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뜨거운 물에 파스타 면을 넣으면서 생각했다.

짐 커크는 만사에 비틀린 녀석이야.

좋은 머리를 가지고 부러 밑바닥 생활을 했던 것이나, 양아치 놈들과 싸우고 다니거나. 몇 가지 예만 들어도 모두들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았다. 비단 나처럼 의사나 룸메이트가 아닌 인간들도 손쉽게 꿰뚫어 볼만큼 투명한 인간이란 소리다. 그리고 이 적나라한 행동양식은 연애도 피해갈 수 없었다.

“또 헤어졌어?”

평범하게 이 녀석은 꽃을 받거나 아침과 저녁에 애정담긴 텍스트를 받는 걸 즐겼다. 애인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껴안거나 서로를 만지는 걸 기꺼워했다. 명시된 관계가 지워지기 전까지의 단단함에 기댔고 직접 쓸 수 있음에 환희를 느끼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애인이 미래를 말한다거나, 삶과 저를 같은 무게로 두는 걸 목도하고 나면 현장에서 도망치기 일 수였다.

“왜냐면, 나는 그냥 가볍게 놀고자 하는 의미였거든.”

태연하게 의자를 당겨 앉으며 그가 말했다. 괜한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고 하지 않나. 그 덕에 개구리 몇 마리가 죽었는지 모르겠다.

“매번 그러니까 문제지. 의자 좀 돌려봐.”

개구리를 죽이고 온 날이면 그의 얼굴은 부어있었다. 몇 번이나 실연을 반복하고 짐을 뺐다 넣었다하는 룸메이트가 과연 좋을까? 나는 이별한 녀석이 나에게로 돌아오면 싫은지 좋은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기분이 되곤 했다.

굳이 나는 룸메이트를 바꿀 생각은 없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내 삶이 잔잔하니 살만했다. 돌아오면 나에게 룸메이트를 거부할 권한은 없었기에 맞이를 해주기도 했고.

어정쩡한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얼굴을 가져다 댄다. 그가 자신의 방탕을 수치스러운 척 하는 표상이었다. 나는 그 위에 가볍게 연고를 바르고 패치를 발라주며 타박했다. “그만 좀 다쳐와라.”

그는 매번 그랬다. 며칠에서 길면 몇 달까지. 못 본 사이에 다시 맡을 수 없을 낯선 냄새를 풍겨 댔다. 속살마저 애인의 냄새를 적셔와 놓고 남이 되어 돌아온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를 내칠 권한도 의미도 없었으므로 그를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씻을 땐 붙이고 씻어 하루 정도는 괜찮아.”

그런 말을 하며 치료키트를 닫았다. 그는 얼굴 위로 올라앉은 패치를 만지작거리면서 배시시 웃었다. 난 그 얼굴을 무시하며 금세 익은 파스타 면을 건져 올리고, 기름 두른 팬에 볶았다. 오랜만에 친구와 동침을 하게 되면 그게 또 반갑기도 했고, 어린태가 나는 동거인에게 질책을 해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나는 반갑다고 말하지도 질책을 건네지도 않고 그에게 음식을 해주었다.

“다음에는 없어.”

진심이었다. 그는 물질재조합 장치로 만들어낸 음식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이별을 한 날에도 헤프게 웃었다. 특히 그가 얼굴이 부은 날에는 파스타를 삶았으므로 더욱 방긋 웃었다.

“너 때문에 실연할 때마다 조금 즐거운 거 같아.”

“진심으로 마지막이니까, 개소리 좀 하지 마.”

마침내 소스와 가볍게 볶아 그의 앞에 두자 퉁퉁 부은 얼굴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파스타 면을 대강 씹어 넘기면서 짐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누가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정이 떨어진단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지레 겁먹고 정을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의 말은 그랬다. 동그랗고 노란 정수리를 보면서 난 한숨을 내놨다. 그 아래 동그란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서 퉁퉁 불어터져 있었다. 제임스는 헤어질 때만 얼굴을 다쳐오는 것도 아니다. 싸움박질로 다쳐올 때도 있었고 부주의로 탐사 중 다쳐올 때도 왕왕이었다. 다만 전자나 후자 모두 질 좋은 남자라 말하긴 어렵지 않나. 나는 그 수없는 연애사를 소문으로 들었으면서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담스러워.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면 짜증나.“

짐은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이 뒤틀리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냥, 짜증나. 걔가 한번만 더 생각해달란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저녁에 너랑 뭘 먹어야 하나 생각했어.“

못됐지, 나? 은근히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눈초리는 제법 애처로웠다.

