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쌔신크리드 소설 포세이큰(Forsaken) 에서 개인적으로 번역하고 싶은 파트를 번역합니다. 소설상의 시간 순서와 번역 순서가 다를 수 있습니다.
* 의역 및 오역, 번역체 주의

* 소설상의 파트 구분
Part 1 : 1735년 12월 6일- 1735년 12월 11일
Part 2 : 1747년 6월 10일- 1747년 7월 17일
Part 3 : 1753년 6월 7일- 1758년 1월 28일
Part 4 : 1774년 1월 12일- 1781년 9월 16일




1735년 12월 9일 



  오늘 아침 딕위드가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노크를 한 후 내 답을 기다렸고, 방에 들어오기 위해 머리를 숙여야 했다. 살짝 튀어나온 눈에 주름진 눈꺼풀을 가진 딕위드는 머리가 벗겨지고 있었으며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는데,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비상 거주지의 출입문은 이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집을 돌아다닐 때마다 몸을 굽혀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당황해 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최소한 켄웨이 일가가 런던에 정착했을 때부터 아버지의 시종이었고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우리 중 누구보다도 더욱 퀸 앤 광장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고통을 더욱 심하게 만든 것은 죄책감-습격이 있던 그 밤에, 집안 사정으로 헤리퍼드셔에 다녀오느라 저택을 비웠다는 죄책감이었다. 그와 마부는 습격이 지나간 후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었다. 

  “저를 용서할 마음이 드시길 바랄 뿐입니다, 헤이담 도련님.” 며칠 뒤, 그가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물론이야, 딕위드.” 내가 말했지만, 그 뒤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를 성(姓)으로 부르는 것은 편했던 적이 없었고, 절대 입에 붙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고마워.”뿐이었다. 

  오늘 아침, 그의 창백한 얼굴은 침통했고 나는 그가 가져온 소식이 무엇이든 그게 좋지 않은 내용일 거라 단언할 수 있었다. 

  “헤이담 도련님.” 그가 내 앞에 서서 말했다. 

  “그래...딕위드?”

  “정말 죄송합니다, 헤이담 도련님. 퀸 앤 광장에서, 바렛 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켄웨이 일가의 그 누구도 어린 토마스 도련님의 장례식에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 분명히 전하더군요. 어떤 접촉도 원하지 않는다고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고마워, 딕위드.” 내가 말했고, 그가 짧게 애도하는 인사를 한 후 문의 낮은 들보에 부딪히지 않도록 머리를 수그리며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 동안 그곳에 선 채, 베티가 돌아와 내 장례 예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혀 줄 때까지 나는 그가 있던 자리를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몇 주 전의 어느 오후, 나는 계단 아래의, 하인들의 숙소에서 식기 보관실로 이어지는 짧은 복도에서 놀고 있었다. 식기 보관실은 우리 가족의 귀중품들을 보관해 두는 곳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드물게 손님을 맞을 때에만 빛을 보는 은식기, 가보들, 어머니의 보석과 아버지가 가장 가치있게 여기던-다시없이 귀중한 책들. 아버지는 식기 보관실의 열쇠를 열쇠고리에 매달아 벨트 옆에 항상 지니고 다녔고, 오직 딕위드에게만 열쇠를 맡겼는데 그마저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일 뿐이었다.      

  나는 식기 보관실 근처의 복도에서 노는 걸 좋아했는데, 그곳에는 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바지에 구멍이 나기 전에 더러운 바닥에서 일어서라고 잔소리하는 보모들이나, 내 공부나 있지도 않은 친구들에 대해 굳이 물어보며 대화하려고 하는 고용인들, 그리고 바지에 구멍이 나기 전에 바닥에서 일어나라고도 하고 공부와 친구들에 대해 대답까지 하게 만드는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게임을 하든 비웃으면서, 내가 병정놀이를 할 때면 일부러 양철 병정을 모조리 걷어차려고 하는 제니로부터도.

  하인 숙소와 식기 보관실 사이의 복도는 내가 실질적으로 저런 것들을 모두 피할 수 있는, 퀸 앤 광장에서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기 때문에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면 나는 항상 그 복도로 갔다.

