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금 볕이 든 창가에 뽀얀 먼지가 피어난다. 변색된 창틀 위로 방금 묻은 지문 자국이 선명하다. 며칠 청소를 걸렀더니 그새 먼지가 쌓였나. 창 너머 세상은 어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오래된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엔 표정이 없다.

 똑똑똑. 경건한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네.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먼저 방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고소한 수프 냄새가 그 뒤를 따른다.

 잘 주무셨어요?
 응. 좋은 아침.

 단정한 말투로 승훈은 아침 인사를 건네고 베드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침대에 계실 줄 알았는데. 뒷말이 생략되어 있지만 의외라는 투다. 아침 햇살이 좋아서. 나는 변명하듯 말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간다. 감자 수프네? 밝은 소리로 묻자 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환절기라 아침 바람이 쌀쌀해서요. 감기 조심하셔야죠.
 괜찮아. 아직은.

 수저를 들어 수프를 조금 맛본다. 늘 먹던 그 맛이다. 지겹지만 질리진 않는 맛. 사는 것과 비슷한 맛이라고 생각했다. 밍밍하고 고소하고 건강하고 재미없고.

 그림이 많이 낡았던데요.
 응.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걱정하지 마. 금방 완성될 거야.

 그림 이야기가 나오자 승훈의 작은 눈이 매섭게 변한다. 불만 섞인 눈이다. 대책없는 낙관으로 승훈의 입을 막고 나는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말벗은?
 점심 전에 올 겁니다.
 괜찮은 아이였으면 좋겠네.
 그러게요.
 오면 청소부터 시켜야겠어.
 그러세요.

 말벗이 도착하면 알려주겠다며, 승훈은 크게 허리를 꺾어 인사하고 뒤돌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입에 물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맛이 없다. 맛이 좋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맛이라는 게 없었다. 곁들여 나온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쿡 찍어 조금 씹어 먹어 본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 맛이 있지도 않다.

 승훈에게 마들렌을 구우라고 말해야겠다.





 아침을 먹고 나면 온실과 정원을 둘러보고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하지만 오늘은 함께 따라나갈 사람도 없고 날씨도 나빠질 것 같다며 승훈이 극구 반대해 서재로 내려왔다. '제발 나이를 생각하라'며 승훈은 조용하고 공손하게 화를 냈지만, 승훈이 화가 난 진짜 이유는 내가 아침 식사를 거의 다 남겨서일 것이다.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지만 점심 전에 말벗이 도착한다고 했던 걸 떠올리고 그냥 승훈의 말에 따라주었다. 승훈은 말벗을 '도우미'라 불렀다. 'companion'을 적당한 말로 옮기려다 보니 표현의 차이가 생긴 것이리라. 무어라 부르든 어차피 하는 일은 같으니 관계는 없었다. 다만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했고, 승훈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잘 보살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같은 사람을 다르게 부르게 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유리창 하나 없는 1층 서재는 숨이 막힐 정도로 어둡고 갑갑하다. 초에 불을 붙이고 묵직한 자줏빛 커튼을 걷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커다란 액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프레임 속 백발의 신사가 쭈글쭈글한 미소를 짓고서 나를 바라본다. 엊그제보다 주름살이 늘어 있다. 머리숱도 줄었고 입술엔 혈색이 조금도 없다. 나는 황급히 커튼을 쳐 그림을 가렸다.

