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다른 아침이 왔다.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이들이 벌써 하나둘씩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뜀박질을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미처 다 뜨지 못한 눈이 찌푸려졌다. 언제나처럼 방 안은 엉망이었다. 가방은 의자 위에 나부라져 있었고, 내용물은 다 쏟아져서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학교에 꼭 가야 할까.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내가 학교에 가는 날을 기다리는 유일한 이유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하루 종일 숨죽은 듯 앉아 시계나 보고 있어야 하는 교실이 반가울 리도 없었고, 식당에 들어서면 따라붙는 곱지 않은 눈초리들은 가뜩이나 다 식은 피자를 더 텁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도, 그 시작과 끝에 있는 한 사람 덕분에 행복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저 그의 얼굴을 몇 분만 보고 있을 수 있어도. 속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친구로 남는 것도 정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몸이 무거웠다. 레너드가 등교를 하는 시간에 맞추려면 당장 씻고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두 발은 바닥에 딱 붙은 채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오늘은 도저히 이 방문을 열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축하한다고?


겨우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을 땐, 이미 길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출근을 하기에도, 등교를 하기에도 조금 늦어버린 시간. 사방을 둘러봐도 지금 길을 걷고 있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 레너드가 늘 걸어오곤 하는 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혼자 걷는 등굣길이었다. 항상 보이던 반가운 얼굴 대신 바람만 쌩하니 불어왔다. 일부러 그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방 안에서 한참 시간을 끌었다. 1교시가 끝났을 시간이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발걸음을 뗀 참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지각을 할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각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머리 위에 뜬 해가 쨍하니 길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집에서 늦게 나와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 한여름이 시작될 모양인지, 벌써부터 그 따가운 햇살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위로 꺾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아 보아도 주변에선 새소리 하나 들리질 않았다. 등교 시간에서 고작 한두 시간 정도를 끌었을 뿐인데도 세상이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평소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정적이었다. 옆에 있던 벤치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수업 시간 중간에 들어가 이목을 끌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2교시가 끝날 때쯤 학교에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다.


락커 근처에서는 언제나처럼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누구도 내게 다가와 왜 지각을 했냐고 묻지는 않았다. 사실 그 아이들 중에 내가 없었다는 걸 알아챈 사람조차 없는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락커 문 안쪽에 달린 거울을 보았다. 내 뒤편에서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보였다. 옆에 있는 락커를 쓰는 애들이었다. 내가 떠나기를 기다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적대감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락커를 좀 쓴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내며 그 애들을 때려눕히기라도 할 것처럼.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교과서를 꺼내고 락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안녕.” 일부러 뒤를 돌아 인사를 건네었다. 그들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되었다.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없었으니 인사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복도를 지나 교실로 가는 동안 한두 명의 아이들에게 더 인사를 해보았다. 반응은 마치 미리 맞춰두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았다. 덕분에 가는 길은 편하게 되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아이들이 슬금슬금 길을 비켜주었던 것이다. 금방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을 보는 듯한 태도였다.


하필이면 과학 수업이었다. 교과서는 펴지 않고 그대로 책상 위에 내버려두었다. 선생님은 교실 안의 불을 끄고 영상을 틀었다. 엎드려서 딴 생각을 하기에는 딱 좋은 조건이었다. 턱을 책상에 댄 채로 책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레너드가 쓰던 책. 머릿속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책을 살짝 돌려보았다. 책 밑에 적힌 ‘레너드 맥코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고통스러웠다. 이 이름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 감정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책을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앞으로는 예전만큼 과학 시간을 좋아하진 못할 것 같았다. 화면에서는 지구가 점점 작아지며 멀어져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안경을 잡고 있는 채로 종이를 뒤적이고 있었다. 앞줄에 앉은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면 영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틈을 타서 커튼을 살짝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운동장에서 장애물 달리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너드의 반은 아닐 것 같았다. 그의 시간표를 전부 외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언뜻 보이는 몇몇의 얼굴이 레너드와 같은 학년의 아이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커튼을 다시 닫고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붙였다. 뭘 기대했던 걸까. 손가락으로 연필을 퉁기며 책상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수업 시간은 오늘따라 유난히 길었다.


“안녕, 짐.”

“...응.”

“이제 과학 수업 끝난 거야? 아, 아침에 안 보이던데, 일찍 왔나봐?”