“입에 묻었다.” 하지만 나는 티슈로 그의 입가를 닦아주며 대답을 피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에게 성심성의껏 이야기했다. 첫번째엔 "사람 마음이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두 번째에 나는 "뭐, 네가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겠냐." 세 번째에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지." 네번째에 나는 "알면 됐다." 다섯 번째에 나는 "널 어쩌겠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 여섯 번 째에 하얀 휴지로 백기를 든 셈이다.

얄밉지만 명석한 녀석은 이미 다 꿰뚫고 있었다. 그의 혓바닥에 누가 죽네 사네하는 것도 누군가를 울리는 게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도 알았다. 하지만 제임스는 연애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그런 독단적이고 모난 성격에도 잘생긴 얼굴은 인간의 심리에 끝없이 작용했기 때문이겠지. 녀석의 그런 못되어 먹은 성정이 오히려 인간들의 오기를 자극하는 듯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기 따위는 없는 이혼남의 위치였다. 나는 빈 후라이 팬을 들고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제임스에게 말했다.

“나는 너 같은 녀석은 절대 좋아하지 않을 텐데. 다들 눈이 삐었는지… 참.”

약간은 비꼬는 감이 없지 않자 제임스가 미소 지었다. “눈이 달려있으니까 나한테 연애하자고 달려드는 거지. 이혼남 주제에 가릴 처지야?” 마냥 기쁘지는 않은 그런 미소는 불씨를 당기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순순한 태도로 대답했다.

“이혼 한번 했으니까 난 너같은 녀석만나서 실패하기 싫거든.”

나는 여기서 대화가 멈추길 바랐다. 내가 아무리 배알 없이 살아도 나도 내 삶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이런 생활이 2년째 반복되고 있었고 이쯤 되면 지칠만도 했다. 아니, 지치고 싶었다.

오늘은 특히 시험을 앞전에 두고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내 소망과는 달리 제임스가 눈 동그랗게 뜨고 실패의 대명사가 된 처지에 분노했다.

“내가 연애에 무조건 실패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나는 새삼 그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한번 성공해 보지 그래.”

제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닫았다. 나는 내 책상에 앉아 패드를 켜고 지면으로 된 의학책을 펼쳤다. 짐 커크는 내 눈치를 보며 행주를 들고 식탁을 잠시 닦는가 하더니 털썩 침대에 널부러졌다. 짐 커크 하는 짓을 알고 있다니, 나도 책을 보고 있진 않았다.

“나도 실패하기 싫어.”

등 뒤로 울리는 목소리에 한숨이 나왔다.

“여태 말은 안했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연애할 때 너무 무서워해.”

“뭘?”

“모르겠어?”

뒤돌아본 제임스는 어느새 상체를 세워 침대에 앉은 채였다.

“모르겠는데.” 나는 그 파란 눈- 너무 파래서 가끔은 주먹을 날리고 싶은-을 보면서 처음으로 말했다.

“너도 진심으로 사랑하게 돼서 나중에 헤어지면 힘들까봐 그러는 거잖아.”

제임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짐 커크. 더럽게 그대로 올라갈래?”

꾸물거리며 어느새 양말도 재킷도 벗어 던진다. 어느새 속옷만 입고 누운 제임스가 골몰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돌아서서 책을 바라봤다. 그가 입을 열었다.

“너랑 연애하면 다를까?”

짐 커크가 멀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애써 동요없는 목소리로, 욕을 했다.

“젠장, 뭐라고?”

“너라면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 같거든.”

나는 덜컥 내려앉은 가슴으로 “이미 친구고, 너는 내 모난 모습도 다 알고 있고, 편하고…” 기타 등등의 이유를 늘어놓는 녀석을 보고 있었다. 내가 언젠가 저 녀석을 좋아하는 머저리들을 이해할수 없다고 했나?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스타플리트에 들어와 굳이 우주에서 헤엄을 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 굳이 저딴 식으로 나를 괴롭히는… 저런 꼬맹이를 좋아하는 걸까?

“헤어져도 친구로 남아줄 것 같고…”

어차피 사랑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짝사랑 대상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진짜 연애해볼래?”

제임스가 그새 붓기 빠진 얼굴로 꺄르르 웃으며 동조했다.

“그럴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과 행동거지로 나에게 웃어주는 건 잔인한 일이다.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 그의 침대로 다가가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네가 말한 거 다 자신있긴 하다.” 너랑 헤어지고 남으로 살 자신은 없거든. 나는 뒷말은 하지 않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짐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면 하는 거지 뭐.” 태연한 낯짝. 정말로 태연한 걸까?

“본즈?”

“이봐, 제임스 커크. 난 진심이야. 네가 자꾸 밖으로 나도는 것도 지쳤고…”

제임스가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며 올려다보는 꼴이 볼만했다. 나는 깔끔하게 내려오면서

“좋아, 본즈.”

장난이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파란 눈알 두 개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연애하자니까? 본즈.”

