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빰바바밤바 빰바 빰빠바밤바밤바 ]




겨울아침의 고요한 적막을 깨는 알람소리에 성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으음.."


아직 혼곤히 잠에 취해 있었지만 적어도 그의 옆에서 세상 모르고 잠든 연인을 깨워야한다는 생각만큼은 명확했다. 성우는 졸린 눈을 부비며 손을 뻗어 그의 옆에서 알몸으로 자고 있는 다니엘을 살짝 흔들며 깨웠다.   


"다니엘. 다니엘 일어나. 오늘 미국공연 가야한다며."


하지만 그의 연인은 일어날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늘 아침잠이 많아 그룹활동때부터 고생하던 그였다. 성우는 장난스레 그의 갈색머리를 헤집으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지만 살짝 눈살만 찌푸릴 뿐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어쩔수 없이 성우는 그의 얼굴에 다가가 사정없이 뽀뽀를 퍼부었다.


"일어나아. 다니엘. 어제 깨워달라 그래놓구. 막 어젯밤에는 '오늘도 지각하면 매니저형에게 죽어' 라구 했잖아." 


애교섞인 칭얼거림에 그제서야 다니엘은 간신히 눈을 떴다. 안그래도 작고 가는 눈이 더 팅팅 부어 눈동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헤집으며 잠에서 덜 깬 거친 목소리로 시간을 묻는다. 


"몇시고."

"새벽 여섯시."


다니엘은 푸욱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얼굴에 바싹 붙어 있는 성우의 얼굴을 끌어당긴다. 


"좀만 더 자자."

"뭐래.일어나."


완벽히 잠에서 깬 성우는 다니엘의 등을 자비없이 후려쳤고 다니엘은 그제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그의 두눈에 성우의 쇄골과 목 부분에 울긋불긋한 흔적이 보여 저도 모르게 베게게 입을 대고 피식 웃는다. 


"어제 좋았나."

"......아씨. 그만 놀리고 일어나시죠. 다니엘씨?"


다니엘은 아무말 없이 성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쪽쪽 입맞추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의 연인의 입술공격에 성우는 적잖이 당황해 가만히 입만 대고 있었다. 어느덧 다니엘의 입이 스멀스멀 목부분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제 그가 성우의 쇄골에 만든 선홍색 자국 부분에 다시 아로새기듯 입맞추었고, 자연스럽게 손을 성우의 밑으로 가져갔다.  


"아 뭐하는거야. 아침부터."


성우는 당황해 다니엘의 손을 떼어냈지만 이미 다니엘의 것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성우 역시 충분히 인지된 상태였다. 다니엘은 성우의 것을 세게 움켜쥐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성우의 위에 타올라 성우의 목덜미부터 급하게 입맞추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진도에 당황하며 밀쳐내는 성우의 두 손을 맞잡고 다니엘은 성우의 귓가에 나즈막히 속삭였다.


"보면 모르나. 모닝섹스"

"와 진짜 미친놈..색마.."


성우는 황당하다는 듯 다니엘의 능글맞은 얼굴을 노려보았지만 다니엘의 익숙한 손길에 결국 반응해버리고 마는 그였다. 자신의 것을 정성스럽게 애무하는 다니엘을 달뜨게 바라보며 성우는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아씨. 몰라. 얼른해."


다니엘은 씨익 웃으며 그의 것을 잡았다 푸르며 희롱했고 성우는 그의 손놀림에 미세하게 반응하며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잔뜩 흥분된 성우의 것을 움켜쥔 다니엘은 한손으로는 어젯밤에 쓰다 남은 콘돔을 주워 입으로 거칠게 뜯기 시작했다. 성우는 그 모습을 보고 흥분을 멈추고 아연실색하여 되물었다.




"뭐하는거야 지금?"

"보면 몰라서 묻나. 넣으려고."

"미친거 아냐."

"왜 뭐가 문젠데. 어제도 잘해놓고선."

"....."





***





힐튼호텔에서 '고자 강선생'이라 불리던 지난날과 다르게, 그의 연인은 날이 갈수록 잠자리 테크닉이 급격하게 늘었다. 성우와 달뜬 첫날밤을 보내던 작년 가을에는 입과 손으로 시작했지만 해가 바뀌고 올 여름이 되자 점차 삽입섹스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성우와의 밤일을 마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는 성우의 귀에 뽀뽀하며 말했다.


"남자랑 그..넣으면 여자보다 겁나 좋다던데."

"뭐 누가그래."

"인터넷."


성우는 유치한 다니엘의 정보검색 실력에 낮게 웃었고 다니엘은 그런 성우를 보며 슥 눈치를 보더니 어린아이처럼 칭얼대기 시작했다.


"우리도 넣어보면 안되나."

"뭐?"


성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다니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장난스러웠지만 꽤나 진심이 묻어있는 표정이었다. 성우는 극악스러운 표정으로 다니엘을 보며 되물었다.


"니가 밑에 깔릴꺼야?"

".... 형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나. 내 등치에 무슨."

"그럼 막 이렇게 당장이라도 부서질것 같은 뼈밖에 남지 않은 내가, 응, 이런 내가 니 밑에 깔리리?"  


성우는 흥분해 마구 손동작을 섞어가며 자신의 연약한 몸상태를 설명했고 다니엘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그런 성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말을 들을것 같지 않는 미운 5살같은 표정의 다니엘을 노려보며 성우는 한숨을 푸욱 쉬며 말을 이었다. 


"야 그리고 무슨 이게 팬픽인줄 알아. 막 이렇게 넣으면 막 쑥 넣어지고, 막 응? 막.. 여자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다니엘은 의문스럽다는 듯 턱을 손에 괴고 자세를 고치며 성우에게 물었다.


"뭐가 말이 안되는데."


성우는 그런 다니엘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휘저으며 다니엘의 이마를 살짝 쥐어박았다.


"저기요. 강선생님. 동영상 많이 보셨다면서요."

"동영상엔 그냥 겁나 좋아하기만 하던데."

"아 이래서 야동으로 섹스를 배우면 안돼."


성우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디부터 얘에게 설명해야하나. 성우는 난감한듯 머리를 쥐어뜯더니 다시 다니엘에게로 돌아누워 허공을 떠도는 손동작을 곁들이며 최대한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야. 다니엘. 있지..음.. 뭐랄까. 뭐부터 설명해야할까. 그 남자랑 남자랑 섹스할때는 여러 준비가 필요해."

"무슨 준비."

"..음.."


성우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것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성우는 제 입을 더럽히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다니엘에게로 들이밀기로 마음먹었다. 한참 적절한 자료를 찾던 성우는 글과 그림을 섞은 게이용 how to sex 만화자료를 찾아 다니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한참 스크롤을 내리며 그 만화를 읽던 다니엘은 꽤나 충격받은 표정으로 성우에게 되물었다. 


"이거 진짜가."

"그래.진짜야. 그러니까 다니엘 우리 여기서 만족하자. 난 지금도 충분히 좋아.니엘아"

"....."


그러나 이미 삽입섹스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다니엘의 욕망을 이겨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그 후로도 다니엘은 섹스가 끝난후 몇번이나 그 이야기를 꺼냈고 결국 성우는 사귄지 1주년이 되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자신의 몸을 선물했다. 성우는 그 하루로 다니엘이 만족할 줄 알았지만 이미 차원이 다른 황홀경을 맛본 다니엘은 그 이후로도 성우에게 종종 삽입섹스를 요구했고 가끔씩 성우가 내킬때마다 다니엘에게 몸을 허락했다. 물론 성우 역시 싫은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입과 손으로 했을때와는 다른 종류의 극렬한 쾌감이 있었고 온몸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다니엘의 것을 느낄때마다 짜릿한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쾌감만큼이나 고통도 상당했다. 다니엘의 것이 들어올때마다 몸이 부서질것 같은 아찔한 고통이 성우를 짓눌렀다. 물론 잠시동안 그 고통을 견디면 더 큰 오르가즘이 몰려왔지만, 생살을 찢는 것 같은 초반의 아픔때문에 성우는 늘 큰 마음을 먹고 다니엘을 받아들이곤 했다. 




