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코네꼬입니다. <떼인 돈 받아 드립니다>는 3년 전에 이북으로 출간된 적이 있지만, 설정을 오메가버스로 바꾸어 다시 선보이는 글입니다. 재미있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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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음을 내뱉을 때마다 거울에 김이 서렸다가 없어지곤 했다. 거울에 서린 김이 없어지면 다시 자신의 한껏 달아오른 얼굴이 나타나곤 했다. 가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지만 시선을 피할 때마다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존재감이 너무 적나라해 뭐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흉포한 몸짓에 가진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옛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눈치 빠른 그가 아니나 다를까 낮지만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생각할 여유가 있나 봐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날, 그 건물 앞에만 서 있지 않았다면. 아니 그 죽일 놈의 호기심 때문에 안으로 들어서지만 않았어도. 아니다. 애초에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게 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 것이었다!

 

2년 전.

 

가진은 건물 입구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진짜 이 입구 안으로 들어서도 되는 걸까? 한 3초? 그 정도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고민을 한 거냐고 하겠지만 그 짧은 몇 초가 가진에게는 억겁의 시간 같았다.

 

“후유.”

 

가진은 또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한 2초 정도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결국 가진은 가슴을 쭉 펴고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어깨가 굽으려고 해서 쪼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가진은 며칠 전 무작정 자신이 재학 중인 대학교 근처를 지나가다 나무에 걸린, 주변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떼인 돈 받아 드립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 문구 하나만 보고 이 건물 안에 들어선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현수막을 뽑은 걸까? 그런 제작처가 있다고? 의심에 의심을 더할 수밖에 없는 현수막에 비해서 들어선 건물은 이질적으로 번쩍번쩍했다. 가진은 건물의 위용에 움츠러들려고 하는 자신을 다독이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거기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몇 층으로 가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거다. 이렇게 큰 건물이라면 1층에 경비 아저씨라도 있기 마련인데 아무도 없었다. 아니면 어딘가에 층별 안내 표지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가진이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손에서 드르륵 진동이 울렸다. 손에 쥔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하나 찍혀 있었다.

 

<고객님, 15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누가 날 보고 있는 거야?

 

가진은 등골을 따라 소름이 쫙 돋았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가진은 그 자리에서 똥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미친,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줄 알 테지만, 그래, 가진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 ‘떼인 돈 받아 드립니다’라는 현수막에는 핸드폰 번호만 있었을 뿐 회사의 상호나 담당자의 이름 같은 건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진은 반은 진심, 반은 농담식으로 ‘정말 떼인 돈 받아 주시나요?’라고 문자를 보내고도 몇 초 동안 손톱을 질겅질겅 씹으며 설마 싶어 흐린 눈을 하고 액정을 바라봤다. 그때는 몰랐지. 정말 자기가 이곳에 오리라고는.

 

가진은 뱅글뱅글 제자리를 돌던 자신이 이내 부끄러워져서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여전히 물음표가 머리 위로 둥둥 떠다녔지만 금세 잊어버린 것은 가진의 단순한 성격 탓이었다.

 

엘리베이터가 가진을 집어삼킬 듯이 쩍 입을 벌렸을 때 가진은 잠깐 고민했다. 진짜 타도 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냥 돈을 포기하고 집으로 갈까? 그러다가 ‘그래, 사나이 민가진,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된다.’라는 심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가진은 후에 생각했다. ‘그때 그 엘리베이터가 정말 지옥의 문같이 생기기는 했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라는 생각을 한 제 머리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다고 말이다. 이렇게 남은 평생 누군가를 위해 무나 썰며 집에서 김치나 담그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15층 버튼을 꾹 누른 가진이 엘리베이터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최근에 예쁘게 색을 입힌 노란빛과 민트색이 적절하게 섞인 머리칼을 지닌, 수없이 탈색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지닌 앳된 남자가 서 있었다.

 

“아, 고놈 참 잘생겼어.”

 

미친놈. 누가 봤으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가진은 예쁘장하게 생겼다. 우성 오메가인 가진은 가끔 머리가 꽃밭에 가 있어서 그렇지 외모는 지나가던 사람들 누구나 한 번쯤은 다시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다.