짐 커크가 도발적으로 웃고 있었다.











2




룸메이트 위에 올라탄 나.

현장이 침대 위이고, 녀석이 발가벗은 것까지 생각하면 그다지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특히 그 얼굴이 괜히 유혹하는 미소를 지으며 교태를 부리고 있다면 더욱이. 나는 웃는 면상을 손바닥으로 밀어버렸다. 아주 혼자서 반짝거리는 두 눈 알이나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나 포슬거리는 밀빛 머리카락 같은 것들. 아니 사실은 제임스 커크를.

“장난 그만 쳐.”

제임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장난 먼저 건 게 누군데.”

반쯤은 장난이 아니었지. 뒤돌아서서 답문없이 내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충만하게 차오르는 증오를 느꼈다. 싫고, 질리는 기분을 상기했다. 난 더 이상 그를 받아줄 기력이 없다. 그 철부지 어린애 같이 구는 것들에 연민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저 다른 인간들과 발맞춰 자라지 못한 녀석이라고 생각을 한다. 제임스는 아주 얄밉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녀석이고… 또…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알파벳들을 조합하다가 내가 읽고 있는 지면의 의료 서적이 저 녀석이 가져온 것이라는 걸 떠올린다. 그러면 또 나는 내가 정 떼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짐을 느낀다. 마치 손가락 틈새로 도망가는 물거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제임스 커크에 단단히 빠졌다는 것을 또 통감한다.

스탠드 불을 껐다.

“벌써 자려고?”

“어차피 다 아는 거니까, 한 번 보려고 했지.”

“와. 천하의 개뼈다귀 선생님도 긴장을 하나 보네.”

“박사학위랑, 의사 면허랑, 실전-실패 형제와도 친구 맺은 내가 어지간히 모르려고.”

중얼거리면서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꺼진 불 아래에는 은근한 어둠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는 옆 침대의 제임스가 내는 소리들이 모두 꽂혀들었다. 바스락 거리는 시트소리가 몇 번 들린다. 손바닥에 진땀이 새고 근육이 긴장한다. 그러나 이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귀에 울리면 나는 온몬의 긴장을 풀고 스스로를 질책한다. 부드러운 콧망울에서 퍼지는 그 따스한 숨. 점차 나마저도 힘이 빠지는 그 안심한 들숨과 날숨. 좆같이… 아무리 노력해봐도 떨쳐 낼 수 없는 짝사랑이 방안에 가득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게 몸서리치게 사랑스럽고 또 원망스러워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잘자, 본즈.”

“그래.”

그는 몇 발자국 옆의 동거인이 이토록 그를 신경 쓴다는 걸알까. 쟤는 모를 거야. 나는 눈마저 질끈 감았다. 쟤는 몰라도 나는 안다. 그저 제임스에게 벗어날 도리가 없다.

 내 성격이 칼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번 난 제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그리고 스타플리트 아카데미의 유명인사는 늘어져서 아주 곤한 잠을 잤다. 제 강의 시간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놓고 가면 아침이고 점심이고 먹지 않을 놈이다.

“짐. 지미보이. 일어나.”

굳이 이른 시간에 깨울 필요는 없다. 씻고 나갈 채비를 마친 후 간단한 아침식사를 만들어 놓은 후에야 어깨를 쥐고 흔들어주면 제임스는 아주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면서 일어난다. 사랑에 빠진 인간이 보는 화면들이라 느린 건 아닐 테지. 하여간 아침에는 굼뜬 놈이라 거의 껴안듯이 흔들어 줘야 일어났다. 손도 많이 가고. 쯧. 식탁에 재바르게 앉은 녀석에게 포크를 쥐어주고 일어나면 내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제임스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다시 말해 기숙사 외에 우리는 거의 남처럼 지낸다. 따로 연락도 안하고 굳이 약속을 잡지도 않는다.

“시험 잘 봤어?”

점심을 먹는 중에 제임스는 그렇게 물어왔다. 예전과 같은 평소였다면 기숙사가 아닌 곳에서 꿈도 못 꿨을 일이다.

“뭐. 그럭저럭.”

나는 이미 의사 면허가 있는 남자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임스는 알아먹은 양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하시겠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험에 긴장해야 하는 처지다. 모든 걸 완벽하게 하겠다는 모범생이라고 어필하는 게 아니라… 내 졸업 후 미래는 우주에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노이로제로 다시 지구로 돌아온대도 우선 나는 우주에 일년은 나갈 의향이 있다. 애당초 이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했던 공부 또 하는 이유도 그런 거고. 게다가 실기 과목들 덕분에 매일은 아니더라도 과목이 겹칠때마다 제임스와 낮에도 시간을 보낼수 있게 되었다.