 가슴이 빠르게 뛴다. 심장이 오래된 내겐 위험한 신호다. 의자에 주저앉아 호흡을 고르고 멍한 눈을 깜박여본다. 루이 16세식 금색 프레임 안쪽으로 까맣게 변한 캔버스가 거대한 블랙홀처럼 나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죽음보다 무서운 건 늙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무덤 같은 서재에서 빠져나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겨우 침실까지 올라왔다. 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 썼다. 피곤해서 눈 좀 붙일 테니 점심은 올려보내지 말라고 침실로 돌아오는 길에 주방에 얘기해두었다. 후에 승훈이 알면 난리를 치겠지만 자는 척하는 동안에는 일부러 찾아와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약이라도 먹을까 하고 약봉지와 물컵을 찾았지만 주전자가 텅 비어 있어 먹을 수 없었다. 승훈의 말이 옳았다. 나는 '도우미' 없이는 단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다. 살 수 없게 변해버렸다. 승훈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건지 눕자마자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잠깐 졸다 깬 건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번뜩 잠에서 깨었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창을 때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하지만 나의 단잠을 깨운 진짜 범인은 따로 있었다. 이불을 칭칭 감고 누운 채로도 느낄 수 있었다. 방 안 가득 이상할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걸. 끄는 듯한 발소리와 고르지 않은 숨소리, 차갑고 위험한 바깥 공기의 냄새가 번갈아 정신없이 예민해진 신경을 찔러댔다. 나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낯선 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불청객의 손끝이 침대 옆 서랍에 닿기 직전에 브레이크를 건 것처럼 급히 멈춘다.

 안녕.

 창 밖으로 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차고 비린 비 냄새를 흩뿌리며 소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놀란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춥다.

 다행히 새 말벗은 귀가 밝은 편이었다. 내가 중얼거리는 소릴 듣더니 허둥지둥 덧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다. 소년이 흔들의자에 걸려 있던 담요를 걷어오는 사이, 나는 소리나지 않게 서랍을 열어 안에 든 걸 침대 속으로 감추었다.

 이제 괜찮으세요?
 응.

 그만 됐으니 옆방에 가서 편히 쉬라고. 막 입을 떼려던 찰나, 차갑고도 따스한 소년의 손이 나의 손을 감싸쥐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히기는 너무할 정도로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포옹처럼 포근한 느낌이었다. 캄캄한 어둠이나 도톰한 담요보다 더.

 소년과의 아주 특별한 악수를 나누고서야 나는 비로소 단잠에 들었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살짝만 더. 좋아요, 아주 좋아. 경쾌한 붓터치처럼 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오늘따라 다소 과장된 흥겨움이 느껴진다. 비도 와서 채광도 좋지 않은데 송 화백은 굳이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나를 발코니 앞으로 불러냈다. 체스터필드 소파에 기대어 자세를 잡고 앉아 있으니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몸이 뻣뻣해지며 좀이 쑤신다. 송 화백은 웃으며 어느 정도는 편하게 움직여도 된다고 했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림 속 모델이 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게 어색해서 몸둘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은 계속 송 화백과 눈을 마주쳐야 하니까. 나를 불안정하게 하는 건 바로 그의 존재다.

 차 가져왔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붓을 물감에 적시며 송 화백은 말벗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홍차가 든 티팟과 에스프레소가 담긴 작은 커피잔이 각자의 앞에 놓인다. 상큼한 레몬향이 묻은 마들렌도 함께다.

 재밌어. 그리고 싶게 생긴 얼굴이야.
 감사합니다.

 새로 온 말벗은 말이 짧은 편이었다. 긴장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들어올 때처럼 말벗은 소리없이 물러갔다. 입고 왔던 옷을 벗기고 단정한 유니폼으로 갈아 입혀놓으니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송 화백은 말벗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 붓을 내려놓고 에스프레소 잔을 들었다.

 언제 한 번 모델로 쓰게 빌려가야겠는데요.
 그러세요.
 아주 재밌는 걸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비밀이 많은 얼굴이잖아요.
 그런가요.
 네. 진우 씨처럼요.

 그가 내 이름을 말할 때면, 몸 안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티팟을 기울여 홍차를 붓고 우유를 조금 따랐다. 고소한 밀크티와 마들렌 글라쎄는 제법 잘 어울렸다. 하나 권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단 것이 싫다며 송 화백은 에스프레소에도 시럽을 넣지 않았다. 짙은 커피향이 홍차향을 누르고 힘있게 밀려온다.

