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테오한테나 가 봐. 걘 혼자 있을 거 아냐."

페르트는 의외로 침착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는 울보였지만 그래도 예전부터 꽤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으니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금방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것도 어색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 입지 않는단 얘기는 아니다.

정리가 부족하진 않지만 온갖 책과 종이들이 가득해 보이는 방으로 들어간 나는 페르트가 앉아서 종이 쪼가리를 보고 있는 책상에 걸터 앉았다. 페르트가 힐끗 내쪽을 봤다.

"테오는 또 오두막에 처박혀서 나무 조각이나 깎고 있겠지. 걔는 몇 시간 내버려두면 훌쩍거리면서 혼자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보내다가 알아서 정리할 걸. 그리고 너도 지금 혼자 있잖아."

"바로 로델 님한테 갈 거야."

"그 전에 든든한 누나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고 나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텐데?"

페르트가 멋진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올려다 보며 유순하게 미소 지었다.

"너랑 나랑 같은 해에 태어났으니 누나라고 할 순 없지."

보기엔 약해 보이는데 페르트는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지지 않았다. 나는 든든한 누나의 이미지를 위해 참지 않고 그냥 허공에 뜬 발을 달랑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슬프지 않아? 참는 게 능사는 아니잖아."

슬픈 감정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무작정 참으려고 하다 보면 결국 그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는 순간이 오고 만다. 한계에 달하기 전에 조금씩 털어내는 게 상책이다. 다들 알지만 자기 일이 되면 잊기 쉬우니까 주위에서 말해주면 좋은 조언이지.

하지만 페르트는 한숨처럼 허허롭게 한탄했다.

"너에게 그런 조언을 듣다니."

"응? 내가 왜?"

페르트는 내가 되묻는 걸 예상하지 못 했는지 멈칫하더니 내 표정을 살폈다. 그냥 많이들 하는 삶의 조언을 했을 뿐인데 이런 반응이 돌아오니 좀 이상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건 절대로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닐 때 하는 말이잖아."

어두에 '아'가 나오는 부분마다 힘주어 말하는 걸 들은 페르트가 잠시 고민했다. 책상 위에 손을 깍지 껴 올렸다가 깍지를 풀며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렸다가 정신 없이 굴던 페르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야 말로 네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잖아."

"내가?"

반문하고 나서야 문득 페르트가 뭣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 떠올랐다. 내 표정을 보고 페르트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 그날……. 네가 하룻밤동안 사라졌다가 아침에 숲에서 발견된 날 이후로 달라진 걸 말하는 거야."

페르트는 사려깊은 친구였다. 내가 아빠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라든가 엄마에게 못된 말을 잔뜩 하고 후회한 날이라든가 혹은 눈이 빨개지도록 엉엉 운 날이라고 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페르트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되어 나를 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입꼬리를 올려 보았지만 바로 한숨이 뒤따라 나왔다. 페르트가 하필 숲을 언급하는 건 단순히 배려심 때문은 아니겠지. 

내 한숨을 신호처럼 받아들였는지 페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볼 수 없는 요정 같은 존재를 보는 거나 동식물과 소통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아저씨 소식을 들은 네가 너무 슬퍼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갔었지만……. 그날 이후로 네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부분이 걱정돼."

"걱정해줘서 고마워, 페르트. 하지만 이건……. 좀 더 복잡한 문제야."

별로 좋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런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은 잘 알 것 같은데 내 감정은 늘 알 수 없고 복잡하게 꼬인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오래 치우지 않아서 청소할 엄두가 안 나는 커다란 창고 같았다.

페르트의 걱정도 이해가 갔다. 그날 이후로 내가 달라진 건 사실이니까. 의지하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줬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원망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제 나도 안다. 숲에 있는 다른 존재들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기에 세상은 넓고 삶의 형태는 다양해서 생사의 경계조차 그리 뚜렷하지 않은 존재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게 상실의 슬픔을 줄여주었다.

페르트가 말한 것처럼 숲이 무슨 마법을 부려서 내 심장에서 슬픔을 뽑아낸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압도적인 세상의 흐름 속에 한 사람의 생사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걸 받아들였기에 내 안에서 슬픔의 비율이 작아졌다고 해야겠지.

물론 내가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금도 아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레타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아빠가 죽었다는 걸 나보다는 훨씬 잘 받아들였으니까. 그 사실이 슬프더라도 나처럼 언급이나 생각까지 피하지는 않았다.

페르트가 걱정하는 건 곁에서 나를 지켜봤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아빠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난 괜찮아, 페르트.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페르트가 손을 뻗었다. 내가 마주 손을 내밀자 페르트가 강하지 않은 힘으로 잡아왔다. 우리는 서로에게 미소를 보냈다. 함께 있을 때 즐겁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함께 고민하고 내가 지고 있는 슬픔의 무게를 나누고자 하는 친구가 있으니 이겨내지 못할 건 없었다.

