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침대 이불 안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짜증이 묻어 나오는 손으로 끈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Sally, Why didn't you wake me up ? ’ 허공에 말을 뱉은 남자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쩝 입맛을 다셨다. ‘ 아, 여기 한국이지 ’ 아무도 없는 넓은 제 방 안을 둘러보다 멋쩍은지 머리를 긁적이며 씻으려는 듯 남자는 화장실로 향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는 옷 태마저 남다르다며 거울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도경수는 안 팔아요? ( 얼마면 돼 )

W.수미




이른 아침 남자가 혼자 자고 깬 방 안도 아파트 한 채 크기는 될 법했는데, 3대가 모인 아침식사 자리의 다이닝 룸은 크기가 훨씬 더 어마어마했다. 서로 다른 듯 비슷한 눈매를 가진 3대는 똑같은 표정으로 하나 같이 국그릇에 숟가락을 넣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풍경이라 생소했던지 남자가 풉 - 하고 소리 내 웃었다.



“ 변 백현 , 밥상 앞에서 무슨 예의야 그게 ”


남자의 형 백범이 말했고 ,


“ 아버님 죄송합니다. 아직 철이 없어서 ”


남자의 아버지가 말했으며 ,


“ 허허, 우리 막내가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의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아버지의 반응에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족의 아침식사는 이어졌다. 남자의 이름은 변 백현. 넓은 정원과 넓은 거실, 남들은 그 흔한 자기 집 하나 갖기 힘들다는데 백현은 그 집보다 더 비싼 차들을 줄줄이 세 대나 갖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 차종부터 시작해 백현이 갖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앞에 대기시켜 주는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런 백현도 집안의 가풍 상 세 대 이상의 차는 소유 할 수 없으니 새 차를 갖고 싶으면 가지고 있는 차를 정리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제 기준의 드림카를 딱 세 대만 선택했다. 


백현의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 일찍이 서구식 문화에 눈을 떠 황금의 땅을 개척 하겠다 입버릇처럼 말했고, 무일푼으로 넘어간 외국에서 행운의 여신처럼 백현의 할머니를 만난 뒤 시작한 석유 사업이 대박의 대박을 쳐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대열에 합류했다. 더군다나 석유 같은 경우 백현의 할아버지가 이끌어 오기 전 까지 다른 나라에 부탁 또 부탁하여 사다 쓰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폭리를 취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돈을 내줘야 하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백현의 할아버지가 성공시킨 사업과 함께 도현그룹은 석유계의 문익점으로 청렴한 기업 이미지와 함께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그런 집에서 태어난 백현은 형인 백범이 있었기에 딱히 사업에 관해 후계자 문제 등 유산에 욕심내는 법이 없었고, 형제의 우애는 매우 좋았으며 막내로써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형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티 없이 밝았다.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생각보다 사업 수완이 좋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어쩌다 시작한 그림은 백현을 팝 아트 계의 아이돌로 올려놨으며 군대를 다녀오고 제 용돈은 제가 벌어야겠다며 몇 군데 카페도 차렸다. 간혹 본점에만 등장해 두 팔을 걷고 샷을 뽑고 있노라면 주변의 여성 고객들이 죄다 백현의 카페에 줄을 설 지경이었으니 백현은 아예 돈을 쓸어 담는 중이었다. 


요즘에서야 한국에서 팝아트가 주목받기 시작하고 많이 알려졌지만 그 전까지는 조금 생소하고 파격적인 장르라 전시회나 연수 등은 외국에서 하고 받던 백현이기에 얼마 전까지도 외국에서 체류 중이었는데 , 이번에 카페도 분점을 몇 개나 더 차리게 되었고 , 형 백범이 이참에 카페와 팝 아트 갤러리를 접목 시켜 조금 더 확장하여 도현그룹과 계열 계약을 맺어보지 않겠냐는 말에 주저 없이 콜을 외쳐 한국으로 들어 온 백현이었다. 


본디 한국에는 길게 있어 봐야 한 달이 전부였는데, 이번엔 꽤나 길게 체류 할 것 같다고 백현은 밥을 꼭꼭 씹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베시시 웃었다. 그런 백현에 형 백범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무슨 좋은 일 있냐고 입을 헤- 벌린 백현에게 물었다. 백현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백범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 형 , 나 갖고 싶은 게 생긴 것 같아. 아니 생겼어. ”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할 때마다 아무 의미 없이 나 이거, 형 나 저거. 할 줄만 알던 백현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말하자 백범이 신기하고 대견한 듯 백현의 머리를 헝클었다. 멋에 살고 멋에 죽는 백현이지만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백범이 머리를 헝클어도 가만 앉아 몽실몽실 간지러운 생각을 떠올리기 바빴다. 그 시작은 얼마 전 백현의 카페 본점에 들어온 신입 알바생 도경수 때문이었다.