 

가진은 거울 속 제 모습에 빠져 히힛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심호흡을 후우 했다. 진짜 올라가도 되는 걸까? 정말 떼인 돈을 받을 수 있는 걸까?

 

‘15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울린 소리에 가진이 얼마나 놀랐는지 움찔해서 뒷걸음치고는 머쓱해져 괜히 주위를 살폈다. 이놈의 새가슴. 가끔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 차면 엉뚱한 짓을 많이 저지르지만 가진은 본래 겁 많은 똥강아지처럼 별것도 아닌 일에도 흠칫 놀라곤 했다.

 

가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길게 뻗은 복도를 살폈다.

 

“뭐가 이렇게 길어!”

 

가진이 혼잣말을 했다.

 

그때 저쪽 끝 사무실 하나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가진의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복도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가진에게는 그 빛이 마치 자신을 구해 줄 것처럼 보였다. 가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발걸음을 옮겼다.

 

가진이 문 앞에 서서 열려 있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이미 열린 문이지만 뭔가 예의를 갖추어야 할 것 같았다. 가진은 그때를 생각한다. 그건 창문 너머의 햇빛이 아닌 그의 후광이었다고. 이 망할 놈의 얼빠.

 

“들어오세요.”

 

가진이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낮은 목소리가 열린 문을 빠져나와 가진의 귓가에 꽂혔다.

 

“아, 아.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가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건물을 올려다보며 느꼈던 것만큼 사무실 안도 널찍했다. 사무실 안에 또 방이 있었는데 딱 봐도 좋아 보이는 책상에 한 남자가 기대어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가진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봤다. 사무실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구조였다. 아마도 안쪽 방에 있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고, 지금 자신의 등을 노린 사람이 비서쯤 되겠지 싶었다. 다만 비서쯤 되어 보이는 사람의 인상이 굉장히 험악한 게 드라마와 다른 점이랄까?

 

가진이 들어가길 망설이자 이번에는 안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래, 바로 이 목소리지! 가진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가진과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웃었다. 아, 뭐야, 사람 가슴 뛰게.

 

“앉으세요.”

 

그가 고급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가진은 말 잘 듣는 똥강아지처럼 조심스레 소파에 앉았다. 푹신해. 이대로 잤으면 좋겠다. 찬란한 햇빛이 커다란 유리를 통해 들어오고 있어서 낮잠 자기에 딱 좋아 보였다.

 

“여기 손님 우유 한 잔 드려요.”

“아! 저, 저는 커피로…….”

“그럼 여기 손님 주스 한 잔 드려요.”

 

아니, 커피를 달라니까 왜 자기 마음대로 우유에, 주스를 주래! 가진은 조금 불만이었지만 왠지 거기에서 커피를 달라고 한 번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가진이 조금 입술을 내밀고 여기저기를 눈으로 훑었다. 물론 자기가 지금 그런 표정인 줄은 당연히 몰랐다.

 

조금 뒤에 가진 앞에 딸기 주스가 놓였다. 가진은 살짝 고개를 숙여 주스를 가져다준, 아까 등 뒤에서 자신을 노렸던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주스를 가져온 남자는 가진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 비해서 덩치도 컸고 얼굴도 굳은 표정이었다. 좀이 아니라 아주 많이 무서웠다. 그 남자가 나가지 않고 옆에 서 있어서 가진은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K신용정보, 실장 김세학입니다.”

 

앞에 앉은 남자가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옆에 선 남자에게 눈짓하자 남자는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근데요…… 진짜 떼인 돈 받아 주시나요?”

 

돌직구였다. 가진은 다짜고짜 사정 설명도 없이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럼요. 근데 죄송하지만 미성년자는 고객으로 받고 있지 않는데 이걸 어쩌죠?”

 

자신의 이름을 김세학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조차도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굉장히 근사해 보였다. 너무 잘생겼잖아! 가진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저 미성년자 아니에요!”

 

급한 마음에 손사래도 쳤다.

 

“저 이래 봬도 스물넷이에요!”

“아, 죄송합니다. 무척 동안이시네요, 고객님. 시간은 많으니 그럼 주스 한 잔 드시면서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겠어요?”

