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내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답게, 하이옌의 중심부는 아주 잘 정비되어 있었다. 도로 주변에 늘어선 건물은 모두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비슷하면서도 세련된 외관을 자랑했고 그 주변은 어두운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게끔 작은 횃불로 장식되어 있었다. 커다란 여관과 술집엔 대낮부터 사람이 붐볐고 상점과 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왕의 등장 후 인적이 드물어졌다는 건 어쩐지 이 대도시엔 해당하지 않는 얘기인 듯 보였다. 높은 설산으로 둘러싸인 하이옌의 시민들은 도시 바깥일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처럼 유유히 그들만의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하이옌의 이러한 풍경이 유지되는 데에 지리적 조건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하이옌의 중심 상가가 유독 발달한 데에는 그 도시의 직업군이 큰 이유를 차지했다. 하이옌은 왕국 최대의 마법 협회와 마법사의 탑이 있는 곳으로,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모여 살았다. 대마법사들은 자기 소유의 탑에 수습 마법사들을 거느리며 생활했고 그 외,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마법사들(보통은 1급 마법사였다)은 마법 협회를 일종의 연구소 삼아 그곳에서 잠과 식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협회에 소속된 정식 마법사에게 지급되는 주급과 평범한 시민들의 의뢰에서 비롯되는 여윳돈으로 그들의 경제 사정은 대부분 여유로웠는데, 덕분에 이들은 꼭 현대의 오피스 직장인들처럼, 식사 때가 되면 우르르 나와 하이옌 중심부에서 밥을 먹었고 저녁이 되면 술을 곁들이거나 쇼핑을 즐겼다.

‘여긴 사람이 꽤 많네.’

영원 일행은 하이옌의 상점가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하이옌의 풍경은 케른을 떠나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영원이 보아왔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이 이제껏 걸어온 길과 마을에선 사람들이 내는 시끄러운 수다 따윌 들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마을에 들러선 여관 주인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결코 그 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이옌에 점차 가까워지며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긴 했지만 도시 내부가 이렇게 사람으로 붐비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영원의 눈에 비친 하이옌의 풍경은 현실 세계의 번화가를 똑 닮아 있었다. 인기 많은 식당을 이용하려 바깥으로 줄을 서는 모습이나 식사를 마친 여자들이 모여 앉아 디저트를 먹는 풍경이 특히 그러했다. 그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품에 안은 채로 걸어가며 하이옌의 술집(낮에는 차를 팔고 있었다)에 앉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야외 테이블에 서너명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눈에 띄었다. 모두 같은 색상의, 옅은 보랏빛이 도는 로브를 입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같은 대마법사 아래에서 일하는 수습 마법사들 같았다. 그러니 저들의 화제는 어쩌면 고고한 대마법사의 험담일지도 모른다. 영원은 혼자서 좀 웃긴 생각을 해버렸다.

“저기, 여기서부턴 좀 떨어져서 와주시겠어요?”

앞서 걷던 클레르가 영원과 리온을 향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뭐? 영원이 되묻기도 전에 클레르는 도시를 둘러싼 외벽 구석에 난 커다란 구멍으로 쏙 빠져나갔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견고한 벽에 떡하니 부서진 곳이 있는 것도 의아한데 거길 통해 거리를 두고 들어오라니. 영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리온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이미 그 구멍으로 몸을 반쯤 밀어 넣은 상태였다.

“조심해서 오도록.”

툭 말을 던진 리온이 몸을 숙여 벽 너머로 사라졌다. 체구가 작은 클레르는 쉽게 통과할 수 있었지만 리온은 거의 몸을 반쯤 숙여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영원은 이미 두 사람이 통과한, 텅 빈 구멍을 미덥잖다는 듯 한참을 노려보다 마지못해 몸을 숙였다. 의심스러운 점투성이였으나 이제 와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았으니….