*



백현의 카페에 신입으로 들어 온 경수는 굴지의 부자라는 이 카페의 사장 백현과는 정 반대의 환경을 가진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서양의 팝 아트를 전공한 백현과 달리 경수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먹을 가는 느낌과 진중함이 좋았고 잘 세운 붓 끝으로 선을 하나하나 그려나갈 때의 집중력이 좋았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고 남들 사는 만큼 유복하게 자란 경수이건만 제 고집대로 동양화를 계속 하자니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돈이 깨졌다. 고등학교 때 까진 동양화는 취미로 그렸으며 자신이 인문대를 나와 조용히 교편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던 부모님에게 드린 충격이 경수는 죄송했다. 부모님은 제 대학 학비를 항상 내주셨지만 경수는 모두 조용히 통장에 저금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노력해서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다. 



경수는 생각보다 재능이 있었고, 일찍이 알아 본 교수는 경수가 졸업하기를 기다렸다. 교수는 동양화 쪽으로 알아주는 인물이었는데, 그런 교수의 마음에 꼭 든 경수를 제 화실에 데려다 놓고 키워 줄 생각이었다. 그런 경수를 보며 매사 갖고 싶은 것도 솔직하게 말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 병이 나곤 하는 경수의 성격을 아는 부모님은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고 부모의 마음이란 이왕 하는 것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아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지원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경수는 한사코 거절했다. 동양화라곤 학원 밖에 다니지 않았던 경수는 대학 진학 후 여러 비싼 재료들에 손 벌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죄송한 마음에 재료비라도 제 손으로 벌자 싶어 알바를 시작했다.


 

“ 어? 경수씨 일찍 왔네요? ”

“ 네에, 사장님.. 사장님도 일찍 나오셨네요.. ”

“ 딱딱하게 사장님이 뭐에요, 백현씨라고 부르라니까요? 어려우면 백현 형도 좋아요 난 ”



‘ 어떻게 그래요오.. ’ 작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경수가 울먹이듯 백현에게 말했다. 제 앞에서 어여쁘게 웃으며 서 있는 남자는 제가 다니는 카페의 사장이었다. 제게 인수인계를 해주며 나간 앞 타임의 알바 형은 분명 사장님은 가게에 자주 없을 거라고 했는데, 며칠은 정말 가게에서 형체도 찾아 볼 수 없더니 경수를 처음 마주친 날부터 주구 장창 카페에 출근하고 있었다. 경수는 항상 제 앞에서 티 없이 밝게 웃는 백현의 깔끔한 인상이 좋았지만 백현이 출근하는 뒤로 몰려드는 손님에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알바를 경험하는 알바 신생아의 일상은 너무도 피곤해 제 앞에서 웃는 백현의 이마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 도경수씨 ’

‘ 예? ’

‘ 얼맙니까? ’

‘ 무슨.. ’

‘ 도경수씨는 안 팔아요? ’



푸흐 - 쇼케이스에서 케이크를 꺼내다 말고 경수가 살풋 웃었다. 백현과 마주친 지 삼일 쯤 되었을 때가 생각이 난 것이었다. 잠시 손님이 끊겨 한가롭던 시간 백현이 경수의 뒤에 서서 자신을 물건취급하며 내 뱉은 말에 경수가 쌕쌕 화를 내며 백현의 정강이를 찼었다. 그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며 백현은 잔뜩 울상인 얼굴로 그런 게 아니라며 ‘ 아, 경수씨가 너무 예쁘잖아요. 너무 제 취향이에요. 경수씨는 저 싫은가요? ’ 하며 경수에게 싹싹 빌었다. 물론 빈 것도 잠시 다시금 뻔뻔하게 경수에게 들이대는 중이었지만.



“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혼자 웃어요? ”

“ 아.. 아니에요 ”

“ 서운한데, 나 소외감 느끼게 할 거에요? ”

“ 아, 저 그게 다음.. 주에 친구들 하고 놀이공원에 놀러가서요 ,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



차마 사장님이 저한테 얼마냐고 물었던 날 생각중이요 라고 할 수 없었던 경수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친구들과의 약속을 실토했다. 경수는 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후폭풍을 불러올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백현의 눈동자가 반짝 반짝 빛이 났고 그때부터 경수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겪기 시작했다. 가령 ,



*



“ 야, 경수야 우리 오늘 날짜를 잘 잡은 거냐? ”

“ 그러게, 도경수가 오랜만에 우리랑 놀아주니까 놀이공원이 사람이 없네 ”

“ 오늘 쉬는 날 인가? ”

“ 아냐 저런 거 다 움직여 운행 하는데? 뭐 어때. 놀자! ”

 


경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친구들이 하는 말만 듣고 있었다. 아침부터 경수는 괜히 기분이 묘했는데 그도 그럴게 백현이 뜬금없이 이른 아침 [ 편하게 재미있게 놀다 와요 ♥ - 사장님 ] 라며 경수에게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알바를 빼줘서 그렇게 얘기하는 건가 , 하며 우습게 넘긴 이 메시지 한 줄에 ‘ 놀이공원을 널 위해 다 빌렸어. 재미있게 놀아 ’ 라는 뜻이 담겨있었다니. 찬열과 종대가 빨리 가자며 경수를 툭툭 쳐도 경수는 미동도 없었다. 도대체 이 인간은 돈이 얼마나 넘쳐 나서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려? 알면 알수록 더 어려워지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에게 알바 하는 카페 사장이 나 놀라고 빌려줬어 라고 할 수는 없기에 경수는 입을 꾹 다물고 능청스레 그러게에 사람 없어서 좋다. 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어쨌든 백현 덕에 사람에 치이지 않고 정말 잘 놀았으니 경수는 백현에게 짤막한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 고마워요, 어.. 백현 사장님...형! ] 

“ 아, 심장이 아파. 의사를 불러야겠어. ”



경수의 답장을 받은 백현이 제 가슴을 움켜쥐고 나 죽는 척을 하자 백현의 앞에서 버블티를 마시던 세훈이 빨대를 씹으며 한심하다는 듯 백현을 쳐다보았다. ‘ 어디 가서 나 안다고 하지 마라. ’ 이에 백현이 발끈하며 세훈에게 냅킨 다발을 던졌다. 


