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다. 무언가의 이해에 있어서도 그랬다. 환생이라는 일생의 대사건에 관해서도 같은 버릇을 보이곤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받아들이자는 게 생각의 주류긴 하였으나 때때로 억울해서 돌아버릴 것 같은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겉으로나마 굉장히 얌전하게 지냈다. 원래 마음에 화도 생각도 많은 것치곤 조용한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차분하려 노력까지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개인주의자고, 나쁘게는 이기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숨이 붙어있도록 보살펴주고 의식주를 제공해주는 페오니아와 세이슈에게, 당신네들 딸은 환생자라서 댁들을 진정 부모로 여기지도 않는단 사실을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는 양심이 있단 말이다. 물론 염치와 별개로 그들을 좋아했기에 나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난 5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른다. 유년을 기억하지도 못할뿐더러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보거나 알고 있지도 않았다. 결국 부부의 딸 역할을 하면서 최선은 수고를 끼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라는 게 얼마나 정신 사나운 존재인지는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그런 활력을 연기할 정도의 열정은 없었다. 천성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미 지난 삶에서 내 기질은 무기력하게 교정 당한 지 오래였다.

다행히 부부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자신들의 딸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한 지식은 그들이나 나나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

 

 

오늘은 드물게 해가 났다. 세이슈는 맑은 날에도 우산을 쓰고 나갔다. 페오니아는 마당에 빨래를 널었고 나는 돕는다고 나섰다가 집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나는 그늘에 웅크리고 거의 외우다시피 한 책을 펼쳐놓고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빈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 페오니아가 여상스런 투로 말했다.

 

“그 기사가 마음에 드나 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펼쳐놓고 있던 중이었다.

 

“응. 엔시스의 이야기가 좋아.”

 

엔시스 파윌라. 일리온 성계의 행성 국가 레늄의 제일검. 무협지나 SF의 한 토막을 읽는 감각으로 나는 이 검사에 관한 기사를 가장 즐겨 읽었다.

재미로만 따지면 바다돌이의 이야기도 만만찮았지만 그것은 이 세계의 정체를 깨달은 계기이기 때문인지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반면 엔시스의 이야기는 읽을만한 서사를 갖췄으면서도 내가 불편한 일을 떠올릴 여지는 없었다.

영웅적인 인물이고 비윤리적인 일을 하지도 않기 때문인지 페오니아와 세이슈가 선별한 기사 중엔 그와 관련된 것이 유독 많았다. 그의 일생을 설명하는 특집과 어느 괴수를 잡았다는 이야기 등. 첨언하자면, 바다돌이에 대한 기사도 엇비슷한 양이 있었지만.


“왜 좋은데?”

 

진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잘생겼으니까.”

 

거짓말만은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도 그의 얼굴을 꽤 좋아했다. 흑백사진은 흐릿했지만 엔시스 파윌라는 그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섬세한 미형의 얼굴은 성별이 모호한 아름다움을 띠었고, 내 취향에 들어맞았다.

페오니아는 뭐가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바다돌이도 좋아하니? 그 사람도 잘생겼잖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진 속의 젊은 바다돌이는 머리털도 수북하고 매력적인 남자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그의 중년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취향과도 거리가 멀다.

 

“우리 딸은 취향이 엄격하구나.”

 

“나는 예쁜 게 좋아.”

 

페오니아는 또 한바탕 웃더니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엄마 같아.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시시한 감상이었다. 아버지의 머리칼과 어머니의 눈을 물려받은 레이린. 그녀는 내 몸이었고, 영혼 같은 문제와 상관없이 나였다. 페오니아는 분명 그녀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5년으로도 익숙해지지 못한 걸까. 한마디만으로 숨이 막혔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건 스무 살 먹은 여자였다. 그 모습은 이미 저 먼 세계에서 죽고 없음에도.

 

손을 뻗어 페오니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햇빛에 비추면 붉은색이나 갈색 광택이 났던 나의 것과는 달리, 그녀의 흑발은 밤처럼 검었다. 아름다운 까마귀 깃털의 검푸른색이다.