그의 동선까지 하나하나 꿰고 있지 못했던 게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레너드의 부드러운 인사를 받고도 표정은 더 딱딱하게 굳어가기만 했다. 레너드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에게 오늘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였던 것이다. 겨우 입을 열어 ‘응’하고 짧게 대답을 했다. 의도했던 것보다도 더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레너드는 당황했는지 말이 길어졌다. 이번에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나는 그와 대화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그를 피해서 늦게 등교를 했는데도, 그는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떡하니 내 앞에 서 있었다. 평소에는 학교에서 한 번을 보기가 힘들던 얼굴이었다. 상급생들이 쓰는 교실은 우리가 쓰는 교실과는 아예 다른 층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우연이 하필 오늘 일어난 것이었다. 레너드는 웃는 얼굴로 아침에 내가 보이지 않더라는 얘기를 꺼냈다. 당연히 안 보였겠지. 원래는 내가 기다렸던 거니까.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를 보니 괜히 맥이 풀렸던 탓이었다. 그가 내 마음을 모르는 게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평소대로 그를 대하라는 건 내게는 너무 힘든 요구였다.


“감기라도 걸렸어? 목소리가 별론데.”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이상하네.”

“뭐가.”

“그냥. 네가 이렇게 얌전하게 구는 건 처음 봐서.”


계속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복도에서 나를 마주쳐서 기쁜 건 레너드밖에 없는 것 같았다. 굳이 내가 불편한 티를 내지 않더라도 그의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그의 친구들의 눈초리가 영 곱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야 뻔했다. 나와 레너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나보다 멋진 친구들이 필요했다. 주변의 시선은 내 결심에 자꾸만 더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내 친구라는 건, 지금껏 내게 일어난 유일한 행운이었다. 욕심을 부리다간 그 행운마저 내팽개치는 꼴이 될 지도 몰랐다. 내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자꾸만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억지로 억눌러두고는 있었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끓어 넘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살갑게 말을 걸어주는 레너드에게 조금도 고마운 마음이 들질 않았다. 그가 짓고 있는 표정도, 그가 하는 말도 전부 짜증이 났다. 내 요동치는 마음과 달리 평온하기만 한 그가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장난이야. 근데 정말 무슨 일 있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퍽이나 설득력 있겠다. 뭔데. 말해봐.”

“그만 좀 해.”

“뭘 그만해. 혹시 나 때문이야?”

“신경 쓰지 말라고!”


그의 손을 탁 쳐냈다. 반사적이었다. 내게 손을 뻗던 레너드는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복도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실수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다. 그가 나를 걱정하듯이 바라보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당황한 마음에 두 발은 제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도망이라도 가야 하는데. 어쩔 줄 몰라서 레너드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그의 친구 한 명이 무거운 목소리로 ‘야’하고 나를 불렀다. 레너드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내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레너드와 나의 거리는 한 걸음 쯤 벌어져 있었다. 그 거리가 내게는 끔찍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눈앞이 아득했다. 지금껏 레너드와 내가 말다툼 한 번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게가 이상하게 다른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화가 난 그의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레너드의 목소리는 침착하기만 했다. 내가 예상했던 딱 그대로.


“야, 어디가?”

“됐어. 그러지 마.”

“답답하니까 그러지. 레너드, 너는ㅡ”

“가자. 수업 가야지.”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자마자 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망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한참 뛰다가 멈춰보니, 다음 수업 교실과는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 있었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화를 낼 때는 언제고, 뒤늦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또, 그에게 먼저 사과를 할 자신은 없었던 탓이었다.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는 행동은 모순적이기 짝이 없었다.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레너드는 나를 달래주려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내가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사실은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종일관 내게 친절하기만 한 사람에게,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한숨을 쉬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레너드도 교실로 돌아갔을 테고, 나도 종이 치기 전에 교실에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오늘만큼은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끌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이번 수업만 끝나면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오후 시간은 언제나 비교적 견딜만한 편이었다. 가볍게 생각을 하려고 애쓰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내일쯤이면 레너드는 오늘 일을 잊을 지도 몰랐다. 그는 이미 내 변덕에 어느 정도는 익숙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 알 수 없는 변덕이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


종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어떤 아이 한 명이 다가오더니 쪽지를 건네었다. 설명을 기다렸지만, 그는 내 손에 쪽지를 쥐어주고는 도망치듯 뛰어가 버렸다. 친구들과 뭔가를 수군거리는 걸 보면 서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떠밀었던 모양이었다. 구겨져 있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혹시나 했던 불안한 마음과 달리, 쪽지는 1시에 상담실로 오라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2교시까지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지금쯤이면 출석부가 넘겨져서 확인이 됐을 게 분명했다. 마음먹고 지각을 한 것치고는 별 거 아닌 결과였다. 나는 전에도 몇 번 상담실에 가본 적이 있었다. 가만히 몇 분 앉아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금방 끝이 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상담실에서는 외삼촌을 꼭 데려와야 한다고 우기지도 않았고, 반성문이나 추가 과제 같은 걸 시키지도 않았다. 또, 1시라면 점심을 먹을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식당에 가기로 했다. 원래는 아이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서 교실에서 시간을 때우고는 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팠던 탓이었다. 어제 저녁에 그렇게 배가 꽉 찬 채로 잠이 들었는데도 벌써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또, 일찍 식당에 가면 식지 않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안녕, 우후라.”