경수는 한 번이면 되겠지 한낱 알바생한테 돈을 그만큼 썼으면 .. 하고 생각했지만 경기도 오산이었다. 형 소리에 불붙은 백현은 경수에게 언제 한 번 더 형 소리를 들어보나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어떻게 감동을 주어야 이 세상에서 우주 최고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낸 끝에 떠오른 생각에 백현이 두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 아, 벚꽃 진짜 예쁘다. ’

‘ 경수씨 벚꽃 좋아해요? ’

‘ 네, 예쁘잖아요. 매화도 예쁘지만 벚꽃도 좋아요 ’ 



백현의 기억 속 언젠가 경수가 사르르 녹는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던 벚꽃이 기억난 참이었다. 해가 쨍쨍 찌는 여름이었지만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 한 없이 긍정적인 마인드와 함께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백현이었다.



*



“ 헐, 경수야 저거 뭐냐 ”

“ 뭔데? 우와.. 벚꽃이다 .. 예쁘다 ”

“ 도경수 너는 벚꽃만 보면 환장하지? 이상한 것부터 생각해야지. 지금이 봄이냐 ? 

  그리고 우리 학교에 언제 벚꽃 나무가 있었어. 갑자기 뭐지? “



분홍 팝콘 같은 벚꽃에 정신이 팔린 경수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찬열을 보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설마.. 아니겠... 우연일.. 말을 매듭짓지도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는데 생각하기 무섭게 제 핸드폰으로 백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찬열이 듣지 못 하게 뒤 돌아서 조용히 전화를 받은 경수는 결국 빼액 하니 소리치고 말았다.



“ 여보세요 ”

- 아 , 경수씨 선물 잘 받았어요? ]

“ 무슨 선물이요? ”

- 벚꽃 ! 예쁘다고 했었잖아요, 그거 구해오느라 힘들었어요 예쁘죠? ]

“ 아, 네 예ㅃ .. 아니 이게 아니라 ”

- 응? 왜요? ]

“ 사장님,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요 ”

- 응 말해요. 그리고 형이라고 좀 해달라니까 그러네 ]

“ 이 세상에서! 쓸데없이 돈지랄 하는 새끼가 제일 싫어요 사장 형아새끼야!!!! ” 



백현이 뭐라 답도 하기 전에 새빨개진 얼굴로 잔뜩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은 경수는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찬열을 피해 황급히 캠퍼스를 벗어났다. 이게 다 그 망할 사장 때문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돈을 저렇게 흥청망청 망나니처럼 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니. 경수는 편견이 제일 나쁘다는 생각을 가진 아이였지만 그 중 예외는 있었다. 돈의 소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펑펑 쓰고 다니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말 것. 패가망신의 지름길. 저를 위해 놀이공원을 빌리고 , 계절에 피지 않는 벚꽃을 어렵게 구해 사들이고. 그 노력은 가상했으나 그로 들었을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은 경수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한 없이 가까웠다가 손 뻗으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런 사람. 경수는 축 쳐진 어깨로 터덜터덜 캠퍼스를 걸었다.


그리고 백현은 경수의 말대로 정말 모를 사람이었다. 

도경수의 세상에서 변백현은 정말 모를 사람이었다. 절대 이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사람.



“ 잠시 신세 좀 질게요 경수씨! ”

“ 네, 네에? ”



꼭두새벽 제 자취방 초인종을 게임 하듯 딩동딩동 눌러대는 통에 부스스 잠에서 깬 경수는 짜증이 나려하는 것을 참고 알바로 배운 영업용 미소 스킬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다짜고짜 제 몸 크기만 한 캐리어를 좁은 집 안으로 들이밀며 사장 형 새끼라는 백현이 경수의 눈앞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경수의 영혼이 리스당한 채 멍청히 서 있자 백현이 되려 집주인인양 ‘ 뭐해요 어서 들어와요. ’ 하며 경수를 이끌었다. 



