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탈을 쓰고


*마피아 복스 아쿠마 ⅹ 악마 루카 카네시로

*역할 반전에서 시작되는 시리어스 개그물(non CP)

*주의:: 캐릭터들의 설정 날조, 잔인할 수 있는 표현 묘사, 필터링 없는 욕설











03.


 긴장감에 체중을 실은 소파가 삐걱이는 소리에 루카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은은한 미소를 띄운 복스는 그의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다가온 얼굴에 루카가 침을 꼴깍 삼키자 그의 목울대가 가볍에 울렁였다.




 ”이제 싫어…나, 나 더 이상은 못 해…….“


 ”무슨 소리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치만, 너무 많이-…“




 두 사람의 발 밑에는 서류 뭉치에서 떨어져나온 종잇장들이 이리저리 흩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의 속삭임과도 같은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햇살이 반짝이는 대낮에 이 두 사람은…….




 “너 사실 악마가 아니라 바보인 거지? 읽고! 이해하고! 사인하면 되는데 왜 그게 안 돼?!”


 “말이 심하잖아! 악마는 인간들이랑 다르게 구두 계약만으로도 얽매이기 때문에 살면서 서류 같은 건 볼 일이 없단 말이야!”




 계약서를 쓰고 있는 중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악마와의 계약이라고는 하나, 복스 아쿠마는 인간의 말 한 마디를 마음에 품기 보다 종이 한 장에 적힌 사인을 서랍 깊숙히 품는 사람이었다. 인간끼리 말로 하는 약속 따위는 전혀 신뢰하지 않았기에 그는 당연하게도 자신 아래의 모든 인간을 고용 할 때 사용하는 계약서와 주의사항, 그리고 법률 따위가 함께 묶여있는 서류 뭉치를 루카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 악마인 루카 카네시로는 두께가 무려 2센티는 되어보이는 서류 뭉치를 보고 경악했다. 악마의 계약이라는 것은 말로서 상대방과 엮이는 것으로, 마법진을 그린다거나 하는 마법조차 필요 없는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혀 위에서 바로 구속되는 주종관계에 익숙했던 그에게 계약 하나만을 위한 식빵보다도 두꺼운 서류는 또 다른 공포로 다가왔다.


 그렇게 소파에 반쯤 누워 서류를 읽는 둥 마는 둥 하는 루카를 보다 못한 복스가 그를 바르게 앉히고서 함께 글자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한 것이 삼십 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두꺼운 만큼 내용이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읽어야 하는 부분은 얼마되지 않았기에, 복스는 필요한 부분만을 짚어주었으나 루카가 모든 내용을 정독하려 들어 이 사단이 난 것이다.




 “그러니까 읽으라는 부분만 딱 읽으면 됐잖아?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거야. 누가 악마를 등쳐먹을 생각이라도 한대?”


 “그런 게 아니라, 띄엄띄엄 읽으면 뒷부분이랑 앞부분 내용이 섞일수도 있잖아…!“


 ”하…….“




 깊은 한숨과 함께 복스가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만년필을 주워 루카에게 던지듯 건넸다. 만년필을 받아든 루카가 그것을 코와 인중 사이에 끼우더니 불만 가득한 눈으로 계약서의 복스가 표시해 둔 부분을 노려봤다. 아예 읽는 것을 포기한 건지, 무심하게 종이를 넘기던 루카는 만년필의 잉크를 엄지 위로 쭉 짜내고 가장 마지막 장의 서명란에 검은 지장을 꾹 찍어버렸다.




 “그거 잘 안 지워질걸.”


 “앗!!”




 복스가 건넨 손수건으로 엄지를 벅벅 문지르지만 지문의 파인 곳을 수로마냥 이동해 검게 번진 잉크는 이미 착색되어 지워질 기색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잉크를 지워보겠다며 엄지를 주먹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는 바람에 애꿎은 손바닥과 다른 손가락까지 잉크가 번졌다. 루카가 엉망이 된 손수건을 다시 복스에게 건넸지만 그는 돌려받지 않았다.


 검은 잉크가 얼룩덜룩하게 묻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꼭 완벽한 악마의 형상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 사이에 섞여 지낼 땐 평범한 금발머리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악마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괴리감을 느끼곤 했다. 특히 다른 곳은 거울이 없으면 확인하지 못하지만 손과 발은 달랐다. 늘 검게 물들어있던 짐승의 발이 말랑하기만 한 인간의 다섯손가락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언제 봐도 생소했다.


