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들키게 될 줄이야. 늘 뒷통수에다 대고 하던 그 말을, 늘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하던 그 말을. 나는 덜컥 무서워졌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좋은 친구로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을 했어야 했는데. 김동한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친구라도 좋았는데. 이젠 그럴 수도 없겠지. 좋아하는 만큼 더 참았어야 했는데. 그걸 못참아서 이렇게 들켜버리게 되다니. 나는 김동한과 그렇게 계속 마주보고 있다가는 김동한의 눈에 빠져서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닫기 전에 나는 바보 같은 변명을 했다.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어제 본 드라마 대사 따라한 거야. 나는 문을 최대한 천천히 닫았다. 혹시라도 김동한이 문을 안 닫아도 된다는 말을 할까봐서. 하지만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날 때까지도 김동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문이 닫히고, 김동한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제 더이상 김동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김동한과 나는 이제 옛날로, 아니 10분 전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나는 침대에 누워 김동한을 처음 만났던 고등학생 때를 떠올렸다. 새학기가 되자마자 나와 짝이 됐던 김동한을. 매일 나와 함께 등교를 하고, 하교를 하고, 급식을 먹고, 매점을 갔던 김동한을. 수학여행 때 차멀미를 하던 나 때문에 여자친구를 내버려두고 내 옆에 와서 나를 걱정해줬던, 고3 때도 같은 반이라며 나를 꽉 안아주던 김동한을. 대학 같은 건 관심도 없다더니 결국 나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지원을 했던 김동한을. 나는 여태까지 참고 참았던 눈물을 이제서야 뚝뚝 흘렸다. 이렇게 들킨 이상, 끝을 내야했다.

진작에 손민지를 페이스북에서 차단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들어간 나는 방금 그쳤던 눈물이 또 나올 것만 같아서 눈에 힘을 줬다. 손민지의 게시글에 태그가 된 김동한. 손민지는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해보이는 울오빠ㅠ 그래두 사랑해~'라는 내용으로 게시글을 올렸다. 김동한의 기분이 이상하든 말든, 둘은 누가 봐도 행복한 커플이었다. 만약 박미정에 내게 알려줬던 사실을 김동한에게 알려줘버리면 둘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김동한에게 손민지와 헤어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사실 일찍 말을 했어도 김동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해볼 걸. 걔가 너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냥 모두 다 콱 말해버릴 걸. 손민지가 그랬다는 것도, 그리고 김동한이 나한테 키스를 했다는 것도. 그랬으면 내 말을 들은 김동한의 얼굴이 참 볼만했을 텐데. 김동한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락이 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 정말로 묻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나한테 키스를 했냐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존나게 비참하게 만들 거였으면, 왜 술을 마시고 키스를 했냐고. 맨정신에도 못할 일을 왜 술에 취했을 때 해버렸냐고. 나는 당장이고 김동한을 만나 그 새끼의 대가리를 한 대 후려 치고 싶었다. 니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나 하냐고. 기억이 안 나면 기억을 해보라고.

나는 내가 저번에 사놓은 담배를 다 피울 생각으로 옷장에 있던 후드집업을 대충 챙겨 입었다. 반이나 넘게 남아있는 저 담배들로 줄담배를 피워야만 속이 편해질 것 같아서. 나는 건물 밖으로 채 나오기도 전에 입에 담배를 물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상관은 없었다. 복도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많았으니까. 공동현관 문이 열렸고, 밖은 추웠다. 나는 건물 옆에 주차장이라고 만들어놓은 곳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입 밖으로 빠져나오는 담배연기는 오늘도 예뻤다. 오늘로부터 이 짓도 끝이다. 김동한에 대한 마음을 접는 건 꽤나 오래 걸리겠지만, 매일 손민지 얘기를 김동한에게 듣는 것도, 그걸 들으며 억지웃음을 짓는 것도. 그리고 내가 여자였으면 아마 사귀었을 거라는 김동한의 그 좆같은 소리를 듣는 것도. 나는 화가 났다. 언제나 김동한의 곁에는 내가 있었는데, 그 눈속에 담겨있는 건 언제나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담배를 세 개째 피웠을 때, 더이상 담배를 피우면 정말이지 내 폐가 썩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툭 하고 바닥에 떨어뜨린 다음 그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지금 김동한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 거짓말이 통하긴 했을까. 왜 하필이면 그 표정을 지어서는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걸까. 나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동거를 한 사이도 아닌데, 우리 집은 온통 김동한이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싶다. 나는 그래서 계속 밖에 있었다. 73퍼센트이던 핸드폰 배터리가 23퍼센트가 될 때까지.


