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물론이죠, 그래서 대제가 하는 일마다 대신 화를 내주는 거고."

아, 소요와 연홍서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귀시장에서의 사건도 그렇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백호의 도를 넘은 분노에 대한 이유가 시시각각 재조명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너무 동정할 필요는 없어요. 울지 못하고 화내지 못하는 건 정상적이지 못한 일이지만... 대제의 성격은 원래도 엄청 좋았거든요. 아마 감정을 먹히지 않았어도 큰 차이가 없었을걸요.”

“응, 그건 맞아. 주군은 원래도 엄청 착했어. 그리고 특이했어.”

평범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특이하다는 말로 정리가 되다니. 원래 오래 살아본 놈들은 다 이런가? 소요가 살아온 천년의 세월도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신기는 적어도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생명으로 그 생각 자체가 인간과 몹시 동떨어져 있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주군이 진심으로 화를 내려고 했다면 우린 벌써 폭주했을 거야. 아무리 감정을 삼킨다 하더라도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거든,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그 말은...”

“우리와 헤어지고 난 뒤에도 주군은 진심으로 슬퍼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는 소리지.”

염혼이 졸린 눈으로 중얼거리자 금령은 내 말이 맞죠?! 라고 호들갑을 떨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제는 생명을 다스리는 신이에요. 이 세상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대제에게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마 그 어떤 취급을 받아도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대제에겐 어린 아이와도 같기 때문일 거예요.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하는 거죠. 어린 아이가 휘두르는 팔에 맞았다고 울거나 화를 내는 부모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은류는 세상 온갖 것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이지? 대충 이해했어.”

연홍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지막이 움직이는 입과 시선의 끝엔 소요가 자리 잡고 있었고 ‘사랑의 대상’ 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음과 동시에 수려함이 담긴 눈이 서로 마주쳤다. 연홍서가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어 보이자 소요는 이유 모를 소름을 느끼고 말았다.

“배, 배신자에 관한 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소요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다급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드물게 침착하지 못한 탓에 혀를 깨물었으나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평정심을 내보였다.

“아 그건... 아까도 말했지만 진성이란 신에 관한 이야기인데... 저 반룡에게 덤벼든 이유는...”

“기운이 똑같았어.”

금령의 말을 가로챈 염혼이 말했다.

“하지만, 오해라는 걸 알았어. 그렇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어도 이건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거야. 저 반쪽짜리 용은 주군을 배신한 자들과 완벽하게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거든.”

“배신한 자가 한 명이 아니란 말입니까.”

소요가 연홍서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이죠. 진성대제와 선대 청룡신.”

금령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큼... 선대 청룡신은 모종의 이유로 진성을 도왔어요. 그 술수가 아주 교묘하고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이를 눈치챈 이들은 꽤 드물었죠. 그래도 결국 꼬리가 잡혀서 청룡일족 치고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어요. 싸움터가 아닌 일반적인 형벌 말이에요.”

“모종의 이유?”

연홍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하, 남녀간에 있어서 모종의 이유라면 하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선대 청룡신은 모든 무신의 칭송을 한 몸에 받는 여걸이었어요. 싸움으로 맞붙으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사방신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용의 피를 극복하지 못한 거죠. 용족은 아주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그 중 가장 흔하게 알려진 것 중 하나가 평생 단 하나의 존재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용은 시름시름 말라서 죽거나 평생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어요. 용족과 다른 신의 혼인이 금지된 것도 바로 그 이유고요. 용족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신이나 인간들 중 영원한 사랑을 하는 존재는 보기 드물거든요.”

“허면 선대 청룡신은...”

“진성과 사랑에 빠졌어요. 대체 뭐가 좋아서 그런 나쁜 놈에게 코가 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속은 거죠. 결국 그 음모에 가담하다가 좋은 자리에서 내쫓겼으니. 정말 멍청하다니까요. 사랑은 한순간이고 권력은 영원한데 말입니다. 하하!”

