 현이었다. 먼저 대군저에 들렀던 그는 진헌에게 호위로 쓸 인원들을 추스려 정환의 집으로 가라고 명한 다음 성철을 찾아갔다. 

  "대군대감, 늦은 밤 어인 일이십니까?"

  성철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밤 늦게 이어진 명의 장원급제 축하잔치에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하였다. 이부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서인지 병풍 앞 쪽엔 구깃한 이불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맨 바닥에 급한대로 방석 두 개를 놓고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는 성철과 현의 분위기는 자못 심각해보였다. 성철 역시 막 잠에서 깼으나, 자헌대군이 이 야심한 시각에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야심한 밤에 미안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보 영감이 살해당하였습니다."

  현의 말에 성철은 늦도록 마신 술기운이 훅 날아가며 정신이 차갑게 내려오는 듯 하였다.

  "우보...가... 죽다니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크흠!"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현에게 되묻던 성철은 겨울이면 계속 달고사는 잔기침이 그치지 않고 연신 쿨럭대었다. 그의 기침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현은 조용하면서도 낮게 말하였다.

  "다 내 불찰입니다. 우보 영감의 안위를 더욱 살폈어야 하는데..."

  현은 정환의 몸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라 제일검으로 이름 날린 정환에게 호위를 과하게 붙이거나 하는 것이 그에게는 실례가 되는 것이라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가 충분히 그런 일에 대응할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이 안좋아졌다고는 하나 정환을 대적할 만한 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가장 컸다. 게다가 아까의 상황을 보았을 땐, 분명 정환 혼자가 아니라 원의와 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향이 컸다.

  "대감... 이제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여서는 안될 듯 합니다. 벌써 우보영감에게 손을 쓴 놈들입니다. 그 궁녀가 아직 우리 손에 있다고는 하나, 그녀가 의금부에 하옥된 이후에 어떤 일을 꾸밀 지 모를 일입니다. 또한, 좌찬성 대감 역시 어찌할 지 모를 놈들이라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철은 다시 나오려는 잔기침을 간신히 참아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아 이 사건의 재조사를 담당하는 저를 해코지를 한다는 것은 그 사건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일 수 밖에 없고, 저를 해코지하다가 꼬리를 밟힐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듯 합니다만..."

  "그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가 어떻게 나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현이 잠시 말을 흐리자, 성철은 궁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곧 파루(罷漏, 통금해제시간)입니다. 대감께서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습니다."

  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궁금해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성철에게 입을 떼었다.

  "우보영감의 시신이 있는 곳입니다."

  "아아... 가야지요. 당연히 가야지요."

  늘 단정하고 곧은 표정을 한 성철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눈시울이 붉게 보이는 것은 호롱불에 일렁이는 불꽃 탓이었을까.

  "그리고..."

  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명이가 많이 다쳤습니다."

  성철은 무슨 말인가 하였다. 우보가 죽은 이야기에 명이가 다친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인가. 이 밤 중에 명이가 왜 그곳에 있는지 머릿 속이 헝클어졌다.

  "명이가... 말입니까?"

  언뜻 이해되지 않은 성철이 현에게 되물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현이 그에 답하였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우보 영감이 명이를 살리려고 대신 칼을 맞았습니다. 명이는 그 직전에 우보 영감의 여식을 구하려다가 다친 것으로 보입니다."

  성철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명이가 왜 그 시각에 그곳에 있었는지, 우보의 여식을 구하려다가 다친 연유도 한순간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가서 보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한숨 쉬듯 숨을 뱉으며 말을 한 현은 멀리서 파루의 종소리가 들리자 성철에게 눈짓으로 채비할 것을 권하였다.

  먼저 사랑채 밖에 나와있던 현은 잠시 뒤 의관을 정제하고 나온 성철을 보고는 솟을 대문 쪽으로 발길을 빠르게 옮기었다. 대문 앞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칠구가 성철이 다른 선비와 함께 대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시각에 대감마님께서 어디를 가시는 것이지? 어라? 저 양반은 언제 우리 집에 왔었던거지?'

  칠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잔치에 왔던 손님들은 모두 다 돌려보낸 것 같았다. 언제 온 것인지, 아니면 진짜 자신이 배웅한 손님 중에 놓친 손님이 있었는지 갸웃거리며 다시 빗자루질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오늘 알아볼 일이 있었다. 근 한 달 넘게 자신의 머릿 속을 어지럽히고, 최근 이상하게 여겨지는 일 때문이었다. 종놈이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었지만, 자신의 마음 저 한 구석에서는 연신 경고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그것이 무엇인지 조심히 알아보아야 했다.