나는 원래 감기를 한 번 크게 앓고 나면 면역이 생겨서 그 다음부터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어제 밖에 조금 있었다고, 나는 감기에 걸려버렸다.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물으려고 내게 전화를 한 이병준은 내 목소리를 듣고서 대체 언제부터 몸상태가 그렇게 병신이 됐냐고 물었다. 언젠가 한 번 약을 사서 오겠다고 했다. 나는 이병준이 말만 하고 오지 않을 걸 알았다. 이병준은 어찌됐든 입만 살아있는 새끼라서, 이 새끼가 하는 말의 3분의 2는 가오였다. 그래도 나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빈속에 약을 먹는 건 안 좋은 버릇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오늘도 그랬다. 전에 김동한이 사두고 간 약을 대충 삼키고, 눈을 감았다. 빈속이라 그런지 속이 쓰렸다. 사실 약 때문에 속이 쓰린 건지, 김동한 때문에 속이 쓰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나는 내가 먹은 약마저도 김동한이 사온 것이라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다. 왜 너는 내 모든 것에,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왜 나한테는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느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김동한이 너무 미워서 김동한이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는데, 언제쯤 내 마음을 알아주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끼는 중이다. 그냥 좋은 친구 할 걸. 평생 아파도, 좋은 친구로 남을 걸.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나는 쓰려오는 배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누군가 우리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오겠다고 그러더니, 이병준이 온 것 같았다. 나는 눈을 한 번 비비고 난 후에 우리 집에 온 사람이 누군지를 확인했다. 저건 이병준이 아니었다. 이병준보다 키가 컸고, 파마머리인 이병준에 비해 머리가 차분했다. 그래, 저건 김동한이다. 나는 내가 헛것을 보는 것 같아서 다시 눈을 감았다. 저게 진짜 김동한이 맞으면,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피해도 될 사람인 내가 사는 집에 굳이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접으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왜 또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거야. 나는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것 때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는지, 김동한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내가 대답이 없자 김동한은 다시 하던 것을 마저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불 속에서 한참을 있었다. 부엌에서 나던 달그락소리는 멈췄고, 대신에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결국 내 앞에서 멈췄다. 김동한은 한숨을 쉬고는 침대에 앉았고,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김동한은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내 머리통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드라마 같은 거 안 보면서."


김동한은 내 머리를 헝클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김동한의 말이 맞았다. 나는 드라마를 일절 보지 않았다. 한 번 챙겨보면 끝까지 챙겨봐야 하는 게 귀찮아서. 처음부터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듣게 되니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었다. 나는 느리게 일어나 부엌을 확인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냄비가 올려져있었다. 그리고 냄비 뚜껑에는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고, 그 포스트잇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이병준이 너 아프대서 죽 해놓고 간다 ㅋㅋㅋ 냉장고에 뭐 많이 없는 거 뻔해서 니가 좋아하는 우리 엄마 멸치볶음 넣어놨으니까 죽이랑 같이 먹고... 어? 요즘 왜 이렇게 자주 아프냐 너는 ㅡㅡ 아 그리고 니가 대사 따라한 그 드라마 나도 보게 좀 알려주라 ㅋㅋㅋㅋ 매일 막 대해서 미안.. 나 원래 이런 말 잘 안하는데 너 아프니까 걱정돼서 하게되네; 아무튼 야 항상 고마워 아프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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