금령이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헌데 그 녀석들과 만천성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이를 잠자코 듣던 연홍서가 물었다. 알고 지낸 세월이 길었지만 그의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닌지 꽤 궁금한 눈치였다. 금령은 드물게 우물쭈물하며 결국 입을 열었다. 가느다란 손을 미간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 모르겠어요? 저 반룡... 아니 만천성 씨는... 두 신이 낳은 자식이라고요. 그래서 기운이 완전히 똑같은 거죠. 염혼이 착각한 것도 그 이유고.”

“....”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만천성이 이 이야기를 입에 담기 싫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진성과 선대 청룡신은 중죄를 저지른 죄인이었다. 혹시 천계에서 시원찮은 취급을 받은 이유도 이것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의 형이라 불리는 청단은 청룡신의 자리에 올라있는데? 수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청단이 저 녀석을 동생이라고 부른 건?”

“그건 저도 몰라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보죠. 확실한 건 두 사람은 같은 핏줄이지만 형제관계는 아니에요. 선대 청룡신은 현 청룡신의 누나였거든요. 절대로 형제일 리 없죠.”

이런 곳에서 이런 충격적인 가족관계를 듣게 될 줄이야. 만천성은 이런 사실이 밝혀져도 정말로 괜찮은 건가? 소요는 만천성이 사라진 석상 너머를 흘긋 쳐다봤지만 이명을 늘리는 정적만이 감돌 뿐 특이한 점은 없었다.

“넌 용의 일족도 아닌 주제에 뭘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어?”

“이거, 이거. 염왕이라고 불리는 귀신이면서 뭘 모르시네~ 원래 권력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인간관계에 대해 빠삭해야 하는 법이라고요. 그래야 내 손안에 들어왔을 때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거든요. 헛짓거리 하면 약점 잡기도 쉽고.”

연홍서의 물음에 금령이 자연스럽게 중얼거리곤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진성과 선대 청룡신이 벌을 받은 이유는 과거 일들에 대한 진상이 전부 밝혀졌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대제에 대한 의심이 사그라든 것도 아니죠. 폄적 당하기 전 대제가 보여줬던 능력은 그야말로 천지를 뒤집을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이었거든요. 이를 두려워한 신들은 대제의 능력을 빼앗은 채 보관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신기들은 봉인당한 채 이날 이때까지 시간이 흐른 거죠.”

헌데 봉인을 해야 할 신기를 봉인하지 않았다가 이 사달이 난 건가. 소요가 지긋이 금령을 응시하자 금령은 혼자 정곡이 찔린 것인지 펄쩍 뛰며 입을 열었다.

“봉인... 봉인은 말이죠... 나 참! 저는 대제와 특히나 연이 돈독했단 말이에요. 도저히 봉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게다가 개수가 108개나 되는데 겨우 두 개쯤 봉인 안 했다고 무슨 일이 나겠지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이 녀석들도 가만히 잠만 자겠다고 약속 했는데... 그랬는데...! 왜 그런 일을 벌였어!?”

금령이 갑자기 화를 내며 염혼에게 물었다. 염혼은 품 안에 호선을 끌어안고는 답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그의 말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니까 주군이 너무 보고 싶었어... 너희도 그렇지 않아...? 푹 잠을 자고 일어난 후엔... 어쩐지 엄마의 품이 그리워질 때가 있잖아...”

“부모님이 없어서 모르겠군.”

소요가 중얼거렸다.

“부모님은 없지만 뭔지 알 것 같아.”

연홍서가 뒤이어 중얼거렸다.

“왜 둘 다 부모님이 없는 건데요? 부모님이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요.”

금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약속은 어기지 않았어... 밖에 나가진 않았다구... 우리가 나가지 못하니까 수문장들에게 시킨 거야... 검은 머리에 선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인간계에 있으면 데려오라고...”

