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HQ AU




그늘막 아래 의자를 펴놓고 꾸벅 졸던 중 아이들의 바쁜 발소리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얼마 전 마을 뒤편에 생긴 놀이공원에 가는 게 분명하다. 놀이공원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것이 아니라 회전목마, 바이킹, 관람차로 겨우 구색만 맞춘 놀이터 수준이었다. 떠돌이 마법사가 만들었다는 놀이공원은 동네 꼬마들의 집합소였다. 마법사는 언제 떠날지 모르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저런 걸 타보겠는가 싶어서 꼬마들의 마음이 이해는 갔다. 오늘따라 손님도 없었고 가게는 누나가 지키기에 충분하다. 잠도 깰 겸 가볍게 산책이나 하자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았는데 더운 날씨 탓에 땀으로 등이 축축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찬물로 샤워나 할까 생각할 즈음 음악소리와 함께 놀이공원이 눈앞에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조악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낡은 놀이기구들은 불안한 모양새로 잘도 쌩쌩 돌아갔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너도나도 타겠다며 아우성치는 애들 사이로 불쑥 서있는 마법사는 덥지도 않은지 이 날씨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손에 든 돈을 받아 주머니에 챙기는 표정엔 귀찮음과 권태로움이 묻어났다. 놀이공원인지 시장바닥인지 모를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사는 듯 느릿하고 선명한 움직임이었다.


회전목마가 돌면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놀이공원에 썩 어울리지 않았다. 자장가로 불리지만 지독히 비극적인 가사의 동요와 같은 분위기였다. 거기에 아이들의 웃음이 어우러져 사실은 어마어마한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가만있어도 땀이 계속 흘렀고 옷을 펄럭여도 더위가 가시질 않았다. 달궈진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데 마법사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은 건조한 얼굴로 멀뚱히 서있었다. 한참 뒤에 안 사실이지만 마법으로는 주변 공기도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마법사의 이름은 켄마. 결이 좋은 노란 머리카락에 얼굴과 몸이 갸름하니 선이 고왔다. 처음엔 여자치고 키가 좀 큰 줄 알았다. 신기하게도 자기 나이를 세고 살지 않아서 잘 모른다기에 그냥 친구하자 했더니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켄마는 말수가 적었다. 굳이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던 게 습관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묻는 말엔 성실히 대답했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 웅얼대는 것 같으면서 발음이 좋았다. ‘쿠로’라고 부르는 울림이 좋아서 켄마가 이름을 부를 때면 마음이 훈훈해왔다.


켄마는 구둣방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묵고 있는 중인데 할아버지의 과도한 친절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래도 아침마다 주는 스프와 빵이 꽤 맛있고 돈을 아끼기에도 좋아서 옮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하루치 식사라는 말에 놀라자 마법사는 마력만 충분하면 먹지 않아도 지낼 수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행동도 말투도 느긋한 게 사실은 성격이 아니라 밥을 적게 먹어서 힘을 못 쓰는 거 아니냐 했더니 발끈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가게를 지키는 것보다 놀이공원에 가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누나는 어디서 무얼 들었는지 너무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매번 주의를 줬다. 켄마는 나보다 한 뼘 이상 작고 비리비리한 게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몸인데 밥도 하루에 한 번밖에 안 먹는 애라고 해도 걱정이 가실 줄 몰랐다. 형부는 내가 뭘 해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눈앞에서 없는 게 더 나은지 별말은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부모님이 나와 누나에게 물려준 집이라 나의 집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누나가 결혼한 이후부터 어쩐지 누나네 식구에게 얹혀사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층짜리 낮은 건물에 나와 누나, 매형 셋이 살았고 일층은 갖출 건 어느 정도 갖춘 식료품점이 있었다. 새 식구가 들어왔다 해서 불편해 하지 말고 서로 잘 지내보자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매형은 내가 나가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나만 없으면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가게로도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을 거고 그렇게 둘이서 단란하게 신혼 생활을 누리다 때가 되면 내가 있었던 방에 아이를 키울 생각이 분명하다. 마치 둘 사이에 눈치 없이 낀 남의 집 식구마냥 대하니 나도 집에 있는 게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주머니 사정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나가 살거나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데 현실은 누나가 쥐어주는 용돈에 의지하고 있는 형편이라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마을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는 곳이라 사는 재미가 없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아들 가게에 따라가 신문이나 들여다보고 꾸벅꾸벅 조는 게 전부인 건넛집 할아버지가 내 미래 모습일 게 뻔했다.


