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업하면서 수정하긴 했습니다만 트위터 스타일 인칭, 써방 단어 및 오탈자 여전히 많습니다. 





그날 훈은 좀 많이 울었음. 화도 많이 났음. 감정을 숨긴 채 잘 지내고 있던 자신을 대차게 흔들어 놓고, 믿어보라고 큰소리 탕탕 쳐놓고는. 제 원래 성격을 드러내자 차가워진 단이 미웠음. 이럴 거면 왜 날 흔들었어. 훈은 홧김에 단을 차단하고 연락처를 지웠음. 그래봤자 번호가 뜨면 한눈에 알아볼 테지만. 일단은 톡을 차단해버렸으니 전화가 오기 전까진 연락이 안 될 터였음. 


그렇게 몇분간 폰을 들고 씩씩거리다가 침대 위에 팽개친 훈이 매트리스를 울리는 진동 소리에 고개를 들었음. 다 지운 주제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훈은 던졌던 폰을 다시 집어들었음. 저장되지 않은 11자리의 숫자가 떠있었음. 원래의 훈이라면 숫자를 확인한 후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오래 울고 난 직후라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음. 눈가를 꾹꾹 누르며 목청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음. 


“여보세요?” 

- ...... 

“...형?” 

- 푸하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음. 기억 속에 깊게 박혀있는 목소리였음. 바로 A. 한동안 제 앞에 나타나지도, 간간이 걸려오던 전화와 문자도 없었기에 겨우 잊어가던 차였는데 하필 이럴 때 다시 나타나다니. 훈은 눈을 질끈 감았음. 


- ‘형’이라. 역시 제 버릇 개 못 주는구나. 

“그런 거 아냐.” 

- 그런 거 아니긴. 지난 번 그놈이야? 아님 그새 또 다른 놈? 

“그런 거 아니라고.” 

- 기든 아니든 나랑은 상관 없고. 

“끊을게.” 

- 아니, 끊지마. 


훈은 손바닥에 배어나온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음. 대체 왜인지. A 앞에선 항상 작아지는 자신이었음. 꿀릴 것 하나 없어진 지금에 와서도. 


- 지난 번 너 만난 이후로, 나 미친듯이 공부했다. 

“...” 

- 9월 모의고사도 잘 쳤고, 지난 주 사설 점수도 잘 나왔어. 

“..어쩌라고.” 


A가 낮게 웃었음. 


- 내년에 너네 학교에서 보자고. 거기 꼭 가고 말테니. 

“니가 우리 학교 오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널 보고 싶진 않아.” 

- 왜 그래. 너 나 좋아했잖아. 내가 내년에 너 만나준다니까? 

“싫다고.” 

- 아, 그래. 그새 남자가 생기셔서 바쁘신 분이셨지? 


훈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음. 정말 되는 게 없는 날이었음. 


“됐고, 수능 잘 쳐.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야.” 

- 니가 잘 치지 말라고 해도 잘 칠 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앞으로 다신 연락하지마.” 


더이상의 말이 나오기 전에 종료 버튼을 눌렀음. 귀에서 폰을 떼고 버튼을 누르는 그 찰나에도 A는 무어라 말을 하는 듯 했지만 훈은 철저히 무시했음. 그러고 보니 벌써 10월이었음. 곧 A의 수능이 끝나고. 지난 번처럼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음. 훈은 열어뒀던 창문을 닫으며 몸을 가볍게 떨었음. 예감이 좋지 않았음. 


그 밤, 집에 돌아온 단은 훈에게 톡을 보냈음. 

- 훈아 

- 지금 집에 있나 

- 내가 좀 울컥해서 그렇게 가버렸는데 

- 미안하다 

- 우리 얘기 좀 하자 

- 나쁜 얘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단은 밤 늦게까지 답장을 기다렸지만 숫자 1은 다음날 아침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음. 연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도 없었음. 단은 학교 가는 길에 훈의 집 현관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집안에선 인기척이 없었음. 어차피 비번을 아니까 눌러볼까 하다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발길을 돌렸음. 어쨌든 학교에 있을 테니까 훈네 단대로 가볼 생각이었음. 