  내가 막 병정들을 늘어놓으려고 할 때 복도에 버치가 나타난 이번 경우를 제외하면. 나는 돌바닥에 랜턴을 놓아뒀었는데, 복도 문이 열리자 외풍 때문에 촛불이 깜빡이며 튀었다. 바닥에 앉은 내 자리에서 그의 프록코트 밑단과 지팡이 끝이 보였고,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그도 지팡이 안에 칼을 숨겨두고 있을까, 그의 지팡이에서도 철컥이는 소리가 날까를 생각했다. 

  “헤이담 도련님, 여기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혹시 바쁜가요?”

  나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냥 놀고 있었어요.” 내가 빠르게 말했다. “뭐가 잘못됐나요?”

  “오, 아닙니다.”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사실, 제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게 바로 놀이 시간을 방해하는 거랍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말했고, 산수 실력에 대한 질문들을 또 받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래, 나는 산수를 좋아했다. 그래,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래, 나는 언젠가 아버지만큼 현명해지길 바랐다. 그래, 나는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 가업을 잇고 싶었다. 

  그러나 버치는 내가 다시 게임으로 돌아오도록 손짓했고, 심지어 지팡이를 한 쪽으로 치우고 바짓단을 걷은 채 내 옆에 쭈그리고 앉기까지 했다.

  “여기 있는 게 뭔가요?” 그가 작은 양철 모형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냥 놀이예요.” 내가 답했다.

  “이게 당신의 병정들이군요, 그렇지요?” 그가 물었다. “그럼 이 중에 누가 지휘관입니까?”

  “지휘관은 없어요.” 내가 말했다. 

  그가 건조하게 웃었다. “당신의 부하들에겐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헤이담. 그렇지 않으면 최선의 행동 방침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규율과 목적 의식을 심어주겠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여기,” 버치가 말했다. 그가 무리에서 작은 병정 하나를 들어, 소매로 문질러 광을 내고는 한쪽에 두었다. “이 사람을 지휘관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지요-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고 싶으시다면요.” 

  “헤이담 도련님”-버치가 미소지었다-“이건 당신의 놀이입니다. 저는 그저 어떻게 노는 것인지 보고 싶어 끼어들었을 뿐이고요.”

  “좋아요, 지금 상황에선 지휘관이 있어도 될 것 같아요.”

  갑자기 복도로 통하는 문이 다시 한 번 열렸고, 고개를 들어보니 이번에는 딕위드가 들어왔다. 깜빡이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그와 버치가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의 볼일은 잠시 미뤄줄 수 있겠나, 딕위드?” 버치가 엄격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딕위드가 인사하며 물러났고, 등 뒤로 문을 닫고 나갔다. 

  “아주 좋군요.” 버치가 말을 이었고, 그의 주의는 다시 병정놀이로 돌아왔다. “그럼 이 사람이 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부하들이 공을 세우도록 격려하고, 본보기가 되어 질서와 규율, 충성심을 가르치도록 해 보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헤이담 도련님?”

  “좋아요.” 내가 순순히 말했다. 

  “또 있습니다, 헤이담 도련님.” 버치가 발 사이로 손을 뻗어 다른 양철 병정들을 지휘관 옆에 두며 말했다. “지휘관에겐 믿을 수 있는 부관들이 필요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요.” 내가 동의했다. 버치가 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대장 옆에 두 명의 부관을 위치시키는 동안 대화가 오래 멈추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침묵이 점점 더 불편해졌기에 나는 불가피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말을 꺼냈다. “누나에 대해 저와 이야기하고 싶으세요?”

  “어떻게, 그렇게 저를 꿰뚫어보실 수 있는 겁니까, 헤이담 도련님.” 버치가 크게 웃었다. “아버님은 좋은 스승이십니다. 그 분이 무엇보다도 책략과 교활함을 가르쳤다는 게 보이는군요,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쭤 봐도 된다면, 무기 훈련은 어떻게 되어 가십니까?” 버치가 물었다.

  “아주 잘 되어가요. 아버지 말로는 제가 매일 실력이 늘어난대요.” 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훌륭하군요, 훌륭해요. 그럼 아버님께서 훈련의 목적에 대해 알려주신 적은 없습니까?”그가 물었다. 

  “아버지는 열 살 생일이 되어야 진짜 훈련이 시작될 거라고 했어요.” 내가 답했다. 

  “그 분이 말해주려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정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습니까? 감질나는 단서 하나도요?”

  “네, 아무 것도요.” 내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가 따라야 할 길을 정해 줄 거라는 것만 알아요. 신조요.”