젊은 사람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은 연애였다. 어차피 철모를 시절 같이 깨 벗고 놀던 사이였는데 사춘기를 겪으며 서로 데면데면하다가 어느 순간 이성으로 느껴져 연애를 한다는 게 우스웠다. 볼 장 다 본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사랑이 피어나는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켄마는 아직 세상을 덜 살아서 어른의 감정을 이해 못 한다며 타박했다. 그러는 너는 어른의 감정을 잘 아냐고 묻자 곰곰이 되짚는가 싶더니 싱겁게 웃기만 했다.


“자기도 애송이면서.”

“난 애송이라 말한 적은 없어.…이 애송아.”

“지금 했잖아.”

“쿠로가 애송이 같이 구니까.”


서로 네가 애송이라며 한참을 티격태격했다. 어떤 꼬마애 하나가 둘 다 바보 같다며 해맑게 꼬집어 말하고 난 뒤에야 의미 없는 말싸움을 멈출 수 있었다. 입을 삐쭉 거리는 켄마의 귓바퀴가 붉었다. 빤히 보면 모자를 뒤집어 써버리니 표 나지 않게 훔쳐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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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신비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머물던 곳에서도 어김없이 같은 일이 반복됐다. 어째 이번엔 평화가 오래간다 했다.


마을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은 모두 내 탓이었다. 하물며 까마귀 떼가 잔뜩 나타난 것도 내 탓이었다. 마법사가 되면 천지를 개벽할 능력이 생기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연히 벌어진 자연현상이라 해명하는 것도 귀찮고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들이라 무시했더니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점점 더 몸집을 불렸다. 그들은 그냥 탓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건 대부분 외지인의 역할이었고 이번엔 내가 그 역을 짊어졌다. 마법사라고 떠받들 때는 언제고 처음부터 불길했다며 경멸하는 일에 진절머리가 났다.


갈아입을 옷가지와 지팡이만 챙겨서 밤중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마구간에 가자 잠귀 예민한 당나귀들이 푸르릉거렸다. 쉿, 조용히 해야지.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나귀들이 소리를 멈추고 커다란 눈망울만 빛냈다. 나름 애지중지 키운 녀석들을 두고 가는 게 마음 쓰였지만 내가 떠난 걸 알면 누군가 옳다구나 데려가 키울 것이다. 가장 튼튼한 놈을 골라 타고 마을을 벗어났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도착한 마을에서 여관비를 내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결국엔 당나귀까지 담보로 삼아 돈을 조금 꿨지만 겨우 사나흘 버틸 수준밖에 되질 않았다. 마력이 떨어져 평범한 인간의 몸이 되어버린 탓에 자꾸만 배가 고팠다. 이곳은 음식 값보다 포션이 비싸서 남은 돈으론 겨우 한 병이나 구하면 다행일 정도였다. 그거로는 충분치 않다.


돈도 마력도 간절한 상황에서 예전에 어느 마을에서 봤던 놀이공원이 떠올랐다. 평범한 인간에게도 약간의 마력은 있다. 가진 줄도 몰랐던 마력을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즐겁다고 마법사가 만든 놀이기구를 탔다. 고귀하고 정통성 있는 마법사들이 본다면 야비하다고 손가락질 했을 행동이지만 돌이켜보니 그도 살기 급급해서 체면이나 양심 따윌 고려할 처지가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다. 이름 모를 마법사에게 깊은 공감을 느끼며 지팡이를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긁어모아 회전목마 하나를 간신히 만들고 나니 꼼짝도 할 수 없어 흙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까무룩 기절했다 일어났더니 어디선가 잔뜩 몰려온 꼬마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남은 기운을 탈탈 털어 꼬마들을 놀이기구에 태우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쿠로오는 놀이공원을 찾은 어른 중에 유일하게 보호자가 아니었다. 공원 변두리에 자리 잡아 이쪽을 빤히 보다가 조용히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 떼를 지어 몰려든 아이들에게 휩쓸려 넘어지던 나를 도와주며 말을 텄다.

