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호 유기현 임창균 

202호 김아무개여주.. 

203호 이민혁 채형원

나페스와 RPS 

이주헌과 김 아무개 씨 

그리고 켠꿍 그리고 민챙 

크리스마스 외전








에피소드 열다섯

같은 층의 이웃 







MAGAZINE Z-ONE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1-2인 가구의 공간과 삶을 기록합니다.




같은 층의 이웃

- 키우는 곳 -





MAGAZINE Z-ONE에서 12월을 맞아 찾은 인물은 ‘cllin’의 대표 민혁 씨입니다. 모실 수 있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이 : 반갑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집의 모습들을 보고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근래에 광고도 하지 않고, 인터뷰도 거절하신다고 알고 있어서, 저희도 민혁 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없이 연락을 드렸는데 흔쾌히 응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 매거진을 알고 계셨다고요.

이 : 네, 에디터님이랑 통화하면서 말씀 드렸던 그대로예요. 바로 옆집에 친구가 사는데 그 친구가 매달 MAGAZINE Z-ONE을 사서 모으고 있어요. 저한테 ‘너희 집도 여기 나오면 좋겠다’고 보여준 적도 있고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은 많은데, 여기를 제일 좋아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안그래도 저희도 그 이야기를 듣고, 감사하고 또 신기했어요. 옆집 사람? 요새는 사실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 : 저도, 이웃끼리 친해진 건 이 집이 처음이에요. 집 크기 때문인지,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여기가 살짝 언덕에 있어서 그런 건지. 저희 또래가 같은 층에 몰렸어요. 옥상에서 고기 구워 먹다가 친해져서 지금은 거의 가족처럼 지내요. 

저희가 이 이야기를 먼저 살짝 듣고, 이 집에 취재를 오면서 ‘같은 층의 이웃’이라는 주제로 말씀 주신 분들께도 인터뷰 요청을 드리게 되었어요. 비슷한 구조의 공간, 비슷한 또래인 이웃들이 어떻게 다르게 사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 : 큰일이네요. H빌라에서 우리 집이 제일 더러울 텐데. (웃음) 저는 더럽다기 보단 맥시멀리스트라고 우기고 있긴 해요. 저랑 형원이 둘 다 옷을 좋아해서요. 

짐이 많지만, 확실히 감각적인 것과 맥시멀 사이에 있다고 느껴지는 배치예요. 옷을 좋아하셔서 관련해서 브랜드를 오픈하신 건가요?

이 : 어렸을 때는 옷을 좀 생각 없이 사다가, 제 동거인인 형원이가 옷을 사는 걸 보고 제가 좀 느낀 게 있었어요. 걔는 늘 새카만 옷만 사서 입는데 큰마음을 먹고 옷을 사요. 가격이 높은 옷이 아니더라도 되게 오래 걸리고요, 그냥 구매해서 가지는 게 아니라, 형원이가 옷을 자기 삶으로 들여오는 것처럼 보였어요. 옷은 기호의 끝이잖아요. 누군가한테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cllin’의 시작이었어요. 

사실, 저희 같이 라이프스타일과 닿아있는 에디터들과 마케터들 사이에서 ‘cllin’이 굉장히 입소문을 탔었거든요. 민혁 씨 스타일을 따서 벙벙하게 입고 다니는 동료들도 확 늘었구요. 근데 딱 입소문 타던 순간에 마케팅 활동을 끝내시더라고요. 유명 플랫폼에서도 다 사라져서 리셀가가 폭등하는 일도 있었고요. 와. 심상치 않다, 이 브랜드 신념이 있다고 느껴졌어요.

이 :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힘들어서 일을 줄이려고 했던 건데요. (웃음) 사람을 늘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함부로 누군가를 고용했다가 제가 책임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워낙 빨리 질리는 편이어서. 신념이라고 봐주시는 분들 덕분에 저도 깜짝 놀랐어요. 덕분에 굶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집 이야기로 돌아와 볼게요. 빨리 질리는 성격이라고 하셨는데, 이사도 자주 다니신 편인가요?