***




그리고 어제도 다니엘이 장기간 해외투어를 간단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허락한 삽입이었다. 그런데 이 발정난 똥강아지놈은 그것도 모르고 아침부터 저 태연한 얼굴로 콘돔을 찢으며 "뭐가 문젠데.어제도 잘해놓고선"이라는 대사를 내뱉고 앉아있으니.. 성우는 순간 울컥했다. 갑자기 달아올랐던 욕정이 한순간 싸하게 식으며 성우는 발로 자신의 밑에 있는 다니엘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야. 이번엔 니가 깔릴꺼 아니면 하지마. 나 못해. 안해!"

   

얼결에 성우의 발에 머리를 맞은 다니엘은 황당한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보았고 결국 "알았다 알았다" 하고 순순히 포기하며 찢다 만 콘돔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토라진 성우의 입술에 입맞추었고 그 어떤때보다 다정한 그 키스에 성우는 결국 다시 마음이 사르르 풀려 응응 신음을 흘렸다. 다니엘의 손이 다시 스물스물 밑으로 향했고 성우는 단단해진 그의 것을 느끼며 그의 등에 가느다란 다리를 휘감았다. 

결국 그 날 아침도 둘은 음탕하게 뒹굴었고 그제서야 다니엘은 만족했는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성우는 넉다운이 되어 침대에 진흙처럼 퍼져 있는 상태였다. 진작부터 체력좋은 멍멍이인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2년동안 지치지도 않고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힐줄 몰랐더란다. 물론 성우 역시 섹스리스보다는 이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다니엘의 페이스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밤낮이 바뀐 촬영으로 지친 상태로 집에 와도 이 발정난 멍멍이가 옆으로 치대고 나면 어쩔수 없이 응해줄수 밖에 없었고 1번은 2번이 되고 2번은 3번이 될때가 많았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고 나면 성우는 당장이라도 힘들어 죽을것만 같았지만 이 멍멍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 날 3시간짜리 단독콘서트를 마치고 돌아왔다. 대단한 체력이었다. 어느날 성우는 이놈이 어쩌면 드라큘라처럼 자신의 양기를 빨아들여 사는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해버렸다. 실제로 성우는 다니엘과 함께 사는 2년동안 체중이 3kg이나 빠진 반면 다니엘은 날이 갈수록 건장해졌고 체중 역시 불어있었다. 

어느새 다니엘은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쫙 빼입고 나타나 침대에 눌러붙어 있는 성우에게 다가왔다.


"형 아직도 자나. 내 이제 간다."

"응..몇일뒤에 온다구?"

"일주일 뒤."

"응. 잘다녀오구. 몸조심하구.. 뽀뽀."


다니엘은 성우의 입에 작별의 뽀뽀를 했고 다니엘은 흡족한듯 미소지으며 문밖을 나갔다.


띠릭-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겨울아침의 으슬한 한기에 성우는 사정없이 뭉개진 이불을 펴 몸 위에 조심스레 덮었다. 성우는 문득 다니엘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니엘과 두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짧았던 2년의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작년 가을에 낸 두번째 솔로 앨범이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다니엘은 그 이후로 해외 여기저기서도 러브콜이 왔고 미국과 일본, 중국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했다. 워너원이 해체되기 전부터 흥행이 점쳐지던 그였기에 지금과 같은 인기는 결코 놀랍지 않았다. 다니엘은 내년에 mmo와의 계약종료를 앞두고 향후 거취를 고심중이었다. 이미 대형기획사에서 그에게 사전 물밑접촉을 시도하고 있었고 다니엘 역시 더 큰 매니지먼트에서 더 체계적인 서포트를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니엘이 활발히 해외를 오가는 시간이 많아지며 강남에 있는 다니엘의 맨션은 성우 혼자 쓰는 날이 더 많았다. 드라마촬영을 마치고 텅 빈 집에 올때마다 성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성우 역시 판타지오와의 계약이 남아있었기에 여전히 판타지오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뮤지컬과 드라마 등 연기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성우가 꿈꾸어왔던 가수활동은 나병준 대표의 완벽한 해임으로 프로젝트가 무산된지 오래였고 드라마의 ost를 부르며 가수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곤 했다. ost를 녹음하고 올때면 가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그리고 새삼 여전히 가수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그의 연인이 부러웠다. 하지만 위로받고 싶어 그와 함께 사는 집에 들어오면 집에는 낯선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그래도 그의 연인은 대체로 성실한 편이었다. 성우와 함께 지냈던 2년의 시간동안 늘 성우에게 최선을 다했다. 해외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성우에게 한아름 선물을 안겼고 공연이 끝나고서도 틈나는대로 성우와 영상통화를 했다. 집에 혼자 남아 쓸쓸할것 같은 그의 연인을 위한 최선의 배려였다. 성우 역시 그런 연인의 마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한 최대한의 애정표현을 했고 그 앞에서 절대 지치거나 외로운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이렇게 일주일씩이나 그의 연인이 집을 비우는 날이면 성우는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사람이 든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맨날 부대끼며 살던 익숙한 얼굴이 사라지니 마음 둘 곳 없이 쓸쓸하고 황량했다. 넓은 집 안에 들어선 차가운 고독이 성우의 몸을 감쌌다.    


"겨울이어서 그럴꺼야."


성우는 낮게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제의 피로가 누적되어 다시 혼곤히 잠에 든 성우는 누군가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성우는 졸린 눈을 부비며 현관문쪽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이 훤히 열고간 침실방문은 바로 현관쪽과 맞닿아 있었다. 


다니엘인가. 또 뭐 두고 갔나. 


그 순간 문이 열렸고 성우는 다니엘의 선량한 눈매를 꼭 닮은 누군가를 마주쳤다.








다니엘의 어머니였다.





"헛.어머님..!"

"어머."


그 순간 너무 놀라 성우는 알몸인것도 잊고 화들짝 침대에서 일어났고 성우 어머니 역시 깜짝 놀란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성우를 바라봤다. 


"어머머. 미안하다 성우야."

"앗.아니에요"


성우는 너무나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어머니를 맞고 이불을 둘러 옷장쪽으로 몸을 피했다. 당혹스러움에 귀끝까지 열감이 채였다.


뭐야. 다니엘. 오늘 어머님이 오신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성우는 서둘러 옷장에서 꺼내 집히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서둘러 나가다 발끝에 뭔가 채여 보니 아까 다니엘이 뜯다만 콘돔이다. 바닥과 침대에 널부러진 콘돔의 잔해들을 보고 성우는 아찔하여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모두 이불속에 밀어넣었다. 


"어머니 오셨어요.."

"으응...저.. 내 오늘 다니엘 반찬챙겨줄려고 왔다."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의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별 말 없이 가방에서 락앤락통을 꺼내며 성우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확실히, 다니엘은 자기가 말한건 모두 지키는 남자였다. 1년뒤에도 성우와 함께 살겠다는 약속을 보란듯이 지켜냈고, 한달전에는 어머니를 위해 서울에 집한채를 마련해드렸다. 넓지는 않았지만 어머니 혼자 사시기에 넉넉한 집이었다. 어머니가 적적하실까봐 다니엘은 부러 자신의 숙소와 가까운 곳에 집을 구매했고 어머니를 설득해 서울로 모셔오는데 성공했다. 남부럽지 않은 세상의 효자였다. 혼자 서울에 사시기 적적하셨던 어머니는 가끔씩 이렇게 다니엘의 집에 놀러오곤 했고 그럴때면 성우는 두 모자가 오븟한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를 피해드렸다. 근데 오늘처럼 연락한번 없이 오시진 않았는데..


"아 니엘이는 모르는것 같던데.."

"아 응. 오늘부터 해외투어 간다기에 말 안했다. 내도 이 주변에 볼일 좀 있어가... 그냥 온 김에 들렀지."

"아 네.."


한참 반찬정리를 하던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성우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근데 저 방 니엘이 방 아이가."