“젠장. 항해술이 오후에 있어.”

“어차피 시물레이션이잖아.”

문제는 이거다. 나는 비행공포증이 있다. 탐사대에 소속된 생도는 무조건적으로 실기 과목을 들어야 하지만 나에게 있어 비행이란 죄다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란 거다.

“젠장, 생생하다고.”

“시뮬레이션이니까.”

“시뮬레이션이 왜 그렇게까지 생생하냐는 거지.”

웬만하면 현장임무에 관한 강의들은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비행은 더욱이. 나는 천성이 펜대나 굴리고 메스나 잡는 의사지, 항해를 하기 위해 키를 잡는 선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거면 왜 항해술을 들어?”

악의없이 물어오는 얼굴에 내가 한숨을 쉬며 토마토를 들쑤셨다. 반으로 조각난 토마토에게서 투명한 초록빛 씨가 터져 나왔다. 굳이 실기과목을 저걸로 듣지 않아도 괜찮았겠지. 하지만…

“항해사가 다 죽으면 내가 해야 하니까. 난 죽기 싫거든.”

강의를 신청할 때 제임스가 비행술을 듣는다고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굳이 이러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네. 난 오늘 게리 만날 거야.”

“…꽤 자주 만나네?”

게리는 제임스보다 한 학년 높은 녀석이었다. 제임스만큼이나 어렸고, 영리했으며 사건사고를 몰고 다녔다. 둘은 합이 맞는 퍼즐조각처럼 잘 맞았다.

큼지막한 고기조각을 입에 넣으려다 빼며 제임스가 웃었다.

“말 안했구나! 나 걔랑 꽤 안정적으로 만나고 있어.”

“뭐? 어제 헤어졌잖아.”

“게리 때문에 헤어진 거야.”

 그러니까, 제임스 커크와 게리는 속궁합도 잘맞았던 것이다.

나는 계기판을 손바닥으로 쳤다. 시발! 제임스커크가 한번에 여럿도 만나고 다니는 줄은 몰랐다. 어쩌면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 아니면 알았는데도 내가 모른 척 했을 수도 있고. 오른쪽에서 운석이 다가옴을 알았고, 너무 빠르게 꺾은 탓에 몸까지 붕떴다. 난 단 한 번도 제임스와 그렇고 그렇게 엮여본 전적이 없다. 젠장. 어제 난 진심으로 설레어했다. 총을 쏘고, 계기판을 읽고, 지레같이 생긴 손잡이를 잡고 뒤흔들었다. 이내 운석 더미가 뒤로 사라졌다. 스테디한 관계라고?

-쉴드 가동 불가 합니다. 연료 28퍼센트가 남았으며 가까운 행성에서 연료를 재공급하시기 바랍니다. 후면부 72퍼센트 이상 훼손되었으나 무사히 착륙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가까운 행성에서…

안내 음성은 나보다도 침착했다. 모든게 다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안달내는 구만.

“너무 거칠었지만, 최저점은 면했네.”

낙제만 면했다. 다시는 짐 커크 한다는 거 따라 하나 봐라. 나는 중얼거리며 거의 너덜너덜해진 심신으로 시뮬레이터에서 내려왔다.

“비행공포증이 있다고?”

비행술의 대가이거나, 라이트 형제의 오십번째 손자쯤 될 교관이 갸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갸륵하고 참 마음에 든다는 웃음을.

“공포증을 이겨내기 위해 여태 수고한 것 알고 있네. 고급 항해술도 들을 예정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각자의 재능에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짓는 광대에 한 대 먹여주고 싶은 기분이 잠시 들었지만, 내 공포증이 그 광대에서 오지 않았기에 참아야 했다. 교관이 나보고 제임스를 사랑하라 지령내린 것도 아니다. 나는 비행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각자 맡은 정도만 탐내야 한다.

솔직히 생각해 봤을 때, 난 들떴었다. 제임스 커크의 장난에 재주 없이 놀아난 셈이다. 어젯밤에는 꿈까지 꿨다. 제임스는 나를 끌어안았고 나도 그를 끌어안았다. 분홍빛 노을이 하늘에 퍼지고 나는 그에게 키스했다.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는 제임스는 귀여웠다.

그래… 아무리 못돼 처먹은 짓을 해도 귀여워 보이는 것이, 나는 이미 글러먹었다. 녀석이 알고한 짓도 아닌 것을. 어쩌겠는가? ‘연애하자니까? 본즈.’ 개꿈이다. 본즈 걔가 그렇게 말할 때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짝사랑을 끝없이 지속하면서… 걔를 기다리며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언젠가 나를 보며 너랑은 오랜 시간 지내고 싶다고 말해주길. 하지만 지금 나는 내 가슴은 살점 하나 없이 뜯어 먹힌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애가 날 볼 때마다 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이 난.