훈의 전공 수업이 마치는 시간에 맞추어 인문대로 가는 길. 하필 B를 마주쳤음. 밝게 웃으며 단의 오른팔을 자연스레 잡은 B에게 네가 왜 여기 있냐고 했더니 철학과 교양 수업이 있었다고 했음. 그러더니 하는 말이, 학점 잘 준대서 넣긴 했는데 이런 쓸데없는 학문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했음.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과는 역시 실용적인 게 최고라며. 취직 잘 되는 공대나 경영대가 짱이랬음. 


단 자신은 취업 깡패라 불리는 과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의 전공, 특히 인문학을 깎아내리는 어조가 매우 불편했음. 그래서 B를 똑바로 보며,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라는 훈계 아닌 훈계를 했음. 평소 선배질 안 하기로 유명한 단이기에 이런 가르치는 말투와 표정은 단 스스로도 초면이었음. 그런데 B는 야단을 들으면서도 그다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음. 씩 웃으며 “네, 주의할게요.” 하는 게.. 너무 순순해서 이상했음. 


단은 몰랐지. 제가 B를 보며 야단을 치는 동안 인문대 대형 강의동에서 훈이 나왔고, 이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가버렸다는 걸. 단이 훈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멀어져서 불러도 소리가 닿지 않을 거리였음. 그래서 단은 일단 발을 딛었음. 달려가서 훈의 뒤를 잡을 요량으로. 


그런 단에게 제동을 건 건, 또 B였음. 앞으로 튀어나가던 단이 B에게 잡힌 오른팔 쪽을 돌아보았음. 


“와? 뭔데?” 

“선배 지금 박지훈 보신 거죠?” 

“어. 왜?” 


단은 마음이 급해져서 단답형으로 빠르게 대답했음. 


“걔, 선배님한텐 잘 하는 편이에요?” 

“무슨 소리고.” 


단은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 긴장했던 다리 근육을 풀고 대신 미간을 찌푸렸음. 


“대체 왜인지 저한테 굉장히 까칠해서요. 그렇게 적대적인 태도 처음이라 당황했는데. 보니까 저한테만 그러더라구요.” 


단은 뭔가 짚히는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화가 났음. 제가 뭐라고, 몇 번 보지도 않은 훈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보통은, 단이 이렇게 목소리를 깔고 심각한 어조로 말하면 지레 겁을 먹곤 했음. 그러나 B는 흔한 유형이 아니었음. 단단하게 굳은 단의 얼굴과는 정반대로 세상 무해하고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늘어뜨렸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이 일방적으로 B에게 화를 내는 듯한 광경이었음. 


“아니.. 전 그냥.. 지훈이가 대체 왜 절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서..” 

“지훈이는 지훈이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니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니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나?” 

“..선배님. 제가 아무리 바보같이 헤헤 웃고만 다닌다지만, 저 싫어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구분해요.” 


단은 여즉 잡힌 채인 팔을 뿌리쳤음. 


“니가 바보같이 헤헤 웃고만 다닌다고?” 

“저 진짜 억울해요. 그냥 친근하게 대한 사람한테 그렇게 가시 돋힌 말 듣는 것도 처음인데 선배가 제 말은 하나도 안 믿고 박지훈만 옹호하시는 것도 너무 당황스러워요.” 

“니 진짜..” 

“...” 

“그만 해라. 좋은 말 할 때.” 


B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단을 올려다보았음. 단은 훈이 향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훈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음. 헐렁하게 입은 후드티의 소매가 다시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뒤돌아보니 B가 가늘게 흐느끼며 팔을 잡고 있었음. 


“죄송.. 죄송해요.” 


단은 한숨을 쉬며 주위를 돌아보았음. 왠지 볼이 따갑다 싶더니 그새 꽤나 많은 시선이 둘에게 집중되어 있었음. 


“이것 좀 놓고 얘기해ㄹ.. 앗” 


단은 그저 제 팔을 툭 쳐서 B의 손을 떨궈냈을 뿐인데, B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있었음. B의 가느다란 몸이 계단 아래로 휘청이는 찰나 단이 B의 어깨를 당겨 잡았음. 분명, 둘 다 안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순간 B의 발이 계단 뒤로 빠졌음. 무게중심을 잃은 두 몸이 하나로 엉켜 계단 아래로 굴렀음. B는 그와중에 몸을 작게 말아 단의 품 안에 푹 파묻혔음. 


*


또 모르는 번호. 훈은 폰에 뜨는 열한자리 숫자에 몸서리를 쳤음. A에게서 걸려온 전화번호를 차단했더니 다른 이의 폰을 빌리거나 공중전화를 이용하는지 어제부터 정체불명의 전화가 걸려왔음. 훈은 한숨을 쉬며 수신거부를 눌렀음. 