  “알겠습니다. 참 흥미롭군요. 그 ‘신조’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지 않았습니까?”

  “네.”

  “얼마나 매력적인지. 당신이 기다리지 못할 거라는 데에 내기를 걸어야겠군요. 그럼, 그 동안에 아버님께서 검술을 배울 진짜 칼을 주셨나요, 아니면 아직도 연습용 나무 막대를 사용합니까?”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칼이 있어요.”

  “꼭 보고 싶군요.”

  “게임실에 보관되어 있어요, 아버지와 나만 열 수 있는 안전한 비밀 장소에요.”

  “아버님과 당신만이라고요? 당신도 그곳을 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내 얼굴이 붉어졌고, 복도의 희미한 불빛 때문에 버치가 당황한 내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내 말은, 칼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알지만 그 곳을 어떻게 여는지는 모른다는 뜻이에요.” 내가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버치가 씩 웃었다. “비밀 장소라, 그렇죠? 책장 안에 숨겨진 공간인가요?”

  표정으로 다 말해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걱정 마세요, 헤이담 도련님, 당신의 비밀은 지켜드릴 테니까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그가 일어서서 지팡이를 집어들고, 바지에서 진짜였는지 아니었는지 모를 먼지를 털어낸 후 문 쪽으로 돌아섰다. 

  “누나는요?” 내가 말했다. “누나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그가 멈춰서, 조용히 킬킬거리고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내가 꽤나 좋아하는 행동이었다. 아마 아버지도 해 주던 것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군요. 이미 제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말해주셨답니다, 작은 헤이담 도련님.” 그가 말했다. “아름다운 제니퍼에 대해서는 당신도 저만큼이나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그 편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르겠군요. 여성은 신비로워야 하는 법이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헤이담 도련님?”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희미한 가닥도 잡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나는 미소지었고, 식기 보관실의 복도를 다시 홀로 차지하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치와 대화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침실로 가던 길에 아버지의 서재를 지나가고 있었고 그때 서재 안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아버지와 버치였다.

  대화 내용을 듣기에는 내가 너무 멀리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버치가 급하게 뛰쳐나왔기 때문에 나로서는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격노해 있었지만-뺨의 색깔과 타는 듯한 눈빛으로 그가 화났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복도에서 나를 발견하자, 여전히 동요한 상태였음에도 그는 짧게 말을 건넸다. 

  “난 노력했습니다, 헤이담 도련님.” 정신을 추스르고, 저택을 나가기 위해 코트 단추를 잠그면서 그가 말했다. “난 그에게 경고하려 노력했다고요.”

  그 말과 함께 그는 삼각모를 쓰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와 버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분명 불유쾌한 만남이었지만 그건 어른들의 일이었고, 나는 그 일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생각할 다른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작 하루 정도 뒤에 습격이 있었다.




  그 일은 내 생일 전날 밤에 일어났다. 그 습격 말이다. 나는 깨어 있었는데, 아마도 다음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에디스가 방을 나간 후 창턱에 앉아 침실 밖을 내다보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자리에서는 달빛이 내린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고양이와 개들, 심지어 여우까지도 볼 수 있었다. 동물을 구경하지 않을 때면 그저 달과, 잔디와 나무에 비치는 희미한 회색 달빛을 바라보곤 했다. 처음엔 내가 본 것이 반딧불이라고 생각했다. 반딧불이에 대해 들어보긴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아는 거라곤 반딧불이는 구름처럼 떼지어 모이고 흐릿한 빛을 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불빛이 전혀 흐릿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계속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보고 있던 건 신호였다. 

  숨이 목에 걸렸다. 그 반짝이는 불빛은 내가 톰을 만났던 그 벽의 오래된 나무 문 가까이에서 나는 것 같았고, 내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톰이 나와 접촉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때는 한 순간도 그 신호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바지를 입고, 잠옷 위에 허리끈을 매고 멜빵을 입기에는 너무 급했다. 나는 어깨에 코트를 걸쳤다. 오직 내가 생각할 수 있던 것은 이제 곧 얼마나 엄청나게 멋진 모험을 하게 될 것일까 뿐이었다.

  물론 지금에야 깨달았지만, 생각해 보면 톰도 창턱에 앉아 자기 집 정원에서 돌아다니는 야행성 동물들을 구경하길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 애도 분명 신호를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그리고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살펴보기 위해 그 자리에서 재빨리 기어나와 옷을 입었을 것이다...