 손수건 대신 건네받은 서류뭉치를 책상 아래 서랍에 넣은 복스가 허리를 펴며 끙 소리를 냈다. 찰칵이며 자물쇠가 잠긴 소리 역시 들렸으나 그의 손에서 열쇠 따위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이얼 금고라기에 루카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굳이 안 잠궈놔도 괜찮지 않아? 몰래 서류를 훔쳐가거나 하는 나쁜 짓은 안 한다구.”


 “민앤이블 하고 싶다면서 그런 발언은 벌써부터 탈락이야. 물론 대놓고 훔치거나 패거나 하는 행패는 사양이지만.”


 ”……그럼 민앤이블이 아니게 되잖아?“


 “그런 급 떨어지는 짓은 동네 깡패들이나 하는 일이지. 우리는 좀 더 고상하게 해 보자고.“




 복스가 구겨진 재킷의 아랫부분을 잡고 가볍게 잡아당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름이 말끔하게 펴졌다.


 루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민앤이블이라는 말에도 나눌 급이 있던가?  악마들 사이에서는 그저 잔혹함과 무자비함, 그리고 쾌락주의만이 계급을 나누는 큰 기준이었다. 통합하자면 오직 힘으로만 그 계급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상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쪽이 더 낮은 급의 민앤이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따라오라는 사인으로 고개를 옆으로 까닥인 복스의 뒤를 루카가 졸졸 따랐다. 단순한 발소리 뒤로 리듬감 있는 경쾌한 발소리가 달라붙었다. 복스가 크게 들이 쉰 숨을 내뱉으며 말을 꺼냈다.




 “……먼저 그 걸음걸이부터 얌전하게 바꿀 수 없어?”


 “응? 내가 뭐 어떻게 걸었는데?”


 “기대한 내가 바보였군.”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복스와 루카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나가자 보초를 서고 있던 장정들이 각을 재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갈아타는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들을 가운데에 두고 반듯하게 선 남자들 탓에 루카는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을 억지로 꾹 눌러담았다.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1층까지 빠르게 내려갔다. 아마 관제실 같은 곳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낸 게 아닐까 하고 루카는 예상했다. 복스가 걸음을 옮기고, 그의 뒤를 따라 루카가 총총 걸음을 하면 장정들이 뒤를 따라 걸었다. 호텔 로비를 걷는 동안 모든 직원들은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고, 다른 투숙객이 저를 포함한 무리를 흘긋대는 걸 알 수 있었다.


 루카는 인간들의 중심에 선 지금 이 상황이 위협적으로, 한편으로는 희열로 다가왔다. 선망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은 악마인 그에게 있어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도 여전한 것이었다.


 저에게 꽂히는 시선 따위는 익숙했던 복스는 빠르지만 반듯한 걸음으로 검은 세단에 몸을 실었다. 루카가 익숙하게 그의 옆자리에 앉자 운전석의 남자가 몸이 움찔거리는게 보일 정도로 동요했다. 어제와는 다른 사람인가? 루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복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신경 쓰지 마, 지금 내가 키우는 애야. 당분간 옆에 둘 거니까 그렇게 알아두라고들 해."


 "예, 보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데?"


 "갤러리."




 갤러리이라는 단어 한 마디에 루카의 눈이 생기를 머금으며 반짝였다. 갤러리라 하면, 인간이 신이라고 여기는 존재에게 바치기 위해 빚어낸 아름다운 미술품이 가득한 장소였다. 즉 일반적으로 악마에게는 껄끄러운 작품도 당연스레 접할 수 밖에 없어 악마들은 그곳을 기피하고는 했지만 루카는 달랐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잘 만들어진 공예품과 작품 따위에 관심이 많았다.




 “눈 그렇게 뜨지말고. 일하러 가는 거니까.”


 “갤러리에 일을 하러 간다고? 마피아 보스가?”


 “그래. 그러니까 그 반짝이는 눈빛 좀 죽여, 이러니까 네가 강아지 같다는 거야. 어딜 봐서 그게 악마의 눈빛인지……이래서야 민앤이블은 하늘 위의 별 따기가 되겠군.”




