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는 눈이 내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까지 움푹 패일 정도의 높이였다. 지붕들과 길거리를 전부 뒤덮는 하얀빛은 일견 감탄을 자아낼 광경이었으나, 태평스레 창밖을 감상할 여유는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부스스한 얼굴로 둘러앉은 요로즈야 삼인방이 아침식사의 첫술을 뜨기도 전에 수화기가 울렸다. 의뢰였다.

일을 가릴 처지가 아닌 요로즈야라 해도 명절과 같은 정기휴일은 꼬박꼬박 지키는 편이었는데, 올해는 성탄절에 케이크는커녕 온전한 끼니 세 끼조차 위태로울 재정 상황이었던 탓에 들어오는 의뢰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침엔 골목마다 한가득 쌓인 눈의 제설 작업. 낮에는 성탄절 기념을 위한 오츠우의 즉석무대 설치. 저녁엔 막판 영업으로 박차를 가하는 케이크 가게의 도우미 역할이었다. 모두가 놀고 싶어하는 연휴인 만큼 비어버린 일손을 급하게 찾는 곳이 많았다. 갑작스런 연락에도 와 주어 고맙다며 의뢰인들에게서 연신 감사인사를 받은 요로즈야 일행은 힘든 몸으로도 기꺼이 웃는 낯으로 그들을 마주대했다.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궂은 일도 도맡아 하는, 카부키쵸의 숨은 공로자. 언젠가 신파치가 늘어놓았던 수식어는 명실상부 요로즈야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짧아진 해 탓에 이른 시간부터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한 나무들은 본격적으로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역할 분담의 가위바위보에서 져 산타 분장으로 팻말을 들게 된 긴토키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가게 문 앞에 나와 섰다. 힐끗 유리창 너머를 뒤돌아보니 점원들과 함께 바쁘게 짐을 나르거나 포장 작업을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실내에서 일한다고는 해도 신파치와 카구라 역시 쇄도하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만만치 않은 노동을 해야 할 터였다. 남들처럼 느긋하게 놀고 싶었을 텐데도 의뢰라는 한 마디에 싫은 내색 비치지 않고 성실히 임하는 녀석들이 대견해, 긴토키는 소리없이 웃었다. 밤늦게가 되겠지만 이번 의뢰까지 끝마친 뒤에는 따뜻한 코타츠에 둘러앉아 크리스마스다운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심장 안쪽에서부터 퍼지는 듯한 온기를 가만히 간직한 채, 그는 홍보용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기운찬 목소리가 불빛 가득한 밤거리에 울려퍼졌다.

특제 성탄절 케이크 판매합니다! 들어와서 둘러보고 가세요—.



점차 시각이 늦어짐에도 번화가를 채우는 행인의 수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살가운 영업 멘트를 건네는 긴토키에 이끌려 몇몇은 기꺼이 가게에 발을 옮겼고, 더러는 얼굴 아는 사람들이 지나가다 반가워하며 케이크를 사가주었다. 어느 가게에서랄 것 없이 캐롤이 흘러나와 사람들의 북적임에 섞여들었다. 그러나 손님들이 가게 앞에 걸음을 멈추는 때보다는, 저마다 단란히 지나가는 군중 사이에 긴토키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시간 쪽이 더 길었다.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예년보다 포근한 겨울이라는 일기예보의 설명이 있었으나 눈이 내릴 정도의 기온이니 그래도 추운 것이 당연했다. 연신 목청을 높이느라 조금 쑤시는 목을 가다듬다 말고 문득 완전히 소리를 죽이면, 흥겨운 음악과 북적이는 말소리로부터 한 겹 떨어진 듯한 침묵이 자신을 감싸왔다. 들이쉬는 숨소리만이 제 것으로 여겨져 서서히 귓가를 메웠다. 고요에 이끌리듯 그대로 눈꺼풀을 닫았다.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유독 바빠 몇 주간 만나지 못한 연인의 얼굴. 연말이 다가올수록 진선조 내부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외부의 연례행사 따위에 불려가는 일도 잦아지는 탓에 손을 놓을 틈이 없다고 그는 말했었다.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습관처럼 쓰디쓴 담배 연기를 불어내는 옆얼굴에는 이미 피로한 기색이 상당해 긴토키는 무엇도 책망할 수 없었다. 소중히 여기는 진선조를 위해 남의 배는 될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성정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무식하리만치 올곧은 그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소모하지는 않기를 바랄 뿐. 이따금 걸려오는 안부 전화는 부끄러움 많은 그로서는 굉장히 분발한 것이었고 그러니 긴토키는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는 대신 여느 때처럼 실없는 말싸움이나 몇 마디 주고받기를 택했다.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그를 생각했다. 까만 제복에 그보다 더 긴 까만 코트를 덧입고서, 부하들을 이끌고 윗사람을 상대하며 직무를 다할 그의 모습. 막연한 상상만이 그려졌다.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는 잦았으나 그들의 업무에 깊게 관여해본 경우는 역시 적었다. 목숨 걸린 사투에 손 놓고 볼 수가 없어 멋대로 참전했던 것이 수 번. 오히려 전투를 포함하지 않은 통상적인 진선조의 일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얼마 없었다. 이따금 함께 대작하는 술자리에서 히지카타의 입을 통해 듣는 정도가.

