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의 시즌과 자격의 시즌, 출현의 시즌 초기, 세인트-14 관련 로어 스포가 있습니다.

*O14(세인오시/오시세인) 커플링 위주입니다.

*원작자의 허가를 받아 번역되었으며 원작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허가 인증↓




세인트는 꿈을 꾼다. 탑이 아니라 염주형 길에 무한히 펼쳐진 복도, 결코 교차하지 않고 고리로 얽힌 히포페드(hippopede), 역설적으로 반사되어 허무 속에 끝없이 뒤얽힌 아날렘마들의 꿈을. 그는 부서진 유리 바닥을 걷지 않는다. 단지 공허하고 또 공허하며 메아리치는 프랙탈린의 영원을 인지하고 기다릴 뿐이다. 어떤 밤에는 메아리의 메아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거친 가장자리에 갇힌 음운이 아직 와닿지 않은 머나먼 숨결처럼 그의 이름을 내쉰다.


이에 대해 물어보면, 오시리스는 팔짱을 끼고 시선을 틀어버린다.


오시리스가 말하길, 오벨리스크는 수성에 있는 해시계의 작업을 안정시키는 데에 필요하다고 한다. 충전을 해야 하니 수호자들에게는 안내가,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고. 세인트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자신이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선다. 후일, 그는 자신이 수성에 오시리스와 같이 남았거나, 오시리스가 탑에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잠시 생각하곤 한다. 가능성 있는 또다른 시간선들이라고, 오시리스는 말하리라. 세인트는 희망 어린 상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세인트는 탑에 돌아와, 그의 믿음직스러운 회색 비둘기 기체를 타고 이제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격납고에 착륙한다. (재)발견에 놀라고, 새로운 친구들의 기쁨과 잃어버린 이들을 애도하는 와중에도, 무언가가 그를 계속 태양에게로 이끈다. 마치 중력이 그를 행성계에서 가장 밝은 물체로 잡아당기듯이.


세인트는 여전히 꿈을 꾼다.


-


[오시리스,


탑은 거의 바뀌지 않았어. 변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건물 외부만 빼고는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어. 새 주민들도 있고, 떠난 옛 친구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집은 집이야.


네 방랑자 친구를 만나봤지. 짧게 줄이자면, 불쌍하더군. 고독을 마치 수의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녀. 똑똑하고 기략이 풍부하지만… 글쎄. 그 자와 어울린다는 게 어떤 건지 네게 설명해줄 필요는 없겠지.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그 자가 너와 닮은 모습이 많이 보이더군. 늘 멀리 있는 뭔가를 보는 눈이 똑같아. 마치 숲 때문에 나무들을 보지 못한 것처럼, 갈망인지 굶주림인지 모를 그 특이한 감각도. 아주 워록같아. 그리고 헌터처럼, 그 자는 외로움이 이점인 것처럼 굴더군. 타이탄처럼, 그걸 믿을 만큼 고집스러워. 독특한 사람이야.


살라딘이 다음 주에 올 거라 들었어. 네가 말한 대로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면, 그와 샤크스가 다시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


(그럴 일이 없단 건 알지만, 희망은 품을 수 있지.)


수성의 온기가 그리워. 금빛 모래와 불타는 사막이. 금색으로 차려입은 네게 잘 어울려. 네 해시계를 돌보듯 스스로를 잘 보살펴, 오시리스.


너의 것인,

세인트]


-


[세인트,


해시계는 '돌볼' 필요가 없어. 나는 해시계의 관리인이 아니야. 비록 네가 재치 있게 반박하려 들지라도 - 분명 그러겠지 - 이 장치는 이 현재를 붙잡아주고 너무 가까이 다가온 멸망의 미래를 우리에게서 막아줄 거야. 이건 기계야. 기능을 수행하지. 내가 그러하듯이.