“본즈-”

그냥 뼈만 남았다.

“다녀왔어?”

“짐 챙기는 가 보네.”

“응 걔 기숙사 비었거든.”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눈을 끔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는 내 옷장을 열었고, 몸집만한 짐가방을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그럴 거 없어.”

지퍼를 열어 가방을 열었다. 아가리를 벌린 가방에 옷을 쑤셔넣으며 말했다.

“걔를 이쪽으로 불러.”

나는 전혀 화난 모양새도 아니었을 뿐더러 오히려 빙긋 웃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당황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본즈… 갑자기 왜그래?”

“갑자기라니, 전혀 아니야. 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거야.” 제임스에게서 못 벗어나기는 개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제임스가 내 가방을 잡아 당겼다. 손 움직임이 멎고 그와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 남부 사투리가 그에게 있어 촌스러워 보이는가 생각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 방 바꿀 거거든.”

제니를 잃고 파멜라를 잃었으면서도 나는 지금 다시 이 녀석과 씨름하고 있지 않는가. 사랑도 별 것 아니다. 몸이 멀어지면 언젠가 마음도 멀어지게 돼있다. 난 헛된 꿈에 젖어서, 혼자 망상하고 있었음을 더 이상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너는 여기 있어.”







3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묻는 말에 룸메이트가 가방을 들쳐 맸다. 2년만에 처음 보는 아주 커다란 가방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몸만 왔던 나와는 다르게 그는 온 갖가지 살림도구를 가지고 기숙사로 왔었다. 갑작스럽게 이혼을 했을 때도 저 가방에 짐을 쓸어 담고 쫓기듯 나왔다고 했다. 그는 그런 사연이 있는 가방에 다시 한 번 짐을 쓸어 넣었다. 옷장에 있던 옷가지들을 아무렇지 않게 쑤셔 넣었고, 내가 골동품 집에서 집어다 준 책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외의 칫솔과 샤워타올 따위는 곧장 쓰레기통으로 낙하했다. 동거인은. 아니 더 이상 동거인이 아니고자 하는 남자는 거침없었다. 짐을 싸는 것도, 여기에 있었던 흔적을 지우는 것도. 그는 한숨을 쉬며 내 질문에 답했다.

“아니, 너는 잘못한 거 없어.”

그는 입가를 아래로 한번 씰룩였다. 아니, 입꼬리를 제외하고 입술을 꾹 눌러 올리는 것에 가까웠다. 모든 게 천천히 눈에 찍히는 화면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한결같은 찡그린 미간까지. 선명하게 잔여물로 내 가슴에 남는다. 어리둥절한 채로 서있는 내 어깨를 그의 손바닥이 가볍게 툭툭 올라앉았다가 사라졌다. 마치 거리낄게 없는 친구에게 대하는 것과 유사했다. 별 거 없다는 뜻인가 본데… 나는 이렇게 구는 남자가 더욱 별달랐다. 레너드 맥코이와 나는 이런 느낌의 스킨십을 한 적 없었다. 그는 6살 차이가 나는 사람으로서 괜스레 나를 어린 동생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아주 가볍게 으쓱거리더니 커다란 짐 가방을 한 번 더 고쳐매었다. 나는 그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고 그는 일상적인 몸짓으로 나를 비켜 세우며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나? 시험기간이 끝나서 잠시간의 휴강기간을 가지는 때이긴 했고, 내가 뭔 가 동거인으로서 잘못했던가? 이건… 여태 별 말 없었으나 남이었다면 별말을 했을 행동들을 내가 하긴 했다. 하지만, 레너드 맥코이 이 자식은 내게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단 한번도 내게 가타부타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뼈만 남아 발라 먹혔다는 그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무던하게 상황을 먹어치우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아주 성급한 태도로 신발 뒤꿈치를 밟아 넣었다.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가 제아무리 별일 아니라고 주장한 데도 그는 충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지아주에서 태어났다고 말해주던 남부 사투리의 남자는 신발에 마구잡이로 발을 넣지 않는다. 난 얼른 그를 쫓아갔다. 옷깃에 손을 대거나 할 만한 사이가 못되어서… 무언가 저지할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를 멈추게 만들고 싶었다. 내가 할수 있는 거라곤 어정쩡한 기세로 그에게 다시 질문만 하는 것이었다.

“어디 가려고 그래?”

레너드가 잠시 멈칫하더니 씩 웃었다.

“기숙사 신청 전까지만 애인 집에 있으려고.”
“어- 본즈 너 애인 있는 줄 몰랐는데…”

나는 뒷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후려 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의 체격과 성격 모두 빠진다고 하기 어렵긴 하지만 어디엔가 연애를 할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오, 지미. 너한테 말을 안했으니까.”
말을 하지 않기도 했고.