“어... 안녕.”

“여기 앉아도 돼?”


식판을 들고서 식당 안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똑바로 걸어갔다. 평소처럼 반대편 문으로 나가서 혼자 벤치에서 점심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나니 청개구리처럼 발이 멈추었다. 식당 안에 있는 아이들의 눈초리는 솔직했다.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정도는 뻔한 일이었다. 식사 시간에 나타난 나를 불청객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조용히 이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그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겠지만, 오늘따라 반항적인 마음이 들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우후라는 다른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해지는 걸 눈치 채고서야 내게 고개를 돌렸다. 우후라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우리가 그만큼 친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나는 학교에서 결코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소문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동급생인 우후라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까지 모를 리는 없었다. 그가 대놓고 거절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우후라는 친구들을 둘러보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붙는 눈초리가 한결 따가워졌다. 사방이 눈으로 꽉 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뻔뻔하게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아이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괜히 빵을 집어 들어 입안에 욱여넣었다. 식사를 하러 왔으니 식사를 해야지.


“야.”

“.....”

“다들 싫어하잖아. 나와.”

“오, 정말?”


빈정거리듯이 대답했다. 자리를 잘못 골랐다. 바로 옆 테이블에,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놈이 하나 앉아 있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뻔히 보였다. 그가 나를 싫어한 건 이미 몇 년도 더 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작년 일 이후에야 노골적으로 꺼려하는 티를 냈지만, 그와 그의 친구들은 아니었다. 작년에 크게 싸움이 붙었던 것도 그의 친구 중 한 명 때문이었던 것이다. 식당 안에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우후라와 함께 있던 친구들은 난처한 기색을 표하며 나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자칫하면 이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불안한 시선을 보고도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건드려 주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신경질이 났다. 밥 한 번 먹겠다는데. 식권도 아까웠다. 어제 영화관에 가는 대신 누나에게서 얻어온 식권이었던 것이다. 그게 어떤 값을 치르고 가져온 건데. 그리고 다시 생각이 레너드에게 미쳤다. 짐, 다쳤잖아.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결국 테이블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우후라가 같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만해, 둘 다. 식사하는 중이잖아.”

“얘랑 친해?”

“뭐?”

“아, 네가 대답할래? 너 얘랑 같이 먹고 싶어?”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거봐. 애들을 괴롭히면 안 되지. 나가라니까?”


“내가 그랬다고?”

“아니, 나는...”

“야, 커크. 나랑 얘기하던 중이었잖아.”

“.....”

“뭘 그렇게 봐. 너 혼자서 뭘 하려고.”

“억지로 쫓아내고 싶으면 몇 명은 더 데려와야 할 걸.”


그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괜히 중간에 끼게 된 우후라의 친구들만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참 운이 없는 셈이었다. 안면식도 없는 나 때문에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될 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인사는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더 미안할 일이 앞으로 많았던 것이다. 나는 일부러 신경을 긁어 놓을 말을 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그는 뜸을 들이지 않고 곧장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내게는 눈앞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할 재주 같은 건 없었다. 뻐기듯이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혼자인 내게는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저 지켜만 본다고 해도, 그에겐 거들어줄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앞뒤 잴 것 없이 달려들었다. 어차피 밀리는 판이라면 한 대라도 더 때리겠다는 심정이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엎어진 식판 때문에 바닥은 이미 엉망이 되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싸움 구경을 하느라 오히려 더 열을 올려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한 눈을 파는 새에 복부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인 건 천장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것이었다. 두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쏟아지는 발길질에 몸을 일으킬 틈도 없었다. 그 중 하나의 발목을 잡아당기려고 몸을 꿈틀대던 차에 그 소동을 멈추게 할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그만 안 둬?”