휴우. 영원은 한숨을 푹 쉬곤 무너진 벽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힘겹게 외벽을 통과한 뒤 주변을 쭉 둘러보니 부서진 곳은 생각보다 꽤 많았다. 도시 입구를 제외하곤 외벽 관리에 그닥 신경을 쓰지 않은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놀라운 점이 있다면 벽의 부서진 틈, 그 언저리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이 몇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이옌의 추위를 견디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낡은 옷가지를 걸친 채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영원은 어떤 설명도 듣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느 도시에나 존재하는 빈민층임을 알아챘다. 그들은 다른 도시에서 넘어왔으나 도시에 소속되지 못하고 소외되었을 수도, 혹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무책임하게 버려진 이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게임에서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

그들을 살펴보던 것도 잠시, 영원은 뒤따르던 리온과의 거리가 부쩍 멀어졌다는 걸 깨닫곤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우, 춥다….”

도시를 이제 막 벗어났을 뿐인데 칼바람이 불었다. 영원은 두툼한 양털로 만든 망토의 끈을 바짝 조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보이는 클레르, 리온의 것 말고는 느껴지는 인기척조차 없는 조용한 곳. 짧게 난 잡초가 흙뿐인 바닥엔 제대로 난 길조차 없다. 요르한의 집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여기예요.”

앞장서던 클레르의 걸음이 작은 집 앞에서 멈춰 섰다. 뒤따르던 리온이 잠시 후 클레르의 옆에 멈춰 섰고, 이후 영원이 도착했다.

‘무슨 집이…….’

집을 확인한 영원은 조금 놀랐다. 그 외관이 너무나도 허름했기 때문이다.

나무 기둥과 판자를 붙여 만든 집은 퍽 낡아 있었고 그 앞 텃밭, 이라고 부를만한 곳엔 말라비틀어진 이름 모를 식물과 부서진 돌, 흙 등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문과 창문은 꽁꽁 잠겨있고 슬쩍 비치는 내부는 어두컴컴하기 그지없어서, 아마 누구든 이 집을 발견한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로 볼 것이 분명했다. 

“정말 여기가 맞아?”

영원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클레르는 텃밭에 주저앉아 정체 모를 나무줄기와 흙더미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맞아요.”

“근데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비밀스러운 일.”

“비밀?”

“그러니까 이쪽은 보지 말아주세요.”

클레르는 그렇게 말하곤 쓱 일어섰다. 꼭 쥔 작은 주먹 바깥으로 투박한 열쇠 하나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손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내며 낡은 집의 문으로 다가갔다. 자연스레 길쭉한 틈에 열쇠를 꽂고 돌리려던 것도 잠시, 어쩐지 그녀는 문을 열길 망설이듯 그 자세로 뜸을 들였다.

“…한 번만 더 여쭤볼게요.”

문 앞에 선 클레르가 문득 리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 정말 요르한님의 동생이 맞나요?”

클레르의 물음에 리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가늘게 눈을 뜨고 리온이라는 남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생김새는, 다르다. 그는 유약한 요르한과 달리 선이 날카롭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콧대가 오똑 선 얼굴은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고 윗입술의 곡선은 유려했으며 눈매는 날렵했다. 어딜 봐도 다른 생김새였지만 비슷한 점이 있다면 바로 저 눈. 리온의 눈동자는 요르한의 것과 똑 닮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또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밝은 금빛 머리칼 역시 비슷했다. 

……그러니 조금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클레르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잡은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짧게 두 번, 길게 세 번. 그건 요르한과 약속한 일종의 암호였고, 이후 클레르는 주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요르한님, 저 왔어요.”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렸다. 클레르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리온과 영원이 뒤따라 들어섰다.

“그리고 좀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오늘은 손님을 모셔 왔어요.”

좁은 집안에 클레르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천장이 낮아 리온은 머리를 조금 숙여야 했고, 그는 그 불편한 자세로 빠르게 집안을 살펴보았다.