"네? 아... 저.. 네 어제만 방을 바꿔쓰기로 했어요."

"글나."


그의 어머니 역시 이미 다니엘이 성우와 함께 사는걸 알고 있었고 가끔씩 성우가 좋아하는 반찬도 다니엘 손에 들려보내곤 했다. 두번쯤밖에 숙소에 오시지 않으셨을텐데 귀신같이 다니엘의 방을 기억하고 묻는 어머니의 날카로운 지적에 성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는 반찬을 다 냉장고에 정리하고 이제 가본다며 자리를 떴다. 성우 역시 어색한건 마찬가지 였기에 어머니의 출발이 몹시 반가웠다. 엉거주춤 인사를 하려는 찰나 어머니가 어렵게 입을 떼며 물었다. 


"...니엘이는 아직도 여자친구 없나."


덜컹- 순간 성우안의 뭔가가 내려앉는것 같았다. 언젠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발언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다니엘이 없는 가운데 자기에게 묻는 것은 뭔가 의미심장했다. 평소에는 혹여라도 아들의 못된 스캔들이 터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어미였다. 


"아.. 네 없는것 같더라구요.."


성우는 기어들어가듯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성우 역시 차마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해 시선을 바닥에 꽂고 머리를 긁적였다. 한참의 침묵뒤에 어머니는 이번에는 성우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성우도 여자친구 없나."

"네..네? 저요?"


성우는 화들짝 놀래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성우의 여자친구 유무까지 묻지 않았던 그의 엄마였다. 


".....네..."


성우는 죄지은 듯 푹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의 어미의 애달픈 두 눈을 마주칠 용기는 없었다. 


"......."

".........."


숨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그의 어미는 아무말 없이 성우를 애달픈 눈빛으로 바라보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잠시 열었다 다시 조개처럼 닫았다. 그녀의 표정에 막역한 슬픔과 두려움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성우도 빨리 여자친구 생겨야할텐데. 그쟈."

"........."


그녀는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채근하듯 말했지만, 왠지 그 목소리엔 간절한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성우는 어쩐지 심장이 쿵쿵뛰며 손에 땀이 바싹바싹 말랐다.

 

들켰다. 들킨건가. 아시는건가? 설마. 그냥 던져본 말일까?


머릿속이 새햐얘졌다. 지금 순간에서 정상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그런 성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어미는 툭 말을 던진다. 


"성우가 내년에 스물일곱이가."

"....네.."

"장가갈 나이네."


성우는 숨이 턱 막혔다. '장가'라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결혼-


그것은 언젠가 성우가 감당해야 할 높은 산이었다. 스물셋 청춘으로 시작했던 성우는 어느새 스물여섯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고 내년이면 스물일곱이 되었다. 이제 슬슬 주변 친구들은 결혼할 여자친구를 만나며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명절때 친척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결혼이야기가 화두에 등장했다. 물론 성우는 아직 너무 이르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도 언젠가 결혼이라는 큰 난제를 고민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성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고백컨데, 다니엘과는 한번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린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의 연애만으로 너무 벅찼기에 결혼이라는 닿을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두 사람 다 너무 어렸고 무지했다. 그리고 누구 한명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그것은 헤어지자는 것을 의미했기에 2년동안 두 사람은 그 주제에 대해 침묵했다. 

그렇다고 내가 다니엘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성우는 상상만으로 아찔했다. 내가 한국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성결혼이 허용된 나라에 이민가서 살 정도로 다니엘을 평생 사랑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차별어린 시선을 감내하면서까지 내가 평생 그를 품어줄수 있을가? 그토록 아이를 좋아하는 다니엘인데 평생 자기와 아이없이 늙어 죽어갈수 있을까? 설사 만약 자기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정작 다니엘이 지금 자기가 생각하는 이 모든 것들을 견뎌내 줄 수 있을까? 그것도 평생?  


몇번을 생각해도 결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결혼과 관련된 모든 가능성에 관해서는 결국 '모른다'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 성우의 결혼을 은연중에 떠보는 다니엘의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모르겠어요.."


성우는 그저 빨리 이 대화가 끝나고 어머니가 문밖으로 나가시길 성우는 간절히 바랬다. 성우의 난감한 표정을 본 그의 어미는 더 이상 성우에게 챙겨 묻지 않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그 순간조차 성우에게는 억만겁의 시간과도 같았다. 


"성우야 그럼 내 갈게. 니엘이에게 안부 전해주고."


신발을 다 신은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성우를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순하게 처진 눈가가 오늘따라 어쩐지 더 애처로워보였다. 성우는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지어보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끝까지 성우의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어머니가 떠나고 간 자리는 더할나위 없이 적막했다. 거실에는 오직 성우의 쿵쿵대는 심장소리만이 선연하게 울렸다. 마지막까지 슬프게 그를 바라보고 떠난 다니엘의 엄마를 떠올렸다. 


아셨을까.아신걸까. 


다니엘처럼 워낙에 눈치빠르고 명석한 그의 어미였다. 이십년간 홀로 감싸가 키워온 아들인만큼 아들의 연애방식이야 누구보다 잘 알았을 터이고 지금쯤이면 그 상대가 누군지 꿰뚫고도 남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성우는 갑자기 당황하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였다.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어미가 품어오던 의문은 아마 확증으로 돌아섰을 것이고, 차마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성우에게 묻지 못해 저렇게 처연한 눈으로만 바라보고 가신것이리라.


성우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다니엘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에게 축복받지 못할 사랑이라지만 적어도 그의 하나 남은 가족만큼은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그와 어머니와의 달달한 통화가 들려올때마다 성우는 제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그것은 일종의 부채감이었다. 성우는 그의 어미에게 있어 20년동안 곱게 키운 슈퍼스타 아들을 동성애자로 만들어버린 죄인이었다. 다니엘과 사귀는 2년동안 성우는 끊임없이 그의 어미에게 속죄했지만 마음의 빚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 빚을 청산하러 그의 어머니가 방문했다. 그러나 결국 성우는 오늘도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저 멀리 도망갔다. 지금와서 모든걸 그의 어미에게 돌려주기에는 지금 이순간의 다니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우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이 빚은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유예만 가능한 것이었고 그 언젠가 모친의 품으로 다니엘을 돌려주어야 했다. 


손가락 사이로 한기가 들어왔다. 순간 몸이 으슬하더니 벼락같이-

외로웠다.

너무나 외롭고 외로웠다.

그런데 이렇게나 너무 외로운데 너는 내 옆에 없었다.

그 사실이 성우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




다니엘은 첫날 뉴욕공연을 마치고 한껏 들떠 있는 상태로 호텔에 돌아왔다. 성공적인 공연이었다. 저번 미국투어때와 다르게 티켓 판매량 역시 압도적으로 늘었고 현지에서의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저번 공연때 좌석을 차지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원정간 그의 한국팬이었다면, 이번에는 현지인 반, 한국인 반의 비율로 좌석이 메꾸어졌다. 해외진출에 긍정적인 신호였다. 콘서트가 끝나고 현지 음반제작사와 짧은 미팅도 갖게 되었다. 짧은 만남으로 그렇게 큰 확률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와 명함을 주고받았다는 것만으로 한껏 기분이 고조되었다. 다니엘은 이런 성공적인 해외진출 뉴스를 알리고자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성우에게 화상전화를 걸었다. 제 셀카만 보이는 화면이 이어지더니 이윽고 화면에 성우의 얼굴이 꽉 들어찼다. 오늘 아침에 봤던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하루가 꼬박 지난 뒤 보니 더 반가웠다. 다니엘은 성우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안뇽 형아."


성우 역시 힘없이 손을 휘저었다. 아침의 달뜬 얼굴과 다르게 깊은 수심이 잔뜩 서있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2년정도 사귀었으면 말은 안해도 상대의 표정만으로 기분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루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성우가 땅굴로 기어들어갈것 같은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왜또. 무슨일인데."

"........."