 완성되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너무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히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난처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송 화백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내가 곤란해하는 걸 즐기는 것도 같다.

 거의 다 되긴 했는데 영 맘에 안 들어서요.
 왜요?
 실물만 못하거든요.

 나이를 먹고 또 먹어도 이런 말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 부끄러워 입을 꾹 다물고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송 화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은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몸 속에서 또 한 번 바위가 굴러떨어진다.

 솔직히 완성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
 왜요?
 다 그리면 여길 떠나야 하잖아요.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목소리가 물줄기처럼 머리 위로 떨어진다. 푹 떨군 고개 밑으로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그의 손이 불쑥 들어와 내 얼굴을 감싼다. 그의 손바닥이 닿은 얼굴 반쪽이 붉은 물감을 칠한 것처럼 천천히 물이 든다.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자 나머지 얼굴 반쪽도 같은 모양새로 붉어진다. 내게 눈길을 두고서 그는 입가에 묻은 마들렌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부드러운 엄지가 입술을 스치고 지나간다. 조금씩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곧게 뻗은 속눈썹이 찌를 듯이 전진한다. 나는 거의 숨도 못 쉴 지경이 된다.

 짙은 커피향이 목구멍까지 밀려든다.





 새로운 식구를 들인 환영식을 겸해 풍족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신선한 광어 카르파초와 연어 파피요트는 담백하니 맛이 좋았지만 새 말벗은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묻자 생선을 못 먹는다고 했다. 이곳에선 속이 빨간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더니 말벗은 크게 놀라고 그보다 더 크게 실망했다. 그럼 이 집 사람들은 대체 뭘 먹어요? 말벗은 따지듯 물었다. 글쎄. 아침에 먹었던 감자수프와 아스파라거스를 떠올리고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두 번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말벗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이 찰랑대는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이런 일은 처음 해보는지 몸을 만지는 손길이 무척 서툴러 내가 다 불안할 지경이었다. 물의 온도도 지나치게 뜨거워 찬물을 섞어야 했다. 어렵사리 만든 비누 거품은 밀도가 떨어져 살갗을 문지르는 손바닥의 체열이 가감없이 와 닿았다. 말벗은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비누 거품을 씻어냈다. 하아. 얕은 한숨에서 하루의 피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이가 많아 몸이 불편한 노인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봐요.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구인 광고를 냈다고 하더니. 날 거동이 불편한 노인 취급했단 말이지. 언제나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승훈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좀 오래 살긴 했지만 노인은 아니다. 아니, 노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오래 살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회피한다.

 형은 어디가 아픈 거예요?
 안 아파.
 그럼 도우미가 왜 필요한 건데요?
 근데 너 방금 나더러 형이라고 했니?

 놀라서 몸을 일으키자 말벗은 미간을 씰룩이며 몸을 움츠렸다. 문득 송 화백이 '그리고 싶게 생긴 얼굴'이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궁금하다. 이 아이의 어떤 점이 그를 자극시키는지. 많은 비밀을 갖기엔 아직 한참 어린 얼굴인데.

 이름이 뭐야?
 태현이요. 남태현.
 태현이 넌 몇 살이야?
 스물둘이요. 형은요?
 너보다 많아.
 몇 살이나 많은데요?
 아주 많아.

 실없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태현은 코웃음만 쳤다. 정신이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 됐어요. 시작할 때보단 한결 정돈된 손놀림으로 태현은 몸에 남은 물기를 제기하고 타월을 둘러주었다. 아, 매운 컵라면이나 하나 먹고 싶다. 간절한 혼잣말이 뜨거운 수증기에 섞여 욕실 천장에 달라붙는다. 한창 많이 먹을 땐데 저녁을 거의 먹지 못했으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일 거다. 주말엔 닭이나 오리를 맛있게 구우라고 승훈에게 말해야겠다. 싫은 내색을 하면 혹시 날 노인이라 한 적 있느냐고 물어서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려야지.