 

“저녁엔 뭘 먹고 싶니?”

 

“감자…….”

 

그녀의 시선은 볕이 내리쬐는 마당으로 향해있다. 얕은 담장과 풍경을 배경으로 초라한 옷가지들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찬란하다. 페오니아의 얼굴은 행복으로 충만해 보였다. 그녀는 딸을 품에 안고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게 만족스러운가 보다.

숨소리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녀는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평온에 나도 잠긴다. 기억도, 고민도, 괴로움도 아무 필요가 없을 듯한, 어딘가 황홀하기까지 한 기분에 젖는다. 안기어있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면, 영원히 이랬으면 좋겠다.

나는 문득 소원을 품었다. 어떤 일도, 어떤 시련도 필요 없이.

내가 불행한지 어떤지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이.

 

 

***

 

 

그것을 목표가 아닌 소원이라 말했던 건 이 별의 이름 같이, 예지이거나 냉소였을까. 대개 이루어지는 일을 소원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나는 오랜만에 여름을 느낀다.

 

공기는 묵직하고 햇빛은 쨍하니 날이 맑다. 거리가 너무 환해서 사람들은 눈을 찡그린 채로 걷고 있다. 그래도 즐거움이 흘러넘쳤다. 높은 습도에 화려한 냄새가 깔려있었다. 한낮의 거리를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립고 반가운 계절의 중간이다. 쉬르마엔 여름이 없었다.

 

이곳은 익숙하다. 학교 앞의 번화가는 수십 번은 걸었던 곳이다. 점심을 먹으러, 간식을 먹으러, 저녁을 먹으러. 혹은 술을 마시러. 대부분은 음식점이니 방문목적도 대개 그랬다.

햇빛도 하얗고 손바닥만 한 판석으로 포장된 길도 하얘서 여름엔 나다니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걸었다.

 

이곳은 나의 과거이자 기억이자 꿈이다.

 

볕 아래를 마음껏 돌아다닌 지도 오래되었다. 꿈은 현실보다 편리하다.

 

앞서 걸어가는 여자가 눈에 익다.

그녀는 자꾸 등 뒤로 손을 뻗어 날개뼈 즈음에서 끊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저 여자가 누군지 안다.

 

나다.

죽기 한 달여 전 즈음의. 이 날이 언제인지도 어느새 깨닫게 되었다. 객기가 들어 길렀던 머리카락을, 마찬가지로 그 시작만큼이나 별 이유 없이 잘라버렸던 날이다.

나란히 걷는, 미용실까지 함께 갔었던 친구가 역시 실연이라도 겪은 거냐고 추궁하고 있었다. 나는 반쯤 웃고 반쯤 화내면서 부정한다.

그들은 성큼성큼 걸어간다. 두 번 갔는데 두 번 모두 국물에 날벌레가 빠졌던 쌀국수 가게를 지나고, 그릇이 종이로 된 태국요릿집을 지나고, 발에 맞는 신을 찾을 수 없었던 구둣가게를 지나고,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옷가게들을 지나고, 용돈에는 비쌌던 디저트를 파는 카페를 지나간다.

나는 점점 멀어진다.

 

열심히 쫓아가는데도 뒷모습이 작아졌다.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잡아서 뭘 하려고 했을까. 잡을 수 있을 리도 없고.

내려다본 손은 잎사귀처럼 자그맣다.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레이린의 손.

 

 

***

 

 

섬뜩함인지 불쾌함인지 모를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훅 들이켠 공기는 차고 습하다. 더운 날 냉장고에 머리를 집어넣고 들이마셨던 냉기처럼 폐부를 채웠다.

정신은 아직 꿈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한 듯 멍했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위눌림과 엇비슷하다.