  퀸 앤 광장의 집에서 굳은 얼굴을 한 두 명이 새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아버지가 고용한 두 명의 전직 군인들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어떤“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들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뿐이었다. “정보”-그것이 아버지가 말한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나는 아버지의 말뜻이 무엇이었는지, 그게 내가 엿들었던 버치와의 격앙된 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쨌든, 나는 그 두 군인을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한 명은 저택 앞쪽의 객실에 배치되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아마도 식기 보관실을 지키기 위해 하인 숙소 근처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두 명의 눈을 모두 피해 계단을 기어 내려가기는 쉬웠고, 나는 달빛이 비치고 있는 조용한 주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곳은 한 번도 그렇게나 어둡고 텅 비고 고요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추웠다. 숨에서 입김이 피어오르며 곧 떨기 시작했는데, 내 방의 미약한 온기 정도를 예상했었지만 불행하게도 생각보다 더 추웠다.

  문 근처에는 촛불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에 불을 붙인 후 손바닥을 모아 촛불 위를 가린 채 마구간 쪽으로 나갔다. 주방이 그냥 추웠다면, 바깥은... 주위의 세상이 얼어서 깨져버릴 것만 같은 추위였다. 숨을 멎게 만들고, 내가 계속 참고 견딜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들 정도로 추웠다. 

  말들 중 한 마리가 히힝거리며 발을 굴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소리가 나를 결심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사육장을 지나 측벽으로, 그리고 과수원로 통하는 큰 아치문을 지났다. 벌거벗고 마른 사과나무들 사이로 나아가자 내 오른편에 저택이 있었고, 나는 창문마다 얼굴들이 나타나는 것을 상상했다. 에디스, 베티,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밖을 내다보다가, 내가 방에서 나와 땅바닥에서 정신나간 짓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하는 것을. 물론 정말로 내가 미친 짓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날 본다면 그렇게 말할 거였다. 에디스가 나를 혼내고, 이런 사고를 친 것에 아버지가 회초리질을 하며 할 말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고함소리가 나길 예상한 것과 달리,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외벽으로 나아갔고, 그 벽을 따라 문까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흥분이 고조되면서 톰이 야밤의 즐거움을 위해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햄, 케이크와 비스켓. 오, 그리고 뜨거운 토디 음료도 있다면 아주 좋을 거라고...

  개가 짖기 시작했다. 마구간 쪽 마당의 개집에 있던, 아버지의 아이리쉬 블러드하운드 태치였다. 그 소리 때문에 나는 가던 길을 멈췄고, 개가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짖기를 멈출 때까지 낮고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기어들어가 있었다. 물론 나중에서야 나는 왜 그렇게 갑자기 개가 짖기를 멈췄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 때에는 왜 그랬는지를 전혀 생각할 수 없었는데, 태치가 침입자에 의해 목이 그어졌을 거라고는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단도와 검을 들고 우리 위로 기어올라와 있던 침입자들이 모두 다섯 명은 되었다. 다섯 명의 남자들이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땅에 엎드려 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햄이나 케이크에 대한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모험과 대담한 행동으로 머리가 가득한 어리석은 소년이었다. 나는 계속 외벽을 따라가 출입문에 다다랐다. 

  그건 열려 있었다. 

  내가 뭘 기대했던 걸까? 출입문은 닫혀 있고 톰이 반대편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중 한 명이 벽을 기어올라야 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어쩌면 문을 사이에 두고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거라곤 출입문이 열려 있다는 것 뿐이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침실 창문에서 봤던 그 신호가 내게 보내려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톰?" 내가 속삭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은 완전하게 고요했다. 새도, 동물도 없었다. 불안해진 내가 따뜻하고 안전한 침대가 있는 집으로 막 돌아가려 하던 차에, 무언가가 보였다. 발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출입문 밖으로, 뿌연 달빛에 잠긴 통로로 나왔고, 달빛은 모든 것을 부드러운 빛으로 비추고 있었다-바닥에 널브러진 소년의 시체까지도. 

  그는 벽에 기댄 채 반은 눕고 반은 앉아 있었고, 나와 거의 같은 옷차림이었는데 옷을 입기가 귀찮지 않았던지 바지와 잠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산책로의 움푹 패인 채 굳은 흙길 위에 놓여 있었고 옷자락은 다리에 휘감겨 있었다.