 욕실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정강이에 달라붙는다. 몸을 조금 떨다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태현은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베개의 높이를 조절한 뒤, 손등 밑으로 길게 내려온 소맷단도 깔끔하게 접어주었다. 손등에 손끝이 닿자 문득 우리가 나누었던 특별한 악수가 떠올랐다.

 그 안엔 뭐가 들어 있었어요?

 태현은 눈짓으로 침대 옆 서랍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만 악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보다.

 내 나이테.

 양초에 불을 붙이던 태현의 입매가 고양이처럼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날 진짜 정신병자로 오해하면 곤란한데. 걱정스런 맘에 진짜야, 라고 소심하게 덧붙이자 태현은 웃음을 거두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형이 무슨 나무예요? 나이테가 있게.
 오래 살면 인간도 식물 같아져.

 주는 대로 받아 먹고 살펴주는 대로 살아 있고. 맛 같은 건 잊고 고통에만 예민해진 채로.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게. 그렇게.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 눈을 감는다. 긴 세월을 통과하며 내가 터득한 건 삶에 대해 대체적으로 무감각해지는 일이었다. 처지에 대한 비관은 이미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감정에 휩쓸리는 건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했다. 대단하게 슬프거나 기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면 목표였다. 다르게 살길 원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거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떠 태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젊고 싱싱한, 호기심 많고 빨리 배우는 스물둘의 생기 넘치는 얼굴을.

 태현아.
 네.
 이 집에선 아무 것도 훔칠 생각 마.
 훔치다뇨. 안 그래요.
 그래. 그러지 마.

 넌 이미 너무 많은 걸 가졌으니까. 뒷말은 삼킨 채,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무겁다. 이번에도 태현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벌써 뭔가 도둑 맞은 기분이다.





 얼마나 되었을까. 나의 나이가, 나의 얼굴이, 나의 삶이 여기에 멈춰버린 건.

 젊은 신체로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그것도 원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그럴 수 있다는 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내가 아름다운 얼굴로 세상과 마주하는 동안 시간은 나를 비껴 사각의 프레임에 머물다 갔다. 사진을 찍어놓은 듯 나와 똑 닮은 얼굴의 초상은 숨이 붙은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었다.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마지막까지 늙어가다 숨을 거두면 그림 전체가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그건 죽음을 뜻했다. 그림이 죽으면 나도 죽었다. 그러므로 불멸의 삶을 간직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림 속 내가 늙어 죽기 전에 새로이 초상을 그리고 그림이 너무 일찍 수명을 다하지 않도록 금욕적인 생활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몸에 해로운 것들은 멀리 하고 위험한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흐르는 시간을 관망하며 이곳에 박제된 채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여럿 떠나 보냈다. 처음엔 그들의 죽음이 슬펐고, 나중엔 따라 죽을 수 없음이 슬펐다. 어느새 축복은 형벌이 되어 있었다.

 달라질 것 없는 삶. 죽음보다 더 죽음 같은 삶. 고인 물처럼 썩어가던 일상에 새로운 활기가 생긴 건 낯선 손님들이 등장하고부터였다. 새로운 초상화가 필요해 급하게 교섭한 송 화백은 처음으로 이 집에 머물게 된 손님이었다. 부탁받은 일을 건성으로 할 수 없다며 그는 반드시 사진이 아닌 진짜 얼굴을 보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워낙 외딴 곳에 있는 집이라 매일 왔다 갔다 하며 작업할 수 없는 환경이라 해도 막무가내였다. 사정이 급했던지라 외부인의 출입에 깐깐한 승훈도 특별히 이곳에 머물도록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송 화백의 등장은 집 전체에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그가 유쾌한 말솜씨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집안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면 대할수록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는 일을 마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외부인이었다. 영원히 이곳에 속할 수 없었다. 송 화백을 제외한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천성이 남의 말에 신경쓰거나 그로 인해 쪼그라드는 인간이 아닌 듯했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신경쓰지 않는 것. 그리고 잘 웃는 것.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다가도 대담할 정도로 친근하게 구는 것. 쌍꺼풀이 없는 눈과 잘 그을린 피부와 탄탄한 허벅지와 나를 보는 눈빛의 온도와 멋진 목소리와 내게는 없는 그의 모든 것들이. 가끔은 두려웠다.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 눈치빠른 그가 내 마음을 알아챘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내 마음을 이용하려 들면 나는 넘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비관적인 생각에 우울을 앓고 나면 두근거림과 두려움은 공평하게 조금씩 더 자라나 있었다.