그는 신발을 고쳐 신지 않은 채로 문을 나섰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룸메이트 생활이 끝나고서도 우리 친구지?”

그가 잠시 나를 쳐다보며 입을 벌리다가 다물고는 다시 씩 웃는다.

“물론이지. 지미보이.”

마치 어린애를 대하듯이, 옛 일터에서 가져온 그 행태 그대로 그러고는 뒷모습만 남겼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질문뿐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본즈 네가 그냥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끼어들 틈도 없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별하고 돌아오면 쟤가 해주던 파스타가 참 맛있었는데. 하지만 내가 그를 위해 짐을 다시 들고 오거나 짐을 다시 빼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였다. 다시 말해 아무도 반기지 않는 나의 연애를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런 주제로 그에게 여기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나가고, 나는 레너드가 나간, 나밖에 없고, 나밖에 없을 방에 우뚝 서 있었다. 내가 어질러놓은 공간들이나 나가는 흉내만 내던 작은 짐은 조악해 보였다. 매번 나는 조금만 짐을 챙겨서 떠났다. 다시 돌아올 예감을 하고서. 하지만 본즈는 아니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해진 내 옆 침대를 보면서 심장이 모나게 뛰었다.

나는 그처럼 신발을 구겨 신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이런 차림으로 절대 밖을 나서지는 않았을 텐데. 헐렁한 티셔츠에 헐어버린 바지를 입고 나는 밖을 서성였다. 레너드 맥코이의 머리통은 보이지도 않는 곳을 떠돌면서 나는 왜 그를 잡으려고 하나 곱씹었다. 엄마나 형이 생각났지만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집을 나가서 떠돌아다닌 것은 맞다. 하지만 레너드는 계속 친구하겠다고 말해 줬는 걸.

아. 미지근한 바람이 시리게 오금이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온도와 무관하게 나의 몸이 추위에 떨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나는 그냥 못 된 걸지도 모른다. 어디를 가도 나와 함께 있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본즈가 있었으면 좋겠다. 레너드가 두드렸던 어깨를 잠시 주무르다가 주머니에 휴대용 패드를 꺼냈다. 나는 메시지 함의 두 번째로 뜨는 버튼을 눌렀다. 몸 몇 번 섞은 내 친구, 내 애인.

[게리, 어디야?] 그러나 내 텍스트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바쁜 걸까? 나는 발뒤꿈치를 질질 끌었다. 아래에 밟히는 접힌 신발이 거슬렸지만 고쳐 신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얼른 답이 왔으면 좋겠다고 초조함을 느끼면서 나는 레너드를 떠올렸다. 삼십분쯤 지났을 때, 게리가 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게리의 부재는 나에게 이래도 된다는 정당함을 부여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연락망 가장 위에 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레너드는 내 전화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Drrrrr… 통신음이 간다. 한번… 두 번… 통신음 사이의 빈 공간이 다섯 개 쯤 생기자 레너드가 평소보다 늦어진다고 생각했다. 여덟 번. 전화소리를 이제야 들었을 수도 있다. 아니 이젠 아홉 번… 어쩌면 그는 그 애인을 만나서 바쁜 지도 모르지. 통신음이 열 한 번, 열 두 번 쯤 울렸을 때 나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곧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게 빤했다. 나는 빨간 버튼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두 시간 만이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한숨과 함께 묻는 레너드의 목소리… 나는 어쩌면 끊을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손가락을 오므리며 바지에 박박 닦았다.

-미안해…
-뭐야. 정말 무슨 일 있어?
-아니.
-근데 왜 울어?

할 말이 없어서 숨을 참았다. 본즈는 내가 운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삼촌도 내가 방에 처박혀 있을 때는 우는 줄 몰랐는데. 그가 만약 알았다면 이 잡듯이 잡아서 날 제대로 울렸을 거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마찬가지로, 몰랐을 텐데…
 
-…짐.
-……
-어디야?

어쩔 도리없이 레너드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했다.

-나…
-응.
-나는,
-그래.
-우리 집, 앞인데…

말을 내뱉으면서도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싶어 부끄러웠다. 몇 살이나 먹고 아직도 별것도 아닌 일로 눈물을 흘리는 건가, 겨우 동거인이 다른 곳으로 간다고, 그게 조금 갑작스럽다고 우는 건가. 나는 본즈가 나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웠다.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지 않길 원했다. 다만 내 걱정 계속되지 못했다.

-…그래 알았어. 거기로 갈게.
-본즈.
-왜, 짐. 괜찮아. 말해봐.