“그렇게 무식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주군은 인간계를 좋아했으니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미치겠군. 결국 악의는 없었다는 증거다. 다만 너무 오래 살아서 사고방식이 이상해졌을 뿐이지. 원래 일의 주범을 만나면 봉인을 하거나, 소멸을 시키려고 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처분이 애매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직은 죽은 아이조차 없으니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뾰족한 수가 나질 않았다. 소요는 생각에 잠겨 만천성이 했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아이들을 치료하고는 있으나 검연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섣부르게 결정을 내릴 수 는 없을 것 같았다. 검연이 살아난다면 이 두 신기의 처분도 유도리 있게 돌아갈 것이고, 만약 검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만천성이 나설 것이다.

“...사정은 대충 알았어. 어찌 되었든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겠지. 악의는 없었고.”

“응... 우린 기본적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아. 그런 짓을 하면 주군이 슬퍼할 테니까...”

“저기... 네가 했던 짓이 바로 납치라는 범죄거든...?”

금령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덧붙였지만 염혼과 호선은 듣지 않았다. 살짝 엇나갔다는 것만 제외하면 두 개의 신기는 사고를 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인간을 좋아했고, 말이 통했기에 억지로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둘의 처분은 아이들의 상태를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소요가 금령에게 말하자 금령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구원의 동아줄을 보는 것 마냥 행동했다. 어지간히도 신기들을 제 손으로 처리하기 싫었던 것이 분명했다. 세 사람과 두 개의 신기는 만천성이 자리하고 있을 석상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천성의 말대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인지 얼마 걷지 않아 평온한 안색으로 누워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제운사의 복식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타 문파에서 데려온 것이 분명했다. 만천성은 요람과 같은 공간 끝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옆에는 제운사의 검은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앉아있었으며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만천성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사존...! 일행분들이 오셨어요...!”

소요는 이 여자아이를 기억해냈다. 분명 제운사에 처음 방문했을 때 뒤뜰에서 마주친 여자아이였다. 닮은 얼굴을 이용해서 검연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어떠냐 계책을 내어주기도 했었지. 어떤 술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는 잠들어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멀쩡하고 정신도 또렷해 보였다. 만천성은 제 제자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열중했다. 만천성은 누워있는 검연에게서 손을 떼지 못했다.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검연의 몸은 안개를 흡수한 만천성의 손처럼 검게 물들어있었다. 얼굴의 절반은 멀쩡했지만 나머지는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칠흑과 같았다.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것 마냥 끊임없이 신음소리가 났으며 가끔가다 힘없이 손을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소요는 만천성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검연의 표정만큼 만천성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괜찮은데, 어째서 검연만 이렇게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소요는 꾸러미에 들어있던 수건을 꺼내 물에 적신 후 땀에 젖은 검연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인지 누워있는 아이들에 옆에는 최소한의 병자를 돌보기 위한 물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픈 아이를 가볍게 돌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체 왜 한 사람만 이 지경이 된 거지?”

연홍서가 뒤늦게 소요의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만천성의 옆에 있던 어린 제자는 제게 하는 질문임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검연은 모두를 위해서 결계술을 펼치다가 상태가 심각해졌어요.”

“결계술?”

만천성이 펼친 것과 같은 종류의 법술을 말하는 건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을 이어갔다.

“저희는 바위처럼 생긴 요괴와 적대하다 이 곳에 끌려왔어요. 상처 같은 것은 입지 않았지만 이 곳에 들어온 이후 아이들이 점차 정신을 잃기 시작했고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악몽을 꾸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길래 저희는 안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결계술이 도움이 될 거란 사실도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는 결계술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력이 부족했던 거군.”

“네... 하지만 저희도 저희 나름의 최선을 다했어요. 특히나 검연은 사존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기 때문에 결계술을 안정적으로 펼칠 수 있었죠. 나중에 사존이 보고 기뻐하면 좋겠다면서 혼자서도 수련을 했을 정도였거든요.”