방랑자는…… 독특한 종자지, 확실히. 하지만 그 자는 어둠이나 어둠과 얽힌 자기의 관계에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아. 그 자가 아는 것이 중요해질 미래가 - 혹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과거가 - 있을 거야. 그 자의 역할이 결정적이게 될 날이. 우주적인 체스판 비유를 쓰고 싶진 않지만, 어느 정도 적절하겠군. 아마도 20세기 지중해 연안즈음에서 온 옛 속담이 있지. 게임이 끝나면, 왕이든 졸이든 결국 한 상자 안으로 돌아간다고. 또 한 번 비유를 쓰고 싶진 않지만 그 상자는 우주고, 우린 모두 동시에, 그리고 무궁히 왕이며 졸인 셈이야. 우리에겐 상자를 부수고 원하는 대로 조종할 힘이 있으니까. 누가 왕이고 누가 졸인지 묻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해. 더 나은 질문은 이거지. 여왕은 어떤 게임을 하고 싶어하는가? 어떤 상자로 우릴 무르고 싶어하는가?


이야기가 샜군.


탑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제일 최근에 왔던 수호자 패거리는 꽤나 흥미로웠어. 너도 마음에 들어할 것 같군. 수호자들이 현상금을 어떻게 받길 좋아하는지 한 번 감을 잡아봐. 그 자들은 꽤나 까다롭지만, 지독하게 열심이니까. 반스가 시험을 가히 광적으로 몰아붙였는데도 구 러시아에서 온 그 수호자들은 흔들리지 않았어. 너도 그들에게서 같은 성실함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믿어.


같은 맥락에서, 네가 옳아. 샤크스와 살라딘은 아직도 서로를 필사적으로 피하더군. 우스운 일이지. 살라딘은 경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찾아오는데도. 타이탄이 두 명이면 별것 아닌 모욕에 사과를 나눌 용기를 끌어내고도 남아야 할 텐데.


너의 것인,

오시리스]


-


[오시리스,


우리가 샤크스와 대화를 나눴던 뒤로 나는…… 많은 생각을 했어. 여섯 문턱. 황혼의 틈. 샤크스의 시련의 장. 우리의 적과 맞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승리와 패배. 아, 철학자 흉내는 네 일이긴 하지. 난 그저 그 수호자와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황혼의 틈 전투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도.


시험에 대해서 더 알려줘. 고참 수호자들이 속닥거리는 건 들었지만 네가 직접 설명해줬으면 해. 뭘 찾고 있었던 거지? 샤크스는 줄 수 없는 무엇을 내걸었나? 너보단 반스의 역할이 더 컸단 건 알지만, 너의 시험이니 너도 지켜봤겠지. 샤크스가 시련의 장을 시련의 장이라 부른 건 옳았어. 수호자들이 친구들과 함께, 그리고 친구들에 맞서싸우는 걸 보면 그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기 마련이지.


내 생각엔 방랑자는 일종의 징조야. 경고지. 우리 수호자들이 서로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조만간 탑에 찾아와. '추방'이 네겐 긍지의 상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어차피.


너의 것인,

세인트]


-


세인트 - 이 좌표에서 만나지.
 ME//30.30.0//189.48.0//


너의 것인,

오시리스


-


세인트가 무너져가는 완벽한 평면 도형들로 이뤄진 첨탑에 기대어 서자, 헬멧의 넓적한 이마가 수성의 매끄러운 모래사장을 내려다본다. 샤크스의 레드잭스들이 다음 경기를 위해 경기장을 치우는 중이다. 잘 맞는 상대들 간의 잘 싸운 경기였다. 세인트 본인이 원하는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설계를 여기에 펼칠 생각이다.


오시리스는 시선을 돌린다. 이곳의 햇빛은 세인트의 헬멧이 너무 밝게 반사된다. 마치 갈비뼈 사이의 공간이 빈틈없이 불쏘시개로 꽉 차서 엇나간 햇볕에 불이라도 붙을 것 같아 세인트를 쳐다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곁에서는 사기라의 의체가 움찔거리고, 그녀의 홍채가 가늘어진다.


"핸드 캐논이 인기가 늘어난 것 같군, 아무래도," 세인트가 곰곰히 말한다. "가시같은 무기 이후에도."


"가시는 잊혀지지 않았어," 오시리스는 답한다. "모든 수호자들이 묽어진 그림자들 일에 얽히고 싶어하진 않지만."