다니엘은 계속 말이 없는 성우를 연신 채근했다. 당장이라도 누가 툭 치면 눈물을 톡 흘릴것 같은 성우의 비참한 표정에 다니엘은 제가 다 마음이 아팠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이 들떴는데, 성우의 얼굴을 보니 그 기분이 수증기처럼 삽시간에 증발해버렸다. 


"무슨일인데.형아. 뭔일 있나."

"....오늘 어머니 오셨어."

"아 맞나. 근데 그게 와. 반찬주러 오셨나보지."


성우는 한참동안 입술을 깨물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마침내 땅이 꺼져라 포옥 한숨을 내뱉으며 잔뜩 물에 젖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사이 아시는것 같아."

"설마."


다니엘은 당황한듯 말했다. 한번도 그의 어미에게 진실을 말한적 없던 그였다. 그의 엄마가 여자친구 좀 만들라며 채근할때에도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둘러대던 그였고, 간혹 그의 엄마가 결혼과 손주 운운할때마다 기겁하며 손을 내젓던 그였다. 한번도 연애와 성우를 관계지어 말한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자신들의 사이를 안단 말인가. 


"몰라. 오늘 오셔서 너랑 나 여자친구 없는거 다시 묻고 가셨어. "

"형까지?"

"응."

"심지어 장가는 언제갈꺼냐 하셨다니까."


다니엘은 한참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폰의 성우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아인데.우리엄마 그럴사람 아인데." 


순간 성우는 욱했다. 아니 내가 들었다는데 니가 왜 그럴사람이 아니라고 하는거야.

새삼 성우는 그렇게나 누나에게 무슨일이 있어도 '홀어미 모시는 외동 효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던 그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때 성우는 효자면 좋은거지 무슨 그런말이 다 있나 싶어 그저 피식 웃었지만 정작 제가 겪어보니 확실히 효자는 피곤했다. 가끔씩 저와의 기념일이나 데이트 약속보다 엄마와의 약속이 먼저인건 그렇다 치더라도 모든 상황판단의 기준조차 그의 엄마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성우와 그의 엄마가 다른 생각을 갖으면 늘 엄마편을 먼저 들었고 무슨일이 있으면 엄마부터 챙겼다. 물론 다니엘의 소속사에서 마련해준 집이라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지만 같이 사는 집에 멋대로 어머니께 비밀번호를 알려주었을때도 성우는 내심 섭섭했더란다. 근데 기어코 그것이 이 사단까지 나게 만들었으니..

심지어 이번처럼 제 귀로 똑똑히 들은 성우의 말보다 제 어미의 인성을 확신하는 다니엘은 너무나도 얄밉기 짝이 없었다.


"......"


자신을 가만히 노려보는 성우를 바라보며 다니엘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형이 너무 예민한거 아이가."

"뭐?"

"그렇다아이가. 형이 좀 다른사람보다 예민한 편이긴 하잖아."

"......."


얼척없는 표정의 성우를 바라보며 다니엘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뭐 그렇게 예민한 덕에 형이 감성이 풍부한것도 있지만.. 가끔 좀 너무 갔다 싶을때가 있다."

"야.니가 둔한거지."

"........."


성우는 갑작스럽게 화살이 자기에게로 돌아오자 저도 모르게 다니엘에게 꽥 소리를 질렀고 다니엘 역시 다니엘대로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확실히 성우는 다른 또래의 남자보다 더 까탈스럽고 예민한 편이긴 했다. 처음 프로듀스101 시절에는 그저 성격좋은 바보형인줄 알았는데 같이 워너원 활동을 해보니 성우는 확실히 남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했고 눈물 역시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연애를 시작해고 2년동안 같이 동거를 해보니 가끔씩 그 감수성은 다니엘에게 유난한 예민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성우는 말도안되는 이유로 혼자 우울함에 잠겨있곤 했고 그 이유를 들어보면 주로 불확실한 연애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기인했다. 가끔씩은 다니엘의 가족에 대한 걱정까지 사서하며 혼자 외로움과 슬픔에 빠지는 그였다. 다니엘은 그 옆에서 차마 위로도 못하고 침묵했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성우의 우울함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미래가 불확실하면 좀 더 발벗고 미래를 위해 뛰면 될 것이고, 그렇게 불안할꺼면 자기와 연애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네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자기가 하면 되지 굳이 성우가 나서서 걱정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성우는 앉으나 서나 '사서 걱정' 이었다. 


"아 그렇게나 예민하니까 아까 아침에도 못하게 하고.."

"뭐?" 

"............"


그리고 성우에 대한 오늘의 불만은 역시 잠자리였다. 1년전에 하도 준비,준비를 외쳐대던 성우의 말을 듣고 다니엘 역시 인터넷을 뒤져본건 매한가지였다. 물론 완벽히 준비를 하고 삽입을 하는 커플도 많았지만 일반적으로 다른 게이 커플들은 그저 분위기에 달떠 삽입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유독 성우만이 까탈인 것이었다. 우리의 예민 옹선생은 제가 준비가 되지 않으면 자신의 털끝 하나 못건드리게 했고 가끔 오늘 아침처럼 다니엘이 무력으로 제압해 억지로 하려치면 사정없이 자신을 걷어차곤 했다. 잔인한 연인이었다. 


"뽀뽀 하나 하는것도 그렇게나 벌벌 떨며 하더마."

"......."


다니엘은 입을 비죽 내밀며 성우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문득 지난날 자신이 성우와 사귀면서 걸어왔던 고난의 길을 떠올렸다. 대만의 미라마 파크에서 비싼 향수까지 주며 고백했는데 대차게 걷어차였고, 한국에서 뉴욕까지 12시간 걸려 날아갔는데 처음 보자마자 도망가려 해서 억지로 붙잡았고, 너무 진도가 빠르다며 거부하던 그를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구실로 꼬드겨 간신히 키스를 받아냈고..그리고.. 그래. 마침내는 컴백 1위라는 인생이벤트까지 걸며 9개월만에 잠자리까지 간신히 갔더란다. 아 물론 불발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다시 돌이켜봐도 다니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힘들게 연애를 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몰라. 나 오늘 해외투어 잘되서 형한테 자랑할려고 전화했는데 이게 뭐꼬."


다니엘은 잇따른 다툼에 속상한 나머지 성우에게 나즈막히 투덜거렸고 성우는 그 말을 듣더니 더 까탈스레 신경질을 부렸다.


"야. 너 지금 누구 앞에서 놀리는거야?응? 나도 가수활동 하고싶어죽겠거든. 니가 막 그렇게 말하면 어?"


사랑하는 연인의 기쁜 소식이었지만 이미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 성우 앞에서 다니엘의 자랑은 오히려 비아냥으로 다가왔다. 성우가 촬영한 드라마 OST녹음을 하면서도 늘 가수활동에 목마르던 성우였다. 그런 그에게 성공적인 가수행보를 이어가는 다니엘의 활약은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쓰라린 열패감으로 다가왔다. 같은 가수를 꿈꾸고 같은 그룹 생활을 했던 둘이기에 그런 비교는 누가 먼저 하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다니엘 못지 않게 노래와 춤에 대한 열정이 상당했던 그였다. 하지만 피치못할 소속사의 사정과 다른 분야의 재능으로 자연스럽게 가수생활을 접게 되었고 그런 사실은 두고두고 성우에게 뼈아픈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자신의 춤과 노래에 대한 열정이 어쩔수 없이 전향한 연기자 활동으로 남들에게 폄훼받는것 같았고 가끔은 다니엘 역시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는것 같아 성우는 내심 속이 상했다.


"아 그게 아이고.. 내는 그냥.."


다니엘은 당황했다. 사실 다니엘 역시 그런 성우의 마음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재작년만 하더라도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하면그 누구보다 쪼르르 성우에게 달려가 자랑했던 다니엘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성우의 가수활동의 가능성이 점차 요원해질수록 성우 앞에서 자신의 활동에 관해 점차 말을 줄여가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성과를 소리높여 자랑하고 싶었지만, 상대 역시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사람이고 또 피치 못하게 그 일을 접게된 사람이기에 마음껏 그 성과를 자랑할 수 없었다. 특히 부쩍 예민해진 성우의 상태를 생각하면 그랬다. 답답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 해외투어는 워낙 고무적인 일이었기에 성우에게 제일 먼저 자랑하려고 영상통화를 켠 것인데.. 이렇게 정색하며 반응해오는 성우가 너무나 밉고 서운했다. 


