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떻게 할 거야? 킬라우나와 흐라그눔을 완전히 무찌르고 나면, 그러고도 살아남으면 무엇을 하며 살고 싶어?"

저스틴은 대답하지 못했다. 멍한 눈빛과 떨리는 입술이 그 이후는 전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고 대신 대답해 주었다.

"난 살아남을 거야."

시에나는 여전히 저스틴의 손을 잡은 채였다.

"그러니 너도 살아남아. 그러겠다는 생각으로 싸워."

<시체를 따라가면 마왕의 발자취>는 곧 리디북스에서 쿠폰으로 할인 이벤트를 진행해서 오래간만에 판타지 작품을 읽고 싶어서 둘러보다가 발견한 소설이었다.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권은 리디북스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고, 권당 2,500원에 구매(대여의 경우 900원)할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에나 시몬스(혹은 애플 시몬스)라는 경비대원 소녀이지만, 완결까지 읽은 후 든 생각은 주인공은 시에나라기보다 크게 시에나-저스틴, 미테-리온으로 이루어진 그룹 단위로 보는 게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끝이 겹쳐지는 두 줄기의 서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혹은 중심 텍스트는 용사 일행이 흐라그눔(마왕이 상위인간을 전멸시킬 때 사용한 마법)을 되살리려는 적대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여정이고, 비중이 큰 서브 텍스트가 저스틴과 시에나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저스틴과 시에나의 관계가 해결되면서 끝나기 때문에 용사 일행의 이야기가 맥거핀이라고도 볼 여지도 충분하다.

위처럼 작품에서 특정한 한 명보다는 여러 인물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구매 전 리디북스의 평점 란에서 책 후반부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한 사람이 있었기에 읽으면서 걱정했지만, 완결까지 읽었을 때 그 정도까지 심각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리온과 미테가 초중반에 합류했을 때부터 그렇게 서술된 편이었고, 시에나와 저스틴의 이야기가 마지막 권에 되어서야 갑작스럽게 진행됐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다만, 미테와 리온의 등장 이후 주인공이 확고하지 않아 이야기의 중심이 흩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관이 매력적이라 그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2권부터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사건은 2권에서 나오는 텔로무스 백작부인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마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 시에나는 작중에서 함께 다니는 용사 일행에서 전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침착하고 빠른 판단력으로 그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자신의 능력이 닿는 대로 적들과 싸우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위와 같은 시에나의 능력 상, 이야기의 흐름이 조사와 추리를 통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에서 리온과 미테를 보호하며 흐라그눔을 저지하기 위한 모험으로 바뀌었을 때, 시에나라는 인물 자체가 이전에 비해 덜 조명되며 다른 인물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특별한 전투적 능력이 없는 시에나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위 서적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가급적 읽지 않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래. 역시 넌 비리디스가 아냐."

호르텐시우스가 슬프게 웃었다.

"사랑해. 시에나."

전생 소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따라가면 마왕의 발자취>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저스틴과 시에나의 관계가 과거에서 이어진 운명이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시에나 시몬스가 비르디스가 아닌 시에나이기에 저스틴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저스틴은 그의 생각대로 과거 호르텐시우스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스틴과 호르텐시우스가 인정하였듯 시에나는 비리디스가 아니었으니까.

전생의 네가 사랑하던 사람의 환생이라 그걸로 충분하냐고 묻는 시에나의 말에 저스틴은 세상엔 첫사랑과 이름이나 머리카락 색이 같다는 이유로 새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는데 전생의 인연이 안 될 이유가 있냐고 대답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어째서 내가 전생 소재를 좋아하지 않는가에 대해 고찰해 봤는데 루시텔이 자신을 미워하는 상대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걸로 모자라 환생해서 다시 구애한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발상은 아니라고 말한 것에 동의하기 때문인 것 같다. 뭐 실제로 당시 호르텐시우스를 제정신이라고 말하긴 힘들지.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저스틴을 응원하게 된 건 보통 광기에 가까운 애정을 가진 인물들은 보통 대상―이 소설에서는 시에나―에게 강요하는데 저스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르디스가 자신을 증오했다는 현실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에나가 자신을 걱정하거나 했을 때, 풍화되어 거의 없어졌다고 보는 데 가까운 감정을, 작중 표현을 빌리면 기적을 본 사람의 표정을 짓는 것이라든지…… 솔직히 이렇게까지 불쌍하면 시체 같은 놈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리온과 미테의 성애적인 감정이 없는 관계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사실 리온이 로맨틱한 사랑을 할 생각도 갖게 되지 않은 건 약 99% 정도로 저스틴 탓이라고 생각하는데 위자료를 청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스틴이라는 기묘한 남자와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가 어우러져 작중 내내 웃음을 자아냈다. 오래간만에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에 눈이 아파서 잠들 때까지 읽어내려간 작품이었다. 굉장히 재미있었고, 나중에 다시 한 번 복선을 곱씹으며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프로필 사진은 델님 캘리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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