“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 사장님? ”

“ 돈 지랄 좀 안 해보려구요. 경수씨랑 동등한 눈높이로 살아볼까 해서 도움 좀 얻으러 왔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수씨한테 미움 받긴 슬프단 말이에요. ”

“ 뭐요? ”

“ 도경수씨,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생각보다 손쉽게 가졌기 때문에 아직 잘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다들 관심 주는 것들은 내가 가진 것 중에 화려한 것들, 비싼 장난감들 이었어요 . 그 관심 속에 사는 게 익숙해져서 관심이 사라지면 다시 잡는 방법을 이렇게 배웠어요. 나 바보 같죠? ”



*



꽤나 진중한 얘기를 하던 와중에도 금세 경수의 옆에 딱 붙어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모양새로 경수의 손을 지분거리던 백현이 결국 경수에게 꿀밤을 한 대 맞은 뒤에야 잡은 경수의 손을 놓았다. 경수가 거절하지 못하게 약간의 과장됨은 있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백현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세훈을 제외한 진정한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그때 생긴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그런 백현이 경수를 만나 곁에 있고 싶었으니 지극정성으로 경수에게 좋은 것들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실상 백현의 사고나 세계에선 경수에게 베푼 것은 빌게이츠가 십 억원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칠만 천원 어치의 휴가비를 지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는데, 경수가 화를 내다니. 



‘ 형 , 다른 환경을 이해하려면 가장 빠른 방법이 뭐야? ’

‘ 그 환경을 직접 경험 해 보는 거지. 너 서양 문화도 직접 체험하고 이해했잖아? 집 안에서 신발 신고 다니는 것 이상하다며 , 요즘 너 완전 자연스러운 거 알지? 아줌마 거실 청소 힘들어 임마. ’

‘ 아 집에서만 신는 신발이야. 깨끗해! ’



형한테 물어 봤을 때는 직접 경험하는 게 최고라고 했는데. 왜 안 통하는 것 같지. 우리 경수 표정 무서운데, 나한테 또 욕하면 어떡하지. 경수의 집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형과의 대화를 생각하던 백현의 머리위로 물음표가 그려졌다. 이미 백현의 머릿속에서 ‘ 우리 경수 ’ 가 된 집 주인 경수는 혼자서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백현에 제가 때린 꿀밤 탓인가 싶어 백현의 앞으로 몇 번이고 손을 휘휘 저었다. 창피한데. 다른 것 보다 창피하다는 감정과 숨고 싶다는 기분이 경수의 등을 간질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 백, 수 천 만원을 물 쓰듯 소비하는 백현은 분명 집도 어마무시하게 잘 살 텐데. 아무리 청소를 해도 좋지 않은 환경과 습기 탓에 스멀스멀 올라 온 천장 구석의 곰팡이, 나눠진 칸 없이 오밀조밀한 공간 너머로 부엌과 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부자리, 그리고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는 뒤통수가 볼록한 CPU 컴퓨터. 경수는 두리번 까지도 아닌 한 번에 쓱 하니 견적이 나오는 제 꼬질 하고 작은 자취방이 백현의 집 화장실보다 작을 거라고 장담했다.



“ 와 경수씨 근데 집 되게 아담해요 ”

“ 네, 많이 작죠, 작아요. 그러니까 돌아.. ”

“ 집도 경수씨처럼 귀엽다. 사람 사는 것 같고 좋아요. 정겹다 ”



백현이 혹여 제 집에 대해 평가라도 내려놓을 까 미리 걱정한 경수가 하려던 말을 끝매듭 짓지 못했다. 백현은 도리어 눈을 반짝이며 경수를 보고 환히 웃었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다. 왜 카페에 여자 손님이 그렇게 많았는지 알만도 하다. 경수가 생각했다. 사실 백현이 다른 파트 알바생 들에게 함구 하고 있는 부분이긴 했지만 백현이 없을 때도 손님은 많았고, 백현이 있을 때면 조금 더 느는 것뿐이었다. 새로 온 계란 닮은 알바생이 그렇게 잘생겼다고 소문이 나서 특히 사장과 있을 때는 투닥 거리기까지 한다고 하니 여자 손님들에게 눈요기 거리가 아니겠는가. 혹여 제가 아닌 카페의 손님에게 경수를 빼앗길까 싶어 너 때문에도 손님이 이렇게 많다. 라는 사실을 절대! 경수가 알 수 없게 하려고 백현은 정말 죽을힘을 다 해 노력 중 이었다. 도경수야 너는 알랑가몰라?



*



삑- 삑 -

“ 저게 뭐에요? 다들 저기다 카드를 가져다 대네? ”

“ 버스 타려면 있어야 해요. 교통카드요. 요즘 신용카드는 다 되긴 하는데 - ”

“ 그냥 카드를 가져다 대면 저렇게 소리가 나요? ”

“ 교통카드라고 따로 전용 카드나 , 신용카드에 교통카드 기능을 부여하면 할 수 있어요. 오늘 이거 타고 카페 출근하실 거잖아요 ”



기어코 경수의 집에서 짐을 풀고 하룻밤을 보낸 백현은 좁디좁은 욕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양치도 하고 세수도 하며 아침을 준비했다. 경수와 함께 카페 출근길을 나서며 경수의 자취방 앞에 세워 둔 제 차를 사용할까 했지만 이참에 제가 검소한 면도 있다는 것을 경수에게 어필하고 싶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급할 때 택시는 두어 번 타 본 적 있지만 버스는 처음인 백현은 저와 경수가 탈 버스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들이 타는 버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카드를 가져다 대면 삑 하고 소리가 난단 말이지. 아아. 카드 많지. ‘ 사장.... 어.. 형, 저거 타야 가요 저거 ’ 그래도 하루 살 부대끼며 잤다고 ( 졸린 경수가 잠에 들려고만 하면 형이라고 좀 해줘, 형이라고 불러줘, 형아 해봐. 라며 잠을 깨우는 통에 울며 겨자 먹기로 호칭 정리에 응함 ) 저를 형이라 불러주는 경수의 부름에 백현이 결심한 듯한 표정을 비장하게 짓고 제 지갑에서 카드를 한 장 꺼냈다. 