  현과 함께 정환의 집으로 온 성철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적지않이 놀랐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마당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멍석에 가려진 시체들과 핏자국, 그리고 가장 안쪽 별당 마당에 흩뿌려진 많은 양의 피가 지난밤이 얼마나 긴박했는 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진헌은 큰 마당에 사람들의 시신을 정리한 후 집안 곳곳의 경비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현이 성철과 함께 오자, 진헌은 눈빛으로 정리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현은 먼저 정환이 있는 쪽으로 성철을 안내하였다. 작은 방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정환의 얼굴엔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듯 평온해 보였다. 다만 곳곳에 나있는 검흔들이 치열한 간밤의 처절함을 드러내었다. 

  "우보... 이 사람아!"

  성철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냉골 같은 방바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정환의 시신 앞에 무릎 꿇었다.

  "이 무정한 사람아, 다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 먼 길을 혼자 떠나는가!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자네를 억지로라도 주상전하께 데리고 갔었어야 했는데, 다 내 불찰이네!"

  자신이 억지로 정환을 왕에게 데려갔었더라면, 아마 그 배후 세력이 섣불리 그를 건드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왕이 알기 전에 없애려 했던 것일 것이다. 만약, 왕에게 그를 보이고, 왕이 정환이 살아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면, 오늘 같은 일은 안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자네의 그 부탁... 내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없네. 내 들어줄터이니, 좀 일어나보게. 여보게, 우보! 아아..."

  불러도 미동없는 정환의 앞에서 성철은 소리없는 통곡을 하였다. 

  현은 성철이 이리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와 정환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철이 조금 전 '부탁'이라는 단어에 머릿 속에서 우보가 자신에게 한 부탁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아, 나도 아직 그의 부탁을 행(行)하여 주질 않았구나.'

  속으로 탄식하던 현은 여전히 슬퍼하는 성철의 등을 바라보았다.




  겨우 추스린 마음을 안고 성철은 현이 안내하는 별당의 안쪽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상처를 입고 누워있는 명의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댄 채 잠든 여인의 모습이 성철의 눈에 들어왔다.

  "간밤에 간호를 하다가 잠들었나봅니다. 명이 역시 어제 기절하듯 잠든 후에 일어나지 않았군요."

  현이 나지막히 말하였다. 성철은 아무 말 없이 명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비록 노비로 오래 살아왔다고 하나, 석이 보다 늘 마음이 더 쓰이고 애틋하게 느꼈던 아이였다. 고된 일로 몸이 성하지 않았을 때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일을 하곤 하던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힘없이 누워 있는 것을 보니 성철의 마음이 쓰라렸다.

  "누가... 누가 우보와 명이를 이리 만든 것입니까?"

  조용하지만 분노가 깃든 목소리였다.

  "내가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다 벌어지고 난 뒤였소. 살수(殺手)는 이미 없었고, 이들 셋만 있었습니다. 다만, 짐작컨대 우리가 생각하는 그쪽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렇겠지요. 그럴 것 같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성철은 명을 바라보다가 그 옆에 누운 원의에게 눈을 돌렸다.

  "이 여인은...?"

  "우보 영감의 여식입니다."

  "아..."

  낮게 신음하였다.

  "명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습니다. 대감께서는 재조사건을 처리하시느라 정신이 없을터이니, 명의 치료는 제가 맡아 하겠습니다. 당분간 제게 맡겨주시지요."

  "아닙니다. 대군대감께 그런 수고스러움을 드릴 순 없습니다. 저희 집에서 의원을 불러 치료토록 하겠습니다."

  성철의 말에 현은 당황하여 얼른 말을 받았다.

  "아니, 아닙니다. 수고롭다니요. 그리고, 갑자기 대감의 아들이 칼을 맞고 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겠습니까? 명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나을 때까지 여기에서 치료하게 하시지요. 주변에는 명이가 대과(大科) 준비를 위해 잠시 산사(山寺)에 들어갔다고 해두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럴 듯한 핑계를 댄 현이 조심스레 성철을 바라보았다. 성철은 모를 것이었다. 명이가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철썩같이 사내아이라고 믿고 천한 노비 출신의 명을 정식 양반 신분으로 입적까지 시켰는데 알고보니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었다고 한다면 그 보다 낭패가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성철이 인품이 좋다고는 하나, 여인 보다 사내를 중시하는 이 나라 풍조에서 과연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양반 신분을 그대로 유지시킬 지, 아니, 과거에 이미 입격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후과(後果)를 감당할 수 있을 지 싶었다. 현의 생각에 명이 여인이라는 사실은 자신만 알아야 했다. 

