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오해의 메커니즘은 비슷했지만 결과물은 달랐다. 오해를 미뤄둔 숙제처럼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나하나 뜯어서 그 모양을 살펴보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는 백현이었고 후자는 경수였다. 형? 세훈이 물었고 경수는 느릿하게 거기 말고 저기 앉자, 하고 대꾸했다. 백현은 연주는 아랑곳하지않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변백현 너 뭐해! 연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백현은 성큼성큼, 경수는 가만가만. 성큼성큼 걷는 백현이 좀 더 빨랐다. 구석 자리를 고집하는 경수를 붙잡았다. 할 말 많은 얼굴끼리 부딪쳤다.



“너 뭐야.”

“뭘.”

“쟤랑 이런 데를 왜 와.”


세훈을 열심히 흘겼다. 감출 생각도 없었다.


“이런 데? 여기 카페야.”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모르겠는데.”

“모른다고?”



과제를 한답시고 텅 빈 한글창을 바라보다 괜히 열이 뻗쳐 엔터를 연달아 눌러 페이지를 넘겨 버릴 때의 느낌이었다. 마음속에선 분명한 말들이 서두를 찾지 못해 힘없이 흩어졌다. 좁고 낡은 캠퍼스에서 삼삼오오 묶이는 일은 숱하게 있었지만 둘이 되는 건 너 하나였다고.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않았냐고. 눈치 없는 후배가 되고 까탈스런 선배가 되는 한이 있어도 꼭 누굴 데리고 나갔는데. 학교에서 한참은 걸어야 나오는 카페에서, 같은 과 사람이어도 갸우뚱할 일인데 이번 학기에 첨 봤을 게 분명한, 접점이 있을 리 없는 다른 과 후배랑 단둘이 있는 널 보고 내가 이렇게 삐딱해지는 까닭을, 너 정말 모르느냐고. 촘촘히 얽힌 진심은 경수의 힘 있는 다섯 글자 앞에서 맥을 못 췄다.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모른다니까. 무려 세 번이었다.



그러나 단호한 오자토크를 선보이던 경수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 크지 않은 카페였다. 작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테이블을 놓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구석으로 도망쳤는데도 백현의 자리가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백현의 상대방 역시 시야 모서리에 아슬하게 걸쳤다. 화를 내는 백현이 우스웠다. 입장바꿔 생각해 봐. 클리셰 범벅인 대사를 떠올렸다. 그런 말을 쏘아 붙일 때, 정말로 입장을 바꿔서 고려할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한 상태라면 애초에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수부터가 그랬다. 백현의 입장?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니 입장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은, 애초부터 바꿀 맘은 없었던 데다가, 자신이 가진 그 입장이란 게 얼마나 더 처연하고 슬픈지만을 내세우는 표현인 셈이었다.



경수는 입을 다물었다. 화를 겨루는 것 역시 사랑의 한 갈래이던 때라면 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가서 얘기하자.”

“할 얘기 없어.”

“나는 있어.”

“너 있는데 뭐 어쩌라고.”

“뭐?”

“나랑 상관없잖아.”

“…”

“번호 지웠다며. 쭉 그렇게 해.”

“…말 꼭 그렇게 할래?”



부르르. 애매한 거리에서 둘을 관찰하던 세훈이 진동벨을 집어 들었다. 음료 가지고 올게요. 딱딱한 말투에 정신이 훅 들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백현에겐 번번이 휘말렸다.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그랬다.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 만이 경수의 정신을 지배해서, 결론적으로 백현만을 생각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변백현을. 대체 어떻게 하면 변백현을.



“그럼 어떻게 말할까.”

“…”

“나 너랑 이런 식으로 부딪히는 거, 너무 힘들어. 근데 이 말 나 저번에도 했는데. 뭘 어떻게 얘기해.”

“…도경수.”

“가 봐, 너 찾는 거 같은데.”