나는 오른손을 힘겹게 움직였다. 오른편에는 페오니아가 자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뒤척이면 잠결에도 안아주곤 했다. 평소에도 종종 예전 삶을 생각하거나 그리워했지만 방금 같이 선명한 형태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그녀의 품에 안기어, 돌아갈 수 없는 때를 떠올리고 만 것을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페오니아의 몸이 닿질 않는다. 나는 그제야 양옆이 싸늘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가물가물하던 눈이 확 떠졌다.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풀썩였다. 왼편의 문 방향에서는 세이슈가, 오른쪽의 창가에는 페오니아가 자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둘 모두 보이지 않았다. 잠자리는 한참 전에 식은 듯이 차가웠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놀라서 두리번거리다가 문틈으로 비치는 불빛을 보았다. 거실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죽이고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와 문 앞에 다가갔다. 잠이 덜 깨어서 그런지 몽롱하고 불안했다. 문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실로 나갈 기운이 생기지 않아서 대신 고개를 벽에 기댔다. 눈이 다시 감기려 했다. 자다가 깨서 울며 부모를 찾는 아이같이, 그들이 보고 싶었다. 목소리엔 저절로 이끌렸다. 그러나 듣게 된 것은 예상 밖의 말이었다.

 

“—도망칠까?”

 

세이슈는 겁을 먹은 듯 목소리를 떨었다.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저 앞뒤 다 잘라먹은 말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도 생각보다도 본능이 한 발 먼저 어떠한 예감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논리도 검증도 없는 막연한 감에 불과했으나 목을 단단히 감싸 떨어지지 않았다.

 

페오니아의 대답이 곧장 이어졌다. 그녀의 음성도 평소와 달랐다.

 

“무슨 수로? 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금방 잡히겠지. 어디든 간에 쉬르마 안에서는 금방 잡힐 거야. 화만 더 돋우게 될 거라고.”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예상이 눈앞에 펼쳐졌으나 실체도 형태도 알 수 없었다. 충격이 가라앉기 전에 대화는 쫓아갈 틈을 주지 않고 이어졌다.

 

“그럼,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잔 말이야? 당신은 그들이 어떤지 몰라서……,”

 

“몰라서? 당신은 알아서 도망치자고 말한 거야? 세이슈, 정신 차려. 이 섬에서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어? 차라리 저항하지 말고 용서를 빌어. 시간을 벌자. 난,” 바람이 창문을 세게 울렸다. “—께 연락해볼게. 당신은 그에게 도움을 청해.”

 

페오니아가 빠른 어투로 지시했지만 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두려움에 파묻혔던 것이리라. 나처럼, 나 이상으로. 나는 숨소리마저 악물었다.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기묘한 심리에 마음이 휘청거리고 호흡이 짓눌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이마를 댔다. 가련한 바보같이 머리를 감췄다. 모른다고 해서 재앙이 피해 가는 것이 아니며, 이미 얻어버린 단서를 기억에서 도려낼 수도 없는 것을.

 

문틈을 따라 아른거리던 옅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거실의 불이 꺼졌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뚫고 울렸다.

나는 한참 내 숨을 단위로 시간을 세었다. 열 번의 들숨, 열 번의 날숨, 다시 한 번의 들숨과 함께 나는 방문을 열었다. 컴컴한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쩐지 울음이 북받쳐서 도망치듯 방문을 닫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몸을 웅크려도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모든 게 평안했다. 그렇게 좋은 일이 없어도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하게 삶은 흘렀다. 그 평온이, 삶이 붕괴하려는 조짐을 보고야 말았다.

고작 몇 마디의 말이었을 뿐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는 걸까. 불안의 가지는 끝없이 뻗어 나갔다. 맥박소리마저 짙어지는 고요 속에서 나는 그 가지가 움트는 환청을 들었다.

 

페오니아와 세이슈는, 새벽이 다 닳을 무렵에야 돌아왔다. 옷깃을 붙잡고 들어온 한기에 나는 설핏 들었던 잠을 깨었다.

세이슈는 내가 일어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마를 쓸어주었다. 단단한 손끝은 차게 식어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페오니아는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그들 스스로를 향한 말이었음에도, 어쩐지 나에게 들려주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도, 의식은 찰나의 안심으로 가라앉았다.

 

 

(2018.08.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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