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덤한 밤

W. 수미




“헤어질까.”

“..”

“헤어지자.”

“..그래. 그럼.”



무던히도 덤덤한 밤이었다. 이렇게 무성의 한 이별이 또 있을까.

5년이나 길게 이어진 연애는 서로를 당연시하게 만들었고, 사랑이 아닌 정으로만 관계를 이어나가게 만들었다. 새것을 들이자니 손 때 묻은 낡은 것에 정이 들어 차마 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아슬아슬 했다. 때 지난 권태기가 이렇게 오는 것일까. 계속된 지루함과 반복된 싸움은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서로 정 떨어질까, 얼굴조차 보기 싫어질까 내기하듯 방법을 생각하고, 작은 꼬투리 하나 놓치지 않으며 다툼으로 변질 시켰다. 권태로운 나날들은 심지어 상대가 보는 눈앞에서 다른 이를 당당하게 만나는 것도 다반사였다. 서로의 대답은 간단했다. 



‘너랑 끝내고 싶어서.’ 

‘나야말로 바라던 바야.’ 



한동안 집 안에서 마주치는 일 없이 싸늘하기만 한 정적 속에 나날을 보내온지라 같이 살고 있기는 한건지 의문이 들 무렵 존재를 알리듯 오랜만에 함께한 저녁. 모래만큼이나 거친 밥을 꾸역꾸역 삼키며 백현은 차오르는 말을 별 것 아니라는 듯 톡 던져낸다.


안부를 묻듯 던져진 말에 묵묵히 밥을 먹던 경수는 고개를 들어 감흥 없는 눈으로 백현에게 시선을 잠시 두다 ‘그래, 그러자.’ 간단히 대답했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일어선 경수가 거실을 돌아 캐리어를 꺼내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백현은 식탁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구나 생각했다. 그간의 싸움은 서로를 지치게 했고, 감정을 좀먹어갔다. 수많은 다툼에 비하면 정말 조용한 이별이구나. 잡음 없이 깔끔한 헤어짐이구나. 했기 때문에.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경수가 싹 비운 밥그릇을 반찬삼아 백현 또한 제 밥그릇 안에 가득 찬 밥을 웃으며 싹싹 비워냈다. 그 사이 5년이나 함께한 짐이 그 뿐인지, 아니면 이미 떠날 준비를 차근차근 해 놓았었던 건지 모를 경수의 초라한 캐리어 하나와 함께 서로가 함께했던 시간이 모두 정리되었다. 현관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경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벗어났다. 정말, 벗어나고 싶었다는 듯 소리조차 나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제야 백현도 일어나 경수와 함께한 마지막 저녁을 정리하고 ‘우리’였던 흔적을 지우려, 아니 치우려 일어났다. 



‘예쁘네. 우리 이거 살까?’


경수가 예쁘다고 골라주었던 거실의 커튼을 떼고, 함께 TV를 볼 때면 늘 품에 안던 소파의 쿠션을 치우고, 경수의 향이 가득 베인 침실의 이불을 모조리 끌어다 세탁실에 던져놓았다. 욕실 한켠 자리한 함께 쓰던 샴푸, 로션을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아, 비단 네 향만이 아니라 내게서도 나던 것이었구나. 우리는 향기마저도 공유하고 있구나, 맞닿는 살 냄새마저도. 세탁실 앞에 던져 놓은 이불 더미에 폭 둘러싸여 천장을 본 채 덜렁 누웠다. 내일은 연차를 내야지. 대청소 해야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유난히도 무덤덤한 밤이었다.



*



“나 왔어. 요 앞에서 너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 왔..”



신발을 벗으며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투를 흔들곤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화들짝 놀라 백현은 현관 앞에 흠칫 몸을 굳혔다. 나 뭐하냐. 정신 차려. 제가 벗어놓은 구두 한 켤레와 그 흔한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거실. 좋아하지도 않는 아이스크림을 반가운 마음에 사 들고, 퇴근 후 기다릴 너를 생각한 기계적인 퇴근 길. 그 순간들. 그래, 우리 헤어졌지. 우리 이렇게 늘 함께였는데. 기억과 습관이란 참 무서웠다. 무의식 저편으로 저를 잠식하는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 주방으로 향한 백현이 물을 틀어놓고 아이스크림을 모조리 흘려 내려 보냈다. 내 기억도, 감정도 모조리 씻겨 내려가도록. 아무 것도 남지 않도록.


변백현의 안에서 웅크린 도경수가 모두 씻겨 내려가도록.