증거를 잡은 연주가 분노하며 가발을 벗어 던졌다. 오랫동안 억눌러온 조폭 마누라의 피가 들끓는 순간이었다. 현장을 들킨 전 남친과 후배가 줄행랑쳤다. 백현아, 쟤네 튄다! 두 사람을 다 쫓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연주가 백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사촌 동생은 누굴 도울 처지가 못 됐다. 백현의 목표물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쫓을 수도 없었고 되레 백현에게 도망치길 권유하는 중이었다. 허망함이 몰려왔다.



“너 안 가면 내가 가고.”



경수는 음료 트레이를 들고 오던 세훈에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미안. 먼저 갈게. 연주 다음으로 경수가 뛰쳐나가게 된 우스꽝스런 상황이 연출됐다. 세훈은 서두르지 않고 걸어왔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의자 사이를 요령좋게 피했다. 백현이 세훈을 신경쓰지 않듯 세훈도 백현을 살피지 않았다. 다만 음료 하나가 남아서, 알바생이 주문을 물어보듯, 헤매는 신입생에게 필기구를 추천하듯 그렇게, 물었다. 아아메 드실래요? 전 쓴 거 못 먹어서.



“…나한테 묻는거야?”

“그럼 여기 선배말고 누가 있어요.”

“같은 과도 아니면서 무슨 선배.”

“그럼 형이라고 해요? 그게 더 싫을텐데.”



“…넌 왜 안 따라가.”

“형이 먼저 간다고 했으니까요.”

“…”

“전 형 말 잘 들어요.”



선배는 안 듣죠? 그렇게 생겼어요. 세훈이 껄렁한 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심술 났다.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였다. 이제껏 세훈은 지지부진한 질투의 역사에 제 이름 석자를 허락한 일이 없었다. 덕분에 차인 적도 많았다. 좋아하면 당연히 질투가 나기 마련이라는 그 명제가, 세훈은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넌 나 안 좋아하잖아. 그런 말을 들으면 왜 허를 찔린 것 같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다 끝났다고 몇 번씩 되새겨도 경수를 상대로 한 마음은 작은 불씨로 옮겨붙는 불처럼 여기저기 영역을 넓혔다. 백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미안하지만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눈 부라릴 필요없어. 차라리 내가 경수 형의 뭐라도 되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어정쩡한 포지션으로 아이스초코나 빨고 있는거, 진짜 모양 빠지니까.



52


모르는 방향으로 뛰었다.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계단을 보면 일부러 뛰어올랐다. 벅찬 숨을 갈무리 할 새도 없이 다시 내달렸다. 시야를 꽉 메운 여러 주택들은 높낮이가 제멋대로였다. 불균형한 햇빛이 여러 군데 기이한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분명 올라가는 중인데도 올라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 기이한 구조였다. 엉성하게 달린 문패에 적힌 주소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우리가 무언갈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얼마나 얄팍한 말인지.



버스를 탄 것도 아니었고 그저 카페에서 조금 더 멀리 걸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생판 낯선 동네를 만났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익숙한 행동을 반복하며 살 따름이었다. 백현을 제외하면 그랬다. 긴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도 백현은 매번 경수를 헤매게 했다. 난데없는 자연재해로 뚝 끊긴 도로 같았다. 백현은 반대쪽에서 실실 웃으며 경수를 향해 손짓했다. 뭐해. 건너오지 않고.


도무지…갈 수가 없는데.



그때도 이랬었다. 1학년 초겨울의 어느 늦은 저녁, 경수는 교양 팀플에서 난항을 겪던 와중이었다. 체대생 몇 명과 두어번 말을 섞어 본 게 다인 동기와 같은 조가 됐는데, 한 번도 제시간에 모이질 못했다. 모여도 영양가 없는 얘기만 하는 통에 진도가 늘 제자리였다. 어떻게 네 명중에 세 명이 프리라이더야. 정색하고 얘기도 해봤지만 그때만 좀 죄송하다며 굽신 거릴 뿐 결국엔 다 경수의 몫이었다. 하필 또 자질구레한 자료가 많이 필요한 과제라 노트북을 부실 기세로 구글링을 하던 경수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동기 성준이 옆에서 도우겠다며 나섰다. (도움이 되진 못했다. 일머리가 없다는 게 바로 이런 뜻이구나, 만 알게 된 경수였다.)