세인트는 오시리스를 내려다본다. 오시리스는 경기장을 지켜본다. 세인트의 시선은 오시리스의 어깨에 무거운 짐처럼 내려앉고, 사기라는 마치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처럼 의체를 다시 움찔거린다. 오시리스는 듣고 싶지 않다고 결정을 내린다.


"찾는 게 그건가?"


"난 아무 것도 찾고 있지 않아. 어둠이 움직이고 있어. 수호자들한텐 다른…… 뭔가가 필요해. 이것 말고."


"그냥 말해, 오시리스." 세인트의 목소리는 즐거움에 따스하다. 익숙하고. 오시리스는 투구 관모에 두텁게 기울어진 햇살을 올려다보고는 빠져든다. 벡스는 거의 모든 시간선에서 세인트를 잘라내고 그의 모든 메아리와 흔적을 무한의 숲 깊숙이 치워버렸다. 너무도 말끔하게 처리해서 오시리스에게 남은 기억을 제외하면 한 조각도 남지 않았던 만큼. 오시리스의 이름을 불러주는 세인트의 목소리는 너무도 밝고 소중해서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잠시만이라도― "오시리스. 원하는 게 뭐냐니깐."


단어들이 목줄기에 쿵쿵 부딪힌다. 세인트의 그림자가 위에 따스하게 그리워지고 태양이 왕관처럼 뒤에서 빛나며 세인트의 헬멧을 월계관처럼 두른다. 오시리스는 그를 만져 진짜인지 확인하고픈 무의미한 충동을 억누른다.


"시험. 수호자들에겐 시험이 다시 한 번 필요해." 오시리스는 경기장을 손짓한다. "샤크스가 하는 걸론 부족해. 선봉대는 너무 바쁘지. 수호자들에겐 나설 만한 도전이 필요해."


"그걸 수호자들에게 제공하겠다고?"


"아니," 오시리스는 말하면서 세인트의 헬멧 사이 틈새를 타고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공허의 선을 눈으로 덧그린다. "나는 네가 수호자들에게 그걸 제공해주길 원해."


-


[오시리스,


샤크스를 설득한 것 같아. 샤크스는 경기장을 살라딘이랑 같이 쓰는 걸 좀 껄끄러워했지만, 난 기적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돌아왔단 사실을 기꺼이 써먹어서 원하는 걸 얻어냈지. 우리가 쓸 수 있는 순번의 지도 자료를 첨부했어. 곧 며칠 동안 샤크스가 이 지역을 비워줄 거야. 파일: [ IF-BRN.0313 ]


네 메아리들도 반갑지만, 진짜에는 역시 못 미치더군.


너의 것인,

세인트]


-


[세인트,


수성에 다시 와줄 텐가? 같이 경기장을 걷지. 최근엔 명상이 힘들지만, 네가 있으면 생각이 맑아져. 누군가에게 소리내서 말하면 도움이 되거든. 이걸 쓰는 동안에도 사기라가 벌써 두 번이나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어.


뭔가가 우리 행성계의 끝자락에서 우릴 부르고 있어. 답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군. 하지만 답하지 않으면, 더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나리란 건 자명해.


해시계는 이제 힘을 다했어. 내가 떠나기 전에 시험을 네게 맡겨두고 가게 해줘.


―너의 오시리스가]


-


세인트는 죽은 모래 위를 거의 아무 소리도 없이 부츠로 짓밟으며 절벽 가장자리까지 걸어간다. 아직도 하늘에 걸쳐진, 지평선을 감싸는 죽은 별의 곡선에 그는 밝게 빛난다. 무한의 숲의 처리 엔진은 세인트의 실루엣에 약간 뒤틀리며 이 불타는 듯한 빛이자 시뮬레이션을 할 수 없는 변칙적 존재를 계산하려 애를 쓴다.


"이만하면 됐어," 세인트는 즐거워하며 선언한다. "수호자들이 이 텅 빈 시뮬레이션을 빛으로 채우는 걸 기꺼이 감독하도록 하지." 먼지를 발끝으로 툭 치자, 희미난 격자무늬의 건축물이 흐릿하게 그 밑에서 빛난다. "정말 황량한 곳이군. 군체라도 이것보단 더 창의적일 것 같은데."