 태현의 등장은 송 화백의 경우와 다른 느낌으로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았다. 태현은 이제 이 집의 식구가 될 아이였다. 그러나 아직은 근본을 알 수 없는 수상한 어린애이기도 했다. 솜씨가 서투르고 실수도 잦아 승훈에게 크게 혼나고 나면 덩달아 다른 일꾼들까지 눈치를 보기 일쑤였지만, 오히려 그 뒤엔 집안에 온화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을 너그럽게 만드는 게 태현의 결함인지 젊음인지 혹은 둘 모두인지 나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의 혼란과 무관하게 태현은 자신이 맡은 일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나 역시 목욕을 시키거나 옷을 갈아입힐 때마다 태현의 손이 몸에 닿는 게 어느덧 익숙해졌다. 태현은 잠을 잘 때 말고는 그림자처럼 내 옆에 붙어다녔고, 도움이 필요할 때면 귀신처럼 나타나 빠른 손길로 일을 처리했다. 귀신 같다는 건 물리적으로도 옳은 표현이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길 여러 번이었으니까. 소리없이 민첩하게 움직일 때면 꼭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도둑고양이' 하고 불렀더니 정색을 하며 싫어해, 그 뒤로 다시는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그건 젊다는 것 다음으로 태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솔직하고 자기 표현이 확실하다는 것. 특히 싫어하는 일에 대해 더 그렇다는 것.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내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던 때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줄 이가 곁에 남아 있던 시절엔 나도 그랬었다. 그때의 친구들은 이제 떠나고 없다. 그들이 기억하던 나도 이젠 사라져버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나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호오(好惡)를 가지려 해도 그것을 알아줄 사람이 없다. 거울이 없는 이 집에서 나는 내 얼굴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

 고요한 서재 안에서 나는 거울 대신 액자 속 노인의 얼굴을 본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 그림 속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은 늘 영원처럼 길다. 바싹 마른 입술로 그림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욕망해도 정말로 괜찮은 건지.

 내 거울은 말이 없다. 나는 몸서리치게 외로워진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환절기의 변덕스런 날씨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감기에 걸려버렸다. 태현이 실수해서 덧문을 열어놓는 바람에 춥게 잠이 든 것이 원인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몸살감기라 여겼는데 밤이 되니 열이 심하게 오르더니 몸이 쪼개질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기침이 너무 심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가 되자 이러다 죽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다 났다. 초상을 그려놓으면 신체는 나이를 먹지 않아 노화로 죽을 일은 없지만, 병에 걸리거나 몸이 다쳐서 숨이 끊어지는 건 별개의 일이다. 다행히 승훈이 재빠르게 조치를 취하고 태현이 옆에서 열심히 간호해준 덕에 하루를 독하게 앓고 나자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새삼 아직 내 몸이 젊다는 걸 느꼈다.