밥까지 거르고 매진한 과제는 열 시가 넘어서야 얼추 마무리됐다. 늦은 저녁을 사겠다는 성준의 말을 거절하기도 뭣해서 백현에게 문자를 남겨둔 경수였다. 나 오늘 늦게 들어가. 김성준이 밥 산대. 미안하긴 한 가봐. 자취방에 살다시피 하는 백현 덕에 부부 같은 이런 문자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백현은 모르겠지만, 경수는 그 사실이 못내 좋았다. 뭐 사갈까? 하면 초밥 먹고 싶다, 따위의 대답이 오는 그 흐름이 이상하게 설렜다. 군더더기 없이 용건만 나누는 대화인데도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에 내가 꼭 한 세트처럼 붙어 있는 것 같아서, 도경수를 뒤집으면 변백현이 나오고 변백현을 반으로 자르면 도경수가 나올 것 같아서, 자각할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이 들었다.



백현에겐 답이 없었다. 성준은 이 시간에 마땅히 갈 밥집이 없다며 그냥 술집을 가자고 했다. 술을 싫어한다는 경수의 불만에도 그럼 술은 내가 까면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목요일 밤이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기운에도 대학가는 시끄러웠다. 추워진 만큼 시끄럽게 굴겠다는 듯, 맛 간 목소리로 고성을 질렀다. 다행히 성준도 그런 곳은 딱 질색이라며 손사래쳤고, 조용한 데로 가자며 경수를 안내했다.



자리마다 커튼이 달린 술집이었다. 경수는 맑은 탕과 매운 탕 중에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에 백현과 오게 되면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도 생각해 보던 찰나였다.



“대박사건. 나 지금 변백현봤어.”

“누구?”

“와, 저 새끼 저거 아닌 척 하더니 딱 걸렸네. 그 선배 있잖아. 예쁜데 좀 까칠한.”

“…잘못 봤겠지.”

“둘이 들어오는 거 딱 봤는데 뭘. 나 눈 되게 좋아.”

“…닮은 사람이겠지.”

“뭔 소리야. 한 사람은 변백현이고, 한 사람은 그 여자 선배인데. 나 아직 술 입에도 안 댔거든?”



경수의 거듭된 부정에도, 성준을 이길 순 없었다. 성준은 변백현의 외양(아침에 경수가 본 옷차림과 똑같았다.)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그 여자 선배의 표정(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을 오바를 보태 묘사했다. 조별 과제 하는 내내 성준이 답답하게 굴었어도 닥치라는 말이 나오진 않았었는데. 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들의 비화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실없이 웃음을 흘리는 꼴이 얄미웠다.



그러나 성준은 잔챙이였다. 진짜는 이곳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을 백현이었다.



상상 속에선 다했다. 중국 무협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커튼을 전부 떼어낼 만큼의 장풍을 쏘곤 당황한 얼굴로 쪼그려 앉아 있는 백현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기도 했고, 싸구려 재연 프로그램처럼 삽시간에 화내고 울고 다그치기도 했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런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는 단골 대사도 당연히, 했다.



속이 메스꺼웠다. 먹은 것도 없으면서 토기가 몰려왔다. 그런데도 화장실에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왠지 백현을 마주칠 것 같았다. 백현은 둘러대는 모양새로, 묻지도 않았는데 친구들 끼리 한 잔 하러 왔다며…경수를 밀쳤다. 밀쳤다. 밀쳤나?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갔다.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멋대로 공상했다.