침실 하나. 주방은 식탁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아주 작다. 복도 없이 거실이 붙어있지만 온통 책투성이였으므로, 거실보단 서재라고 불러야 알맞을 듯 보였다. 책은 아주 많았다. 책장에 꽂다 못해 넘친 책이 그 앞에 수북했고 그 외에도 집안엔 온통 열댓권쯤 쌓인 책더미가 군데군데 지뢰처럼 놓여있었다. 그리고, 창가에 붙은 책상. 

요르한은 거기에 있었다. 해가 밝은 대낮임에도 책에 얼굴을 파묻고, 깊이 잠이 든 채로.

“아니, 요르한님!”

책상에서 잠든 요르한을 발견한 클레르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영원이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빼앗아 주방 식탁에 올려놓은 뒤, 요르한에게로 잽싸게 달려가 그에게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 해가 이렇게 떠 있는데 주무시면 어떡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잠은 침대에서 주무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렇게 딱딱한 곳에서 주무시면 허리가 다 망가져 버릴 거라구요! 그리고 책, 아휴, 책 좀 치우시고. 먼지가 이렇게나….”

손을 휘휘 저은 클레르가 요르한이 잠든 책상 바로 앞에 붙은 창문을 열었다. 깨끗한 공기를 실은 찬바람이 안으로 들이닥치자 엎어진 요르한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러나 클레르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제가 하루에 한 번은 꼭 환기하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맑은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시는 분이 매번 이렇게 먼지 구덩이에서, 아휴, 이러니까 요르한님의 건강이 좀처럼 좋아지질 않는 거라구요!”

클레르는 꼭 시건방진 하녀처럼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주전자에 깨끗한 물을 받아 끓였고 종이봉투를 뒤져 음식과 담요를 꺼냈다. 그녀는 문 앞에 멀뚱멀뚱 선 남자 둘은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처럼, 적당히 따뜻해진 물을 컵에 따르고 담요를 챙겨 요르한에게 다가갔다.

“요르한님, 일어나세요. 이러다 감기 걸린다구요. 아니, 이미 조금은 걸리신 것 같지만….”

좀 전의 소란에 잠을 깬 요르한이 비적비적 몸을 일으켰다. 그는 습관처럼 얕게 기침한 뒤 클레르가 건넨 따뜻한 물로 입을 적셨다. 

“으음, 클레르, 왔구나.”

“대체 어제 언제 주무신 거예요? 또 아침에 잠이 드신 건 아니겠죠?”

“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요르한님. 자꾸 책상에서 이렇게 주무시면 몸이 망가지고 말 거예요!”

“괜찮아. 이미 내 귀는 클레르의 잔소리 덕분에 절반은 망가졌는걸…….”

“뭐라고요?”

한쪽 귀를 손으로 틀어막은 요르한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평한 이마는 벌겋게 자국이 나 있었고 머리는 부스스하게 뻗친, 정돈이라곤 눈곱만큼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클레르는 그런 것 따위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귀를 약간 붉히며 요르한의 등에 담요를 두를 뿐이었다. 

“아참,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이라고?”

“네. 보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손님이라는 단어에 요르한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클레르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곁눈질로 요르한의 뒤를 부지런히 살피고 있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장난을 치는 것 아닌 듯했다.

그는 잠기운이 싹 달아난 얼굴로, 베개 삼아 잠을 잤던 책을 다급히 덮으며 말했다.

“클레르,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누가 날 찾으면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고….”

“네,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요르한님의 동생이 찾아왔거든요.”

흠흠, 하고. 놀랄 틈도 없이 뒤에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르한은 그제야 집 안에 정말로 클레르가 아닌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걸 깨닫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리온이 서 있었다.

“……리온?”

리온은 웃으며 대답했다.

“요르한.”

리온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게 지금으로부터 꼬박 8년 전.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동생은 어느덧 키가 훌쩍 자라,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얼굴이 조금 변했지만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요르한은 반가운 미소를 짓는 것도 잊은 채 리온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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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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