이 : 아니요. 여기 온 지 4년이 넘었어요. H빌라 또래 이웃 중에는 저랑 형원이가 제일 오래됐어요. 근데 사실 이사 생각은 별로 없어요. 집이 둘이 살기 좁진 않고요. 좁아 보이는 건 짐 때문이에요. 짐은…. 한번 정리는 해야겠지만 (웃음) 형원이도 저도 정리에는 소질이 없는 편이라서요. 대신 방 구조를 자주 옮기고 물건도 옮겨 놓고 해요. 그건 형원이가 도와주기도 하고요. 방에 붙여 놓은 포스터나 담요를 바꾸거나, 자는 곳을 바꾸기도 하고요. 저랑 형원이는 진짜 아무 데서나 자요. 제가 걔 방에서 잘 때도 있고 걔가 제 방에서 잘 때도 있고요. 동거하는 사람들 치고 규칙이 진짜 없어요. 

그러면 보통 자주 싸우지 않나요?

이 : 지금보다 어렸을 땐 진짜 많이 싸웠고, 이제는 잘 안 싸워요. 나이를 먹어서 둘 다 기운이 없나 봐요. 솔직히 말하면 가족보다도 가까워져서, 이제 뭘 해도 그러려니 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 아 쟤랑은 그냥 이러고 계속 살아야겠다, 포기하는 단계. (웃음) 

저희가 형원 씨 인터뷰도 할 예정인데, 비슷한 의견이실 지 궁금합니다. (웃음) 집이라는 공간이 민혁 씨한테 어떤 의미를 주나요?

이 : 좀 진지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쨌든 저는 여기가 저를 키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이 들으시면 어이없으시겠지만요. 다른 곳에 비해서 여기가 터가 좋은 것 같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자주 해요. 형원이도 저도. 그리고 저의 이웃들도 여기 와서는 일이 좀 잘 풀린 느낌이 들거든요. 물론 다른 분들도 다 인터뷰를 해보셔야 하긴 하겠지만요. 저는 여기 와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일을 키워보기도 했고. 실제로 텃밭에서 상추나 수선화 같은 거 씨앗부터 심어 키워보기도 했어요. 저한테는 여기가 키우는 곳,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지내고 싶어요. 

키우는 곳, 이라는 말이 좋네요. 민혁 씨가 크는 것 같기도 하고 민혁 씨가 키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 맞아요. 

원래는 집에 대한 질문이 마지막인데, 곧 크리스마스니까 질문을 하나 더 해보려고 해요. 크리스마스 소원이 있다면요?

이 : 음, 내년에는 더 사랑 받길. 

오, MZ세대 다운 솔직한 야망이군요?

이 : 아니에요. 돈 많이 안 벌어도 돼요. 근데 사랑은 많이 받고 싶어요. 

소원 꼭, 이뤄지시길 기도합니다.











“야, 민혁아.”

“어.”

“너 요리 못 하는 사람이 김치볶음밥 만드는 방법 알어?”


뭔데.


이민혁이 완전히 정신을 빼놓고 대답하고 있다는 거 알았다. 여기는 해뜨는빌 2층 복도. 정확히 말하면 202호와 203호 사이.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회사에서 나눠줬던 후리스 입고, 민낯으로 가만히 서서 귤을 네 개 째 먹고 있다. 하나 정도는 이민혁 입에 넣어주었다. 쳐다도 안 보고 받아 먹고 있는 이민혁이 자기 키만한 트리 위에 반짝이는 건 모조리 신중히 올리고 있었다. 201호와 202호 203호 앞으로 각각 온 택배가 여섯 개가 넘었는데 오늘 오후 내내 그걸 신나서 둘이 다 뜯고 꺼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중간에 당이 딸려서 귤 가지고 나오다가, 아주 문득 알아채고 만 것이다. 이것들이 이민혁이랑 나를 아주 똑똑히 이용해 먹고 있다는 거. 요리 못하는 사람이 김치볶음밥 만드는 것처럼.