나 도서관에서 쓰러진 거 아냐? 네 명 몫 다 하다가 고꾸라진 거 아니냐고. 맞아. 김성준이 먼저 술을 사겠다고 나설 리가 없는데. 변백현 역시 나 몰래 누굴 만나고 다닐 리가 없고. 따지고 보니 이상한 거 투성이잖아? 꿈에서 꿈인 걸 알면 조종할 수 있다고 그러던데. 루시드 드림이랬나. 아. 어떻게 하면 루시드 드림을 경험할 수 있는지 알려준 것도 변백현인데. 간신히 꿈에서 나를 불렀는데 너무 가까운 거리에 날 소환해 버려서 심장이 막 두근거린 탓에 잠에서 깨고 말았단 얘기도 했었지. 초심자가 가장 실패하기 쉬운 유형이라며. 심장이 너무 뛰지 않게 조심해야지 루시드 드림을 즐길 수 있는데 경수 너를 부른 탓에 왜냐면 너를 부르면 심장이 당연히 너무 뛰니까 망할 수 밖에 없었다며.

 

변백현, 대답해. 그 심장 나한테만 그러는 거 아니었어? 너무 많이 뛰니까 이젠 막 분간이 안 가? 다른 사람 만나도 그만큼 미치는지 시험하는 거야, 뭐야.



경수의 의식이 마구 뒤엉켰다. 술이 필요 없었다. 눈물이 뚝뚝 나왔다. 당황한 성준이 호출벨을 눌렀다. 일머리 없는 성준에겐 눈치 또한 없었다. 경수야 너 참이슬 먹을래 처음처럼 먹을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경수에겐 주변의 모든 소리가 그저 웅웅대는 진동으로 들렸다. 변백현 하나로 이렇게 전부 망가진 기분이 들다니. 정작 이 상처를 안겨준 변백현은 멀쩡하게 술 마시고 있을 텐데.



바람난 애인 같은 건, 절대 가지고 싶지 않았는데.



언젠가 도어락이 고장 나 열쇠를 들고 다닐 때 방향을 착각하고 집어넣었는데도 열쇠가 이상하게 맞물리는 바람에 빼내느라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제대로 넣은 줄 알고 힘으로 욱여넣은 탓에 꺼내는 일이 배로 힘들었다. 열쇠는 그럴듯하게 끼워져 있었지만 문을 열 순 없었다. 반대로 잡아 당기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손에선 썩은 감자에서나 풍길 법한 냄새가 났다. 다 싫었다. 아빠의 외도를 엄마도 알고 있었다는 걸 들은 후론 자주 이렇게 마음이 주저앉았다. 단단한 콘크리트라 믿었는데 순 흙벽이었다. 작은 충격에도 와르르, 형체를 잃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설사 시작점을 안다 한들 내가 돌려놓을 수도 없지 않나. 그리고 엄마가 괜찮다고…. 씨발. 말이 되냐고.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미련한 엄마의 아들로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참견. 훈수. 조언. 첨언. 엄마의 미련함은 어떤 것으로도 부술 수 없었다. 무식하게 단단하기만 해서, 어찌어찌 가족을 붙여놓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모순은 모순을 낳았다. 맞지 않는 열쇠 꾸러미가 무거워졌다. 그 무렵 경수는 다짐했다. 미련해지지 말자.



그러나 차마 현장을 덮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성준 앞에서 쪽팔린 줄도 모르고 엉엉 울었던 그날 밤에, 경수는 자신이 미련하다고 느꼈다. 미련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징후가 없는 병과도 같았다. 발견한 게 천운이었다. 더 진행되기 전에 끊어내야 맞았다. 지울 수 있는 데이터는 모두 삭제하고, 지울 수 없는 것은 백현과 사이를 벌린 채 서서히 게워내야 했다. 그런데



헤어져줘.



생각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먹은 대로 굴 수 있다면.



백현을 먼저 찾아갔다. 부은 얼굴이 속상해 시선을 아래로 처박았다. 내 것 같지 않은 목소리로, 내 맘 같지 않은 말을 뱉었다. 너와 멀어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왠지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는 해피엔딩도 존재하는 것 같아. 근데 난 그걸 모르겠어. 변백현. 넌 알지. 안다고 말해. 헤어지기 싫다고 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도경수 너 장난 하냐고….



53


그래, 그러자.