  물론, 그건 톰이었다. 머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모자 챙 아래로 그의 초점 없는 죽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톰이었다. 그의 갈라진 목에서부터 몸까지 흘러나온 피가 달빛에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이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건 내가 내는 소리였다. 수많은 끔찍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기 시작했기에 정확한 순서를 기억하기조차 힘든데, 내 생각에는 집에서 들려오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비명소리로부터 그 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도망쳐. 

  그 목소리들이, 내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는 생각들 모두가 그 한 마디를 외쳤다는 걸 인정하기 부끄러웠다.   

  도망쳐. 

  그리고 나는 거기에 복종했다. 나는 도망쳤다. 단, 그 목소리들이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그 행동은 아버지에게 배운 것과 내 본능에 따라 행동한 걸까, 아니면 그걸 무시한 것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가장 끔찍한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위험을 향해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 뿐이다. 

  마구간을 지나 나는 달렸고, 문이 이미 열려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디에선가 더 많은 비명이 복도를 따라 울려왔다. 나는 주방 바닥에 흐른 핏자국을 따라서 문을 지나 계단으로 향했고, 거기서 또 다른 시체를 발견했다. 군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배를 움켜잡은 채 복도에 쓰러져 있었고, 입에서 피를 흘리고 눈꺼풀을 미친 듯이 깜박거리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지나쳐 계단으로 달려가면서, 부모님에게 생각이 미쳤다. 현관 앞의 홀은 어두웠지만 비명과 달려가는 발소리, 그리고 연기로 가득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위층에서 또 다른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들자 발코니에서 춤추는 듯한 그림자가, 그리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를 공격한 자들 중 한 명의 손에서 칼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의 하인 중 한 명이 층계참에서 그 자를 상대했는데, 그 번쩍이는 빛 때문에 나는 멈춰섰고 그 불쌍한 사람의 운명을 보지 못했다. 대신 나는 그의 시체가 발코니에서부터 나와 멀지 않은 나무바닥으로 피에 젖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고, 발을 통해 그것을 느꼈다. 그를 죽인 자는 승리의 웃음소리를 냈고, 나는 그 자가 층계참을 따라 저택의 더 깊숙한 곳으로 달려 들어가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침실이 있는 곳으로. 

  “어머니!” 나는 소리를 지르며 계단으로 달려갔고, 그와 동시에 부모님의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가 침입자를 상대하기 위해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바지를 입고, 나신의 어깨에 서스펜더를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묶지 않은 채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랜턴을, 다른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헤이담!” 내가 계단 꼭대기에 도착하자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침입자는 우리 사이의 층계참에 있었다. 그 자는 멈춰서 나를 돌아보았는데, 아버지의 랜턴 불빛 아래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바지와 검은 가죽갑옷 조끼를 입었고, 마치 가면무도회처럼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는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아버지 쪽으로 올라가는 대신, 그는 씩 웃으며 층계참을 따라 내 쪽으로 돌아섰다.

  “헤이담!” 아버지가 다시 소리쳤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침입자를 쫓아 층계참으로 달려왔다. 그들 간의 거리는 즉시 좁혀졌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기 위해 돌아섰고, 칼을 든 채 계단 아래에서 길을 막고 있는 두 번째 침입자와 마주쳤다. 그 자는 첫 번째 침입자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귀였다. 그 자의 귀는 뾰족했고, 거기에 가면을 쓰고 있어 마치 흉물스럽게 변형된 꼭두각시 같았다. 잠시 동안 나는 얼어붙었다가, 내 뒤에서 웃으며 다가오던 자가 다시 아버지를 상대하기 위해 돌아선 것을 보았고, 그들의 칼이 부딪혔다. 아버지가 랜턴을 뒤에 내려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반쯤은 어둠 속에서 싸웠다. 짧고 격렬한 싸움에 신음과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섞였다. 그 갑작스럽고 위험한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가 싸우는 것이 제대로 보이도록 불빛이 좀 더 밝기를 바랐다.

  그리고 싸움이 끝났다. 그 암살자는 더 이상 웃지 않았고, 칼을 떨어트리며 비명과 함께 난간 위로 굴러 아래층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귀가 뾰족한 침입자는 계단을 반쯤 올라오다가 마음을 바꿔 돌아서더니 현관 앞의 홀로 달아났다. 