쿠로오는 사람을 잘 다뤘다. 누나를 따라 장사를 하며 말솜씨가 유려해졌다고 하는데 날 때부터 능글맞았을 게 분명하다. 만날 들러 아이들 줄 세우는 걸 돕는 중에도 나를 놀려먹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쿠로오가 은근하게 쳐다볼 때마다 주변에 마력이 넘실거렸다. 쿠로오는 자기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다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뭘 그렇게 보냐고 반했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주변 온도를 한껏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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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내려앉자 줄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타고도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낸 애들까지 보내고 나서야 기묘한 음악소리를 내는 놀이기구가 멈췄다. 가짜 말들이 지칠 리도 없는데 벌어진 입에서 아이고 하는 탄식이 들리는 듯 했다. 아이들에게 시달린 우리도 자리에 주저앉았다.


좋아하는 애플파이를 잔뜩 담은 주머니를 건네자 켄마의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돈다. 이걸 사오느라 매일 빵집에 들렀더니 그 집 아가씨가 제게 반한 줄 알고 나만 보면 괜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귀퉁이부터 야금야금 베어 먹는 모습이 귀여워 빤히 보자 켄마가 등을 돌렸다.


“놀이기구 타본 적은 있어.”

“...아니.”

“왜? 네가 만들었잖아.”

“굳이 탈 이유가 없잖아.”

“지금 타볼래?”

그러고 싶지 않은지 못 들은 척 하는 모습에 오기가 생겼다.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잖아. 빙빙 돌아가는 거... 보고만 있어도 멀미나...”

“타는 건 또 다른 거지. 한번 타보자.”


회전목마는 지긋지긋하고 바이킹은 멀미가 날 것 같다 길래 관람차에 올라탔다. 삐그덕거리며 올라가는 모양이 허술하기 그지없어 자칫하면 무너질 듯 불안했다. 음악도 뭣도 없이 좁은 공간에 마주앉아 있는 건 어색하고 민망했다. 켄마는 그럴 거였으면서 왜 타자고 했냐는 표정이다.


“안에서 마법 같은걸 보여주면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러면 나한테 남는 게 없잖아. 간단해 보이는 것도 하루 종일 하면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아.”

“이걸로 돈 말고 뭘 또 벌어?”


자기도 모르게 놀이공원의 비밀을 말하고서 입을 꾹 다무는 켄마였다. 전기도 없이 돌아가는 게 마법 때문이겠거니 했는데 그런 속셈이 있을 줄은 몰랐다. 놀이공원은 일종의 발전소였다. 이건 갈취행위가 아니냐 하자 필요 없는 사람의 것을 필요한 사람이 조금 받아가는 게 큰 잘못은 아니지 않냐 며 변명을 한다.


“마력은 마법사만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어...보통 사람도 조금은 가지고 있지.”

“꼬마들만?”

“아니...어른은 애들보다 좀 더...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어른들은 이런 걸 잘 안타지. 시시하니까... 어른들이 온다면 더 많이 모일 테지만 지금도 충분해.”


이상한 호기심이 들끓었다. 그럼 나는 마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 어릴 때 마법사를 꿈꿨던 적이 있다. 예전에 소환 진으로 고양이를 불러냈던 마법사를 보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고양이를 보고 어린 나는 눈을 빛냈다. 나뭇가지를 주워와 마법사 놀이를 했고 꿈에선 하늘을 날았다. 크면서 자연스럽게 잊고 있던 일이 지금에서야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상에 이른 관람차는 잠시 작동을 멈췄다. 집들이 손톱만큼 작게 보여 마을에 있는 모든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속을 더듬어 나의 집을 찾아냈고 이 층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했다.


지상과는 달리 높은 곳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내가 있는 칸은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켄마가 함께 하니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겁이 나긴 했다.


