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박준, 문병-남한강 詩-



1


“상장군 김 신, 폐하를 뵙습니다.”



봉인은 깨어졌고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속죄마저도 나에게는 사치였다.


0


아무리 같은 집 안에서 살을 부대끼며 크고 작은 소란을 벌인다고 해도 그는 도깨비였으며 신(神)이었다. 지지 않겠다는 듯 으르렁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존재의 차이가 있다는 소리이다. 김 신, 그자는.



“아, 하윽, 그, 만-“



그런 그에게도 존재하는 단 하나의 약점이 바로 주량이었음에도,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도깨비답게 주량 따위 무시해버리기 다반사였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이리저리 온갖 능력을 사용하는 건 조금 골치 아픈 일이었지만, 제정신이었을 때 보지 못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는 건 꽤나 재미난 일이라 딱히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술 냄새를 어찌나 풍기던지 질색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는데 덜컥 방문이 잡혔다. 또 무슨 추태를 보여주려 그러는 걸까.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 하는 걸 꾹 참고 최대한 무신경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김 신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오늘은 여타 다른 날과는 다르다는 게 느껴져 왔다.



“정신, 차, 악-!”



어떻게든 도망치려 손을 뻗어 시트를 잡은 순간 발목을 강하게 옥죄어오는 손에 볼썽사납게 상체가 앞으로 넘어졌다.

빛을 잃은 눈동자 속 위험함을 감지한 후 도망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고, 그대로 쿵쿵 벽에 온몸을 부딪혀가며 거친 입맞춤과 헤집어오는 손길을 받아냈다. 어떻게 입고 있는 상의가 벗겨진 것인지도 몰랐고 단순히 욕정에 눈이 먼 도깨비를 상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 번만, 한 번만-“


“너, 네, 신부는, 어떡… 흐윽!”


“사자야.”



혹여 김 신이 눈앞의 날 제 신부로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뺨이라도 때리려 했지만 귓가에 정확히 틀어박히는 단어는 그가 이름이 없는 날 부르는 속히 애칭이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라도 현재 지금 자신이 안고자 하는 이가 누군지는 알아보는 김 신에 행동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그는 속전속결로 옷을 벗겨내고 벗어 더는 물러날 곳도 없게 만들었다.



“아, 아아, 아파…!”


“내 너를 볼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 있다.”


“으흐! 너, 내일, 흣-!”


“궁금하지 않으냐?”



아래를 헤집는 손길에 죽어 나가는 오롯이 나만이었다. 김 신은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들리지 않는 대화를 하였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미리 염력을 이용해 사지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 놓았다.

억지로 공간이 생긴 배와 침대 사이로 김 신의 팔이 들어차 부들거리는 허리를 지탱시켜준다. 입에서는 헉헉거리는 거친 신음과 힘겨운 헐떡거림이 계속됐지만 배려 따위는 없었고, 되려 무릎에 걸쳐진 바지를 완전히 벗겨내 성기를 붙잡아 오는 손에 몸을 비틀었다.



“참으로.”


“으, 으헉! 헉! 하으윽-“


“곱구나.”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뱃속 가득 타인의 것이 들어찬다.

사나운 불길이 몸속을 헤집어 더는 남아있는 것이 없을 때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억겁의 시간이 끝날 수 있었다.


*


“…사자야-“


“…”


“혹 내가 어제 너에게 또 실언했다면,”


“그런 거 없었어.”



아니 그러면 왜 지금…

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현명하게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은 신이 묵묵히 밥을 먹는 여를 보며 유하게 웃어 주었다. 원래라면 이런 거에 크게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데, 유독 냉한 기운을 풍기는 저승사자를 보아하니 어제 저가 무슨 사고를 치긴 쳤구나 싶다.



“일하느라 힘들지? 먹고 싶은 과일이라도 있어? 내가 사다 줄게.”


“…네가?”


“응. 말만 해. 친구 좋다는 게 뭐니.”