 담담한 나와 달리 승훈은 이번 일로 대단히 크게 놀란 듯했다. 이게 다 초상화가 너무 낡았기 때문이라며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릴 하더니, 애먼 송 화백에게 가서 대체 그림은 언제 다 되는 거냐고 꽤나 공격적으로 독촉을 한 모양이다. 덕분에 낫자마자 꼼짝없이 밖으로 끌려나와 모델을 서야 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집안에 처박혀 있을 순 없다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 기분전환이 될 거라고 송 화백은 꽤나 끈질기게 야외에서 작업을 할 것을 권했다. 그러니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이런 것에 약하다.

 밖으로 나와 보니 송 화백의 말대로 정말 보기 드물게 좋은 날씨긴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푸른 하늘. 쨍쨍하지만 덥지 않은 햇빛. 향긋한 온풍과 취한 듯이 산들거리는 고채도의 잎사귀들. 보이는 대로 물감을 찍어 바르면 누구라도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처럼 가을 안의 저택은 몹시 아름다웠다. 기분이 좋아 가볍게 산책을 하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펼쳐 앉았다. 차양으로 햇볕을 막아주느라 정작 옆에 있는 태현은 쏟아지는 빛줄기를 피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자세히 보니 왼쪽 뺨이 빨갛게 부어 있다. 승훈에게 맞은 것 같다.

 오늘이 금요일이던가.
 네.
 장 보러 다들 시내에 나갔겠네.
 아직요.

 태현은 부루퉁하게 대꾸하곤 힘들어서 축 내려가 있던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차양이 올라가자 컨버스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송 화백의 머리가 보인다. 내 얼굴이 아니라 어깨 너머 뒤편을 응시하고 있다. 혹시 누가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닌지 살피는 것 같다.

 몸이 안좋아서 그런지 단 게 먹고 싶네. 초콜릿 같은 거.
 가서 가져올까요?
 주방엔 없을 거야. 내가 시켰다고 하고 따라가서 한 통 사올래?
 시내에요?

 풀이 죽어 있던 태현의 목소리가 두 톤 높게 올라간다. 매주 금요일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 뭍으로 나간다. 물때에 따라 매번 다르지만 대개 오전에 나갔다가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짐을 실어 오후에 들어온다. 뭍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요리사와 시동(page)이다. 가끔 특별한 지출이 있을 때는 집사인 승훈이 따라나갈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두세 명 정도의 단촐한 규모였다. 하루 24시간 내내 내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 태현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원칙대로라면 그랬다.

 허락 맡아야 하는데.
 내가 허락한 거니까 괜찮아. 지금 가면 배에 탈 수 있을 거야. 트러플 한 통하고 너 먹을 것도 조금 사와.  물건값은 내 앞으로 달아놓고.

 나는 눈짓으로 송 화백의 발치에 있는 도화지와 4B연필을 가리켰다. 그리고 태현이 들고 온 도화지를 찢어 짤막하게 메모를 적어주었다. 가서 이걸 보여주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을 거라 하자, 그제야 태현은 완벽하게 밝아진 얼굴로 좋아서 껑충껑충 뛰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나가는 김에 바람도 좀 쐬고. 좋아하는 라면도 실컷 먹고 와.

 신이 나 달려나가는 태현의 팔을 붙잡고 송 화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담배 한 갑을 부탁했다.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체 했다. 이 집에선 술과 담배가 금지였다. 송 화백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아 보이네요.
 그동안 답답했을 테니까요.
 그게 아니라 진우 씨 말예요.

 아프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히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송 화백은 붓에 물감을 먹이며 바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 뜻 없이 하는 말이니 가슴에 담아둘 것이 아니라 귓가에 스치도록 놓아두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그가 한 말은 내 안에 흘러들어 자꾸만 머릿속을 울렸다. 내가 아파서 걱정을 했구나. 당연한 사실에 헤픈 여자처럼 마음이 흔들린다.

 집에만 있으니 면역력이 떨어져서 쉽게 몸이 아픈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때요? 이번 참에 저랑 같이 여행을 다녀오는 건.