54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었다. 얇은 밑창 때문에 여기저기가 쑤셨다. 까진 발뒤꿈치가 쓰라렸다. 무식한 방법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눈에 보이는 상처완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상실감이 해일처럼 몸을 덮쳤다. 경보는 지상에서의 버둥거림이었다. 여전한 마음이라는 걸 이렇게 깨달았다.



좋아하는 만큼 무너지는 거라면, 대체 얼마나 변백현을 좋아하는 걸까.



55


대체 두 사람 왜 이래?



“보내주신 논문에서 건질 게 없던데요.”

“제대로 안 읽으신 것 같은데. 거기 준거가구에 대한 정의 잘 나와있어요.”

“그럼 그 부분만 발췌해서 얘기를 해주셔야 과제가 원활하게 진행되죠.”

“저번에 변백현 씨도 통으로 논문 보내셨길래, 일단 그렇게 한 건데.”



“이건 연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디요.”

“개인주의랑 자기애요.”

“좀 다른 경우 아닌가요?”

“여기 논문 보면, 나르시시즘은 자기애로서, 자기 자신을 제일 중요시 하는 특성을 갖는…”

“아, 알 것 같네. 자기애 높은 사람들, 그런 경우 많으니까.”

“…”



“이 부분은 빼죠.”

“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논리가 우리 가설이랑 안 맞는다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제일 설명하기 좋아. 결과도 잘 나올거고.”

“해봤어?”

“해봐야 알아?”

“어, 난 그래. 넌 아니겠지만.”



유진은 죽을 맛이었다. 학과 사람들이 인정하는 두 미남과 같은 조를 하게 된 학기 초만 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왔었다. 입만 열면 빻은 소리를 지껄이는 형민이 거슬렸지만, 얼굴에 버금가는 고운 심성을 가진 두 미남이 자근자근 밟아주는 까닭에 바로 편안해졌다. 내 생애 언제 이런 경험을 또? 과제는 성가시고 교수는 인간 ASMR이 따로 없었지만 두 미남과 같이 좁다란 스터디룸에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눌 생각을 하면 짜증이 가시고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분명 그랬었다. 몇 주 전까지는.



‘친했다던’ 두 선배가 어째서 통 말을 섞지 않는지, 유진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같은 프레임에 잡히면 배로 감탄을 자아낼 게 분명했지만 주제 넘은 감상이었다. 사람의 눈이 왜 두 개던가? 한 눈으로 변백현을, 또 한 눈으로 도경수를 보려고 두 개가 아니던가? 둘이 떨어져 앉으면 유진이 그만큼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끔 욕심은 났다. 둘이 서로 마주 앉아서 웃고 그러면…그림 죽일텐데.



취소!



웬일로 같이 앉았다 했더니 말끝마다 가시가 돋쳐있었다. 꼭 말로 현피라도 뜨는 것처럼, 서로 살살 약을 올렸다. 말리기도 전에 반말이 튀어 나왔다. 동기라 당연히 말을 놓을 줄 알았는데 첫 날부터 격식을 차리길래 정말 어지간히 안 친한가보다, 했었는데. 예의를 차리기 위한 말씨가 아니라 마지막 방어선을 사수하는 말씨였다. 싸운 이유를 모르니 말리기가 겸연쩍었는데, 그렇다고 또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유진은 바라보기만 할 뿐 절대 손대지 않겠다는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두 개의 눈으로 공평하게 두 사람을 바라봤듯이, 오른쪽 손은 백현의 어깨에, 왼쪽 손은 경수의 어깨에 얹었다.



“나가서…나가서, 얘기하시는 건 어때요?”

“…”

“그, 까먹으신 것 같은데. 여기 저도 있고, 쟤도 있고, 형민 선배도 있고.”

“…”

“나가서 해결하고 오시는 게 나을 것 같아가지구.”

“…”

“또 너무 주먹질은…”



또 너무 주먹질은 하지 마세요. 얼굴도 재산이니까…라고 말을 맺기도 전에 두 사람이 나간 게 다행이었다. 한참 후에야 하마터면 어마어마하게 주책 떨 뻔했다고 자책하는 유진이었다.