아이의 설명을 듣던 만천성의 손이 잠시 멈췄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연 덕에 저희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지만... 검연의 힘은 결국 바닥이 났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모자라서 결국...”

여자아이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허나 연홍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검연이 그렇게 노력할 동안 너는 뭘했지?”

“저, 저는...”

아이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저를 쏘아보는 눈빛에 긴장을 한 것인지 잔뜩 움츠러들어 고개를 푹 숙이기도 했다. 만천성은 아이를 질책하지도 두둔하지도 않은 채 검연의 치료에 열중할 뿐이었다. 소요에게 처치했던 것처럼 독 안개를 빨아들이는 것인지 이제는 양손이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 검연이 괴로움에 몸부림치자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입술이 닿기 직전의 자세를 취해 보이기도 했다. 만천성이 한가지 행동을 할 때마다 검게 물들었던 검연의 얼굴은 조금씩 본래의 색을 되찾는 듯했다. 허나 점차 안정되어가는 검연의 상태와는 달리 만천성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식은땀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검연에게 흐르던 흉흉한 기가 옮겨갈 때 마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를 빠득 갈기도 했다. 하지만 만천성은 멈추지 않았다. 발그레했던 피부가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마냥 창백해진 것이 몹시도 불안했기에 소요는 만천성에게 휴식을 취하라 말하고 싶었지만 만천성은 검연의 상태에 집중할 뿐 소요의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만천성은 모든 오감을 제 제자에게 집중시켰다. 독에 침식당하는 고통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고통이 겹쳐진 것 마냥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슬퍼 보이기도 했는데 소요는 어째서 만천성이 검연 하나에게 저리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검연이 괴로운 만큼 만천성 또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지극정성이네...”

“미안... 인간들이 이렇게 연약한지 몰랐어... 본지 너무 오래돼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금령과 염혼이 한마디씩 했다. 금령은 만천성이 왜 고작 인간을 위해 저토록 노력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눈치였으며 염혼은 아이들을 위험한 곳에 데려와 놓고 방치한 것에 대한 미안함 정도는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호선은 가만히 만천성의 곁으로 날아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기까지 했다.

"...검연은 내가 살려. 방해 말고 저리 꺼져있어."

힘에 부쳐 하면서도 만천성은 인상을 찌푸린 채 다른 이들에게 중얼거렸다. 상태가 좋지 않아 고운 말이 나오지 않는지 욕지거리를 포함한 채였다. 소요는 작은 일이라도 돕고 싶었지만 만천성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요... 냄새가 나...”

결국 만천성을 제외한 이들은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서 소요를 구석으로 끌고 온 금령이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자 소요가 제 옷깃을 들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는 소리지. 제게서 나는 것은 연홍서에게서 옮은 은은한 복숭아 향 뿐이었다. 소요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응시하자 금령이 제 가슴을 팍팍 치며 말했다.

“어휴, 답답하긴. 진짜 냄새가 난다는 게 아니라 뭔가 수상하다고요! 보통 용족이 다른 종에게 사랑과 빠지는 일은 흔치 않은데, 저 반룡... 만천성 씨의 표정을 보세요.”

금령이 금빛 부채의 끝으로 만천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눈은 못 속이죠. 완전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라고요. 혹시 몰라요... 제 엄마와 같은 과오를 반복할지..."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

그게 뭔데. 소요는 금령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눈빛 만으로 그런 것을 구분하지? 의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가 저를 쏘아보자 금령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웃어 보였다.

“아~ 이거 참, 청룡신과 더불어서 또 뭘 모르시는 분이 생겼구만. 천계에서 가장~ 연애 경험이 많은 이 재물신이 말씀 드리자면 눈동자 하나만 봐도 딱 견적 나온다고요. 저건 완벽하게 사랑에 빠진 눈빛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제 몸을 버려가면서 살리려고 할 리가 없죠.”