결국 그 날 둘은 화해조차 하지 못하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누구 한명이 기분을 풀어주려치면 다른 한명이 화르륵 화를 냈고 상대가 어르고 달래면 또 다른 상대가 꼬투리를 잡아 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모든 대화 하나하나가 다툼으로 이어지자 결국 성우와 다니엘은 감당할 수 없다는 듯 인사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다니엘의 마음 한켠이 묵직했다. 구름 위를 걷는것처럼 방방 뜬 상태로 호텔에 도착했는데, 성우와의 통화가 끝나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문득 요새 싸움이 잦아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 달력을 들어 살펴보니 성우와 사귄지 2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 원래 연애 2년째면 엄청 싸울때지.. 다니엘은 스스로 납득하고 피곤한듯 호텔 침대에 몸을 던졌다. 


확실히 2년전과 같은 불같은 감정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때는 서로밖에 보이지 않을때였다. 상대가 화를 내면 무조건 내탓인거 같아 백기를 들었고 한시라도 빨리 그를 달래주고자 싸우고 나면 바로 미안하다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2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연인보다 내가 더 소중해졌다. 연인의 기분보다 내 자존심이 중요했고 내 감정이 중요했다. 가끔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연인이 미울때가 더 많았다. 처음엔 너무 말이 잘 통하고 서로 닮은 부분이 많아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그 사람을 알게 될수록 점차 자신과 다른 부분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2년의 시간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다니엘은 베게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우와 2년째 맞는 뉴욕의 겨울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


일주일간 둘은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다니엘이 해외에 가있을때면 매일같이 영상통화로 사랑을 속삭였던 둘이었지만 이번 싸움은 꽤 오래갔다. 아마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닌것이기에 그랬다. 예전에는 어떤 사소한 계기로 싸움을 시작했으면 누군가가 전화해 그 일을 사과하고 풀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복합적인 이유가 얽혀있었다. 그리고 더구나 그 이유는 매우 근원적이었다. 누구 하나가 사과한다고 바뀔 문제가 아니었고 이미 2년동안 비슷한 문제로 싸워온 둘이었다. 싸움의 형태와 종류, 계기는 달랐지만 결국 그 뿌리는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이 잠자리라는 당장 눈에 보이는 이유로 터진 것이고 이번에 무마한들 다음에는 다른 계기로 터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씨.. 추운데.."


다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캐리어를 한쪽 구석에 놓은채 집문앞을 한참을 서성였다. 도저히 들어가 성우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다. 이럴때는 같이 산게 정말이지 후회가 되었다. 보통 연애를 하다 싸우면 집에 들어가 생각의 정리라도 하기 마련인데 연인과 함께 사는이상 생각의 정리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함께 해야했다. 그래서 싸우면 보통의 연애보다 더 오래갔고 감정의 골도 그만큼 깊게 패었다. 예전에는 연인과의 동거에 대해 막연한 로맨스가 있었던 반면, 지금은 누군가 동거를 한다 그러면 도시락을 들고 뜯어 말리고 싶을만큼 반대였다. 적어도 지금 기분에서는 그랬다. 게다가 소속사에서 잡아준 내 집인데 이렇게 눈치보며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다니엘은 스스로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다니엘은 한참 도어락을 열얻다 닫았다 하며 문앞을 서성였다. 


그 순간 삐빅 문여는 소리가 들렸다. 


성우였다.


"............"


성우는 문을 열고 그 까만 눈으로 다니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까만 생머리가 이마를 덮고 검은색 후드티를 걸쳐입은 성우는 옷차림은 편해보였지만 눈빛에는 노기가 서려있었다. 성우는 들어오라는 듯 다니엘을 향해 눈짓했고 다니엘은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성우의 눈치를 슬끗 보며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성우는 팔짱을 끼고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저 또렷한 선의 이국적인 얼굴이 아무말도 않고 자신을 노려보니 호랑이처럼 무서웠다. 집에는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눈을 피해 머쓱한듯 이마를 긁적였고 애꿏은 캐리어만 드륵드륵 끌어봤다. 한참의 어색한 공기 끝에 결국 성우는 한숨을 푸욱 내뱉으며 다니엘에게 손바닥을 펴보였다. 


"..선물."

"뭐?"

"해외다녀오면 꼭 선물줬잖아."


다니엘은 그제서야 면세점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아무리 성우와 다퉈 일주일간 말하지 않았더라도 습관처럼 면세점에 들러 성우의 선물을 산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성우의 눈치를 살피며 성우의 손에 면세점에서 산 고급쵸콜렛을 얹어줬다. 고급스러운 붉은색 패키지로 덮인 32종 믹스 쵸콜렛이었다. 


"어 . NEUHAUS거네. 나 여기꺼 좋아하는데."

"아니까 사왔지. 이번에 면세점에 들어왔더라."

"....."


성우는 눈썹을 찡긋 들어올리며 어쩔수 없다는 듯 팔짱낀 두 손을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포장을 풀러 쵸콜렛을 입안에 넣더니 오물오물 쵸콜렛을 입으로 녹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사 다람쥐같이 귀여워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피식 웃었다. 


"너도 먹을래?"

"응? 아니 됐다."

"그러지 말고 먹어."


성우는 성큼 다니엘에게로 다가가 쵸콜렛이 가득 묻어 있는 입술을 다니엘의 입술에 입맞췄다. 달콤한 쵸콜렛 향이 다니엘의 입과 코를 가득 메웠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허리를 안아 농밀하게 입안에 남아있는 쵸콜렛을 핥았다. 성우의 치아, 혀, 혀천장 구석구석 묻어있는 쵸콜렛은 무척이나 달콤했고 쌉쌀했다. 성우 역시 눈을 감고 입을 벌려 가만히 다니엘을 받아들였다.

그제서야 다니엘은 뜬금없이 선물을 요구했던 성우의 행동이 나름 화해의 제스쳐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니엘은 그 어떤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성우의 입을 탐했고 후드티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딱딱한 성우의 갈비뼈가 만져지며 성우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결국 그대로 두 사람은 들러붙어 키스하며 일주일전의 바로 그 침대로 향했고 스리슬쩍 다시 뜨거운 분위기로 돌아왔다. 일주일동안의 금욕과 날선 다툼 이후라는 드라마틱한 상황때문에 잠자리는 전례없이 격했다. 다니엘은 미안함을 가득 담아 성우의 몸을 애무했고 성우 역시 그 날은 미리 준비를 하고 다니엘을 기다렸던 것인지 다니엘이 제 안을 파고드는 것을 순순히 허락했다. 사실 몸의 화해가 제일 쉬운 법이었다. 

한참의 격렬한 잠자리 후 결국 둘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평소의 연인으로 돌아왔다. 둘은 암묵적으로 과거의 발언들을 절대 입에 담지 않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건 아마 서로의 허물을 들추기엔 지금 이 순간 상대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쵸콜렛보다 달콤한 밀어를 나누던 둘은 누가 먼저랄거 없이 그대로 색색 잠들어버렸다.


창밖에는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첫 눈이 소복하게 나리고 있었다. 새털같이 가벼운 그것은 소리없이 나무에 살짝살짝 쌓이기 시작했고 결국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는 똑 꺾여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눈은 빛처럼 가볍지만 어둠처럼 무거운 것이었다. 


