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말이야! 진짜 미치겠다니까? 저 무거운 걸 수리하는 데까지 들고 갈 수도 없고…”

[안나, 그러게 야동 좀 작작 보라니까.]

“야동 안 봤다고!”


남은 뜬금없이 컴퓨터가 먹통이 돼서 복장이 터질 것 같은데, 핸드폰 너머의 친구라는 놈은 낄낄거리며 날 놀려대기 바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움이 안 돼요.

며칠 전에 새로 갈았던 것 같은데, 벌써 가득 찬 재떨이용 종이컵을 보다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당장 쌓여있는 과제만 해도 산더미인데, 피시방이라도 가야 하나. 한숨부터 나오는 안타까운 내 신세에 탁 트인 복도 위로 화창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발랄한 도어록 소리와 함께 등 뒤로 현관문이 열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이렇게 담배를 태울 때면 자주 마주치던 옆집 여자가 고개를 까딱이며 날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어떡해, 다 들렸나 봐.

뭐 그리 좋은 말이라고 복도까지 나와서 떠들어댔는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든 과거의 자신을 향해 욕을 한 바가지를 퍼부으며 뻘쭘하게 인사를 받았다.


“저기,”

“느, 네?!”


아, 혀 씹었다.

이제껏 오고 가다 마주칠 때나 하는 짧은 인사가 전부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걸려온 말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쥐고 있던 종이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컴퓨터… 제가 봐드릴까요?”

“…정말요?”


천사네. 옆집에 천사가 살았는데 내가 몰랐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구원자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그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내 몸뚱어리만 한 본체를 뜯어다 수리센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차올라 동그랗게 커진 파란 눈동자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네. 안에서 통화 소리가 들리길래… 제가 전공이 마침 그쪽이라, 괜찮으시면…”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나 때문에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얘기하는 그 하얀 얼굴을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노루발을 내려뒀던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자기가 먼저 제안했으면서 실례합니다, 라고 말하며 쭈뼛거리는 모습에 그럴 필요 없다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마실 거라도 드릴게요. 잠시만요.”

“컴퓨터는 어디가 고장 난 건가요? 전원은 일단 들어오는 것 같은데,”


전공이 컴퓨터 관련이란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단숨에 진지해진 얼굴로 자연스럽게 본체의 버튼을 찾아 누르며 물어오는 옆집 여자의 목소리에 싱크대로 향하던 몸을 다급하게 돌렸다.


“잠…!”


아, 흐응! 하앙!

바탕화면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모니터를 가득히 채운 차마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광고들에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줄기차게 나오는 영화 속의 남자아이처럼 양 뺨을 감싼 채 좌절했다.


“최근에 그게… 이거, 때문이었나 보네요.”


네. 날 죽여요, 차라리.

담배 피우기 편할 것 같다는 이유로 덜컥 골라잡은 낡은 원룸의 얇은 벽과 생각 없이 곧바로 옆집 여자를 데리고 온 나 자신을 저주하다 퍼뜩 든 생각에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면 뭐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야 당연히…”


옆집 여자는 하얗던 피부를 티셔츠의 넥 라인 아래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나도.


“크흠, 이건 백신만 돌리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한참을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여자의 손이 마우스 위로 올라가 몇 번 딸깍이자 우리를 괴롭히던 광고 소리는 금세 사라졌지만 애매해진 분위기는 그대로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곤 그저 아까 전, 인사를 받았을 때처럼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마우스의 클릭 소리가 반복될수록 조금씩 원래의 색을 되찾아가는 피부가 신기한 마음에 그대로 싱크대에 기대선 채로 멍하니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목선 예쁘네.

항상 헐렁한 후드티나 운동복 차림이라 몰랐었는데 집에선 저렇게 입고 지내는 걸까, 얇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옆집 여자는 의외로 스타일이 좋았다. 딱 봐도 가늘어 보이는 허리에 탄탄한 허벅지, 옅은 핑크빛이 도는 복사뼈까지 홀린 듯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내려간다.


“다 된 것 같은데, 와보실래요?”

“으, 어, 네!”


또 혀 씹었다.

행여나 몸매를 신명나게 훑고 있던 것이 들킬까, 괜히 날 올려다보는 새파란 눈을 피했다. 관절 인형이라도 된 것 마냥 삐걱이며 비켜준 자리에 앉아 깔끔해진 모니터에 집중한 척, 인터넷 브라우저나 평소 자주 쓰던 프로그램 들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여기 또,”

“응? 잠시만요…”


다행히 전과 같은 종류는 아니었지만 오른쪽 아래에서 빼꼼하고 올라온 광고창에 옆을 돌아보려다 헛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너무 가깝잖아!

방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보고 있던 탓일까. 한 손은 의자 등받이에, 또 한 손은 마우스를 잡은 내 손 위에 얹은 채로 무표정하게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에 겨우 진정되었던 얼굴이 다시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속눈썹 길잖아, 저런 안경은 왜 쓰는 거야? 좋은 향기 나네. 피부도 완전 매끈하고…

이러면 안 된다고 이성이 말려대지만 이미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는 탓에 이젠 완벽할 거라며 떨어지려는 그 손을 무심코 붙잡았다.


“그, 저기요?”

“…이름! 우리 서로 이름도 몰랐네요, 이때까지! 저는 안나에요.”


오늘 하루, 두 번이나 씹힌 것에 대한 복수를 하는지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댄다.


“그러고 보니…, 전 엘사에요.”

“엘사, 오늘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요.”


방금까지 훅, 치고 들어온 건 자신이면서 왜 갑자기 또 부끄럼을 타는지 슬며시 풀어내려는 손을 더 꽉 쥐며 의문이 깃든 그 눈동자를 올려다봤다.


“컴퓨터 고친 김에 같이, 넷플릭스 보실래요?”

“…네?”

“그게, 재밌는 공포 영화 시리즈가 있거든요!”


예상과는 달리 금방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다급하게 뒷말을 더 이어붙여 가는 중 대뜸 푸스스,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것도 많은데! 그, 저기…”

“좋아요.”


‘같이 넷플릭스 볼래?’ 라는 말의 다른 뜻을 엘사가 설명해 준 건 시즌 3까지 나온 미드를 전부 보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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