“밥 먹다 말고 웬 한숨이냐. 복 나가게.” 


참이 보다못해 한 마디를 했음. 말이 한숨이지 아까부터 젓가락으로 밥알만 깨작거리고 있는 훈이 영 신경 쓰였음. 하루 정도야 컨디션이 안 좋을 수도 있는 거지만 이건 이틀째잖아. 병 걸린 병아리처럼 비실대는 게,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는데 도통 입을 열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훈은 미안, 한마디를 하고 입을 또 닫았다가. 뭐라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또 열었다가. 다시 젓가락으로 밥알을 괴롭히기 시작했음. 


“야.” 

“왜.” 

“내 입 무겁다.” 

“뭐?” 

“걱정하지 말고 말해라. 니 이러다 병 나겠다.” 


훈이 젓가락을 내려놨음. 그러거나 말거나 참은 콩나물 무침을 집어 먹으며 “정 말하기 싫음 말고”라고 한 마디를 더했음.


“자꾸.. 장난전화 같은 게 와서.” 

“장난전화? 어떤 장난?” 

“어.. 그게..” 

“중국집이녜?” 


훈이 풋, 웃었음. 


“언제적 장난이냐 그건.” 

“그럼? 막 이상한 신음소리 내고 그런 거?” 

“..그거랑 비슷한 건가..” 

“헐...” 


참이 밥을 뜨다가 숟가락을 내렸음. 


“차단하면 안 되나?” 

“차단했는데 자꾸 다른 번호로 와.” 

“와.. 누군진 몰라도 악질이네 그거.” 

“모르는 번호는 아예 안 받고 있긴 한데..” 

“야. 택배도 받아야 되고 뭐 당첨될 수도 있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 받을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갖고 해결이 되나.” 

“그럼 어떡해.” 


훈은 울상을 지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둔 폰을 바라보았음. 그새 또다시 울리는 폰에는 숫자 열한개가 또 찍혀있었음.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되나?” 


참이 진지하게 말했음. 훈은 순간 A의 얼굴을 떠올렸음. 신고하면 분명..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터뜨리겠지. 훈은 고개를 저었음. 


“고작 이런 걸로 경찰이 나서주겠어?” 

“야, 전화나 문자 폭탄 이런 것도 스토킹이라더라. 암튼 증거 다 수집해놔.” 

“증거...” 


훈이 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음. 참은 속으로 생각했음. 유명세란 참 피곤한 것이구나. 스토킹이라고 말은 해주었지만, 신체 건강한 스무살 남학생이 장난 전화로 신고를 하면 경찰은 아마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겠지. 안타까운 일이었음. 



그 시각 단은 병원에 있었음. 단 혼자 넘어진 거였다면 워낙에 운동신경이 좋으니 몇 계단 구르지 않고 바로 일어났을 텐데, B가 저를 붙들고 있는 바람에 거의 계단 끝까지 굴러야했음.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던 순간 통증이 찌르르 뼈를 타고 올라왔고 ‘X됐다’ 한 마디가 치고 지나갔음. 그 사이 단의 품에 매달려있던 B도 몸을 일으켰음. 단이 인상을 쓰며 왼팔을 부여잡고 있는 걸 본 B가 하얗게 질렸음. 


“어떡해요. 선배. 다친 거에요?” 

“어- 아무래도 팔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 

“어떡해, 어떡해. 괜히 저 때문에-”


호들갑을 떨며 단의 손을 부여잡는 B를, 단이 언짢은 표정으로 물리며 말을 이었음.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이것 좀 놓고.” 

“제가 같이 갈게요. 다 저 때문이니까, 제가 택시비도 내고 병원비도 내고 다 할게요. 죄송해요 정말.” 


단은 몸을 일으키며 저만치 멀리 떨어져있는 제 폰을 주워들었음. 액정은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박살이 나있었고 본체 역시 세로로 갈라져 내부가 다 보일 정도였음.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 변화 없이 검게 죽은 화면만이 보였음. 단은 폰을 주머니에 거칠게 꽂아 넣고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걸었음. B가 뒤쫓아오며 단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음. 손길이 미묘하게 허리와 엉덩이께를 스쳐 기분이 좋지 않았음. 