***




일주일의 길었던 다툼 이후 다니엘은 최대한 성우의 기분을 자극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성우가 우울해있으면 최대한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고 성우가 먼저 허락하지 않는한 삽입 역시 요구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해 그의 연인의 까다로운 성격을 맞춰주려 했던 것이다. 성우도 그런 다니엘의 노력이 눈에 띄었는지 예전처럼 과하게 근심을 표출하지도 않았고 그의 어미에 대해 일절 입에 담지도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꽃밭이었지만 그 밑에는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한 얇은 살얼음이 깔려있는 상태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둘이 더 잘 알았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 얼음을 깨트려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의 발단은 성우에게 들어온 영화 시나리오였다. 소속사를 통해 운좋게 성우에게 최근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시나리오의 출연제안이 들어왔다. 사실 그동안 뮤지컬과 드라마만 했었던 성우에게 있어 영화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영화는 이미 대략적인 라인업까지 마친 상태였고 그 중에는 연기파 유명 배우들도 몇몇 섞여 있었다. 성우로서는 쟁쟁한 대선배님들과 뒤섞여 연기를 지도받고 배우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성우가 맡은 역의 비중 역시 나쁘지 않았다. 


"형 그 영화 할꺼가."


다니엘은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간만에 들어온 좋은 각본의 영화에 성우는 한껏 입이 찢어져라 들뜬 상태였고 이미 워너원 멤버와의 카톡창에도 잔뜩 자랑을 해둔 터였다. 다니엘의 가시돋힌 물음에 성우는 거실에 우뚝 서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엄청 좋은기회라가주궁..당연히 해야하지 않을까? 근데 왜?"

"..........."


다니엘은 무언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고 성우에게 읽고 있는 대본을 잡아채더니 감독이름을 가리켰다.


"임마 이거 충무로에서 게이로 유명한 감독아이가."

"야. 감독님한테 임마라니!"


성우는 갑작스런 다니엘의 다그침에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다니엘이 뺏어든 대본을 다시 가로챘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를 보며 마뜩찮은 듯 다시 언성을 높였다.


"저번에 기사난거 못봤나. 그 감독 동성한테 성희롱해서 사과문쓴거."

"야 그거랑 이거랑 뭔상관이야. 영화만 좋으면 됐지."


다니엘은 다시 성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상관이냐니. 임마가 이번엔 형한테 껄떡댈지도 모르는데." 

"야 오바야."

"오바라니. 내 안그래도 영 찝찝해서 다 알아봤다. 근데 저번에 건드린 아도 신인배우라 카고 지금까지 자기 영화에 출연하는 신인배우들은 다 모조리 건드렸단다. 근데 형이라고 안 건드릴 보장있나."

"............"


성우는 당혹스러움에 다니엘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안그래도 옛날에도 소유욕과 집착이 원체 강한 아이라 생각했지만 이정도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성우 역시 그 감독이 게이인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다니엘의 말도 안되는 땡깡과 망상으로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성우는 입술을 꽈악 물었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휙 돌아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암튼 안된다."


결국 성우는 참다 못해 폭발했다.


"야! 니가 뭔데! 너는 그렇게 혼자 잘 나가니까 내 마음같은건 이해 못하지! 야! 나도 좋은 시나리오 받아서 제대로 된 배우생활 해보고 싶다 어?!!"


성우는 분에 못이겨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다니엘이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날수록 그는 불안했다. 성우 역시 워너원 활동 이후 나름 연기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길을 가면 누구나 알아보는 슈퍼스타 다니엘에 비해 자신은 한참이나 초라했다. 연인에 대한 자격지심만큼이나 비참한건 없었기에 성우는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알량한 자존심은 점차 곪아만 갔다. 그리고 비로소 제대로 이름을 알릴만한 좋은 작품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다니엘이 저리 말도 안되는 이유로 어깃장을 놓아버리니 성우는 그간 쌓아왔던 서러움과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몰라. 할꺼야. 그 감독이 게이이든 뭐든 뭔상관이야! 너도 게이잖아!"





"내 게이 아이다."





그 순간 성우는 턱 숨이 받혔다. 쿵 하고 심장이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그 순간 성우 마음 속 깊이 숨겨왔던 무언가가 산산히 조각났다.

그것은, 다니엘의 입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었다. 

사실 다니엘과 2년간 사귀면서, 둘은 한번도 자신의 성정체성을 규정지은적이 없었다. 성우는 교회선배와 기성용을 좋아했기에 스스로 바이라고 정의내렸지만 다니엘은 달랐다. 




"난 남자라고 다 안좋아한다. 그냥 형이 좋았던거지."




다니엘은 덤덤히 내뱉었다. 성우는 그 말이 더 쓰라렸다. 그 순간 2년간 외면했던 아득한 진실이 성우앞에 다가왔다. 

그렇다. 분명 다니엘은 성우를 만나기전까지 남자를 좋아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완벽한 스트레이트였다. 다니엘과 사귀게 된 어느 날 다니엘은 자신도 자신이 이상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번도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가져본적이 없었고, 또 성우 이후로도 다른 남자에겐 눈길조차 안간다고 했다. 그저 성우가 좋았을 뿐이라 했다. 언뜻 들으면 달콤한 고백이었지만 성우는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콕콕 아팠다. 언제든지 다니엘은 다시 여자에게 돌아갈수 있다는것. 앞으로 다니엘은 다시 스트레이트로 살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큼 무서운게 세상에 없었다.  


성우는 두 주먹을 그러쥐고 파르르 떨었다. 지금 그의 연인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두가지 말을 내뱉어버렸다. 순한 강아지같이 아름다웠던 그 얼굴은 그 어떤 못된 악역보다 더 지독하고 비열한 얼굴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 순간 저 얼굴에 주먹을 날려 분을 풀고 싶었지만 여기서 제가 주먹을 날렸다간 간신히 버틴 유리바닥이 산산이 조각나 완벽히 추락해버릴 것을 알았다. 성우는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숨을 참자 벌겋게 눈물이 차올랐다. 버텨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 한방울이 그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짭쪼름한 액체가 입술을 타고 들어왔다. 성우는 눈을 질근 감았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자기가 다니엘에게 패배하는 느낌이었다. 연인과의 사랑싸움에 있어서도 분명 자존심과 오기는 존재했다. 그것이 지금과 같은 중대한 사안이라면 더더욱.


"나 나간다."


결국 성우는 대본을 채어 밖을 나가버렸다.


쾅!!


자신이 분노로 치밀어오른만큼 있는 힘을 다해 현관문을 쾅 닫았다. 조용한 맨션이 성우의 열에 채인 문소리로 거세게 뒤흔들렸다.

그 날 성우는 차를 몰고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소매로 닦으며 민현의 숙소로 향했다. 유일하게 자신들의 사정을 알고 있는 민현이었다. 성우는 민현을 보자마자 그의 어깨를 붙잡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대체 왜그러냐고 묻는 민현의 걱정어린 물음에 성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자기도 좋을것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대답으로 간명하게 말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문제였고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만 표정을 짓던 다니엘의 엄마가 눈앞을 스쳤다. 자꾸 자신에게 배려없는 잠자리를 요구하고 애먼 감독에게 질투를 하던 못된 연인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연인의 비상을 질투하는 추한 자신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침내는 자신에게 지쳐 여자에게로 돌아가는 다니엘이 모습이 손에 잡힐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순간 사지를 찢는 듯한 절절한 아픔이 가슴께로 몰려왔다. 성우는 토해내듯 울음을 삼켰다.   




그것은 성우가 2년간 외면해왔던 명백한 진실이었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때때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너무나 소름돋게 리얼했다.

진짜 삶은 사랑을 읊조리는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고 영원을 약속하는 행복한 메르헨이 아니었다.

삶은 치열한 아픔이었고 생살을 파고드는 고통이었으며 눈물젖은 괴로움이었다. 

그 날 성우는 날카로운 생의  현실을 깨닫고 아이처럼 섪게 울었다. 




그 날밤은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성우는 민현이 양보해준 침대에 누워 가만히 그 풍경을 지켜보았다. 얇게 흩날리던 눈발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굵어졌고 마침내 모든것을 집어삼킬듯 창문을 뒤흔들었다. 칠흑같이 까만 밤하늘에 새하얀 눈보라가 휘몰아치니 백도 흑도 아닌 아득한 회색으로 세계가 침잠했다. 눈보라가 잠잠해지면 세상은 다시 까맣게 물들었고 눈발이 거세지면 세상은 다시 하얗게 환해졌다. 성우는 뜬눈으로 그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며 다니엘을 생각했고 다니엘을 생각하는 제 자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불현듯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랬다. 




