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토르의 눈꺼풀 위로 햇볕이 내리 쬐었다. 귀와 눈이 열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토르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워 앉았다. 바람이 적당히 선선하게 불어와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아침…?’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반쯤 감겨있던 눈을 완전히 떴다. 분명 아까까지 토르는 만찬 연회장에 있었다. 술을 마시며 시시콜콜한 영웅담을 들으며 앉아있었다. 도대체 언제 잠들었던 것일까…또한 언제 옷을 벗었지…기억이 뒤죽박죽 엉켜있었다. 토르를 눈을 감고 어제를 떠올렸다. 모든 이의 축하를 받았고, 무수히 많은 술잔을 부딪쳤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로키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던 장면뿐이었다. 동생이 건네준 축배를 마지막으로 이상하리만큼 기억이 없었다. 그다지 취하지도 않았고, 몸을 거누지 못 할 만큼 취한 적도 없었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로키가 건네준 잔의 바닥이 제일 선명한 기억이었다. 기억 속에 얇은 막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다른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두통이 밀려왔다. 마치 기억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토르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들려온 것은 시중 중 한명인 마르타의 목소리였다.

“토르님, 대관식이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예복을 갖추어 주십시오.”

‘그래, 대관식이었지.’ 토르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기억이라는 것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었음으로 토르는 이 답답함을 그냥 흘려보내기로 했다.

***

대관식 연회장 문 앞에 도착한 토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늘 먼저와 있어야 할 로키가 보이지 않았다. 짜증 섞인 얼굴로 냉담하게 ‘늦게 다니지 마.’라고 말해줄 동생이 없었다. 토르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역시나 대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닌지. 짧은 시간동안 토르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 동생이 오지 않는다면 아버지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머니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볼지. 이대로 대관식을 취소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토르의 단순한 머리로 수많은 생각을 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다. 막 대신을 시켜 동생을 찾아보라고 하려던 참에 멀리서 로키의 기나긴 뿔 투구가 보였다. 로키의 실루엣이 점점 정확해졌다. 로키는 편안한 얼굴로 연회장 문 앞, 토르 옆에 나란히 섰다. 토르는 적잖이 당황했다.

“안녕, 형.”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토르는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몇 번이나 상상했지만 로키의 ‘안녕 형’은 보기 중에 없었다. 차갑게 날이 선 눈동자도 없었고, 굳게 앙 닫힌 입도 없었다. 토르는 예상치 못한 기분 좋은 아침인사에 어떻게 답해줘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기분…좋은 것 같구나.”

“응, 아주 오랜만에 잠을 잤거든.”

로키는 옅게 미소를 띠었다. 아주 옅은 미소였지만 둔한 토르도 인지할 수 있었다. 어제 로키가 전한 축하의 인사가 진심이었음을 토르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형제라면 누구나 나눌 수 있는 단조롭고 가벼운 대화로 인해 토르는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토르에게 이러한 소소한 대화는 짙은 향수였고, 그리운 추억이었다. 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와 똑같아질 수는 없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었기 때문에.

“왕이 되는 기분은 어때?”

“썩 나쁘지 않아.”

토르의 말에 로키가 웃었다. 토르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얼마만이였을까. 편안한 얼굴로 웃는 로키를 보는 것이. 오딘이 왕위계승자로 자신을 지목했을 때부터 짊어져왔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진 듯 했다.

“형은 분명 좋은 왕이 될 거야. 분명, 아버지보다 더.”

로키의 말로 인해 토르는 이 모든 것이 본인을 위한 날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고맙다. 동생아.”

토르는 손을 들어 로키의 어깨를 툭툭 내려치고 두꺼운 손으로 로키의 어깨를 꽉 쥐었다. 로키는 토르의 목을 당겨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적잖이 당황한 토르를 보며 로키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로키는 토르를, 토르는 로키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찾으려는 듯 혹은 무엇인가 기억하려는 듯,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토르는 로키의 시린 눈에서 우주를 보았다. 그 작은 유리알 같은 우주에 토르가 비춰지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대로 잊는 것이 좋아. 분명 괴로운 과거가 될 테니.”

토르는 로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형제 앞,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토르는 모든 것을 잊었다. 무엇인가 단단히 막혀 기억나지 않았던 기억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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