  '어?'

  그렇게 생각하던 현이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성철네 계집종과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앞뒤가 맞아들지 않았다. 

  '명도 여인이고, 그 계집종도 여인일텐데 어찌 아이가 생길 수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그 계집종은 명이 여인인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고, 그 아이는 아마도 성철의 망나니 큰 아들의 아이일 가능성이 상당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역시 혼자 수발하기 어려우니, 내 듣기로 명이 가까이 하는 아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이를 이리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일월이 말이군요. 그 아이는 곧 명의 소실(小室)로 들일 아이이니, 그리 하겠습니다. 그 편이 명이에게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싶군요."

  성철이 수긍하며 수락하고 더이상 자신의 집에서 치료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자, 현은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때 잠들어 있던 원의가 그들의 이야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자기도 모르게 명의 손을 붙잡고 그의 곁에 붙어 잠들어 있는 사이 자헌대군 현과 중년의 선비가 방에 들어와 있자 당혹스러움에 얼른 일어나 머리와 옷차림을 단정히 하였다.

  "깨어났습니까?"

  현이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송구합니다. 남녀가 유별한데, 이리 한 방에서 못난 꼴을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원의는 어찌할 줄 몰라 얼굴이 달아오른 채 눈을 둘 곳 없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현에게 말하였다.

  "괜찮습니다. 밤새 명이를 간호하시느라 그러한 것인데요."

  현의 말에 성철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현은 이어서 그녀에게 성철을 소개하였다.

  "이쪽은 명이의 부친 되시는 좌찬성 대감입니다. 대감, 그리고, 이쪽은 우보 영감의 여식 원의 낭자입니다."

  가운데에 서서 현이 서로를 인사시키자, 원의가 먼저 성철을 향해 예의바르게 인사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손원의라고 합니다. 명이가 제 아버님께 학문과 무예를 배웠기에, 명이와는 어려서부터 알고 자란 사이입니다. 부디 못난 모습을 보인 소녀를 용서해주십시오."

  원의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성철을 바라보았다. 성철의 얼굴은 꽤 미남자였다. 중년이었지만, 그 안에 어딘가 모르게 명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역시 명의 부친이 맞았다. 속으로 명의 화사하고 곱상한 얼굴이 성철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이 아비 김성철이오. 우보와는 젊어서 같이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네. 낭자... 상심이 크겠지만, 부디 잘 추스리시오. 우보의 장례는 섭섭치 않게 치루어 주겠소."

  성철은 인자한 얼굴로 원의를 바라보았다. 세상천지에 홀로된 친우의 여식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줄 생각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원의가 그에게 내미는 것이 있었다. 

  "아버님께서 어르신께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의는 마른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는 명의 도포를 성철에게 건네었다.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도포에다가 글을 쓰시고는 명... 도령에게 이 도포를 좌찬성 어르신께 드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또한, 주상전하를 찾아뵙지 못하고 하직하는 불충한 신하를 용서해달라고 꼭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원의는 말하면서 아까 전의 그 광경이 떠올라 말끝에 눈시울이 다시금 붉어져 올라왔다. 정환이 숨을 거두기 전 절박하게 쓴 글이었다. 명에게 부탁하였으나, 지금 정신을 잃고 누워있으니, 그를 대신해 자신이 아비가 원하는 바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원의였다.

  성철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건네는 도포를 받아들었다. 현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도포자락을 펼치는 성철의 손길에 눈을 떼지 않았다. 도포에 써진 글을 읽어내려가는 성철과 현의 눈이 갈 수록 깊은 곳으로 침잠하였다.

  다 읽은 성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보가 주상전하께 자신이 살아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좌로 쓴 것이군요."

  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성철은 그가 왜 마지막 순간에도 이렇게까지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군... 이건?"

  성철의 눈이 도포자락의 글 중 한군데에 머물며 빛을 내었다. 성철의 말에 현이 글을 다시 읽었다. 현 역시 눈에 이채가 돌았다.

  "우보 영감이 일기엔 쓰지 않았던 말이군요."