“김치 꺼낸 다음에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가 해주잖어.”

“…….”

“우리 지금 이용 당한 거라고.”

“…와. 헐. 미친.”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다. 며칠 전 201호 놀러 가서 저녁 먹고 있는데 트리라도 하나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누구 입에서 나왔는 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핸드폰 뒤적거리던 유기현이 자기 무릎만큼 오는 미니 트리 보여주면서 이런 거? 하길래 민혁이 코웃음을 쳤다. 야, 너는 돈도 잘 버는 게 배포가 작냐? 하는 소리에 버튼 꾹 눌린 유기현이 자기 키보다 더 큰 트리를 샀다. 그걸 꾸미는 오너먼트는 이민혁과 채형원이 샀고 조명과 별은 내가 샀다. 그렇게 온 택배가 여섯개. 혼자면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유기현이 [야 택배 왔다는데] 하는 소리에 집에서 뛰쳐나온 게 둘이었다. 연차 쌓여 집에서 하루 쉬고 있던 나와, 요새 일 줄어 재택근무 하는 이민혁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한참 지나서야 알아챈 거였다. [형이랑 누나가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임창균의 카톡을 보며, 야. 우리 지금 이용당하는 거라고. 근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걸 오타쿠들이 어떻게 참겠나 싶다. 진심이 우러나오는 행동이다. 오너먼트 하나 이유 없이 공간을 차지 하지 않는다.


귤 열 개 쯤 먹고, 어깨를 같이 붙어서도 한 시간이 꼬박 넘게 걸렸다. 불 켜고 나니까 장관이었다. 트리 불빛이 비치는 민혁이의 얼굴에 어룽어룽 작은 감동이 어린다. 나이 서른 먹고 저렇게 소년 같은 얼굴이 나올 일인가 싶다. 근데 진짜 대박, 너무 이쁘다. 거기 서봐봐. 초등학생처럼 브이하고 선 이민혁 사진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찍어주고 해뜨는빌 단톡에 올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봐봐]


순식간에 숫자가 하나씩 빠르게 줄어들었다. 지 사진 마음에 들었는지 인스타에 올린댄다. 댕글댕글 웃으며 트리 한 번 보고 핸드폰 한 번 보고 하던 민혁이 있자나, 하고 조금 혀짧은 소리를 내며 입을 연다. 응? 하고 고개 들었다가 잠깐 쫄았다. 뭐지. 봤던 얼굴인데. 언제 봤던 표정이더라. 네가 이주헌 짝꿍이니까 브랜드 파티 어쩌고 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길 때 표정인데, 이거.


“…왜.”

“나 내일 집에서 인터뷰 하거든? 전에 네가 보여줬던 그 잡지 있잖아. 거기서 디엠 왔었어. 좀 해보고 싶더라고.”

“헐. 대박, 나 거기 진짜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너도 내일 인터뷰 하나만 해라.”

“뭐?”


아 이새끼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같은 층의 이웃

- 나아지는 곳 -





만나서 반갑습니다. MAGAZINE Z-ONE의 찐구독자를 뵙게 되어서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김 : 제가, 원래부터 정말 좋아하던 매거진이라 예전부터 제가 민혁이한테 이야기했던 적이 있어요. 좋은 기회로 이런 경험도 해보게 되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터뷰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매거진을 좋게 봐주셔서, 덕분에 이렇게 좋은 취재 기회가 생겼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가 꼭 취재를 했어야 하는 집이네요.

김 : 감사합니다. 

이 : 원래 말 많은 앤데 긴장을 한 모양이네요. 

김 : 이민혁 씨는 왜 저희 집까지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웃음) 

아, 저희도 요청 드린 건 아니었는데 재밌는 구경이라면서 같이 오시더라고요. 지금 이 집이 방이 세 개죠? 3인 가족까지도 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데, 혼자 거주를 하시네요?