  아래층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난간 너머로 나는 역시 가면을 쓴 세 번째 침입자를 보았고, 그는 귀가 뾰족한 자에게 손짓하더니 두 명 모두 층계참 아래로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를 올려다보자, 낮은 불빛 아래 아버지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게임실이야.” 그가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머니나 내가 막아서기도 전에, 아버지는 난간을 넘어 아래층의 현관 홀로 뛰어내렸다. 그가 뛰어내리자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에드워드!” 어머니의 목소리에 담긴 비통함이 머리를 울렸다. 아니, 나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우리를 버리고 있어. 

  왜 아버지가 우릴 버리는 거지?

  내가 서 있는 계단의 층계참으로 달려오면서 어머니의 잠옷은 흐트러졌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거기다 어머니의 뒤쪽으로 다른 공격자가 다가왔는데, 그 자는 층계참 끝의 계단에서 나타나 어머니가 나에게 닿는 동시에 그녀에게 다다랐다. 그 자는 한 손으로 어머니를 뒤에서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앞으로 휘두르며 그녀의 드러난 목을 그으려 했다.

  생각하기 위해 멈출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 한참 후까지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단번에 앞으로 나아가, 계단에서 죽은 침입자의 칼을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고 그 자가 어머니의 목을 긋기 전에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찔렀다. 

  내 조준은 정확했고 칼끝은 가면의 눈구멍을 통해 그 자의 눈에 박혔다. 그의 비명이 엉망진창이 된 홀을 울렸고, 잠깐 동안 그는 눈에 칼이 박힌 채 어머니에게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자는 난간에 기대어 쓰러지면서 칼을 비틀어 뽑았고, 잠시 비틀거리더니 무릎을 꿇고 앞으로 넘어지며 몸이 땅에 닿기 전에 숨이 끊어졌다. 

  어머니가 달려와 내게 안긴 채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고, 나는 칼을 들고서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을 하러 나가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여러 번 말했던가. “오늘은 네게 책임을 맡기마, 헤이담. 나를 대신해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거라.” 지금, 나는 정말 그렇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계단 아래에 다다랐고, 저택 전체에 이상할 정도의 조용함이 내린 것 같았다. 현관의 홀은 텅 비었고, 불길하게 깜박이는 주황색 불빛이 비추고 있음에도 여전히 어두웠다. 연기로 공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지만 그 탁한 시야 사이로 나는 암살자들의 시체와 일전에 살해당한 시종의 시체를 보았다... 그리고 에디스가, 목이 그어진 채 피웅덩이 속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도 에디스를 발견하고는, 훌쩍이며 나를 중앙 문이 있는 방향으로 잡아당기려 했다. 하지만 게임실로 통하는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칼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엔 세 명의 남자가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필요해요.” 어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며 내가 말했고, 어머니는 내가 뭘 하려는 것인지 보더니 나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 결국 나는 그녀가 바닥으로 넘어질 만큼 강하게 손을 뿌리쳤다.  

  그 낯선 한 순간 나는 어머니가 일어나도록 도와주는 것과 사과하는 것 중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였고, 나 때문에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다. 하지만 게임실에서 들려오는 큰 고함은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처음 본 것은 내 검이 든 상자를 담은 채 책장의 비밀 공간이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그 방은 평소와 같았고, 덮개를 씌운 당구대를 치워 공간을 마련한 채 마지막으로 훈련했던 그 모습대로 남아있었다. 아버지에게 가르침과 꾸지람을 받았던 이전의 그 날처럼.

  바로 그곳에서, 이제는 아버지가 무릎을 꿇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아버지의 가슴 깊숙이 칼을 묻고 있었고, 칼날이 등으로 튀어나와 나무바닥에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그 귀가 뾰족한 자가 서 있었는데 그의 얼굴 아래쪽에는 큰 자상이 있었다. 아버지를 상대하기 위해 두 명이 덤빈 거였고, 그것도 지금 막 이긴 것이었다. 

  나는 그 살인자에게 덤벼들었고 그는 아버지의 가슴에 꽂힌 칼을 회수할 틈이 없었다. 대신 그는 돌아서며 내 칼을 피했고 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지자 칼을 놔 버렸다.