 

언제 고객으로 탈바꿈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미성년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으니 가진은 그것으로 마음이 한결 놓였다.

 

가진이 앞에 놓인 주스를 들고 꼴깍꼴깍 마셨다. 그러다가 컵을 든 채로 힐긋 남자를 봤다. 남자는 긴 다리를 꼬고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가진의 마음속 저편에서 올라온 진심을 담은 탄성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뻔했다. 가진은 얼른 자신의 입을 주스 잔으로 막았다.

 

가진은 살면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값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은 남자는 셔츠가 팽팽할 정도로 어깨가 넓었다. 하지만 슬림한 체격인지 전혀 덩치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도드라진 눈썹 뼈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살짝 찌푸려진 미간. 어른 남자는 이런 걸까? 향수를 뿌린 건지 그에게 나는 향도 너무 좋았다. 알파일까? 당연하겠지?

 

가진이 조금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가진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조금 들썩였다. 하지만 이내 배시시 웃었다. 남자의 잘생긴 눈썹이 살짝 움직이는 듯했다.

 

가진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게요, 등록금 때문에 그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아, 제가 미술 전공이라서요. 근데 그 회사가 사정이 안 좋아졌다고 하면서 지금 6개월째 돈을 안 주고 있어요. 돈은 500만 원 정도인데요, 진짜 세 달 반 동안 밤새우면서 그린 거거든요. 전화할 때마다 말로만 다음 달에 꼭 주겠다고 그러고는 지금까지 안 줘요. 계약서를 쓰긴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어요. 제가 왜 돈 안 주시냐고 따지려고 그러면 회사가 어렵다, 안 주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 그렇게 말해요. 아주 그냥 배 째라는 식이에요.”

“그럼, 배를 째면 되겠네요.”

“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가진은 순간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남자는 싱긋 웃으면서 계속 얘기하라는 식으로 눈짓했다. 검은색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다. 뭔가 사람을 홀리게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진은 마치 이때다 싶어서 그동안 마음에 쌓인 얘기를 주절주절 말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치 아빠에게 있었던 일을 다 일러바치는 듯한 아이처럼 칭얼칭얼 찡찡찡 모드가 되어 버렸다. 가진은 다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왠지 창피한 부분도 없지 않아서 민망한 듯 웃었다. 남자의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럼, 고객님, 저희가 책임지고 그 돈 받아 드리겠습니다.”

 

가진은 남자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그러면 그동안 거의 반년 동안 받지 못했던 자신은 뭐냔 말이다.

 

“저, 근데요. 저기…….”

 

가진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망설였다.

 

“네, 고객님, 말씀하세요.”

 

남자는 인내심이 있는지 가진의 말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저, 돈 받고 나면 수수료라든가 그런 건 얼마…….”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가진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곳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남자만 멀쩡할 뿐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 비록 자신이 이곳에 자석에 이끌리듯 들어섰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채업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등록금 때문에 돈이 필요한 가진은 이 줄이 동아줄인지 썩은 줄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잡긴 잡아야 했다.

 

“일정액의 수수료가 있지만 많은 액수는 아니고 저희가 받은 돈의 몇 프로 정도일 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계약서에 사인하고 가시겠습니까?”

 

남자는 염려하지 말라는 듯 웃어 주었다. 가진은 남자의 얼굴을 홀린 듯 쳐다보며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의 얼빠, 라고 가진은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이때는 가진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아, 네. 그럴게요. 꼭 제 돈 좀 받아 주세요.”

“네,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가진은 그가 보는 앞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그가 서류 한쪽에 사인을 할 때 펜을 잡은 그 손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길고 하얀 손가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사인한 서류 한 부를 챙겨서 봉투에 넣어서 가진의 손에 쥐여 준 뒤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도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가 내민 손을 가진이 얼떨결에 잡았다. 가진은 자신의 손을 폭 감싸는 그 손을 보며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 손이 자신을 옭아맬 것이라고는 그때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BL 작가 코네꼬입니다. <둘만 모르는 연애> <입사보다 힘든 퇴사> <만인의 사랑둥이를 홀라당> <그대가 내 세상입니다> <어린 양 잡아먹기> <색공> 등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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