다행히 뼈가 부러진 건 아니었지만 작게 금이 갔음. 한동안은깁스를 하고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 하여 팔을 고정한 채 병원을 나왔음. 한숨이 터져 나왔음. 중간고사 기간이기도 했고, 코앞으로 다가온 축제도 문제였음. 아무래도 공연은 못할 것 같았음. 단은 성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문득 훈 생각이 났음. 뜬금없이 다친 팔을 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이 다쳤다는 말을 들으면 놀랄지도 몰라. 단은 미리 설명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폰을 집어들었음. 아. 생각해보니 폰이 아작난 상태였음. 


“선배, 제 폰 쓰실래요?” 

“어? 어. 빌려주면 고맙고.” 


B가 단에게 폰을 내밀었음.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작은 동물처럼. 폰을 건네받은 단이 짧게 말했음. 


“비번.” 

“121036이요.” 


키패드를 빠르게 누르고 폰을 귀에 붙인 단의 얼굴에 초조함이 맴돌았음. 신호음이 반복될수록 성마름이 더해갔음. 결국 ‘연결이 되지 않아—’안내 멘트까지 들은 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음. 


“한번 더 거셔도 돼요.” 

“..어, 미안. 조금만 더 쓸게.” 


그러나 전화는 결국 연결되지 않았음. 체념한 단은 폰을 B에게 돌려주고 병원 앞 약국으로 향했음. 처방전을 주고, 약을 찾고, 택시를 타는 내내 B가 곁에 붙어있었음. 제 책임이니, 집에 가실 때까지 바래다 드려야 한다며. 단은 거절조차 귀찮아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음. 


택시 안에서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음. 사고가 있어서 축제 공연에 참가하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을 알리자 회장은 길길이 날뛰었음. 왜 멋대로 몸을 굴리냐며 성질을 내는 통에 폰의 주인인 B가 통화를 가로챘음. 이게 다 제 잘못이며, 단은 오히려 자신을 구해주다가 다쳤다는 말을 하자 회장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음. B가 회장의 이름을 조심스레 부르자 그제야 어어, 그런 거였으면 어쩔 수 없지, 하며 전화를 끊었음. 단은 자기 쪽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B는 선배 공연 못 나가게 만들어서 너무 죄송하다며 또다시 울먹거렸음. 


택시 기사의 짜증을 받아치면서도 골목까지 들어가 달라고 요구하는 B였음. 팔 다친 거 안 보이냐며, 성질을 내는 모양새가 낯설었지만 사실 그 모습이 그리 나빠보이진 않았음. 돈을 내겠다는 B를 만류하며 단이 카드를 찍고 내렸음. 따라내리는 B가 차문을 닫았음. 쾅. 


그 소리에 건물 현관으로 막 들어가던 차의 훈이 뒤돌아보았음. 담황색 택시에서 내리는 익숙한 두 얼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아무래도 단의 깁스한 팔이었음. 그리고 그런 그를 걱정스레 올려다보고 있는 B. 훈은 그때, ‘눈이 돈다’라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했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길로 내려갔음. 


단을 부르려는 찰나, 잔잔하게 웃으며 B에게 인사하는 단의 얼굴이 보였음. 훈은 들어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뒷걸음질 쳤음.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음. 


왜 다쳤지? 왜 하필 쟤랑 같이 있지? 온갖 생각이 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음. 그때 단이 뒤를 돌아보았음. 뻣뻣하게 서있던 훈과 단의 눈이 마주쳤음. 단이 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음. 아니, 걸어오려고 했음. 


“왜.” 


B가 단의 옷깃을 꾹 붙잡고 있었음. 물기가 맺힌 작은 눈이 반짝 빛났음. 


“저, 너무 죄송해서.. 선배 나을 때까지 돕고 싶어요.”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지금 시험 기간이잖아요. 축제 공연은 안하신다고 쳐도, 공부도 하셔야 하는데.” 

“...” 

“돕지 않으면 제 마음도 너무 불편할 것 같아요.” 


단은 건물 입구를 다시 돌아보았음. 그 사이 훈은 사라지고 없었음. 한숨을 쉬며 B를 내려다봤음.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음. 


“알겠으니까.. 그리고 나 지금 너무 피곤하니까.. 내일 보자.” 

“앗 그럼 선배님, 제가 밤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B가 그제야 옷을 놓으며 웃었음. 단은 건성으로 인사를 하며 건물 입구에 카드키를 찍었음. 현관문를 닫으며 뒤를 돌아보자 B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손을 흔들고 있었음. 