“그는 저 또한 도와주었던 자입니다. 저런 행위는...”

“에헤이! 그거랑 다르다니까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올바른 행동을 하는 거랑,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건 천지와도 같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니까 일단 믿어보세요. 현무는 천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 재물신의 연애상담이라면 다들 껌벅 죽는다니까요. 제가 울린 인간만 해도 천계 영혼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란 말입니다.”

금령은 묻지도 않은 자기자랑을 주절주절 해대기 시작했다. 소요는 반박할만한 기운이 남지 않아 금령이 하는 말을 모조리 한 귀로 들은 채 흘리기 시작했다.

“어어? 표정 봐, 진짜로 안 믿어요? 저 얼마 전까지도 연애 했다니까요! 인간계에 아직 두고 온 전 애인이 있다고요! 어차피 인간이니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그건 그저 인간 하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닙니까.”

“에이, 원래 인간들은 그런 건 금방 잊어요. 원래 연애는 한 사람이랑 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여러 사람이랑 해야 하는 거라고요. 동시에 많은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면 문제 될 것도 없고요.”

“신의 신분으로 인간과 연애를 했다고?”

어느새 나타난 연홍서가 금령의 귓가에 속삭이자 금령이 펄쩍 뛰었다. 얼마나 높게 뛰었는지 하마터면 금령은 이마를 천장에 처박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을 정도였다. 능청스럽게 다가온 연홍서는 자연스럽게 소요의 옆에 자리 잡았다. 은은하게 펴지는 도화의 달큰한 향기가 코 끝을 찔렀다. 금령은 놀라서 주저앉은 채 외쳤다.

“이.. 이... 인간이랑 연애할 땐 당연히 신분을 숨기죠! 뭐, 가끔 변덕으로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도 있지만 지금까진 별문제 없었습니다. 바로 하늘로 돌아왔으니까! 지가 뭐 어쩔 건데?!”

“그렇게 행동하다 언제 한 번 큰코다친다. 현무신이 봐준 것만 두 번이야. 세 번째면 너는 빼도 박도 못하고 추방이라고.”

“에이, 그럴 리가요. 대부분의 인간들은 떠나간 사랑은 금방 잊기 마련이라 또 다른 사랑을 찾는다니까요? 게다가 수명도 한정되어 있죠!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목숨이 다해서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고요!”

"넌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너무 무시하고 있어.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나도 한 때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

"아니 그야 당신은..."

미친놈 이잖아! 금령은 뒷 말을 꿀꺽 삼키곤 연홍서의 눈동자를 노려봤다. 저와 조금은 다른 샛노란 꿀빛의 눈동자. 보는 이 조차 숨이 막히게 만드는 그 아름다움 속에 담긴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착으로 시작해서 정욕, 순수함, 질투와 존경마저 들어있는 지독한 감정. 이런 것은 도저히 정상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한번 발을 들이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은 광기. 사랑이 얽혀있긴 하지만 이리저리 뒤섞인 감정들은 넝쿨과도 같아서 평범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화야행은 분명 죽어서 귀신이 되기 전까지도 저런 눈빛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걸 당사자 앞에서 어떻게 말하겠는가? 말을 해봤자 현무는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고 저 무시무시한 염왕에겐 나중에 보복을 당하겠지. 금령은 입을 함부로 놀려도 될 상대와 입을 다물어야 할 상대를 아주 잘 구분하고 있었다. 

"당신은 뭐?"

연홍서는 답을 기다리듯 능청스럽게 웃으며 소요의 옆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돌아버리겠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이 숨 막히는 대화에서 나를 좀 꺼내줘~! 금령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철썩-!

"?!"

순간 들려오는 거친 소리. 부질없는 대화를 하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보였다. 과연 재물신의 운인가, 금령이 애타게 외치자 만천성과 검연이 자리 잡았던 곳에서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거센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홍소백류만 씁니다. 가뭄에 콩나는 연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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