삑 -

“ 아? 우와, 봤어요? 천 백원? ”



제 카드를 가져다 대자 삑 하는 소리가 나니 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경수를 돌아 본 백현이 칭찬을 바라는 아이마냥 눈을 크게 떴다. 경수는 그런 백현이 신기하기도, 귀엽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해서 못 들은 척 살짝 얼굴을 돌렸다. 그마저도 흔들리는 버스를 적응하지 못한 백현이 제 손을 꾹 잡아오는 통에 경수가 놀라 다시 백현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카페에 가려면 족히 이십분은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간인지라 아직까지 출근하는 사람들로 버스는 점점 만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제 도착하지 딴생각 중이던 경수가 급하게 숨을 흡 하고 들이쉬었다. 제 눈 앞에 백현의 입술 끝과 가슴팍이 정면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사람들이 미는 통에 꼼짝 없이 제 손을 잡은 백현에게 안긴 채로 버스를 타야했던 경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차저차 카페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린 경수는 두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뺨을 짚어 내렸다. 



“ 나 왜 이러지. ”



‘ 빨리 와요 ’ 손짓하며 저를 부르는 백현의 얼굴을 좀처럼 마주보기가 부끄러워진 경수였다. 괜히 심장도 두근두근 뛰는 것 같았다. 아, 세상에서 정말 싫었는데. 경수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그래 내가 지금 사장님의 다른 모습을 많이 보아서 그게 새로워서 그런 걸 거야. 고작 하루가지고. 경수는 제 왼쪽 가슴에 손을 대어 힘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후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



하루 만에 끝이 날 줄 알았던 백현의 서민 놀이는 아니 경수 자취방 더부살이는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 중 삼일동안의 아침은 백현이 즐겨먹던 아메리칸 식으로 준비해 경수에게 대접했고, 삼일은 경수가 간단한 집 밥을 차렸다. 가짓수도 적고 산해진미도 아닌 그저 간단한 간장 계란밥이나 스팸 구이 등이 전부였는데도 백현은 엄지를 척척 들어가며 경수에게 맛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무래도 인스턴트 음식은 처음 먹어보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중이리라 경수는 생각했다. 이러다 건강한 입맛으로 사는 사람 입맛 버려놓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걱정도 했다. 그러던 중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찾아보던 백현이 무심코 경수에게 물었다.



“ 경수야 ”

“ 응 , 왜요? ”

“ 떡볶이가 뭐에요? ”



같이 살 맞대고 종일 지내온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는 호칭 변화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존댓말은 아직 둘 사이에 존재 했다. 팔을 쭉 뻗어 경수에게 핸드폰 화면을 내밀며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 같은 백현을 경수는 하마터면 끌어안을 뻔 했다. 도경수 미쳤어. 제 뺨을 찰싹 치며 백현이 내민 핸드폰을 받아든 경수는 화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백현이 보던 것은 유명하다는 떡볶이 맛집에 관한 블로그 글이었는데,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는 경수도 먹어보고 싶게끔 사진부터 글까지 하나하나 맛깔나기 그지없었다.



“ 떡이랑, 어묵이랑, 파랑, 양파랑, 고추장양념이랑 해서 떡을 보글보글 끓여서 먹는 거에요 ”

“ 나 먹어보고 싶어요. 우리 먹으러 갈래요? ”



기대에 찬 눈으로 쳐다보는 백현에게 차마 전 떡볶이 안 좋아해요 , 할 수 없었던 경수가 그러자고 하며 겉옷과 지갑을 챙기려고 일어났다. 이에 경수의 손을 제지한 백현이 ‘ 여기 가보고 싶은데 거리가 있으니까 오늘은 내 차 타요. 떡볶이는 비싼 거 아니니까 내가 사줄래. 그건 돈 지랄 아니죠 경수야? ’ 하며 방향을 잃은 경수의 손을 따뜻하게 꼭 쥐어 왔다. 



*



“ 형 ”

“ 응? 왜요? 맛없어? ”

“ 아니, 그거 말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

“ 뭐든 ”



능숙한 솜씨로 운전하는 백현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매콤한 떡볶이를 신기하듯 주저 없이 먹는 볼이 빵빵한 백현을 보다 경수가 여즉 궁금하던 것을 참지 못하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소소한 것 하나까지 아니 제 속옷 스타일 까지 전부 경수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백현은 신이나 대답해주려고 급하게 입 속의 떡을 삼켰다. 백현이 물 한 잔을 원샷하고 내려놓자마자 경수의 질문이 이어졌다.