정처 모를 상념 속에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길 맞은편에 모여들어 있는 검은 제복 무리가 눈에 띄었다. 줄곧 떠올리고 있던 옷차림이었으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시선은 어렵지 않게 가장 바라던 상대를 찾아갔다. 여럿의 중심에 서서, 명령을 내리는 듯 부하들의 이목을 쥐고 있는 남자. 여타 소음에 묻혀 지시의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긴토키는 멀거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내 말을 마친 히지카타가 담배를 고쳐물며 몸을 돌리다가, 긴토키를 향해 잠시 멎었다.

여전히 귓가에 유일하게 뚜렷이 들려오는 것은 자신의 느릿한 숨소리. 허공에서 퍼지는 하얀 입김. 시선은 서로에게 묶인 듯 허공에서 뒤섞였으나 그뿐이었다. 가벼운 인삿말이나 손을 흔들어 보이는 제스쳐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그저 떠올리던 상대가 그곳에 있음을, 그 사이의 거리가 분명함을 짙게 확인한 뒤 눈길은 떠나갔다. 구태여 소리내어 아는 체 하지 않는 이유를 긴토키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나 그와 자신 사이의 간격이었고 한계였다. 요로즈야와 진선조라는, 다른 곳에 적籍을 둔 둘의.

긴토키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치장 가득한 지상의 빛과는 사뭇 다른 광경. 올려다본 하늘에는 각자로부터 수천 광년씩 떨어져 결코 닿을 일 없을 별들이, 소리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과, 별과, 쓸쓸한 입김만이 어둠 위를 덧쓰듯 흐릿하게 퍼져 나갔다.



“으응, 더는 못 먹는다 해…….”
   “오츠우쨩, 안경에 싸인해주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잠꼬대들을 하냐. 캔맥주를 홀짝이던 긴토키는 저마다 웅얼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냈다. 그들이 깨어 있었더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표정이 슬그머니 비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결에 추워하지 않도록 이불을 조금씩 끌어올려주었다. 노곤한 온기가 감도는 요로즈야 안방. 코타츠 위에는 마지막 의뢰를 받았던 가게에서 받아온 케이크의 잔해와 술을 마시지 못하는 녀석들을 위한 음료수 몇 병, 제철과일이라며 오토세가 박스째 챙겨준 귤 따위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명절인 만큼 일찍 가게를 접었다며 돌아온 오타에까지 합세해 한껏 들떴던 아이들은 떠들썩하게 파티를 이어가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잠들었다.

긴토키에게는 취기가 부족한지 잠이 오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도 기다리게 되고 마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인지도 몰랐다. 힐끗 시계에 눈길을 주면 시침은 이미 자정을 넘긴 뒤였다. 약속은커녕 만나기 힘들 거란 언질까지 받았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왜인지. 마냥 성실한 그의 탓이 아니라서 더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고 만다. 긴토키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목을 태우는 듯한 쌉싸름함이 식도를 지나갔다. 끝맛으로는 여전히 허전함이 남아 있었다.