  《전하, 그 궁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들고 온 소반에는 처음 보는 형태의 술병이 담겨져 있었사옵니다. 세자저하께선 그 전까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으셨고, 경원대군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저하께서 먼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시고, 그 이후에 대군의 잔에 술을 채워주셨습니다. 그 잔을 나누어 마신 후 그 일이 일어났으며, 결단코 경원대군께서 어떠한 다른 움직임도, 어떠한 시도도 하시지 않았음을 소신 목숨 걸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현은 우보의 글에 다시 한번 제 형인 경원대군의 무죄를 확신하였다. 비록 정환이 직접 증언하지는 못하나, 이 글이 그 궁녀와 함께 이전의 조사가 엉터리였음을 충분히 증빙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낙관하는 현과는 달리 조금은 침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성철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군대감 말씀대로 조속히 진행해야겠습니다. 저는 바로 등청(登廳)하여 일을 정리하겠습니다. 전하께는 열흘 내, 아니 문건이 모두 정리되는 가장 빠른 시일 내 고(告)하겠습니다. 허니, 대군께 청(請)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사건을 마무리하려면 당분간 바쁠 듯 합니다. 명이 치료와 더불어 염치 없지만, 우보의 장례를 제 대신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경비는 제가 모두 다 대겠습니다."

  "경비는 걱정하지 마시고 업무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우보 영감의 장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우보의 마지막 가는 길은 벗인 제가 해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성철의 간곡한 말에 현은 그렇게 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 있던 원의가 성철과 현을 향해 큰절을 하였다.

  "낭자, 왜 이러십니까?"

  현이 절을 마치고 일어서는 그녀를 황망히 부축하며 물었다.

  "소녀, 대군대감과 좌찬성 대감의 은혜에 갚을 다를 방도가 없어 이리 큰절만 올리는 점 부디 양해해주십시오."

  "괜찮네. 낭자의 아비는 나의 소싯적 벗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네. 너무 부담갖지 않았으면 하네."

  현은 성철의 얼굴에 띄워진 따뜻한 봄바람 같은 포근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뒤 성철은 현에게 인사를 하고는 등청을 위해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정환의 장례는 현의 주관 하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직 복권되지 않은 그의 상황으로 인해 크게 하지는 못하였으나, 3일 간 정환의 집에서는 엄숙하게 장례가 조용히 치러졌다.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매일 밤 늦게 퇴청(退廳)한 성철이 들러 한참을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그 3일 동안 명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자리보전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는 칼독이 오르는 지 열이 심하게 나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특히, 원의와 현의 부탁으로 불려온 일월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다행히 하룻밤 꼬박 지나 열이 내렸다. 옆에 있는 여인들의 속타는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여전히 명은 잠 속에만 빠져들어 있었다.


  장례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난 어느 날 밤, 고요한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저 조용한 숨소리 뿐이었다. 숨소리가 하나가 아닌 셋이라는 것이 이 조용한 방에서 어색함을 뿜어내는 원인이긴 하였다.

  방 한쪽엔 깨끗한 명주천과 짓이겨진 약초들, 그리고 탕약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아씨, 이만 나가보셔도 되실 듯 합니다."

  만삭의 일월은 움직이는 것이 조금 버거운지 허리를 뒤로 살짝 젖히며 원의를 바라보았다.

  "아니네. 자네 몸도 만삭이라 불편할 듯 하니 내 옆에서 도와주겠네."

  원의의 표정은 덤덤하면서도 고고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옆에 있는 천과 약초가 담긴 쟁반을 끌어다 일월의 옆에 가져다 주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일월을 바라보면서 얼른 시작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일월은 명의 가슴에 난 상처에 덧댄 천을 갈고 약초를 다시 바르려면 저고리를 풀어 가슴을 드러내야 했다. 하지만, 옆에서 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는 원의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양반님네들 사이에서는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는데, 아씨께서는 어찌 계속 고집을 피우십니까?"

  일월이 아예 대놓고 타박하였다. 그녀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때문에 명의 상처를 보는 것이 더뎌져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는 자네는...?"

  "하아, 아씨, 저는 그야 당연히..."

  일월의 말이 원의에 의해 끊겼다.

  "아직은 아니지 않는가. 그... 명이의... 소실(小室)이라는 그...것..."

  원의가 마뜩치 않게 뾰로통한 표정과 말투로 말하였다. 그 모양새가 마치 새침하게 토라진 아이같았다. 일월은 그녀를 보며 잠시 멍하였다.

  '이 아씨... 지금... 나를... 질투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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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이 많이 바빠 업로드가 늦어졌습니다. ㅠ.ㅠ 그래도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초보 작가입니다. 사극 동양풍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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