부드러운 목소리에 걱정이 멎고 제멋대로 행동이 뛰쳐 나갈것만 같다. 처음에 나는 레너드에게 나의 모든 걸 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신비함을 추종하고 다 털어놓는 상대를 지겨워한다. 나는 본즈가 날 지겨워하고 떠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봐도 귀로 울리는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고 그 다정이 나는 너무 슬퍼서.

-가져갔던 거… 그대로 가져오면 안 돼?
-…우선, 조금만 기다려.

바보처럼 굴지 않을수 없다.






4



처음 보는 사람과 잠자리를 공유하는 일은 익숙한 일이다. 14살 때부터 줄곧. 첫 애인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한적한 시골 바닥에 갑자기 나타난 또래의 여자애. 철부지 꼬마애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와 별다를 것 없이 어렸으나 나보다 훨씬 성숙했다. 나처럼 혼자 살고 있었지만, 이유가 달랐다. 그는 혼자 살기 위해 혼자 살았다. 난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자립한 여자애 하나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나는 많은 걸 배웠다. 그는 사랑, 그 엇비슷한 것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섹스를 알 게도 했으며 무엇보다 침대를 공유하는 법을 알려줬다. 살을 맞대고 별을 보는 것은 홀로 집에 남아있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한해가 지나기 전에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는 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순 누군가와 그가 겹쳐보였고, 남긴 연락처를 찢어서 태웠다. 하지만 그 연락처가 재가 된다고 그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지구가 해를 한 바퀴 돌기도 전에 나는 외로움을 잊었던 것이다. 그 지독한 외로움. 반작용이었다. 제니퍼가 선사한, 아니 내 외로움이 선물한 동침이란 달콤함은 나를 길들였다. 계속해서 애인을 만들어야만 했다. 내 빈 갈빗대에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지만 커크가家는 밤마다 비었다.

나는 해가 떨어진 때에만 함께 있는 삶에 익숙해졌다.

섹스하지 않고 함께 사는 건 이상하다. 마침내 방황을 마치고 스타플리트에 들어서고 나서 처음으로 느낀 감상은 겨우 그거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내 살 외에 다른 체온을 느낄 수 없었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아침이다, 꼬맹아.”

먼저 일어난 남자가 나를 조용하게 다독거리며 깨워주는 일은 내 인생에 좀처럼 존재하기 힘들었다. 애인이 아니라면 더욱이. 탐사를 목표로 만난 생도라니, 그냥 동거인이라는 건 생소한 일이다.

그는 내게 요구하는 게 없었다. 섹스나 다정한 말 봉사나 돈에 대한 걱정… 이것들이야 당연히 필요 없었으며 내 까탈스러움에 대한 부연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삶을 설명했고 실패를 조롱했다. 비행을 제외하고는 대개 여유가 넘쳐 보였다. 처음 겪는 일조차 마치 한 번쯤은 다 해본 것처럼 굴었다. 나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도 나를 알아냈다. 나는 처음 이사 짐을 내려놓는 남자의 덩치를 보고, 아니 그전에 술병을 넘겨주는 손가락 같은 것을 보고 우리가 한번쯤 섹스할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 실패해서 우주까지 흘러들어온 남자였다. 쉽게 잠자리에 사람을 들이는 종류가 아니었단 거다. 난 의아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잘해주는 거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아카데미의 특성이라고 해도, 그는 내가 만난 동갑내기들이나 그 언저리의 사람들과도 달랐다. 왜였을까?

알 수 없었고,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지를 즐기고 싶었다.

언젠가… 그래도 내가 기숙사에 붙어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내 뺨에 반창고 그 비슷한 것을 발라주고, 멍든 몸에 연고를 발라줬을 때였다. 펍에서 치정싸움에 휘말렸던 것뿐이었는데 그는 내가 또 일을 벌인 줄 알았다.

“넌… 잘난 얼굴 써먹을 줄 알면서도 아낄 줄은 모르냐.”

걱정으로 점철된 미간과 그 아래 숨겨진 오묘한 그의 눈 색을 나는 왜 그때야 발견했을까. 계속해서 보던 얼굴이었는데 처음만난 것처럼 나는 한 순간에 그와 언젠가 섹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본즈가 나와 자고 싶으면 어떡하지? 진짜 웃긴 상상이었다.

“왜 웃고 그래.”

나는 그냥 네 손이 간지럽다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너드와 함께 침대를 뒹구는 것은 어렴풋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말이 뇌리에 새겨지는 순간 족쇄를 찬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잖아, 혹시라도 쟤가 날 좋아하면 어떡해. 정말… 쓸모없는 추측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평생 함께하는 섹스상대는 없다. 영원한 사랑도 없다. 혹시라도 한번 얽혔다가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싫었다. 움튼 단서는 내 머릿속을 헤집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결국 내가 기숙사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했다.