56


쫓겨났지만 갈 데는 없었다. 대놓고 투닥거려놓곤 또 둘이 되니 조용해졌다.



백현은 경수의 입매가 좋았다. 다물린 입술이 자아내는 유순한 선이 좋았다. 백현이 사랑해 마지않는 경수의 차분함이 도톰한 가운데 고여있는 것만 같았다. 빛은 유독 경수의 입술에 오래 머물렀다. 너 좀 반짝인다는, 유치한 말을 절로 내뱉게 하는 모습이었다. 좋은 것에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경수의 닫힌 입술을 아꼈지만 침묵까지 원하진 않았는데,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개를 같이 가져야 했던 것처럼.



전환점이 필요했다. 백현이 골머리를 앓는 일들은 생각보다 더 뒤죽박죽 섞여 있었고 꼬인 매듭 하나를 잘라 내는 식으론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치하게 꼬투리 잡는 일을 멈췄다. 그럴 타이밍이 아니었다.



“경수야.”

“…”

“네 말을 해봐.”



내 말에 맞춰 네 말을 하지 말고, 까지 얘기했을 때 경수가 몸을 돌렸다. 완전히 돌린 건 아니고 반쯤 돌린 모양이었는데 삐딱하게 들을 거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심장을 이런 박자로 뛰게 하는 건 도경수 하나였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북을 든 토끼처럼…북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흠씬 두들겨 패는 것처럼, 이렇게.



“…너 대체 왜 나를 좋아한다고 뻐겨?”

“뭐?”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

“너 그냥 내가, 네 손에 안 잡혀서, 분해서 그러는 거, 너도 좀 알아야 해.”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래. 너만 신인류라 심장 세 개씩 달리는 바람에, 나를 좋아하면서 다른 누군갈 좋아할 수도 있다는 명제가 성립될 수 밖에 없는 신체를 타고 난 게 아닌 이상. 말이 안되잖아.



“난…네 트로피, 되기 싫어.”

“말 똑바로 해.”

“…”

“너 혼자 멋대로 결론 내리지 마. 나한테도 기회를 좀 줘.”

“차라리 자자고 해.”

“야.”

“괜히 사람 따라다니면서, 이러지 말고.”

“도경수. 너 진짜 씨발, 말 막할래?”

“기회? 난 다 봤어. 네 변명 필요 없어.”

“‥.”
“무슨 기회를 달라는 거야.”



난 다 봤는데. 다 들었는데. 네가 연주 선배랑 돌아다닌다는 것도. 단둘이 술집에 간 것도. 널 두고 사람들이 연주 선배랑 사귀는 것 같다며 쑥덕댈 때 내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네가 알아? 그걸 듣고서도 차마 너한테 물어볼 용기가 안 나서 아닐 거라고, 아닐 거라고 생각만 하다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무작정 학교 운동장을 토할 것처럼 뛰었어. 그러고 난 후에도 도저히 마음이 진정이 안 돼서, 운동장 한쪽에서 체대 애들이 축구를 하는데 그냥 그 공에 맞고 싶더라. 축구는 왜 공 하나로 게임을 하나. 이왕 할 거 화끈하게 공 열 개쯤 가지고 하면 하나보단 맞을 확률이 올라갈 텐데. 변백현. 넌 다 모르잖아. 내가 해보지도 않고 아는 척 한다고? 그럼 넌 왜 모르면서 아는 척‥.



백현이 거리를 좁혔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를 거부했다. 네가 눈으로 말하는 사람이란 걸 알아. 그렇지만,



“최연주 내 사촌 누나야. 오해하게 만든 거 미안해.”

“‥”

“그러니까 뱉어.”

“‥”

“지금 하는 말, 삼키지마.”



난 별로 유능하지 못해. 기색을 읽어도 판독은 능력 밖이야.



그러니까,


네 말을해.

난 들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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