“ 형, 그림 하잖아요. 카페에도 걸려있는 그림들 형이 그렸다고 .. ”

“ 아, 응 그거 그렸지. 어, 팝 아트 라고 하는 건데요 , 그렇게 어려운건 아니에요 뭐. ”

“ 전 지내면서 봤겠지만, 동양화 전공 하고 있단 말이에요. ”

“ 응, 경수 그림 봤지. 가볍지 않은 느낌인데 진중해보여서 마음이 차분해지던데요? 산수화도 직접 그린 거 에요? 맞나? 느낌이 경수 그림이었는데 ”

“ 아.. 네 그거.. 전에 과제로.. 참 그게 아니라 그럼 형은 있잖아요.. ”



어려운 말도 아닌데 손을 꼼지락 거리며 어렵게 말을 잇는 경수에게 백현이 손을 들어 경수의 어깨를 작게 다독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그림을 하고 있고, 경수의 관심과 카페를 돌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매니지먼트 실장인 셀리에게 부탁받은 작업을 전혀 손도 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백현 역시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 그.. 슬럼프라는게.. 오면.. 그러니까, 이게 과연 내 길이 맞는 건가 .. 그림을 계속 해도 되는 걸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떻게 극복 하세요? ’ 경수가 고개를 들어 백현을 바라보자 백현은 경수의 어깨를 더욱 더 따뜻하게 잡고 빙긋 웃어 줄 뿐이었다.



“ 이런 분위기에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경수야 너 지금 엄청 예뻐요. 형이랑 만나주면 알려줄게 그럼 안 될까요? ”

“ 아 형! ”

“ 경수야. 나라고 항상 그림이 잘 그려지는 건 아니지. 미묘하지만 느낌차이이기도 하고 너도 느껴봐서 알겠지만 새하얀 종이 앞에 앉아 있으면 뭐든 꼭 그려야 돼. 라는 생각이 의식을 지배할 때가 있어요. 뭔지 알지?"



눈을 마주쳐오며 백현이 말을 이어간다. 아주 차분하고 단호하게.

 근데 그런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사실 내가 좋아서, 즐기려고 하는 그림인데. 조급해하지 말고 그 슬럼프라는 느낌도 좀 즐겨보는게 어떨까 싶어서 하는 말이에요. 너무 잘 그려지면 또 그거대로 스트레스니까. 지금 이 기분도 느끼고 넘기면 자연히 극복하게 될 거야. 그림 뿐 아니라 뭐든 따로 자격이 주어지는 일들은 없어요. 정답이 정해진 길도 없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경수 너는 잘하고 있어요. 잘 해 왔잖아. 네 그림들을 보면 알 수 있어. 내가 너랑 다른 장르를 그리고 있다고 그림 보는 눈 없겠어요? 나도 장난으로 시작한 일은 아닌걸. 내 눈 믿어도 돼요. 믿어줘. 

고운 눈을 접어 방긋.



“ 정말, 잘하고 있는게 맞을까요? ”

“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나는 경수 네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나 슬럼프야. ”

“ 혀엉, 제가 혀..형을 왜 싫어해요 , 안 싫어해요 ”



‘ 정말? ’ 울상을 짓다 경수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백현에 놀란 경수가 급히 딸꾹질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애꿎은 떡만 포크로 열심히 찍히는 중이었다. 동기들이나 교수님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 안정감 있는 백현의 말을 경수는 곱씹고 또 곱씹었다. 정말 나는 조급해 하고 있었나. 응어리 졌던 경수의 마음이 실타래가 풀리듯 조금씩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 그럼 나 좋아해? 응? 그래요? 나는 경수 너 좋아요 무지 많이. ’ 제 마음에 너무도 솔직한 백현과 ‘ 아..모..몰라요! 다 먹었으면 빨리 집에 가요오 ’ 잘 익은 얼굴로 수줍게 대답하는 경수가 매콤 달콤한 떡볶이처럼 간지러운 하루를 보낸 날이었다. 



*



“ 도경수, 한창 방방 날아다니는 것 같더니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 ”

“ 응? 내가 뭘 ”

“ 아니 , 근래에 집도 꼬박꼬박 강의만 끝나면 달려가는 것 같더니 요즘은 안 그러는 것 같아서 ”

“ 아, 아냐 그런 거 ”



의심하듯 저를 흘기는 찬열을 애써 무시하며 카페로 향한 경수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얼마 전 백현이 사주고 싶다며 영문도 모르는 저를 이끌고 데려간 너무도 고급스럽던 레스토랑에서 백현이 또 한 번 경수에게 정말 진심으로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왔다. 여전히 제 마음도 잘 모르겠는 경수가 도망가기 급급해하자 백현은 그때만큼은 전혀 웃지 않았다. 미안해진 경수가 울상을 지었지만 크게 걱정 할 일 아니라는 듯 백현이 다시 웃어주었는데 , 그 다음 날 백현은 짐을 정리하고 경수의 집을 떠났다. ‘ 너무 오래 신세진 것 같아서 미안해요. 작품 일도 있고 본가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 곤히 자고 있어서 따로 인사 못해요. 미안. 아침 꼭 먹고 학교 가요. 나중에 카페에서 보자. ’ 정갈한 메모만 덜렁 남겨진 채였다. 