페르트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문 밖으로 숲이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내 곁에 있는 것처럼 숲도 어디서든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숲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불현듯 어떤 생각 하나가 내 머리속에 떠올랐다. 숲은 마을을 감싸고 있고 마을과 숲이 내가 지금 있는 성에 사는 영주님이 다스리는 영지에 속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숲은 숲이다. 왕국이나 영지 같은 말로 이름 붙이기 전에도 후에도 숲 속엔 짐승들이 살고 냇물이 흐르고 땅굴을 파는 요정들이 금맥의 위치를 소근거리고 깊은 숲 속엔 거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영주님이나 사제님, 혹은 백작이나 왕이라는 이들이 알든 말든 관계 없이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이니까.

나는 웃으며 페르트의 손을 잡은 손아귀에 장난으로 힘을 꾹 주었다. 

"지금은 지금 있는 문제를 생각하자. 우리 중에 네가 제일 똑똑하잖아. 이런 일은 너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단 말이야."

페르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손을 빼내면서 대답했다.

"그게 쉽지 않으니 말이지."

페르트를 아주 엄청 매우 오래 알아온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페르트가 이럴 때 '쉽지 않다'라고 한다는 건 사실상 방법이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페르트 쪽으로 몸을 좀 더 가까이 하며 재촉했다.

"쉽지는 않지만 뭐가 있기는 있다는 거지? 아까 말한 것처럼 숲을 이대로 내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 말이야. 뭔데 그래?"

페르트가 책상 위에 앉아있는 내 엉덩이 옆에 있는 종이들을 흘깃거리며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아. 그렇지 않아도 로델 님이랑 논의하려고 생각 중이었거든."

"나도 마침 생각난 게 있는데! 같이 얘기하면 되겠다. 아, 꼭 좋은 생각은 다 지나간 뒤에 떠오른다니까."

"아직 늦진 않았어. 같이 가서 얘기해보자."

결국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있던 것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보호한 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뭔가 퍼뜩 생각난 것처럼 멈춰섰다. 바로 책상에서 뛰어내리려던 나도 움직이는 걸 멈췄다. 

페르트는 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할 말이 있어."

"왜? 테오한테 무슨 말이라도 전달해줄까?"

페르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묶이지 않아 흘러내린 갈색 곱슬머리가 살랑거렸다.

"아니. 테오에게 할 말은 내가 직접할게. 그런 게 아니라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그래."

"뭔데?"

대답에 앞서 페르트가 조금 긴장한 태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길 꺼내려고 저렇게 망설이는 거지? 내 궁금증을 한껏 자극한 페르트가 아주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난 너희들을 보고 멍청하다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해. 물론 내가 아는 지식을 모르는 경우는 많은 게 사실이지만……."

"뒤에 말은 안 붙이는 게 더 낫겠다."

"그러게."

페르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페르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걸 모르면 그걸 설명할 수 있어서 좋아하면 좋아했지 그런 걸로 사람을 무시하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페르트는 익숙한 거지. 자신은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상황에 익숙해서 평소에도 당연히 그런 상황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다.

물론 가끔 나나 테오를 멍청이 보듯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게 진심으로 친구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건 페르트를 안다면 당연히 알 수 있으니까. 

"테오도 진심으로 한 얘기는 아니야. 알잖아?"

"아마 그렇겠지……. 그래. 나도 알아."

나는 책상 너머로 몸을 뻗어서 페르트를 꽉 안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페르트는 잠깐 숨막혀 하다가 풀려난 뒤엔 풀썩 주저앉아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꾹 누르듯 기댔다.

"위로는 고마운데 방금은 진짜로 숨막혔어."

"그 정도는 괜찮잖아."

"죽지야 않겠지……."

페르트가 나를 불한당 보듯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로델 님께 상의하러 가자. 아마 네가 하려는 얘기는 나도 들어야 할 테고, 어쩌면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화하는 걸 내가 도울 수도 있을 테니까."

"내가 좋은 의견을 낼 것 같다는 뜻이지?"

"그래. 이럴 땐 다들 힘을 모아야 하니까."

테오, 페르트, 나까지 우리 셋이 로델의 방에서 나온 건 로델이 피곤하다며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로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페르트와 함께 다시 로델의 방으로 향했다.

피곤하다는 게 그냥 우리를 내보내려고 한 말인 건 아닌지 로델은 방에서 쉬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로델은 꽃이 피어나면 휘어지는 부드러운 꽃대처럼 자리에 앉아서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크를 하는 이들 중에 반가운 사람도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병문안을 온 거니?"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면 나중에 다시 올까?"

내 말에 로델이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가라고 했겠지만……. 내가 너희를 반기지 않을 수 있을 리가. 그래도 요즘엔 많이 건강을 찾았지.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항상 침대에 누워만 있었는걸."

로델은 요즘도 거의 침대에 누워있지 않나? 침대에 안 누워 있을 때도 방 안에만 있던데. 그래서 내가 약속도 없이 마구 들이닥쳐도 늘 로델을 만날 수 있었던 거니까.

어쨌든 로델이 괜찮다니 차라리 빨리 얘기를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페르트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냥 나 먼저 말하라는 뜻 같았다. 

"로델, 나한테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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