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의 사망 소식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바다는 거칠어졌고 폭풍이 치기 전에 새로운 오래된 인어가 수장 자리에 서며 소란은 잦아든 것 같았다.

새로운 수장은 젊은 여자의 모습을 벗고 늙은 여자의 모습으로 인어들 앞에 섰다. 여러 해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수장이 인사를 하는 순서가 돌아와 드디어 새 수장과 마주쳤을 때, 수장은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그런지 조금 귀찮은 표정으로 인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사이에 적금색 머리카락이 섞여 있는 새 수장은 주름살로 인해 눈이 쳐져 보였지만 굳게 다물린 입술엔 특유의 다부지고 옹골찬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황금색 꼬리 비늘을 내버려 두며 작은 눈에 들어찬 새까만 눈동자로 관중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장이 입을 열었다. 수장의 초음파는 까칠하고 딱딱했다. 또 어딘가 말투가 이리저리 툭툭 튀는 경향이 있었는데 인어도 지역 방언이 있는 것 같았다.

[나 메리는 수장직을 일임했고, 그 직함으로 인해 바다의 색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살인어 사건에서 범인이 이쪽 출신의 파란 비늘을 가진 인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재희는 바닷물을 삼켰다. 땀 대신 짙은 염분이 피부 밖으로 빠져나갔다. 새로운 수장의 눈이 재희와 맞부딪쳤다.

[그리고 파란 비늘의 인어가 똑같은 비늘 색의 어린 인어를 협박해 인어사회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수장을 단호하게 시선을 거뒀다. 재희는 아가미 호흡을 몰아쉬었다.

[우리는 파란 비늘의 수화를 잡을 겁니다. 수화는 유력한 범인이니까요.]

수장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마쳤다는 듯 꼬리로 거칠게 물을 가르며 나아갔다. 재희는 멀어지는 빛의 잔상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수장이라는 존재가 제일 거슬린다. 인어를 죽이면 수장이 바로 눈치챌 테니까. 재희는 너무 큰 위험부담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수장이 수화의 위치를 알아챘다는 것에 당황한 것도 있지만, 수장을 죽인 이유는 수장의 능력이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벌어질 혼란을 틈타 수화의 눈앞에서 일을 치를 생각이었다. 이렇게 출혈을 빠르게 메꿀 줄은 몰랐다.

조금 자중해야 될 때다. 몸을 바짝 엎드리고 도약의 때를 기다렸다. 수화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게 가장 불안한 단점이지만, 하는 꼴로 봐선 독버섯을 주워 먹어도 살아남을 것 같다.


수화는 정해진 고독에 익숙하게 굴복했다. 끝없는 기대보단 정해진 결말이 더 나았다. 수화는 입 밖으로 진주 조각을 토해내었다. 날카로운 비늘은 잘만 삼키던 몸이 이런 반응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수화는 제 파란색 비늘은 꼬리에서 떼어냈다. 떨어진 자리가 부어오르며 피가 흘러내렸다. 익숙해진 고통이었다. 그는 바다를 향해 비늘을 던졌다. 이제 비늘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그래,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진 거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며 비웃고 책잡던 눈빛이 전부 사라진 거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직도 수화의 목을 죄고 있었다.

수화는 꼬리를 물에 담갔다. 물은 여전히 수화를 반기고 있었다. 그래, 어서 오렴. 어서 와. 너는 영원히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나를 미워할 수 없어. 바다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제 상처를 어루만지고 인자하게 미소짓는다. 하지만 바다에게 수화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도 좀 더 노력하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한 걸지도 몰라.'

머릿속이 차분해지자 떠오르는 건 후회뿐이었다. 수십번이고 실망하더라도 늘 '그래도' 가 등 뒤를 따라붙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작은 기대 하나로 버텨왔다. 그니까 바다를 사랑하는 인간을 익사 시켜 인간의 기억이 남게 한다면 전 수장님의 영향이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화를 내는 건 아주 잠시일 거라 생각했다. 재희가 가장 증오하는 방식으로라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바다를 느끼게 하며 공감받고 싶었다.

결국 절망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살면서 그렇게 큰 걸 바라진 않은 것 같은데.

수화는 꼬리를 두 다리로 바꿨다. 처음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전 수장님의 허가로 육지 위에 나왔을 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발을 한 번 디딜 때마다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수 십 번 넘어지며 걸음마를 연습했다. 그때 전 수장님과 왔던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수화는 전 수장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쉬지 않고 걸음마를 연습했다. 마침내 열 걸음을 떼는 동안 넘어지지 않자 전 수장님은 큰소리로 웃으며 기뻐해 줬다.