 네?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 화백은 한 치의 변화도 없는 표정으로 날씨 이야기를 할 때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림 좋아하시죠? 그림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경치 좋은 곳도 걷고 그러면 좋잖아요. 지금처럼 모델도 되어주시고. 그림을 아주아주 많이많이 그릴 거니까. 송 화백은 정말 그렇게 말했다. 그림을 아주아주 많이많이 그릴 거라고. 그가 흥분해 말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한다. 진심인 걸까. 스쳐 보내야 할 말이 자꾸만 귓속을 파고든다.

 여길 떠나기 싫다고 하시더니 거짓말이었나 보네요.
 싫지만 할 수 없잖아요. 다 그리면 떠나야 하니까.

 여기 월세는 안 놓으시죠? 호기로운 농담에도 크게 웃을 수가 없다. 애써 미소만 짓고서 태현이 놓고 간 차양을 높이 들어 얼굴 절반을 가렸다. 당황한 눈빛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촌구석에서 살아 무엇하시게요.
 당신이 있잖아요.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점점 대담하고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 기쁘다기보다 불편하다. 익숙지 않아서다. 말의 진위를 판가름할 냉정함이 더는 내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을 피한 채 필사적으로 그럴싸한 농담을 찾아 대꾸한다.

 그야 당연히 제가 있죠. 제 집이니까요.
 자주 놀러와도 되겠습니까?
 되도록 제가 깨어 있을 때 오세요. 아님 승훈이가 쫓아낼지도 모르니까.
 그럼 저희 집으로 가면 되죠.
 그래야겠죠. 민호 씨 집이니까. 민호 씨는 민호 씨 집으로 가야겠죠.
 아뇨, 진우 씨가 저희 집으로 놀러 오시면 된다고요. 그럼 누가 쫓아낼 일도 없잖아요.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그의 말에 담긴 의도나 뉘앙스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이 섬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은 적도, 방문해본 적도 당연히 없다. 나는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시선을 들지 못한다. 그는 자유로웠다. 육체적으로. 규율과 편견으로부터. 눈을 좀 들어주세요. 제 쪽으로.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햇빛이 너무 세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힘없이 차양을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세상이 빙글 돌았다.

 진우 씨. 내 이름을 부르며 송 화백은 붓까지 내던지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오늘은 바위가 옆으로 떨어진다. 내가 볼품없이 땅바닥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옆구리 사이로 송 화백의 팔이 들어오더니 단번에 몸이 일으켜졌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가 닿는다. 그에게 그댄 채 나는 웃었다. 기쁘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곳에선 아무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 이름마저 까먹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네요.

 아니라고. 그냥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말하기가 싫다. 그러기엔 그의 품 안이 너무 따뜻했다.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가슴에 살며시 머리칼을 부볐다. 그의 육체가 너무도 선명해서 현기증이 난다.

 들어갈까요?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무례한 요구에도 그는 싫은 내색없이 내 말을 따라주었다. 한 쌍의 연인처럼 우리는 불온하고 은밀하게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흔치 않은 날씨에 흔치 않은 기회였다. 둘 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잠이 올 것 같아.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의 손이 가만히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손끝에 밴 물감 냄새가 적당한 해로움으로 나를 물들인다.

 원한다면 밤마다 재워줄 수도 있는데.

 머리칼을 쓸던 손이 슬그머니 얼굴 쪽을 향해 온다.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없어서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답을 유보한다. 지나치게 침묵이 길어져 분위기가 상하기 전에, 그는 재빨리 또다른 농담으로 상황을 무마한다.

 화가는 그만두고 여기 도우미로 취직할까 봐요.
 태현이가 들으면 큰일날 소리네요.
 태현 군은 바로 옆방을 쓰고 있는 거죠?
 네. 침실에 달린 작은 쪽방인데 잘 때는 문을 살짝 열어놓고 자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내가 뱉은 말의 위험성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렇군요. 송 화백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묻지 않았다.

 해가 기운다. 그림은 풍경 속에 방치되어 있다.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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