아니, 그래야 할것 같았다.





***




성우는 3일동안 다니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민현의 숙소에서 하룻밤 잔 성우는 인천집으로 향했다. 생활에 필요한 짐이 모두 다니엘의 집에 있었지만 다시 다니엘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정리가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니엘을 만난다면 다시 열에 채여 키스를 할테고 몸을 섞을테고, 그 뒤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럴순 없었다. 다시 같은 아픔이 반복되는건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기어코 다니엘은 성우를 불러냈다. 4일째 되는 날 아침, 결국 다니엘은 성우에게 먼저 문자를 했다. 보고싶다고 했다. 견딜수 없다고 했다. 자기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결국 성우는 다니엘의 진심어린 호소에 인천에서 차를 몰고 다니엘과 함께 살던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주차장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성우는 주차장안에서 다니엘을 기다렸다. 저 멀리 흰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색 랩마스크를 낀 다니엘이 보였다. 예전에 자신이 선물해준 흰색 캘빈클래인 점퍼를 멋스럽게 걸치고 나온 다니엘은 멀리서도 후광이 비치는 연예인이었다. 다니엘은 두리번거리며 성우의 차를 찾았고 이내 파란색 BMW미니쿠퍼를 찾아 이곳으로 휘적휘적 걸어왔다. 다니엘은 성우의 차문을 열었다. 누구보다 익숙하지만 누구보다 낯선 연인의 옆모습이었다. 3일만에 보는 얼굴이라 더욱 반가웠지만 오늘따라 그의 연인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채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아무말없이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었다. 뭐라 말을 시작할지 몰랐다. 글로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던 진심이었지만 정작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숨이 막혀왔다. 다니엘은 아무말 없이 자신의 갈색머리를 헤집었다. 틀림없이 성우는 지금쯤 또다시 자신안의 땅굴에 빠져 한참을 헤메이고 있으리라. 다니엘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결국 이번에도 사과는 자신의 몫이었다.




"형아. 미안하다."

"......."

"미안하다고.."




다니엘은 성우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무엇때문에 본인이 용서를 비는지 몰랐더란다. 그때 성우더러 영화를 관두라고 해서? 아니면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고 해서? 그 무엇도 전혀 납득이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성우의 기분을 풀게 해주기 위해 마음에 없는 사과라도 정성들여 해야했다. 


"....."

"....안풀꺼가."

"....."

"......됐다 그럼."


다니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다니엘도 이젠 지쳤다. 그의 연인은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 예민했다. 늘 사과는 자신의 몫이었고 항상 자존심을 먼저 굽히는것도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뭐가 못나 이렇게 늘 연애에 있어 패잔병이 되어 무릎꿇어야하는지 답답했다. 항상 이렇게 사람을병신처럼 만드는 성우가 미웠고 먼저 자존심 한번 안굽혀주는 고고한 성우가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다니엘은 성우를 고깝게 노려보다 결국 다시 날선 불만을 내뱉었다. 


"그 혹시 내가 게이가 아니라해서 글나. 그게 뭐 우쨌는데."

"......"

"결국 형이 좋았단 얘기잖아. 그게 뭐 기분나쁜얘긴데." 

"....."


그리고 무엇보다 다니엘은 저 작은 대갈통에서 굴러가는 성우의 생각을 도저히 알수없었다.다니엘이 한마디를 하면 저혼자 땅굴로 파고들어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다 품었다. 그리고 이내 저혼자 결론내려 다니엘에게 신경질을 부리거나 잔뜩 우울한 표정으로 몇일간 그 생각에 혼자 잠겨있는 식이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때는 그런 성우의 고민을 다니엘 역시 추측해보려 노력했으나 그것은 자신이 상상할수 없는 범위내에 있었고 고민의 단계 역시 매우 심각했다. 그래서 워너원 시절에도 다니엘이 저를 좋아하게 된걸 알고나서도 뭐가 그리 걱정되는지 한참을 도망갔고, 자신이 고백했을때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니엘은 그때도 그런 성우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 역시 이해가 가지않았다. 결과적으로 사귀기전부터 성우에게 품었던 불만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끝내 해결이 안되었던 셈이다. 


"....아씨. 좀 뭐가 문젠지 좀 얘기해라. 항상 그리 삐져만 있지말고."

"이건 말로 해서 될 문제가 아냐."

"......"


다니엘은 크게 한숨 쉬었다. 또 이패턴이다. 이래서 다니엘이 3일간 성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우는 본인이 우울해하기 시작하면 그걸 말로 내뱉고 싶지 않아했고 늘 자기 혼자 가득 침잠했다 스스로 다시 나오곤 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그 우울함을 지켜봐야했고 가끔은 다니엘도 그 우울에 함께 젖어들었던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도 함께 그 우울함의 늪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미국진출때문에 모든 신경을 그곳에 집중해야하는 마당에 성우의 공연한 짜증과 우울까지 받아주며 자신의 일상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우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3일동안 다니엘은 미국진출과 관련한 미팅들을 진행하며 바쁘게 지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이 2년전과 지금이 많이 달라졌음을 다시금 느꼈다. 예전에 성우와 연애를 시작할때는 오직 모든것이 성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모든 상황을 성우에게 맞추었고 오직 성우만 보였다. 자신의 모든것을 내건 목숨과도 바꿀수 있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2년이 흐르니 그 끓어 오르던 열정과 심장을 뒤흔들었던 호르몬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의 유효기간이 지난 그 자리에는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욕심이 꿰차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그에게는 성우만큼이나 성공적인 미국진출 역시 중요했고 자신의 방해받지 않는 일상이 소중했다. 

2년의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걸 바꿔 놓은 셈이다. 


그래..확실히, 2년이면 오래 사귄거지..


그 순간 다니엘의 눈에 익숙한 차 한대가 보였다.


"엇... 디스패치다." 


성우 역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다니엘의 시선이 향한 곳을 함께 따라갔다. 다니엘은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니엘이 슈퍼스타 2년차가 되기 시작하자 디스패치는 본격적으로 다니엘의 동선을 파악하며 다니엘에게 들러붙었다. 마치 사생팬처럼 디스패치는 다니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 다니엘의 집으로 들어오는 모든 차들을 감시하며 다니엘의 사생활을 캤다. 다니엘 역시 이를 모르는게 아니었다. 친한 기자님이 어느정도 다니엘에게 언질을 주기도 했고 다니엘 스스로도 지금쯤 디스패치가 신년호 커플공개로 자신을 노릴때라 생각했으니까. 아마 지금쯤 엄청난 성능의 줌렌즈로 자신과 성우를 보고 있을런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니엘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디스패치가 새파란 신인과 동성애는 건드리지 않는다 했지만 혹시 또 몰랐다. 최근 디스패치는 빈약한 스캔들 기사로 대중의 조롱섞인 비아냥을 듣고 있었고 디스패치 내에서도 대박커플을 터트리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는 소식 역시 들었으니까. 만약 디스패치가 성우와 자신을 그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그 여파는 단순히 광고위약금에서 끝나지 않을것이라는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지 손상때문에 미국진출에 차질이 생겨버릴지도 몰랐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 흰색 차..?"

"응. 몇일전부터 계속 저기 잠복해있었다 아이가."