김 : 네, 맞아요. 거실처럼 쓸 수 있는 공간이 하나 있고, 나머지 방이 두 개가 있어요. 혼자 살긴 살짝 큰 편이고, 민혁이가 살고 있는 집이랑 딱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구조예요. 기현이와 창균이가 살고 있는 집은 안방이랑 주방이 조금 더 크고요. 이 전에도 자취를 길게 했는데 저도 작은 곳에서 원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큰 집을 오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때마침 회사에서 저금리로 대출이 나왔고요. (웃음) 사실 이 전에 거주하신 분들이 워낙 오래 사셔서 처음엔 좀 낡아 보였는데 제가 꾸미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솔직히 말하면, 살짝 후져서 더 좋았어요. 아, 후지다는 표현 써도 되나요? (웃음) 그렇지만 정말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어요. 

그렇군요, 저도 살게 되는 공간은 가끔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케터라고 들었는데, 직업적인 부분 때문일까요. 감각이 있다고 느껴졌어요. 집을 꾸밀 때는 뭘 가장 많이 신경 쓰시나요? 레퍼런스 삼은 컬러나 분위기가 따로 있으신가요?

김 : 우선 MAGAZINE Z-ONE을 진짜 정말 많이 봤구요. (웃음) 보면 사실 정말 잘 해놓고 사시는 분들 많잖아요. 근데 진짜 멋있는 집은 멋을 부린 집이 아니라 취향이 확실한 사람들의 집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좋아하는 게 많고 또 좋아하면 깊게 좋아하는 편이라, 이 집 구석구석에서 취향의 쓰임새가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손 닿는 곳에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눈 닿는 곳에 좋아하는 거 있고 마음 먹으면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요. (웃음) 집을 잘 관찰하면 거기 사는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잖아요. 집에서 드러나는 제가 선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게요. 살고 있는 사람이 정말 잘 드러나는 집이에요. 식물도 많고, 차분한 느낌도 있고, 컬러감이 편안하고요. 편안하고 차분하고 술을 좋아하는 그런 분이신가요?

김 : 그렇게 보였으면 하는 게 소원이에요. 

이 : 아, 너무 웃겨. 

김 : 저분은 조용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웃음) 아, 안 여쭤볼 수가 없네요. 많은 취재를 다녔지만 또래라는 이유로 이렇게 편하게 옆집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요. 친구? 이웃? 어떤 사이에 가까운 지 궁금합니다.

김 : 처음에는 좋은 이웃 정도로 생각을 했고. 그다음엔 친구가 되었고요. 지금은 친구도 좀 넘어간 것 같아요. 식구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원룸에서 자취할 적엔 옆집 문소리를 신경도 안 쓰고 살았는데요. 요새는 집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문소리나 발소리가 들리면 옆집에 누가 들어왔는지, 나가는지를 알아요. 가족들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누가 들어오는지 아는 것처럼요. 제가 이 집에서 이십 대의 마지막과 서른의 시작을 같이 하고 있는데, 조금 오버를 보태서 인생에서 가장 풍부한 시기였어요. 집이 커져서 그런 게 아니라 마주치는 사람들 덕분에요. 많이 배우고 겪고 같이 보내면서 아무 것도 아닌 채로 납작했을 시간들이 덕분에 풍성해졌어요. 

정말 좋은 관계를 가지고 계신 것 같아서 부러운 마음이 들어요. 그럼, 집이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김 : 말했던 것처럼, 손 뻗는 곳에 취향이 묻어 있고 좋은 사람들이 같이 있어서 제가 나아지는 공간이에요. 힐링의 의미가 아니라 ‘상태가 좋아진다’는 의미의 ‘나아지다’요. 덕분에 다시 집 밖을 나갔을 때 당당하고 또렷할 수 있어요. …저 사실 이 질문에는 미리 답변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매번 보던 고정 질문이라서. (웃음) 

나아지는 곳이라, 정말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집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원래는 아까 그 질문이 마지막인데, 곧 크리스마스라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소원이 있다면요?