"벡스는 빛도 어둠도 흉내내지 못해," 오시리스는 말한다. "군체를 모방하더라도 어둠과 같은 편이 되진 못하지. 벡스는 둘 다 이기지 못하는 미래를 원하니까." 오시리스는 잠시 멈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여행자, 고스트, 대붕괴, 수호자 본인들에 대한 수 세기 간의 숙고를 아무 생각도 없이 내던져버린다. "어둠이나 빛이 승리하는 시간선에서 벡스는 살아남지 못할 거야. 어쩌면 벡스는 빛과 어둠이 맞잡은 손에 가장 신속하게 끝날지도 모르겠군."


세인트는 아무 말도 없이 절벽가에 와서 곁에 서는 오시리스를 내려다볼 뿐이다. 함께, 둘은 흐릿한 태양이 조용히 타오르는 것을 지켜본다.


오시리스는 무한의 숲 끝자락에서 손으로 쓰여진 편지를 쥔 채 세인트를 떠난다. 그의 가슴 안에는 수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또는 앞으로 수십년 간 느끼지 못할, 혹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공허가 가득하다.


-


[오시리스,


알아낼 게 있다면 따라가. 단지 필요하다면, 내가 널 다시 한 번, 그리고 언제나 뒤쫓아갈 거란 걸 알아줘.


너의 것인,

세인트]


-


[세인트,


확실히, 언제 또 수성으로 돌아올진 모르겠군. 답을 좇다보면 늘 더 많은 질문을 맞닥뜨릴 뿐이니까. 선봉대는 내 말에 신경쓰지 않지만, 이번에야말로 내 말에 귀기울이게 만들 뭔가를 찾을지도 몰라.


네 시험은 어떻게 되어가나?


너의 오시리스]


-


[오시리스,


분명 수학적인…… 뭔가가 있으리라 믿어. 하지만 등대에서 얼마나 많은 각양각색의 수호자들과 화력팀들이 일곱 번째 승리를 쟁취하는지 보면 놀라워. 희망이 생기지.


아나스타샤의 소식을 다시 들어서 좋긴 했지만, 그 전쟁지능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 그녀가 걱정되는군.


만일 선봉대가 자네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친구들은 나하고도 얘기를 해야 할 거야.


너의 것인,

세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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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끈기 있는 변호를 받을 자격을 내가 언제 얻어냈는지 모르겠군.


결국엔, 우리 모두 사람일 뿐이야. 실수를 할 수 있지. 아무리 수호자더라도, 우리가 실패하는 건 인간의 척도에서 보자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전쟁지능의 실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지. 그리고 선봉대는 내 말을 듣느니 차라리 전쟁지능과 거래를 하겠다고 단언했고.


너의 오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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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대붕괴에서 살아남았어. 또 한 번 붕괴가 온다면, 그때도 살아남을 거야. 전쟁지능이 있든 없든, 실수가 있든 없든 간에.


오시리스, 우리가 같이 앉아 얘기를 나눈 그 순간부터 넌 날 얻은 거야. 우리가 여섯 문턱과 황혼 틈새에서 싸웠던 그 때. 무엇에든 질문하는 게 네 의무란 건 알지만 - 그야 물론 넌 워록이니까 - 이것만은 결코 의문을 품지 않아도 돼.


단언컨대 너의 것인,

세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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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네 소식을 들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군. 몸조심해, 소중한 친구여. 그리고 사기라 말도 잘 듣고.


언제나 너의 것인,

세인트]


-


[너처럼 워록같이 걱정하지 않는 건 오직 네 시험이 있어서야. 네가 걱정돼. 일부러 계획한 건가? 당연히 그랬겠지, 이 똑똑한 친구야.


네 목소리를 조만간 다시 듣길 바라.


세인트]


-


[또 널 찾으러 가게 만들지 마. 네가 또 시간을 부수는 게 감당이 될지 모르겠으니까. 아니면 더 최악은 내가 시간을 부수는 거겠지.


세인트]


-


[이게 네게 도착할지, 아니면 네가 읽을지조차 모르겠어. 어찌되었건 이것만은 사실이야. 난 네가 돌아오길 기다려. 영원히 그리고 항상.