같이 지낸 지 고작 일주일 하고 조금 더 지났을 뿐 인데 , 괜히 텅 비어버린 집이 유난히 쓸쓸했다. 그런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경수는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제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카페의 손님도 좀 줄어든 느낌이었다. 작품 때문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매일같이 출근도장을 찍던 카페에도 백현은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타임의 알바생이 교대 전 사장님이 떴다며 급하게 핸드폰을 내밀며 보여 준 포털 사이트를 통해 백현과의 거리감을 한 번 더 실감했다. ‘ 팝아트계의 훈남 작가 백현 , 다음 작품의 주제는 ? ’ 사진 속 백현은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작품 때문에 이러는 거 맞는 거죠? 경수는 제 머리위의 물음표를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



예쁘게 놓여 진 계절과일들과 세련된 찻잔 속 진귀한 차들까지 한데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표정 하나까지 똑 닮은 삼대가 한데 모여 잠시 본가를 비웠던 백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침을 뚝 뗀 백현이 포크로 찍은 풋사과를 아삭 하니 베어 물었다. 우리 경수 보고 싶다. 나 왜 안 백수지. 다 때려치울까. 아냐 그건 좋지 못해. 우리 경수 먹여살려야해. 졸업하면 작업실을 차려줄까. 아 또 싫어하려나. 근데 나 벌써 몇 번이나 퇴짜 맞은 거지 우리 경수 데리고 살 수는 있을까. 백현의 표정이 내내 변했다. 



“ 우리 막내가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근래엔 집에만 있는구나. ”


백현의 할아버지가 말했고,


“ 이해하고 경험해본다던 일은 잘 해결 했어? ”


백현의 형 백범이 말했으며


“ 아들, 전화 오는 것 같은데 ”


진동이 울리는 백현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백현의 아버지가 말했다.



‘ 할아버지 죄송해요 하하 ’ 눈웃음을 슬쩍 지으며 든 핸드폰에 경수의 이름이 찍혀 백현이 행여 끊길세라 급히 받았다. 궁금한 표정으로 가족들 모두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통화 볼륨도 줄이지 못한 백현이 몹시 행복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아 들었는데 여보세요? 외치기 무섭게 경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 야아 이 나아쁜 새끼야아아 ]

“ 어?? 경수야, 술 마셨어요? ”

- 끄으래 마셔따 어쩔래애! 너 징차 나쁜 새끼야아 , 너능 형도 아니야 이 나쁜 사장니마아. 이씨 .. ]

“ 이 시간에 누구랑 마셨어? 어디야 거기? 어디에요? ”

- 집! 우리 집! 형아 너가 나 혼자 냅두고 간 우리 집! 나 혼자 마셔따아! 경수 혼자아! ]

“ 경수야, 집이야? 내가 거기로 갈게 잠깐만 기다려요 어? ”

- 시로, 오지마여어 또 혼자 두고 가버릴거자나여 나쁜놈. ]



우리 경수 혀가 다 꼬였어도 욕 할 때만 발음이 굉장히 정확한데? 백현이 실없이 푸흐 하고 웃다가 이어진 경수의 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놓칠 뻔 했다. ‘ 왜 이제 안 와요? 내가 시로요? 왜 우리 집도 안 오고 카페도오 안 오고 .. 나능.. 형아 보고찌픈데.. 왜 안 와여... 그래! 만나여! 우리 만나여!! 나도 형아가 좋아여!! ’ 올라가는 입 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백현이 경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려던 찰나 따가운 기분에 슬쩍 돌아보니 따가운 시선 여섯 개가 제 등을 찌르고 있었다. 아 헐. 망했다. 설상가상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경수의 전화도 끊겼다. 싸해진 분위기 속에 백현이 조용히 소파에 착석하자 큼큼 헛기침을 한 할아버지가 자리를 떴고 그런 할아버지 뒤로 형 백범이 조용히 따라 나섰다. 



“ 아.. 아버지 ”

“ 잠깐 나 좀 보자. 서재로 따라 들어오너라. ”



매사에 당당하던 백현은 이 순간만큼 어깨가 움츠러든 적이 없었다. 서재에 놓인 책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아, 만나보기라도 하고 아셨으면 좀 좋아. 망했다는 표정을 한 백현을 빤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앞에 놓인 찬 잔을 들며 백현에게 권했다. 아무리 백현이 귀한 아들이라 한 들 집안이 집안인지라 목소리를 통해서도 알았겠지만 남자인 경수를 쿨 하게 허락해주실 리가 없는데. 밖에 나가서 받을 걸 , 백현이 후회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 백현아 ”

“ 네, 아버지 ”

“ 큼.. 거 그러니까, 예쁜게냐? ”

“ 예? ”

“ 참하냔 말이야, 백범이에게 듣기로는 네가 애타하고 애를 좀 먹는다더니 고생하나 싶어 도와줄까 했는데 엿 들으려던 건 아니다만 들렸으니 말이다 , 그쪽에서도 너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아비로서 뿌듯하구나. 내 새끼. 거절당하면 아비 체면도 말이 아니잖니. 그 외모를 물려주었으면 자고로 제 짝은 쟁취를 해야지 아무렴. ”