“쿠로는 마력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어. 어쩌면 나보다도 더.”

켄마가 꼭 입맛을 다시는 것 같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었던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고 자란다는 나무가 생각났다.

“걱정 마. 쿠로는 나와 상성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 표정 지을 건 없어.”

“그런 표정은 뭐야”

”내가 꼭 잡아먹을 것 같다고 생각했잖아.”

“눈치 하나는... 그럼 나도 마법사가 될 수 있겠네.”

“응.”


켄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켄마의 시선은 몸 속 깊은 곳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잔뜩 굳은 나를 진득하게 핥아 올리는 지독한 눈. 야릇한 긴장감이 맴도는 관람차.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새 켄마가 마법으로 나를 구속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나눠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고 시선을 거두었을 때 비로소 참은 숨을 뱉을 수 있었다. 무사히 땅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으면 마왕에게 가야 돼.”


마왕.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만나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미지의 존재. 말로만 들어 정말로 존재하는 지 알 수 없는데도 마왕을 잡겠다며 나서는 용사들 중에 우리 마을을 거친 자도 있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꼭 마왕이어야만 해?”

“나는 백마법밖에 모르고... 흑마법사는 찾아보기 힘들어. 그리고 흑마법을 제일 잘 다루는 건 마왕이야.”


 

그 날 꿈에서 켄마는 나를 마왕의 성 앞에 데려다 놓았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큰 강철 문이 열리고 어둠이 나를 부르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흠뻑 젖은 침대를 보며 만약 켄마가 마왕에게 가자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할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따라갔을 것이 분명하다. 켄마가 가자고 하면 나는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켄마는 사실 마법사가 아니라 나를 지옥으로 빠트릴 악마가 아닐까. 허리 아래까지 잠긴 줄도 모른 채 바다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중이었다. 켄마의 손을 잡고서. 그렇게 계속.



/

금세 친근한 마음이 들었던 게 단지 쿠로오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침대에 누우면 쿠로오의 마력이 떠올랐다. 멀리 있으면 검은데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진주를 갈아 넣은 듯 은은한 빛을 띠는 청사금석 같았다. 단단한 광물처럼 뭉쳐있던 그것은 기분에 따라 넘실대며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제련되지 않아 손을 대면 베일 것 같은 모습에 감히 만져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잘 가꾸기만 한다면 마왕에 버금가는 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질투 많은 마왕이 그렇게 되도록 두진 않겠지만.


나를 보고 대마법사가 될 거라며 호들갑을 떨던 늙은 옛 스승이 떠올랐다. 생전 뛰는 법이 없던 비쩍 마른 마법사는 긴 수염을 휘날리며 우리 집으로 찾아왔었다. 나는 결국 대마법사가 되기는커녕 마을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쿠로오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읽었다. 마왕이 어떤 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쿠로오와 함께 마을을 떠나는 상상을 하며 어린애를 납치하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폭풍이 오고 있었다. 동물들은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떼를 지어 이동했다. 그 자리에 머무는 건 폭풍에도 견딜 집을 가진 인간뿐. 심상치 않은 바람에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놀이공원에 오는 머릿수도 줄었다. 쿠로오의 발길도 끊어진 이곳에서 나는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혹시 폭풍의 방향을 바꿀 수 없냐고 찾아와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마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함부로 썼다간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없다고 대답하자 역시 보잘 것 없었다고 궁시렁거리는데 엉덩이에 불을 붙여주고 싶었다.


바람에 털거덕거리는 관람차를 올려다보며 앞으로의 거취를 고민했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자꾸만 그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내내 흐리기만 하고 비는 오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던 날 밤, 창문을 마구 때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불안감이 나를 덮친다. 폭풍우 치는 밤엔 과거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각배를 탄 나는 먹물같이 까만 바다 위에서 노 하나 가지지 못한 채 파도 위를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살기 위해 납작 엎드려서 제발 폭풍이 멈추길 바다가 날 삼키지 않길 간절히 빌었다. 시커먼 하늘이 바다 위로 거대한 창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천둥이 쳤다.