네가 날 위해 부순 모든 시간대에서도 너의 것인,

세인트]


-


모든 언어 프로세서가 뒤엉키고 뒤집어진 채, 발소리를 따라 엇박자로 쿵쿵거리는 느낌 속에서 세인트는 오시리스의 익숙한 실루엣을 향해 걸어간다. 이 등대의 정상에 비추는 햇볓이 뚜렷하게 그 선을 내비친다.


오시리스의 빛은 어째서인지 조금 약하게 느껴진다. 멀리 떨어진 것처럼. 그를 기다리던 이 오시리스는 메아리가 - 분신이던가, 아니면 오시리스가 이제 뭐라고 부르는 건진 몰라도 - 아니란 것을 세인트는 알지만, 거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의 심장 속에 굳건히 뿌리내린 오시리스가 완전히 실재하는 것을 막는, 얇은 겉치장.


태양이 둘 사이로 건너지길 기다리는 바다처럼 액체같은 금빛을 쏟아붓는다. 세인트는 더 가까이 걸어간다.


"뭘 찾았나?" 날 돌봐줄 필요는 없어나 이제 이건 내 시험이 된 줄 알았는데처럼 당장 떠오르는 수천 가지 가벼운 말 대신 세인트는 조용히 물으며, 울부짖는 모래 때문에 납작히 깎인 근처 바위 위에 자신의 헬멧을 벗어 내려놓는다. 한 줌의 양초가 부드럽게 깜빡거린다. 지독하게 더운 공기가 플라스틸 얼굴을 두드리자 빛이 밀어낸다.


"태양권의 경계." 오시리스는 어깨 너머 세인트를 힐끗하며 말을 시작했다가, 다시 침묵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고, 심지어 사기라의 의체도 평소보다 더 핵에 가까이 오그라붙은 채 뾰족한 끝을 뻣뻣히 세우고 있다.


세인트는 둘 사이에 남은 마지막 몇 걸음을 좁히고는 오시리스를 대면한다.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아, 지금 이 순간에조차 시간은 너무도 다르게 느껴진다. 어쩌면 오시리스가 떠난지 몇 주 밖에 안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잃어버린 세월의 균열은 아직도 둘 사이에 넓게 벌어져 있다. 세인트의 가슴 안에서 연약하고 기운찬 뭔가가 마치 허공에 모양을 그리는 날개처럼 퍼덕거린다.


"오시리스," 세인트는 조용한 목소리로 운을 떼고, 그의 음성 모듈에 잔잔한 잡음이 스쳐지나간다.


오시리스의 눈꼬리는 주름이 잡혀 있고 미간에는 그림자가 묵직하게 모여든데다가 그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멀고 멀다. 마치 잠재적인 현실들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어느 하나 붙잡지 못하는 것처럼.


"라스푸틴과 얘기를 했어," 오시리스는 마침내 중얼거린다. "행성계의 가장자리에 다녀왔지." 그는 눈을 감는다. "내가 옳았어. 어둠이 오고 있어. 놈도 알고 있었지."


오시리스는 한 손을 든다. 다시 뜨여진 그의 눈은 날카롭고 지쳐 있다. "고집스러운 타이탄식 연설은 늘어놓지 마. 웅장한 전투 따윈 없을 거야. 선은 그어졌고―"


"네가 언제부터 선을 지켰다고 그래?" 말을 자르면서도, 세인트의 목에서는 예상치 못한 분노가 으르렁거린다. 오시리스의 눈빛은 마침내 첨예해진다 - 마침내, 마침내 세인트는 오시리스의 모든 주의의 무게를, 그 꿰뚫어보는 눈빛이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오직 자신에게만 머무는 것을 느낀다. "넌 내―" 음성 코어에서 불똥 몇 개가 새어나와 세인트는 말을 잠시 멈춘다. "넌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오시리스. 이건 너답지 않아."


"이건 우리가 본 그 무엇과도 달라," 오시리스는 점차 열기를 띠는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무장하는 게 고작이야. 그마저도 충분히 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면 말이지. 이건 수호자들을 정면으로 집어던진다고 해서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나는― 우린 또다시 널 잃을 수는 없어."