아무나 골라 사귀며 집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레너드를 보면 그의 선의가 계속해서 다른 단서로 읽혀졌다. 레너드와 금방이라도 섹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상한 소리다. 정말로. 자연스럽게도 그런 흐지부지한 근거로 시작한 관계들은 죄다 빠르고 더럽게 끝을 봤다. 매번 다시 돌아오는 나를 보면서 레너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비로소 나는 그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내가 뺨을 붉히고 돌아올 때마다 본즈는 물을 끓였다. 면을 삶아내고 소스로 볶아내는 모습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얼렁뚱땅 헤어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훈련을 받는 개처럼 나는 학습했다. 행복한 삶인 줄 알았다.

왜… 내가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죄다 무너지는 걸까.

레너드 맥코이가 다시 물을 끓인다. 면을 삶지는 않는다. 끓은 물이 찬장 구석에 박힌 인스턴트 티백을 적시고, 우려낸다. 점차 노랗게 변하는 잔 속을 보면서 나는 코를 훌쩍였다.

“짐.”
“…응.”
“울지 마.”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어, 내가. 나는 이번 학기 들어서 레너드와 같은 비행수업을 듣는 것이 너무 좋았다. 기숙사도 밤에만 머무는 곳처럼 그와 대화를 하곤 했지만 그 수업으로 인해 문자도 자주 주고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냥 순조롭게 그와 오랜 친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레너드는 짐으로 밀 한 톨도 가져오지 않았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바람 냄새를 풍기며 내 눈물을 닦아주었을 뿐이다.

“나도… 우는 내가 짜증나.”

기숙사에는 내 짐만 내팽개쳐 있고, 레너드의 것이라곤 그가 누웠던 침대만이 덩그라니 놓여있다. 나는 눈을 흘기다가 방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는 다시 한 번 세상이 일그러지는 걸 비참하게 봐야 했다. 한숨이 내 귓가를 스치고 레너드가 앉았다.

“정말, 뭘 잘했다고 우는 지 모르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곁에 앉아서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거친 손가락 끝이 얼마나 섬세한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스스로 깨닫길 바란다. 그건 거의 애무에 가까웠다. 지문에 담긴 애정이 느껴졌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데 왜 떠나가려 하는 거야? 나는 목젖까지 그런 응석이 튀쳐 나가려는 걸 막았다. 닦아낸 손으로 그가 내 얼굴을 마주 잡고 엄한 얼굴을 했다. 그 낯에서 어디엔가 먼지 냄새가 났고, 술 냄새도 났다. 하지만 생김새는 무엇 하나 망가진 태없이 말짱하다. 난 그 손을 떨쳐내려고 했다.

“짐 커크.”
“응.”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사뭇 진지한 얼굴. 나는 그가 내 기묘한 상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새 게리가 널 찼어?”
나는 부정했다.
“아니야.”

레너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표정은 줄곧 그가 뱉던 한숨이 버무려진, 하지만 동시에 평소처럼 내가 선망하기 그지없는 단단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다시 집에 들어오길 바라는 거야?”
“그건……”

어떻게 말하겠어. 아무리 나라도 레너드 맥코이 너랑 섹스하게 될까봐 집을 나간거지, 함께하는 생활은 좋다고 말을 어떻게 해야 될까. 나는 거기에 답하지 않고 다른 소리를 꺼냈다.

“나 그냥 여기서 살 거거든.”
“뭐?”

아주 어이가 없었는지 그가 내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게리가 날 찬 건 아닌데. 게리가 같이 사는 건 좀 그렇대.”
“…흠.”

가늘게 떠진 눈이 나를 쳐다봤다. 어느새 멎은 눈물을 어깨로 닦아내며 차를 머금었다.

“나도 당황했어…… 된다고 해놓고 말 바꾸는 건 뭐야. 네가 나간 상태에서 걔가 그런 소리하니까… 감당이 안 되는 거 있지.”

레너드의 검지와 중지 끝이 식탁위에서 천천히 종종걸음 치는 걸 바라보았다. 레너드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너도 어차피 기숙사 새로 구하기까지 기간이 있잖아.”
“어- 뭐.”

어딘가 먼곳을 보는 얼굴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심드렁한 목소리에 가슴이 지끈거렸지만 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단 한 번도 먼저 이런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레너드는 몰라도 나는 알았다.

“그때까지만 같이 살자.”

내가 얼마나 레너드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지 나는 안다. 이제는 레너드가 왜 여태 참아왔는지 알아야겠다. 그와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궁금했다.

“애인 집 갈거라니까……”

레너드가 말끝을 흐렸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고 내가 조금만 더 건드리면 넘어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말꼬리를 늘리며 그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 기간만이라도 레너드는 내 곁에서 있긴 있을 테다. 지금은 그 뿐이라도 좋았다.




Life is disaster but we have each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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