 

눈을 뜨니 쏟아지는 빗소리와 방을 뒤흔드는 천둥소리. 식은땀에 젖은 나를 깨운 엄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 날, 천둥과 함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천둥이 치면 누군가는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천둥이 무서웠다. 하늘이 내리는 징벌 같기도 했다. 너희의 죄를 심판하리라,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찢는 소리 같았다.


천장에서 창문에서 벽에서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사방에서 나는 빗소리에 목이 조여 들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리를 막지 못했다. 물어뜯어 엉망이 된 손톱 밑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어제 쿠로오에게 천둥이 치면 날 찾아와 달라고 말했다.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웃지 않는 내가 예사롭지 않았는지 알겠다고 대답했다. 반드시 너를 찾아가겠다고 걱정 말라고 손을 붙들어 주었다.

쿠로오는 천둥이 치면 올 것이다. 나는 당장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천둥이 끔찍하게 무서운데 천둥을 기다렸다.


 

/

다가올 폭풍에 사람들은 먹을 것들을 쟁여 놓기 바빴다. 덕분에 가게가 셋이서도 손이 모자랄 만큼 정신없었다. 바쁜 틈에서도 머릿속에 켄마가 떠올랐다. 켄마와 우울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놀이공원. 빙빙 도는 기구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남은 물건이 얼마 남지 않은 가게를 정리하는데 켄마가 불쑥 찾아왔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곧 비가 많이 올 거야. 천둥이 치면 꼭 찾아와줘.”


덜컥 사람을 놀라게 했다. 표정이 하도 심각한 게 꼭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언하는 신관 같아서 혹시 세상이 뒤집어지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켄마는 몇 번이나 알겠다는 내 대답에도 엄숙한 표정을 풀지 않고 돌아갔다.


다음 날 비가 왔다. 낡은 지붕은 비를 온전히 막지 못했다. 새는 틈 아래로 받쳐놓은 양동이에 물이 똑똑 떨어졌다. 밖이 어두워도 높게 솟은 관람차는 볼 수 있었다. 세찬 바람에 불 꺼진 관람차가 조금씩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을 타고 누나와 형부의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오래된 집은 비는 물론이거니와 부부의 침대 속 사정까지 전하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엿듣는 상황이 불쾌하기도 하고 켄마가 걱정되기도 해 숨죽여 집을 빠져 나왔다.


우산은 하등 도움이 되질 않았다. 사방에서 비가 날려 옷이 쫄딱 젖은 채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그 때 끼익 거리며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던 관람차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부러져 기능을 상실한 우산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달렸다.


처참하게 부서진 건 관람차 뿐만이 아니었다. 잔해에 깔려 산산조각 난 회전목마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목이 부러져 나뒹구는 목마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비를 마셨다. 기괴한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흙탕물을 밟아 발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뛰었다. 몇 번이고 빗물에 넘어질 뻔해 바지가 더러워졌다. 닫힌 여관 문을 급하게 두드리자 신경질 가득한 얼굴로 노인이 문을 벌컥 열었다. 여기 마법사가 있는지 묻자 위층을 가리켰다. 뛰어 올라가는 등 뒤로 바닥이 더러워진다며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막상 문 앞에 서니 선뜻 열기가 두려웠다. 부러진 목마의 형상이 떠올랐다. 혹시 켄마도... 하는 불안감을 지우며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초조하게 몇 번을 두드리다 귀를 대봐도 잠잠했다. 참을 수 없어 문을 거세게 여니 침대 위로 이불을 뒤집어쓴 켄마가 돌아봤다.


나인걸 확인한 켄마가 벌컥 달려들어 덮치듯 안겨왔다. 물에 쫄딱 젖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떠는 몸을 끌어안고 이제 괜찮다고 속삭였다. 내가 왔다고 안심하라고 계속해서 말했다. 떨림이 잦아들자 켄마가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가자. 마왕한테로.”

아아, 이건 수십 번도 넘게 상상했던 질문.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늘 대답은 하나였다.

“그래. 같이 가자.”

나는 켄마의 손을 잡는다. 어딘지도 모를 지옥에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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