"널 먼저 잃어버린 건 나였어."


오시리스의 눈이 약간이나마 커진다. 일광이 그의 눈썹의 곡선을 덧그리고, 두건의 불타는 금빛 위로 부드럽게 빛이 드리워지며 세인트는 이해할 꿈조차 꿀 수 없는 눈의 깊이를 비춘다.


"널 먼저 잃어버린 건 나였어, 오시리스," 그는 굳건히 되풀이하며, 부드럽게 오시리스의 팔꿈치를 손으로 감싸쥔다. 이렇게나 가까이서, 그는 수성이나 별에 가까이 있는 거리와는 상관없는 희미하고, 익숙한 햇볕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이건 그 무게를 홀로 감당하도록 너를 버려둔다고 해서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야."


-


오시리스는 남는다. 생각지도 않게. 혹은,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그의 시험에 있어 세인트의 열정은 지구의 바닷가에 있는 그 어떤 등대보다도 밝게 빛난다. 어쩌면, 오시리스가 생각하길, 여기서 뽑아낼 비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세인트가 모든 무결점 화력팀을 배려와 희망을 담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볼 수록 늑골 사이의 허무가 더욱 커다란 공허로 무너지는 것만 같다. 쉽게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공허.


오시리스는 세인트가 헬멧을, 완갑을, 견갑을 벗는 것을 지켜보고 이 화력팀, 작전, 협동, 시너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는다. 저도 모르는 새 오시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치 세인트의 존재 자체가 시공의 씨실과 날실에 부대끼는 중성자성이고 본인은 가장 단순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조차 없는 것처럼.


이 시간선에서, 세인트의 손끝은 너무도 조심스럽게 그의 턱선을 건드려서 오시리스는 자신이 부서질 것만 같다고 여긴다. 다른 시간선에선, 오시리스는 자신이 세인트를 함께 끌어내려 모든 주요 전선들이 손 깊숙이 파고들도록 그 동채에 손가락을 얽고 목 안의 맥박 하나하나로 호흡을 재었으리란 걸 안다. 머나먼 한 과거에선, 또다른 오시리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영원히 기다렸을 것이다. 텅빈 무덤 위에 몸을 숙이고 찬양갈채가 너덜너덜한 선으로 흐려지는 동안 행성계가 변환 엔진에 사그라질 때까지.


서늘한 손길이 그를 여기에 붙잡아둔다.


오시리스는 꿀처럼 되직한 공기를 가로질러 세인트의 턱을 그러잡는다. 마치 수천 개의 반사상들이 각기 다른 행동을 취하려던 것처럼 산산히 조각난 기분과는 선뜻 다르게 과감한 손길이다.


세인트는 손쉽게 몸을 숙여준다. 그에게선 시원하고 날카로운 공허의 맛이 나고, 오시리스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내심과 조심스러움을 가지고 세인트가 키스해오자 한 줄기 연기가 되어 흩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로브의 옷깃에 와닿는 손끝이 후드를 살살 밀어내고, 뒤이어 등 한가운데를 가볍게 눌러온다. 모든 접촉이 마치 세인트가 받아들여달라고 종용하는 것 같다. 그 외에 다른 걸 한다는 생각은 헤아릴 수도 없다.


우주는 둘의 주변에서 움직인다. 먼지가 느릿하게 반짝이는 두터운 햇살이 오시리스의 겉옷을 적시지만 세인트의 손길이 대조적으로 그 열을 식히고, 오시리스는 먼 곳의 분신이 이 감촉을 다시 느끼려 이미 과거를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접촉이 천분의 일 초의 차이를 두고 복제되는 셈이다. 몸이 가볍게 떨린다.


"오시리스," 세인트는 속삭이고, 그가 이마를 서로 맞대자 따뜻한 공기가 오시리스의 입술에 와닿는다. "말해줘―"


"그래," 오시리스는 바로, 생각지도 않고 대답한다. "네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야. 그래."


그는 세인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중합체 뺨에 손바닥을 갖다댄다. 세인트는 접촉에 얼굴을 기울이며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몸을 떼었다가 - 오시리스는 저절로 그에 이끌리듯 앞으로 몸을 내민다 - 등대 여기저기에 널린 납작한 기둥에 앉아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한다.