*



“헤어질까.”

“..”

“헤어지자.”

“..그래. 그럼.”



알고 있었다. 우리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잦은 싸움은 감정이라도 남아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한 톨이라도 서로에 대한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자꾸만 채근해 다투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싸움마저도 서로를 방관하며 서서히 줄어들고 있을 때였다. 어쩌면 조만간 이 곳을 벗어날지도 모르겠다 싶어 두어 달 전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계약해 두었다. 백현이 이 집에 들어오지 않던 시간동안 경수는 조금씩 물건들을 정리했다. 따로 내어 둔 집의 살림을 마련해야 했으니 저 또한 ‘우리’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나날이 길어졌다. 사이는 점점 메말랐고, 지독하게 덤덤한 이 밤은 길었던 연애를 끝내기에 적합했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서로가 너무도 염원하고 있었던 이별이라서 그런가. 밥도 술술 잘 넘어가 다른 때 보다 더 잘 먹은 기분이었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 거실 한 켠 치워두었던 캐리어를 끌고 침실로 향했다. 스킨, 로션, 향수 들을 챙기려고 협탁을 보는데, 다 같은 걸 쓰고 있어서 그런가 뭐가 제 것이고 백현 것인지 모르겠어 경수는 한참을 갸웃거렸다. 양도 비슷하게 남아있네. 이름 써 둘걸 그랬나. 똑같은 건데 뭐 어때.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어 챙기고 서랍 속 남아있던 옷가지들을 챙겼다. 지난 봄 정리 해 놨던 겨울옷 미리 가져다 놓았던가. 그것도 섞여 있나. 뭐, 남은 게 있으면 백현이 알아서 버리겠지. 없다면 새로 사면 그만일 터.


미리 정리해 둔 것이 꽤나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보다 정리할 짐이 많지 않아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칫솔과 면도기만 들고 나온 후 짐정리는 아주 간단히 끝마쳤다. 캐리어의 바퀴 그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울리고, 백현은 여전히 식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묵묵히 밥그릇을 비우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두다 집을 나섰다. 소리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조용히 나선 채 현관문이 완전히 닫히자 참았던 숨을 쉬듯 경수가 작별인사를 내 뱉는다.



“사랑했어. 지난 5년 아주 많이.”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도경수를 열렬히 사랑했던 변백현을 아주 많이 사랑했어.


*


“야, 나 오늘 또 넘어졌다 요 앞에서? 흉지겠.... 아 나 뭐하냐.”


넘어져 생채기가 난 종아리를 쳐다보다 정신 차린 경수가 양 볼을 톡톡 쳤다. 이 집엔 네가 없어. 너는 모르는 ‘나’만의 집이니까. 외주 계약을 따내고 백현에게 자랑해야지 하는 생각에 곧장 달려오다 기어코 넘어지고, 집에 와 백현부터 찾는 것이 무척 꼴사나웠다. 습관이 이렇게 무서웠나. 헛웃음이 나온다. 우리, 남들이 말하는 ‘쿨’한 정리 한 것 아니었나. 눈물도 한 점 나지 않는 이별이었는데, 왜 이토록 오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건지.


퇴근길에도 긴장하지 않으면 평소대로 같이 살던 그때의 집으로 향하려는 발걸음에 어찌나 심장이 떨어지듯 놀라는지. 경수는 상처가 난 곳을 흐르는 물에 씻어 내리면서 따끔거리는 이것들이 모두 어서 낫길 빌었다.


생채기마냥 따끔거리는 변백현이 어서 빨리 제게서 씻겨 내려갔으면.


*


추억이 되니 이제야. 시간이 가도 서로의 기억에.

눈부셨던 네가 , 그리고 내가 함께 있어.

언제나 서로의 곁에, 그리고 앞에.


*


아주 깊은 꿈을 꾸었다.

우리의 방황이 끝나 돌고 돌아 되돌이표처럼 서로에게 다시 돌아오는 그 순간을.

아무리 흘려보내도, 씻겨내려도 웅크린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무덤덤한 그 밤이 지나고 우리는 그때처럼 무덤덤할 수 없었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아린 밤들이 계속 되었다.


잠이 들면 속삭인다. 영원히, 영원히 사랑해.

어디 있니, 너는 지금.


같은 생각과 함께 잔뜩 젖어 후회로 물든 눈을 뜨면 너무도 보고 싶어 마음을 짓누르는 통증이 찾아왔다. 


이 밤이 지나면 달려가겠지. 네게로, 내게로.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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