김 : 엇, 이건…. 예상을 못한 질문인데. 음, 어. (정적) 좋아하는 사람이랑 귤 까먹으면서 해리포터 정주행을 하고 싶어요. 

소박하고 귀여운 소원이네요.

김 : 네, 이뤄졌으면 좋겠어서. 살살 빌었어요.










그렇다. 나는 종종 가끔 내가 진짜 싫을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이다. 눈앞에서 미남이 취했을 때. 아무리 우리가 식구니 뭐니 해도 그런 사실과는 별개의 것으로 채형원은 진짜 잘생기긴 했다. 그러니까 연예인을 하는 거겠지? 형원이는 얼굴에 그 ‘뉘앙스’라는 게 있다. 진짜 개쩌는 미남한테서만 나오는 찌릿찌릿한 빔. 근데 한 마디만 변명하자면 내가 얘를 이성으로 좋아하거나 평소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냥…. 한 때 월에 십오만원씩 썼던 리디봄툰포타 이런 것들이 아직도 내 몸 안에 사리처럼 남아서 그렇다. 조금 전 스쳐 간 대화에 머릿속이 마구간 같아서. 누가 내 생각 못 읽는 게 진짜 다행이지.


“…듣고 있어?”

“똑똑히 듣고 있어. 제대로 들었어.”


한 이십분 전쯤, 회사 회식을 했다면서 취한 채형원이 별안간 맥주 들고 한잔할래? 하고 문을 두드린 것이다. 민혁이는 친구 만나러 나간 모양인지, 주헌이는 바빠서 아직도 작업실이고, 나도 마침 맥주 한잔하고 있어서 신나서 옷 껴입고 나왔더니 느닷없이 채형원이 꺼낸 고민이 괜히 좀 진했다. 아무래도 이민혁과 자기가 친구 사이를 묘하게 뛰어넘지 못하는 것 같다고. 그래, 거기까진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채형원이 취해서, 그리고 나를 진짜 안전하고 친한 친구로 느끼고 중얼거린 거였다.


“혹시, 나한테 만족을 못하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기가 그 마구간의 구간이다. 만족? 만족….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들은 거 아니라서. 멍한 와중에 걔가 이름 조용히 불러서 움찔했다. 얼굴은 이십대 중반 같은데 목소리는 서른의 그것이다. 와씨. 만족을 못 줄 피지컬과 얼굴이냐고, 이게?


“나 별론가?”

“그게 야!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너 빨리 사과해.”

“누구한테.”

“야이씨. 아무한테나 사과해. 대국민 사과해.”


걔가 취해서 푸흐흑 웃는데 진짜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맥이 탁 빠질 정도로. 도대체 왜 자존감이 낮은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채형원 얼굴로 태어났으면 나는 세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를 가졌을 지도 모른다. 물론 형원이의 진짜 매력은 세상 위에 있는 얼굴과 피지컬을 가지고 얼굴값을 못한다는 것이다. 묘하게 자세가 동글 굽었고 눈알 굴러가는 소리 들릴 때까지 눈치 보고, 웃음이 헤프잖어. 사람 마음 이상하게. 마음 쓰여 죽겠으니까, 맥주 한 캔 마셔놓고 취기를 따라가준다.


“무슨 문제 있어?”

“문제?”

“걔가 잘 못 해줘?”

“…아니, 걔 잘 해. 타고 난 놈이야.”

“…그런 걸 물어본 건 아니긴 한데. 우선 더 말해봐.”