"난 무한의 숲에서 기꺼이 널 위해 내 목숨을 내놨을 거야," 세인트는 되뇌인다. "널 찾는데에 필요한 게 뭐였든 간에, 나는 해냈을 거야."


오시리스는 천천히, 세인트의 허벅지가 그리는 선 사이에 무릎을 꿇고, 세인트의 서늘한 두 손을 잡는다.


"난 널 위해서 시간을 부쉈어, 세인트," 오시리스는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멸망하도록 놔둔 다른 모든 시간선에서 거둬들인 승리들은―" 오시리스는 고개를 내젓는다. 맞잡은 세인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널 탓할 순 없군," 세인트는 조용히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빼서는 오시리스의 턱을 감싼다. "나라도 똑같이 했을 테니까."


"나의 세인트," 그저 생각만 해왔던 수 년과 영겁과 시대, 실제와 시뮬레이션, 이미 지나간 미래와 아직 그들을 기다리는 과거가 지나 오시리스는 속삭이며, 세인트의 허벅지가 허리에 이어지는 굴곡에 얼굴을 묻고 지금은 흐느낄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되새긴다.


-


[오시리스,


전에 이 말을 안 한 것 같지만, 네 이름으로 이 시험을 관리하게 되어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네가 떠날 때의 아픔을 줄여주거든.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너의 것인,

세인트]


-


[세인트,


너와 난 각자의 방식대로 의무를 우선시하지. 내가 무시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너도 이해해줄 거라 믿어. 왠지는 몰라도 그 사실이 작별을 조금 쉽게 해주는 것 같아. 어쩌면 역설적인지도, 혹은 아닐지도 모르지. 나도 꽤나 감상적으로 변했어.


너의 것, 너의 것, 너의 것인

오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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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리스,


이번 주에는 시험을 중지할 예정이야. 이오가 우선이니까. 네가 에리스를 도와줄 방법은 없나? 뭐라도? 이 짐을 에리스 혼자 짊어져선 안 돼.


너의 것, 영원히 너의 것인,

세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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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장 소중한 사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좋든 나쁘든 에리스는 어둠을 가장 잘 알지. 이제 남은 건 지켜보는 것 뿐이야. 잘 듣고, 조심해. 내가 전에 말했듯이 누구도 믿지 마.


모든 시간의 회랑이 불모지가 될 때까지도 너의 것인,

오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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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충고로군, 내 심장이여, 왜냐면 난 늘 널 믿을 테니까.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시간이 되면 나에게로 돌아와.


언제나 너의 것인,

세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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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리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둘의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세인트는 그의 스카프와 두터운 갑주와 젤로 쿠션을 덧댄 겹을 뚫고 오시리스의 입술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한다. 냉각수와 시냅스 연결선에 빠져든 열이 그의 가슴 속으로 질주한다. 오시리스가 미소짓자 그의 눈꼬리에 살며시 주름이 잡힌다.


"내가 듣기론," 오시리스가 말한다. "우리는 서로 거리를 두는 걸로 유명하더던데."


"우리가?" 세인트는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오시리스의 손은 그의 흉갑에 잠시 멈췄다가, 헬멧의 입가에 머무른다. "재미있군. 지난 주엔 두 헌터가 우리가 어떻게 형제일 수 있냐고 논쟁하는 걸 들었지. 난 엑소고 넌 인간인데 말이야. 내가 잘 몰랐더라면 누가 일부러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 줄 알았을 거야."


웃음이 오시리스의 눈 안에서 반짝인다.


"누구에겐 이게 재미있는지도 모르지."


"그 누구는 내가 키스할 수 있게 넘어오는 게 좋을지도 모르는데," 세인트가 으르렁거린다.


마침내, 오시리스는 웃는다. 따뜻하고 조용한 소리에, 세인트는 그의 허리를 안고 가까이 끌어당겨 그 빛의 따스함 속에 스스로를 묻는다.


"그럴지도," 오시리스는 인정하고, 그리고 어둑하고 텅 빈 격납고에서, 우주선의 날개 그늘 아래서, 그는 희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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