디스패치의 발견은 간신히 허리를 곧추세워 일어선 성우를 다시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성우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기 시작했다. 만약 디스패치가 우리를 찍어 내보낸다면- 이 연애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성우는 제 어미보다 다니엘 어머니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집안의 자랑이었던 아들이 한순간에 더러운 게이연예인으로 몰락해버린다면 그의 어미는 더 없이 수치스럽고 괴로울것이다. 아마 성우를 죽도록 두고두고 원망하겠지. 성우는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너무나 사랑스러운 연인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게 날아오르고 있는 연인이, 자신때문에 한순간 나락으로 추락하고 광고까지 모조리 끊긴다면- 그의 삶의 전부였던 가수활동마저 접어야한다면- 더이상 춤을 출 수 없다면- 그 순간 미국진출을 기뻐하며 환하게 웃는 다니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빛나는 얼굴이 디스패치의 보도와 함께 어두운 낯빛으로 변했고 눈물로 범벅되었으며 이내 괴로움으로 찌들어갔다. 성우눈에는 모든게 보였다. 지금 가장 힘껏 날아오르고 있는 그의 날개를 부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아씨.. 여자랑 위장연애라도 해야하나.." 




다니엘은 골치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니엘의 입에서 '여자'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성우는 가슴 한켠이 싸해졌다. 갑자기 심장이 다시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게이가 아니야. 다니엘은 원래 스트레이트였어. 다니엘은 여자에게로 돌아갈꺼야. 언젠가 여자와 결혼할꺼야. 몇일전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던 그 잔인한 생각이 다시 퍼뜩퍼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바이와 스트레이트가 현실적으로 잘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운이 좋았던것일 뿐.


여기까지 생각하니 다니엘을 만나기전까지 혼란스럽게 휘몰아치던 마음의 상태가 갑자기 서늘하게 잠잠해졌다. 눈보라가 멈췄다. 이제 세상은 암흑으로 물들었다. 세상이 어두워지니 저 멀리 작게 빛나는 정답지가 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답지였다. 


성우는 바로 지금이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하는 시점이라 생각했다. 만약 지금도 이렇게 흘러가버리고 만다면 나중에 더 큰 아픔을 껴안으며 그 답지를 펼쳐보게 되리라. 성우는 눈을 감고 차분히 지금의 상황들을 종합해보았다. 무리하게 섹스를 요구했던 그의 연인이었다. 그는 성우의 모난 성격을 못견뎌하면서 성우와 관련된 남자라면 질투하고 집착했으며, 본인은 게이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고 언제든지 여자에게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성우는 그의 어미를 떠올려보았다. 비통한 얼굴로 성우를 바라보던 어머니였다. 만약 이번 디스패치가 자신들을 보도한다면 그 어미의 심정은 어떨까. 그 어미를 바라보는 다니엘의 마음은 어떨까.

마지막으로 성우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잘나가는 애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해주지 못하고 못난 자격지심에 자신을 동정하고 연인을 질투한 그였다. 다니엘이 여자에게로 돌아갈까봐 매일매일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는 그였다. 매일같이 그의 어미에 대한 부채감이 쌓여가던 그였다. 그의 어미가 결혼을 채근했을때 숨이 막혔던 그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다니엘을 전력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는 스물여섯 어른이 되어버린 그였다.     




성우는 생각의 정리를 마쳤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그리고 찬찬히 그 답을 내뱉으려는 찰나 다니엘의 2년전 불같은 고백이 그의 입술을 붙잡았다. 




-가보면 알겠지. 태양이 불처럼 뜨거울지 얼음처럼 차가울지. 가보면 되지않나. 

나랑 함께가보자 형아.

나랑 끝까지 가보자.




아아, 다니엘. 나는 너와 함께 끝까지 태양까지 가보고 싶었다. 함께 태양이 불처럼 뜨거울지 얼음처럼 차가울지 보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까지 함께 날아 오르기에는 우리는 너무 달랐다. 잠자리 성향이 달랐고, 성격이 달랐고, 성정체성이 달랐다. 뭐 하나가 제대로 맞는게 없었다. 아마 우리는 태양까기 가기도 전에 서로 불처럼 다투다 잿더미가 되겠지. 



눈이 멀더라도 태양까지 손붙잡고 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이미 우리는 이십대 후반을 바라보는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버렸고 그 뜨거웠던 열정은 미지근하게 식어버렸으며 결정적으로 서로의 다름을 알아버렸다. 그것 이상으로 리얼한 현실이 없었다. 우리의 시작은 눈부시도록 특별했지만 끝은 놀랍도록 평범했다. 사람은 연애를 시작할때 모두 다 다른 이유로 시작하지만, 결국 모두 다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된다. 우리처럼. 





결국, 모든것엔 시작과 끝이 있는것이다. 

그것은 워너원을 통해 이미 충분히 깨달았다.




이제, 다니엘에게 이 생각을 말해야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틀림없이 이 생각은 다시 목구멍을 역행하여 깊은 심연으로 침잠하게 될 것이었다. 

성우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입을 떼었다. 그러다 무언가 괴로운 듯 다시 입을 다물었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의 시간 뒤 성우는 다시 고개를 들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입밖으로 내뱉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날카로운 말이었다. 그 말은 성우의 입안을 천천히 맴돌며 사정없이 상처를 내었다. 머금고 있기에는 너무 아픈 말이었다. 그러나 성우는 지금 이 말이 밖으로 나온 순간 다시 주워담을 수 없음을 안다. 아무리 무릎꿇고 절절히 빌어도 이 말은 두번다시 성우가 거두어 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성우 역시 이 말을 내뱉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마 다니엘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하느님도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2년간의 모든 상황과 문제들은 결국 그 말을 괴물처럼 키워냈고 성우의 고운 입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말해야했다. 뱉어야했다. 그것이 바로 성우 본인을 살리는 방법임을, 성우는 너무나도 잘 안다. 




결국 성우는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가득 쥔 주먹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심장이 파르르 소리내어 울었다. 갑자기 눈이 사막처럼 건조해지며 목구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성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괴로움을 잊기 위해.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그리고 나즈막히 그 말의 끄트머리를 내보냈다.  





"다니엘..."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 성우를 바라봤다. 갑작스레 길어진 침묵에 다니엘도 무언가를 눈치챈 듯 성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다니엘은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 5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누구보다 옆에서 성우를 지켜봐왔던 다니엘이었으니까. 아마 성우의 떨리는 손만 보고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우는 다니엘과 눈을 피해 손끝으로 시선을 두었다. 2년전에는 그 까맣고 깊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시작을 이야기했지만, 끝을 이야기할때는 도무지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었다.





"니엘아...."




"..............."





   

마침내 무겁고 날카로운 그것이 성우의 가는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리고 바닥으로 추락하여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

"..............."







그것은 주울수도, 다시 붙일수도 없었다. 







다니엘은 놀라워하지 않았다. 이미 성우가 말하기 전부터 모든걸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다니엘은 한참 성우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무언가 할말이 있다는 듯 입을 떼었다 다시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고 입술을 피가나도록 꼬옥 깨물었다.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머리를 거세게 헝클었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다시 성우의 얼굴을 애달프게 바라보더니 나즈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다니엘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한참의 시간 뒤에 드디어 그 입에서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놀랍도록 담담했고 차분했다. 





 


"알았다."













 

그것은 이 세상의 종결이었고 

완벽한 닫음이었으며-

길고긴 모든 서사의 마지막이었다.


사계절은 모두 지나갔고,

겨울로서 끝을 맞이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 

흔적도 없이.


-fin.- 










***



나는 바람이 좋다고 했고 너는 에디트 파이프가 좋다고 했다 

나는 억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가로 가자고 했고 너는 바이올린 소리 옆에 있자고 했다 

비루하고 저주받은 내 운명 때문에 밤은 깊어 가고 

너는 그 어둠을 목도리처럼 칭칭 감고 내 그림자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너는 카바이트 불빛 아래 불행한 가계를 내려놓고 싶어 했고 나는 독한 술을 마셨다 

너는 올해도 낙엽이 진다고 했고 나는 밤하늘의 별을 발로 걷어찼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너는 왜 나를 만났던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우리는 왜 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 도종환, 스물몇살의 겨울 











***

내일모레(일요일 저녁9시) <외전 - 그리고 다시,봄 - 최종화>와 <작품해설 및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댓글창은 잠시 닫아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재발행본에서는 <외전>과 <작품해설>은 내일 발행됩니다. 댓글창은 닫지 않습니다. 


RPS 기반/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립니다. https://twitter.com/gomchu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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