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는 개봉 이후 가히 폭풍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은희와 함께 살아왔던, 또는 은희였던 40대 초반의 여성들 뿐만이 아니라, 10대와 20대의 젊은 여성들도 은희에게 깊은 공감을 표하며 자신들을 ‘은희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같은 역사성을 지니지 않은 여성들은 경험을 통해 어떻게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글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한다.


은희, 세상에 나오다

김보라 감독은 벌새를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영화라고 말한다. 자신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을 끌어안고 자신의 ‘가족’에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기 위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영화 벌새를 성장 영화이기보다는 그의 인간 됨 (Coming-of -Human)에 관한 영화라고 정의 내리고 싶어 했다. 즉, 이 영화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흥미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픽션이라기보다는 한 인간 (감독 스스로)의 변화 과정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인공 은희는 영화 내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주체적 인물이 아니다. 그는 변화하는 사건들 속에 조용히 보는 관조적 인물에 가깝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본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통념에 따를 때, 이러한 수동적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는 우리에게 낯설다. 그것은 은희가 의도했다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주변부의 작은 소녀였기 때문이다. 시대와 사회가, 그리고 은희의 가족이 그것을 원했다. 은희는 오빠한테 맞게 되지만 그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불합리한 일이 생겨도 강하게 반박하기보다는 조용히 지켜보는 편에 가깝다. 이러한 은희의 수동성은 오히려 그의 현실을 꾸미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행인 것은 그가 끊임없이 ‘모든 모습을 지켜봤다’는 점이다. 그는 말하지 않지만 똑똑히 지켜본다. 그리고 벌새라는 영화가 대중들 앞에 나온다. 주체의 전복이다. 우리는 성장한 은희가 자신이 지켜본 것들을 스스로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발화하는 데에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영원히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던 어린 여자 아이인 은희는 이렇게 우리 앞에 나오게 되었다.

영화는 은희의 개인적 경험에 머물지 않고 어떤 공통된 경험들을 환기시킨다. 성수대교의 붕괴, 서울 시내의 재개발 현장, “서울대”에 가라는 교실 풍경 등.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시기의 자신을 환기해낸다. 급작스러운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일어났던 무수한 사건들과 공간들을 영화 속에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은희의 모든 문제는 병리적 사회와 긴밀한 연관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풀어내고자 한다. 개인은 시대와 어떻게든 긴밀한 연관이 있다. 역사성을 지닌 사건들은 그 시대를 구성하고 또 개인의 삶에 침투한다. 공통적 경험은 어떤 힘을 가지는가? 베네딕트 앤더슨은 책 〈만들어진 전통〉에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정의를 제시했다. 여기서 같은 것을 경험했던 세대라는 범주 또한 ‘기억의 공동체’다. 세대의 기억을 환기하는 영화는 많았지만, 주로 ‘형제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사를 전개했다. 남성들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 형제애에 기반한 데모 경험, 긴 머리 소녀와의 첫사랑 등의 레퍼토리는 얼마나 많이 반복되어 왔는가? 그러나 이 영화는 중학생 여성의 시선에서 모든 사건들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고 같은 세대의 ‘자매들’의 공통의 경험들을 끄집어내어 의미화한다. 이렇게 형성되고 발화되는 다채로운 여성의 경험들 속에서 우리는 정치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정치성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적이라는 것은 공통의 것을 추구하는 과정이며, 나의 이야기를 공공의 것으로 끄집어내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정치적인 이야기를 전했다고 평가된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단어의 함의와도 닮아있는 논의다.

그러나, 사적인 경험을 꺼내고 대중들 앞에 내비치는 일은 많은 위험을 감수하게 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사회적 운동을 위한 서사’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해서 때로는 어떤 경험들 그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특정 여성의 어떤 경험은 축소되고, 특정 어떤 경험은 과도하게 부각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여성’이라는, 또는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빠에게서의 폭력의 경험, 서울 중산층 가족의 방관, 동성과의 오묘한 감정의 경험,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경험 등 은희의 경험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과거와의 동일시의 경험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영화가 가부장제에 대해 고발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닌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감독 자신의 경험을 서사로 풀어가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었을 것이다. 지켜보는 자이기를 견지했던 중학생의 은희가 발화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어떻게 자신의 경험들을 언어화할지 몰랐던 것일 때문일 것이다. 가스 라이팅과 가정 폭력 등의 단어로 다시 명명할 수 있었던 사건들은 어른이 된 은희 앞에 보다 명확한 모습으로 다시 놓이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소외되었었던 각각의 시대적 여성 주체가 사회적 담론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독자적인 관점을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여러 가지 경험들이 그들에게 공통의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고정된 정체성 내부에서만 자신을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영지, 2021년의 우리들

그렇다면 1994년, 열네 살의 은희는 2021년 현재 어떤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영지 선생님을 만나고, 죽음들을 이해하고, 관계 맺음을 배우면서 성장했던 은희는 마흔 한 살이 된 지금 우리 곁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 어른이 되었을까. 그래서 그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큰 울림을 주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는 다른 세대에 위치하는 영지와 은희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고민함으로써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연결과 연대 가능성에 대해 인지하고자 한다.

영지 선생님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은희의 바로 윗세대의 여성이며 이질적인 인물이다. 그는 대학의 휴학생이고, 운동권 출신이며 은희에게 다른 종류의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진다. 영지는 은희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다정하고 진실된 애정과 관심을 주는 존재다. 그는 말하지 못했던 은희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폭력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지의 상처는 언뜻 비추어져 불안함을 낳다가 그는 영화 상에서 성수대교 붕괴라는 대사건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그의 사망은 좌절감을 준다. 이상을 품고 사는 이들은 우리가 아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을까, 이들은 이 사회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지 못해 붕괴하게 될까.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끝나서 영지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다. 영지는 은희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편지에서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지 스스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작은 희망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신, 다음 세대인 은희에게 작은 불씨를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감히 추측컨대, 은희는 스스로 붕괴되지 않았기에, 그리고 버텨 주었기에 지금 우리 앞에 나올 수 있었을 테다.

우리가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지금의 우리에게 영지 같은 존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은희의 이야기는 세상에 나옴으로써 소외된 어떤 이에게 손을 내미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지가 다음 세대인 은희에게 주는 따뜻한 관심을 똑같이 주는 것이다. 넌 혼자가 아니라고. 이 무서운 경계들을 인식하고 또, 나아가자고. 은희는 끝끝내 새로운 세대에게 영지가 되었다. 물론 그 손을 잡는 대상이 공통의 경험들을 가진 다음 세대의 여성이라는 특정 범주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은희의 엄마에게, 은희의 언니에게 영지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다른 시대에 태어나 다른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은희에게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 오묘한 차별의 경험들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동안의 사회에서 발화하지 못하고 소외되었던 여성 아닌 다른 존재들도 그 손을 잡을 수 있다. 다른 경험을 지녔지만 질서의 바깥을 꿈꾸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공동의 희망을 생성해 낼 수 있다. 그 순간 영지가 건넨 작은 불씨는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되어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참고 문헌

『인문잡지 한편 –1호 ‘세대’』(2020), 민음사.

김보라 외 5명(2019), 『벌새, 1994년 닫히지 않은 기록』, 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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