  바보처럼 그 암살자를 쫓느라 나는 측면을 방어하는 것을 잊었고, 그리고 다음 순간 옆에서 귀가 뾰족한 자가 치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의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공격이 빗나간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날로 베는 대신 그는 칼자루로 나를 때렸고 내 시야가 어두워졌다. 내 머리가 무언가에 닿았는데 그것이 당구대의 다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나는 멍한 상태로 아버지를 마주보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아버지는 여전히 칼 손잡이까지 가슴에 박힌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여전히 작은 생명의 불꽃이 남아 있었고 자신의 눈에 나를 담으려 집중하는 것처럼 그의 눈꺼풀이 잠시 깜박거렸다. 잠깐 동안 우리는, 부상당한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누워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며 아버지가 나에게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내가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살인자가 다가와 일말의 멈춤도 없이 아버지의 몸에서 칼을 뽑아냈다. 아버지의 몸이 덜컥 흔들렸고, 고통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경련하며 피로 물든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죽었다. 

  발 하나가 내 옆구리를 밀어 바닥에 등을 대게 만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죽인 자, 그리고 이제는 나를 죽일 자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 자는 히죽거리며 두 손으로 칼을 들어올려 나를 찌르려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면의 목소리가 내게 도망치라 말했던 것이 부끄러웠다면 지금은 그 목소리가 고요했다는 것이, 내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곧 아버지와 함께하게 되리라는 기쁨으로 품위있게 죽음을 마주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유령이 아니다. 무언가가 내 눈길을 끌었는데, 그건 살인자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칼끝이었다. 순간 그것은 아래에서 위로 그어졌고 그 자의 사타구니부터 몸통까지를 갈라놓았다. 그 공격의 방향은 잔인함을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인자를 앞으로 밀지 않고 내게서 떼어놓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공격은 잔인하기도 해서, 그 자는 비명을 지르며 두 동강으로 잘렸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내장이 먼저 바닥으로 쏟아진 후 죽은 육체가 쓰러졌다. 

  그 자의 뒤에는 버치가 서 있었다. “무사합니까, 헤이담?” 그가 물었다. 

  “네.” 내가 헐떡거렸다. 

  “다행이군요.” 그가 말했고, 귀가 뾰족한 자가 덤벼드는 것을 막아서기 위해 칼을 들고 돌아섰다.

  나는 무릎으로 움직여 떨어진 칼을 잡고 일어서서 버치와 합류하려 했고, 버치는 귀가 뾰족한 자를 게임실의 문으로 물러나도록 몰아갔다. 갑자기 그 자가 무언가를-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버치는 뒤로 물러나며 손을 뻗어 내가 더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복도에서 귀가 뾰족한 자가 다시 나타났고, 다만 이번에는 인질과 함께였다. 처음 내가 두려워한 것처럼 어머니는 아니었다. 제니였다. 

  “물러서.” 귀가 뾰족한 자가 으르렁거렸다. 제니는 흐느껴 울었고, 칼날이 목을 누르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내가 인정할 수 있을까-그 순간 제니를 보호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훨씬 더 강하게 원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 있을까?

  “거기 가만히 있어.” 귀가 뾰족한 자가 다시 말하며, 제니를 뒤로 끌어당겼다. 제니의 잠옷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발목 주변에 걸렸고, 구두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갑자기 그들은 횃불을 휘두르는 다른 가면 쓴 자와 합류했다. 입구 쪽의 홀은 이제 연기로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저택의 다른 편에서부터 불길이 번져 오며 응접실로 향하는 문을 날름거렸다. 횃불을 든 자가 재빠르게 커튼에 횃불을 던져 넣었고 우리 주변까지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버치와 나는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내 시야에 어머니가 들어왔고, 감사하게도 그녀는 무사했다. 하지만 제니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저택의 출입문 쪽으로 끌려가면서 그녀의 눈은 우리가 그녀의 마지막 희망인 것처럼 나와 버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횃불을 들었던 침입자가 동료들과 합류했고, 힘겹게 문을 열더니 바깥 거리에 세워져 있는 마차로 튀어나갔다.

  잠시 동안 나는 그들이 제니를 놓아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차로 끌려가며 그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가면을 쓴 세 번째 남자가 마부석에 올라타 고삐를 잡고 채찍질을 했다. 우리가 불타는 저택에서 빠져나오고 시신을 끌어내도록 남겨둔 채 마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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