“허-“



흉흉하게 눈을 치켜떠 신을 바라보던 여가 마지막 그의 말에 크게 코웃음을 친다.

그렇게 폭풍 같던 시간 후 쓰러지듯 둘 다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지만, 온몸의 통증 때문에 먼저 잠이 깬 것은 여였다. 술만 먹으면 기억이 사라지는 신과 다르게 그는 어제 알코올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기에 어제의 기억들이 생생했고, 그러기에 분노하고 또 좌절했다. 방안은 점점 차갑게 얼어붙어 가고 금방이라도 눈앞의 도깨비를 저승으로 데려갈 듯한 기세였던 여는 한숨 한번과 같이 분노를 가라앉혔다. 어차피 도깨비는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기억도 못할 것이다. 애써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저 혼자 간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 여는, 그대로 자신만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신의 방으로 들어가 마치 자신이 이곳에서 잠이 들었던 것마냥 침대 위로 향을 남겨놓고 분풀이라도 하듯 방 안 곳곳을 어지럽힌 후에야 방에서 나왔다.



“술 마셨으면 곱게 네 방 가서 자.”


“…응.”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당장 기타누락자부터 가만 안 둬.”


“야, 넌 왜 자꾸… 그래, 알았어.”



신부의 등장에 반박을 시도하려 했던 도깨비는 반쯤 얼어붙은 식탁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선배님.”


“어?”


“망자들 저승으로 안 데리고 가십니까?”


“아…”



후배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는 자신이 지금 삼중 추돌사고가 일어난 현장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온 몇몇 저승사자들은 각자 저의 몫을 해내 망자들을 인도하는데 저가 맡은 망자들은 벌써 추돌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 있다. 자신의 부주의로 일을 어렵게 만들었기에 누구한테 분풀이도 하지 못하고 망자들이 있는 곳까지 걸음을 옮기려던 여가 곁눈질로 피가 낭자한 사고현장을 바라봤다.

오늘도 처참하구나. 아무리 많은 죽음의 현장을 목격해도 생각마저 무덤덤해질 수는 없기에 여는 늘 하던 생각을 하며 갈 길을 바삐 갔다. 아니, 가야만 했다.



“욱-“



갑자기 치미는 토기만 아니면 말이다.

여의 헛구역질에 같이 있던 후배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더 놀란 표정을 지은 여가 입가를 가린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들려오는 고통 어린 비명들과 시끄러운 고함. 그리고 이리저리 낭자한 피와 함께 올라오는 혈의 향.



 “우욱-“



인지하고 나니 한층 더 강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혈의 향에 여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왜 이래, 왜 이러는 거야.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몸의 반응에 여의 눈이 요동쳐온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다른 저승사자들이 하나둘 여에게 다가오자, 머리를 몇 번 흔든 그가 심호흡 몇 번을 내뱉은 뒤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오늘 내가 몸이 별로 안 좋아서 그러는데, 대신 좀 부탁해도 될까.”


“아, 예,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어. 괜찮아. 위에는 내가 말씀드릴게. 부탁한다.”


“예.”



후배에게 일을 맡기자마자 서둘러 모자를 살짝 내리누른 채 사고현장에서 사라진 여가 도착한 곳은 집 거실. 은탁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부터 방보다 거실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신은 그 날도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고, 갑자기 나타난 여에 눈길을 한 번 주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야, 도깨비.”


“지금 근무 중 아니야?”


“너 인간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다 했지.”


“…?”



다소 뜬금없는 여의 말에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뗀 신이 대답 대신 눈썹을 한 번 치켜떴다. 그건 왜 물어보는데? 조금 전 일어난 상황 속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단 하나의 기억에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이곳까지 왔다가, 허를 찌르는 신의 말에 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부주의하고 무식한 도깨비 자식.”


“뭐? 야, 너 갑자기 무슨, 야, 야!”



자기 할 말만 하고 또 홀연히 사라진 여에 신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듯 멍하게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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