“ 아버지..? ”

“ 미안하다, 애비가 철이 없어 네 형이랑 같이 좀 알아봤다. 생각보다 어리더구나. 벌써부터 영계를 밝혀 쯧쯧, 나가려는 길이 같으니 하나 봐 두었다.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면 사용하도록 해라. ”



백현은 머리를 크게 맞은 듯 했다. 아버지가 내민 열쇠를 영혼 없이 받아든 백현이 물음표를 가득 띄우자 서재를 벗어나려 걸음 한 아버지가 뒤 돌아 말했다. ‘ 작업실이다. 아마 두 사람이 작업에만 집중 할 수 있는 환경이 될 게야. 손주는 백범이 통해서 보마. 다 늙어 손주 여럿은 케어 하기 힘들 것 같다. 한국에서 살기 힘들면 언제든 말하고. 할아버지께서 네 형과 같이 네덜란드에 집하나 봐 뒀다. 네 엄마는 아이 성품만 괜찮다면 걱정 없다고 연락 왔다. 조만간 여행 접고 들어온다더구나. ’ 멋쩍은 듯 뒷짐을 지며 백현의 아버지가 서재를 벗어나고 백현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기 바빴다. 자신은 너무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 힘들었던 기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수가 제 곁에 자리 할 것이며 이해하기 힘든 일을 받아들여주는 가족이 있다. 친구 세훈이 걸리긴 했지만 조만간 경수를 당당히 소개 할 생각이었다. 미친놈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세훈은 무엇이 되었든 백현을 이해해 줄 것이다. 이제 경수 부모님만 남은 건가. 어떡하지 보고 싶다 우리 경수. 진짜 보고 싶다. 백현은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경수야 나 보고 싶어도 잠깐만 참아. 이번에는 꼭 네 대답을 얻어 낼 거야. 



*



“ 아 머리야, 어? ”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소리에 깨어난 경수가 1교시 시간에 맞추려 간단히 씻고 자취방을 막 벗어나던 참이었다. 눈앞에 분홍색의 벚꽃이 가득 피어났다. 한 여름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한 명 뿐인데.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찾아 든 경수의 앞으로 순백의 안개꽃과 함께 다발의 장미가 내어졌다. 꽃 사이로 백현이 고개를 빼곰 내밀며 경수에게 ‘ 좋은 아침. ’ 인사를 건냈다.



“ 형? ”

“ 나 오늘은 나쁜 놈 아니에요? ”

“ 아, 그거는.. ”

“ 도경수씨는 많이 비쌉니까? ”

“ 네? ”

“ 얼맙니까? 도경수씨는 ”

“ 아 형!! ”

“ 정식으로 나랑 만나 줄래요? 많이 좋아해 경수야. ”

“ 야..약속 하나 해요 그럼 ”

“ 응? ”

“ 돈, 함부로 펑펑 쓰지 않기. 벚꽃.. 이것두 오늘만 용서 하는거에요 알겠어요? ”

“ 당연하지! 그럼 나랑 만나 주는 거야? 그래? 그런거죠? ”

“ 뭐, 그래요. 만나 줄게요 근데 나 무지 비싸요 알죠? ”

“ 앞으로 변백현 도경수 한정 지갑 열게요! ”



‘ 내 지갑은 도경수거야! ’ 하늘에 외친 백현이 경수를 안아 들고 떨어지는 분홍꽃잎 사이로 빙글빙글 돌았다. 아마도 앞으로 두 사람의 그림엔 서로가 서로의 영향을 받아 사랑으로 슬럼프는 극복하지 않을까? 맞잡은 두 손 사이로 백현의 작업실 열쇠가 반짝였다. 그래서 작업실은 정말 그림 그리려고 사용 한데? 정말? 



*



“ 아 좀 떨어져어어 , 나 더워요 ”

“ 저거 봐준다고 한지 한 시간 넘었거든? 너 지금 네 먹만 갈고 있잖아요 ”

“ 나도 얼른 마저 그려야죠, 형은 다 그렸잖아 벌써. 괴물이야 진짜. ”

“ 아 진짜 싫은데 ”

“ 뭐가요 ”



졸업을 앞두고 졸업 작품 전시회를 지도교수의 갤러리에서 열게 된 경수는 요즘 들어 부쩍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교수와의 술자리도 늘어만 갔다. 백현은 왜인지 그 젊은 교수가 경수를 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뾰루퉁한 기분으로 그림을 마치고 경수에게 제 기분이 나쁘다 칭얼거리는 중이었다. 경수가 받아주지 않는다. 괜히 백현은 경수를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파묻곤 중얼거렸다.



“ 경수야 , 전시회 그거 내가 열어줄게요 ”

“ 뭐? ”

“ 갤러리 내가 차려줄게. 안 그래도 건물 봐둔 게 있는데 있다가 계약할거거든?  거기 딱 네 그림들 걸어두.. ”

“ 돈 지랄 하지 말랬지!!!!!!!!!!! 변백현 이새끼야!!!!!!!! ”



오늘도 경수를 위해 백현의 지갑은 열리고, 경수는 그런 백현의 지갑을 도로 닫느라 열심이었다.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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