실눈을 뜨고 보니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 서 있는 아이를 보니 누군가가 선생님을 데려온 모양이었다. 등이 뻐근했다.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눕혔다. 발길질은 멈췄지만 몸을 일으킬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도 한 마디씩 욕설을 내뱉더니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테이블의 기둥을 잡고 허리를 세웠다. 몸을 조금 일으키고 나자 시야가 넓어졌다. 그리고 무슨 우연인지, 내가 그 순간에 발견한 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너드의 얼굴이었다. 뻔한 일이었다. 그는 분명 내게 달려와서 나를 일으키고는, 도움도 되지 않는 잔소리나 늘어놓을 것이었다. 한숨을 쉬며 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내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그대로 사람들 틈 사이를 빠져나갔다. 배가 아릿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기라도 하는듯한 태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잊고 그가 서 있던 자리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 본 게 분명했다. 오전의 일에 화가 나 있다고 해서 이런 심술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다. 천천히 걸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내가 지나가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르르 옆으로 물러섰다. 문 앞에는 싸움을 벌였던 아이들과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너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일주일 간 방과 후 보충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상담실은 가지 않아도 되었다. 훨씬 더 큰 사고를 쳤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보호자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이 없어서 비교적 가볍게 넘어가게 되었다. 교무실을 나오는 길에 누나를 마주쳤다. ‘꼴좋다. 넌 숫자도 셀 줄 모르냐?’ 교무실에 가고 나서야 그와 그의 친구들이 총 네 명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보다 더 되는 줄 알았는데. 누나 말대로 숫자를 조금만 더 못 세었다가는 병원 신세를 질 뻔 했으니 그것도 다행은 다행이었다. 오후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락커 쪽으로 갔다. 오후 수업을 전부 마치고도 수업이 더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영 좋질 않았다. 집에 가도 특별히 할 일이 없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만큼 지루한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도망을 칠까. 또 반항적인 마음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학교에 붙들려 있고 싶진 않았다. 들킬 게 뻔한 일이긴 해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지도 몰랐다. 내 락커 앞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우후라였다. 모른 척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를 찾아온 것 같진 않았던 것이다.


“짐.”

“응, 안녕.”

“굳이 싸울 것까진 없었잖아.”

“내가 먼저 안 때렸어. 그리고 걔네가 싫은 걸 어떡해.”

“뭐, 나도 걔네는 별로이긴 한데.”

“거짓말. 애들은 다 걔네를 좋아하잖아.”

“다 멍청해서 그래. 걔네가 멋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럼 애들 생각이 맞나봐. 잠시만, 거기가 내 락커거든.”


“알고 온 거야. 물어보는데 아는 사람이 통 없어서 힘들었어.”

“그래? 왜?”

“음, 애들이 너랑 같이 있기 싫다고 한 건 진심이 아니었을 거야. 너랑은 다들 처음 보잖아. 네가 누구한테 먼저 말을 거는 편도 아니고.”

“난 상관없어. 어차피 다들 싫어하는데, 뭐.”

“넌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해?”

“왜?”

“위로해주려는 거잖아.”

“...그래, 고마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말다툼을 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우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는 간다는 말도 없이 나를 홱 지나쳐갔다. 내가 한 말이 정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후라도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다음에 이 얘기를 또 할 수 있을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참 생각을 해 본 후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레너드가 아닌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우후라와 나는 저번 주말에야 겨우 통성명을 한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나를 그의 친구 중 한 사람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내게 친구를 만드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게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였던 레너드를 제외한다면, 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데 성공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혼자 다니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이 나를 꺼려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아이들 틈 사이에선 겉돌기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처음 해보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잊은 것처럼 친구들과 하나둘 씩 모여서 웃고 떠들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부러웠다. 레너드를 잃은 다음이어서 그런 걸까. 그의 빈자리는 유독 날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락커 문을 열었다. 락커 안에는 못 보던 물건이 하나 들어있었다. 연고였다. 그 상자를 집어서 앞뒤로 살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익숙한 상표였던 것이다. 레너드가 내게 발라줄 때 항상 쓰던 연고이기도 했고, 그가 아니면 굳이 학교에 연고를 챙기고 다닐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모른 척 지나갈 땐 언제고 또 걱정하는 척이야. 내가 불쌍하긴 했나 보지? 거울에 퉁퉁 부은 입술이 비춰보였다. 연고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그의 도움은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았다. 그의 동정어린 시선도 이젠 지긋지긋했고, 고작 연고 하나에 흔들리는 내 마음도 짜증나기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내게 쏠리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그 안에도 사람은 있었지만, 더 이상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쓸자 금방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짜증 나. 걔가 나한테 신경이나 쓰는 것 같아? 붕 뜬 마음이 미웠다. 그의 자그마한 호의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두려 하는 내가 싫었다. 하루 종일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싫어. 내가 다시는 좋아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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