기분이 묘했음. 아무리 차갑게 대해도 끝까지 제게 호감을 놓지 않는 아이. 평소 타인의 감정에 둔한 단이지만, B가 제게 표시하는 호감의 종류가 무엇인지 이제 대충 알 것 같았음. 사실 이제야 알아챘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단은 제 집이 아닌 훈의 집으로 향했음.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음. 최근 흔한 일이었음. 목소리를 낮춰 이름을 불렀음. 역시 대답이 없음. 단은 한숨을 쉬며 최후의 통첩을 했음. 


“비번 안다. 지금 안 열면 내 손으로 연다.” 


5초 후. 문이 열렸음. 이틀만에 보는 훈의 얼굴이 파리했음. 아픈가 싶을 정도. 단의 손이 훈의 이마로 향했음. 열을 재려는 의도였는데 매섭게 쳐내는 손에 의해 밀려났음. 


“왜 또 이러는데.” 

“내가 원래 그렇잖아. 모르고 만났어?” 

“박지훈. 쫌..” 

“좀, 뭐?” 

“하...” 


현관에 서서 대치한 상태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음. 


“뭔지는 몰라도 내가 잘못했다. 화풀어라.” 

“뭔진 몰라도..?” 

“...” 

“그냥 대충 사과할테니 기분 풀라는 말 같은데 그건.” 


훈은 어제 받은 톡을 잊을 수가 없었음. 답지않게 용기 내서 보낸 화해의 시도에 차갑게 돌아왔던 메시지. 그래놓고 지금 와서 대충 해결하려는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음. 그러나 B가 훈의 메시지를 지웠다는 걸 알 리가 없는 단의 입장에서는 현재 훈의 언행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와 달리 정말로 싸늘해졌음. 


“박지훈.” 

“...” 

“그러는 니는, 대충이라도 사과를 먼저 해본 적이 있나.” 

“뭐?” 

“니 잘못도 맨날 내가 먼저 사과하고. 기분 좋아지면 대충 안기면서 때우고. 말로 니 잘못을 인정해본 적이 있긴 하냐고.” 

“...대충 안기면서..?” 


훈의 손이 파르르 떨렸음.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거니까 처음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 몇 개월이나 됐는데. 여전히 일방적이잖아.” 

“...” 

“나도 가끔 불안하다. 니가 진짜 날 좋아하긴 하는지.”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선 단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음. 


당연히 좋아하지. 미쳤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이렇게 붙어먹어? - 많은 솔직한 말들이 훈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음. 그러나 실제로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럼 좋아한다는 표현 많이 하는 사람을 만나든가.” 

“...” 

“...” 


단이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현관에 쿵. 가볍게 찧었음. 


“훈아.” 

“...” 

“우리. 시간을 좀 가지자. 당분간.” 

“...” 


단은 그 말을 끝으로 나가버렸음. 문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훈은 끝까지 쳐다보았음. 아래로 떨어지던 시선이 깁스에 이르렀을 때 뒤늦은 후회를 했음. 저것부터.. 물어봤어야 했음. 어찌된 일인지, 괜찮은 건지, 아까 건물 입구부터 궁금했는데. 결국은 물어보지도 못했음. 



*



애초에 단대도 다르고 활동범위가 다른 둘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음. 게다가 시험기간. 둘다 정신없이 레포트와 전공 시험에 치이다보니 생각보다 무던하고 빠르게 시간이 흘렀음. 서로가 없이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그 사이 우주대 커뮤에는 질문글 몇 개가 올라왔음. 공대 남신 ㄱㄷㄴㅇ님 요즘 같이 다니는 사람 누구냐고. 도서관에서 ㄱㄷㄴㅇ 자리에 음료수 올려놨더니 그분이 홀랑 까먹었다며. 같은 과 후배냐고 묻는 질문에 누군가가 답했음. 전혀 관련 없는 과고, 아마 동아리가 같아서 친한 걸 거라고. 댓글로 그런 게 있었음. 한동안 ㅂㅈㅎ이랑 같이 다녀서 눈호강했는데, 요즘은 왜 같이 안 다닐까요. 가끔은 전혀 관련 없는 타인의 눈이, 가장 정확한 법이었음. 이처럼. 



트위터 @tejava_mil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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