최대한 구체적으로 서술해보라고 말할 뻔했는데 맨정신이니까 얌전히 기다린다. 사실 여기 이 둘이 대화하면서 술 먹으면 제일 오래 남는 사람들이다. 끝까지 남아서 이런 이야기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나이 서른들 먹고 순정만화처럼 살 순 없으니까. 다만 그때는 다분히 우리 바깥의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대학 다닐 때, 근처에서 자취할 때 진짜 대박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었어. 나는 처음에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좋아서 그러는 거 알고 깜짝 놀랐잖아, 같은 이야기들. 남자가 생각하는 상대의 야한 포인트와, 여자가 생각하는 상대의 야한 포인트들. 얘네 다 게이인데 내가 이걸 들어서 생정에 도움이 될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다만, 하여튼 그런 맥락에 우리 스스로가 들어있던 적은 없으니까. 형원이 한참을 대답을 안 하길래 스읍, 하면서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걔가 좀.. 집요한가?”


채형원이 맥주 마시다가 흠칫, 캔을 내려 놓는다. 표정이 묘했다. 얘, 뭐지? 하는 얼굴이라 실수한 줄 알고 어버버 해명하려고 하는데 형원이 가만히 그러는 거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어?”

“……미친.”


나 또 별걸 다 알게됐네. 그니까, 나도 내가 싫어. 평생에 걸쳐서 이상한 걸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술 먹으라고 고갯짓이나 했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술 먹는 거 보는데,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젠가 싶었다. 딱히 큰 문제 아니지 않나. 고개 갸웃거리고 있는데 채형원이 취한 속에 맥주 한 캔을 빠르게 부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문젠 것 같애.”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좀, 표현이 잘 안 돼.”

“…하기 싫은 건 아니고?”

“안 싫어. 좋아. 걔 진짜 잘 해.”


근데 거의 십 년을 친구였으니까. 뭐 막 사랑한다거나 끝나고 얘기를 한다거나 좀 안고 있자거나 그런 게 없지. 좀 서먹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민혁이가 섭섭해하는 거 알어. 우리 뭐 프렌즈 윗 베네핏이냐고 그러더라고. 근데 내가 그 상황에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솔직히 표정 관리도 잘 안 돼. 분위기 깨고 싶지 않고, 맘이고 몸이고 정신도 하나도 없고 하다 보면 좀 벅차서. …아, 내가 별 소리를 다 했다. 그냥 너니까 내가 한 번 말해봤어. 너한텐 이게 왜 되냐? 그냥 듣고 웃고 넘겨라.


“와. 야, 형원아.”

“…어?”

“내가 여태 큰 착각을 했다.”

“……?”


세상에.

이렇게 생겨 먹은 채형원이,

이민혁을 받아주고 있던 거구나.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처럼 손바닥을 이마에 가만히 붙이고 몇 번의 탄식이 터졌다. 물음표 둥글 뜬 얼굴로 날 보고 있는 형원이를 본다. 사실 나 얘네가 친구라서 둘이 밤을 어떻게 보낼 지 정확한 모양을 그려본 적은 없다. 솔직히, 그런 상상 아예 해보지 않았던 건 아닌데 구체적이기 전에 그만뒀다. 친구니까. 지금 이야기 들으면서 나는 그래도 그림상 얘가 무심한 공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에, 그래. 요새 시장의 대세를 따져보면 이런 애가 이쪽으로 가야 하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넘겨짚었다. 민혁이가, 걔가 워낙 귀여운 오타쿠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는 것도 사랑도 많아서 다 내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던 거였다. 생각해보면 힌트도 많았는데 말이다. 나는 장어 먹고 너 주거써 하는 이민혁을 앙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앙큼한 게 아니라 엉큼한 거였잖아. 와, 이민혁 이 자식이….


“형원아. 너….”

“어.”

“와. 어떡하냐.”

“머가….”

“감당할 수 있겠어?”


오늘부터 쏟아질

그 애의 사랑을?


야 이거

사실 비밀인데,

나 아직 리디 못 끊었다.






(소장본 판매 이후 유료로 전환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24,938 공백 제외
1,5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