 저를 향해 쏘아대는 잔소리에 루카가 입술을 비죽이며 미간을 팔자로 찡그리자 복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호탕한 웃음 소리를 냈다. 그가 풀이 죽어 얌전해진 모습이 어지간히도 웃겼는지 복스가 큰 손으로 박수까지 쳐가며 웃는데, 그의 박수 소리는 웃음과 대비되게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루카는 그제서야 복스가 자신을 놀려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부루퉁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미안하다며 건네오는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복스는 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도시의 낮과 밤은 너무나도 달라서, 어젯밤 달리던 차 안에서 바라보았던 네온사인이 가득했던 도시가 지금 자신이 있는 도시와 같은 곳이 맞는지 루카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활기를 머금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을 루카는 제 자색 눈동자에 하나하나 담았다.








 갤러리는 현대적인 것을 넘어서 미래지향적 디자인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딱딱한 직각의 콘크리트 건축물이 아니라 둥글게 휘어진 외벽과 말끔하게 덧칠된 하얀 페인트가 눈앞의 것이 정말 건축물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끔 만들었다. 몇 세기 전, 아름답게 깎아낸 조각상을 보았던 그 감정을 기억해낸 루카는 인간의 끝없는 발전에 감탄했다.


 그러나 이내 입구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는 디자인은 오직 시각적 아름다움에만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건물은 생소한 건가?”




 복스가 루카를 향해 고갯짓하며 물어왔다. 루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생소하다기 보단……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라 그래.”


 “이런 데서 생각이 잘 맞는군. 나도 건물은 건물의 형태인 게 제일이라고 생각하거든.”


 “의외로 취향이 클래식하구나.“


 ”그런 셈이지.“




 의외로 그는 쉽게 수긍했다. 루카는 그 모습에 호텔 안에 배치된 다이얼 전화기를 떠올리며, 그것이 그의 입맛이 반영된 인테리어는 아닐까 골똘히 생각했다. 복스의 뒤를 따르면서 그가 리볼버를 선호할지 권총을 선호할지, 그도 아니라면 더 깊은 역사의 길로 빠져야만 하는 일본의 장검인 카타나 같은 무기를 선호할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처음부터 초빙된 인물들만 입장 가능한 전시회였는지, 갤러리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고급진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드레스 차림에 깃털이 달린 부채(루카는 이곳에서 굉장한 거리감을 느꼈다!)를 들고 있는 여성도 있었다. 루카는 자신의 정장을 내려다보며 어젯밤 입었던 청재킷을 다시 걸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루카의 긴장을 읽어낸 복스가 직속 부하를 제외한 보디가드를 전부 물리고 그를 본인 옆으로 바짝 세웠다.




 “너무 긴장하지 마, 퍼피.“


 ”…퍼피..?!”


 “그래, 그래. 자, 앞서 말했다시피 난 아날로그파야. 하지만 종이 서류는 정보가 새어 나가기 쉬워.”


 “응,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서 이런 갤러리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야. 일종의 연락망이지. 연락 방법은 매일 바뀌지만 그것도 암호로 전해받으니 앞으로는 미리 숙지해두기만 하면 문제 없을 거야, 아주 클래식한 방법이기도 하고.“




 복스가 앞장서고 루카가 그 뒤로 따라 붙자 두 걸음 뒤로 직속 부하가 따라붙었다. 업무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걸음이었다. 그는 심지어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었는지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이거 하나 사 갈까?” 라며 직속 부하에게 손짓하기도 했다. 직속 부하는 곧장 갤러리의 관계자에게 향했다.


 벽에 걸린 작품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보며 색감, 분위기, 작가의 자잘한 취향 따위를 이야기하는 복스의 모습은 마피아 보스가 아닌 좀 부유하고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가 예술에 있어 조예가 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를 따라 걷던 루카 역시 어느새 업무는 잊어버린 채 함께 작품을 관람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작품에 대한 가벼운 농담이나 감상을 나누었다. 개중에서도 루카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 하나가 있었다. 부분만 보았을 땐 유화 페인트가 질서 없이 마구 덧발려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정한 규칙성이 존재해 다채로운 색감을 뽐냈다. 욕망. 작품의 제목이었다.


 작품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는 루카의 옆에서 복스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알록달록한 작품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정말 악마가 맞긴 한 건지, 복스가 실소를 내뱉었다.




 ”보는 눈이 있네. 마음에 들어?“


 ”응. 표현은 못 하겠는데, 처음 봤던 그 벅참에 사로잡혀서…계속, 보게 돼.“


 ”좋은 작품은 많지만 마음을 흔드는 작품은 찾기 어려운 법이지. 잘 됐군, 하지만 이제 일 할 시간이야.“







우와 다음편을 네 달이나 지나서 올리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저에요(여유분도 없음...)



아부지한테 영혼 저당잡힌 딸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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