어울려 줄 사람도 모두 잠들어버리고 사다하루마저 코타츠에 몸을 묻은 채 색색 수면에 들어가, 희미한 시계 소리를 위안 삼아 자작하고 있을 때였다. 어련히 포기하고 잠이나 잘까 싶어 탁상 위로 엎어졌을 즈음. 바깥의 소음이 그를 불렀다. 인근의 밤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초인종 대신 똑똑,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손님이었다. 술김에 잘못 들은 것인가 하고 코타츠에 다리를 담근 채 방문 밖으로 빼꼼 고개만 내밀었던 긴토키는 창호지 너머 희미하게 비치는 인영에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겨울밤의 한기가 들이닥쳤다. 그러나 체온이 식는 것 따위 신경 쓸 틈이 없을 만큼 기다려왔던 손님이었다. 여어. 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듯 목도리를 끌어올리며 히지카타가 조금 멋쩍은 인사를 했다. 줄곧 상상으로 그리던 그가 기억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러워, 긴토키는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하룻밤 늦게 산타라도 온 줄 알겠어.”

여느 때 이상으로 애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시선에, 덩달아 달아오른 히지카타는 부끄러운지 조금 눈길을 피하며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산타가 아니라서 미안하게 됐군. 이거, 먹고 싶어했던 케이크…….”

정성스레 리본이 묶인 상자였으나 긴토키는 아랑곳않고 그부터 품에 끌어당겼다. 포옥, 같은 키의 그가 팔 안을 한가득 채운다. 어, 어이, 케이크 엎어지면 어쩌려고…! 당황하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조차 마냥 좋아 그는 쿡쿡 웃었다.

“산타가 아니기는. 히지카타 군이 내 산타인데. 아니, 산타 따위보다 히지카타 군이 더 좋아. 긴상 착하게 일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구나…….”

옅게 남은 술기운 탓인지 솔직하지 못하던 남자가 주절주절 행복에 취한 듯 읊조리는 것을 들으며,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히지카타는 말없이 그를 마주안았다. 품에서는 알코올 냄새에 뒤섞여 그의 포근한 체취가 났다. 서로의 체온이 옮은 탓인지 주변의 공기가 홧홧했다. 어느새 중얼거림을 멈추고 조용해진 긴토키는 벅찬 심정을 맞닿은 가슴에 가둔 채 한참 말을 고르다,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고생했어.

팔을 둘러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히지카타는 약간의 침묵 뒤 응, 하고 조그맣게 답했다.



“이미 먹었을 텐데 괜히 사왔냐?”
   “괜히라니, 또 먹어도 맛있는 게 케이크인데.”

딸기가 한가득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신나서 꺼내며 긴토키는 대꾸했다. 전화 너머로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던 때. 파칭코에서 돈을 불리면 사먹고 싶은 케이크가 있는데 몇 달째 성공하질 못했다던 투덜거림을 지나가듯 들었었다. 서른 직전의 아저씨 주제에 꽃이라도 만개할 듯 환한 낯으로 좋아하는 그를 히지카타는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긴토키는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꺼내고, 부엌에서 접시며 포크 따위 식기를 가져와 능숙하게 늘어놓고, 덤으로 몇 캔 남아 있던 술까지 대령해왔다. 코타츠는 애들이 차지해 버렸다며 커다란 담요를 가져와 히지카타에게 둘러주기까지 했다. 괜찮다 사양하려 해도 내가 추워서 그래, 하고 옆자리에 들어와버리니 더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혹여나 안방의 아이들을 깨울까 전등을 켜지 않은 대신 밝힌 작은 호롱불은 제법 성탄절다운 분위기도 더해주었다. 아닌 척 해도 의외로 로맨티스트인 녀석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 함께 담요를 뒤집어쓰고서 당연한 듯 히지카타의 허리를 둘러안은 긴토키는 장난스레 속삭였다.

“어른들끼리 제대로 즐기자구.”
   “올 줄도 몰랐으면서 능청맞기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히지카타는 싫지 않아 어깨의 담요를 고쳐쥐었다.

이미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 이브도 당일도 지난 조금 늦은 크리스마스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둘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각자의 맥주가 담긴 유리잔을 쨘, 부딪쳤다. 수면을 투과한 촛불이 일렁였다. 동시에 사랑을 속삭이며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twitter: @ecrirebl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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