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망쳤다 해도 전 수장님을 탓할 수 없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누가 자신에게 그만큼의 애정을 쏟아 부어줄 수 있었을까. 전 수장님은 칭찬 뒤에 바로 다리를 다친 수화를 꾸짖었지만 꾸짖음따윈 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 꼬리가 나을 때까지 전 수장님은 수화를 바다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했지만.

정말 죽었구나. 수화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는 처음 걸음마를 배웠던 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하나 발을 디뎠다. 어느새 찾아온 가을이 나뭇잎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수화의 바닷물 세례를 받은 나무 몇몇 개는 시름시름 앓으며 새까매진 잎끝을 아래로 말았다. 수화의 맨발에 조금 이르게 떨어진 낙엽이 밟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가을바람이 느리게 걷는 수화의 등 뒤를 성급하게 밀었다. 비틀거리던 수화는 앞으로 넘어졌다. 자르지 못해 수화의 가슴께까지 자란 머리카락이 그의 시야를 새까만 장막처럼 가렸다.

수화는 오른쪽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은 온통 고요한 바람 소리뿐이다. 진한 은행 냄새와 짠 바닷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킬 것 같이 강렬하게 퍼지며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뭉그러트렸다. 수화는 물속에 있는 것처럼 뻐끔거리는 아가미를 힘주어 닫았다.

재희는 단풍이 전부 질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육지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바다와는 달리 덧없었다. 바다에는 시간이 없다. 기나긴 어둠 속에 어둠이 겹겹이 덮여있을 뿐. 하지만 육지는 시간을 사랑했다. 오죽하면 난파선마다 시간을 재는 장치가 달려있을 정도였다. 대부분 침수하는 과정에서 전부 망가졌지만.

수화는 시간이 싫었다. 시간에는 타인의 의사가 들어갈 수 없다. 제멋대로 멀리 달아나면 붙잡을 수 없다. 먼저 달려가며 재촉할 수도 없다. 결국 모든 일이 과거에 있던 추억으로 끝나버릴까 두려웠다.

재희마저 시간을 핑계 대며 자신을 이곳에 두고 영영 잊어버린다면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누가 기억해줄까. 영원히 정해진 고독에 묻힌 채 살아있는 시체처럼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수화는 제 목을 움켜쥐고 목에 힘을 주었다. 작은 비명 같은 목소리라도 나온다면 이곳을 지나는 인어 한 명에게라도 눈에 띄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인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외로움을 나누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친구가 되는 건 뭘까. 친구가 생기면 친구가 자신을 아껴주는 만큼 자신도 친구를 아껴줄 수 있을까? 만약 자신이 너무 서툴러서 친구가 지친다면? 재희에게 했던 모든 호의가 무시당했던 게 떠올랐다. 외로움에 너무 익숙해져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아예 잊어버렸다면 과연 그런 기회가 와도 친해질 수 있을까? 거부당한다면? 수화는 제 불안을 마음속 심연 속으로 꼭꼭 감췄다.

수화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고민을 하든 누군가 대화를 나눌 상대와 마주치면 방긋 웃어버리고 말 거란 걸.

제 안에서 구렁에 빠진 바다뱀처럼 머무는 목소리를 꺼내주려 고군분투하던 수화는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인어의 특유의 짠 비린내가 사방에서 섬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수화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눈치채고 섬 가운데로 뛰어갔다. 섬의 중심엔 거대한 화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번 용암이 흘렀던 U자 곡엔 바다에서 들어온 물이 졸졸 흘러 염호로, 다시 바다로 빠져나갔다. 수화는 강물 속으로 깊이 잠수해 모퉁이에 몸을 가까이 붙이고 비늘의 형광작용을 지운 뒤 꼬리를 들어 상반신을 가렸다. 물살이 찰랑거릴 때마다 물과 똑같은 색의 비늘이 보였다 감춰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이다. 수화가 인어들의 냄새를 맡았다는 건 인어들도 수화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거니까.

'재희가 말한 건가? 어째서? 말할 거였으면 진작 말했을 텐데 왜 지금?'

수화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처음부터 이런 셈이었던 걸까. 놀랍지도 않다. 재희는 처음부터 그를 싫어했으니까.


재희는 빛으로 가득 찬 눈앞을 노려보았다. 긴장감에 아가미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둠과 더 큰 어둠이 겹친 바다는 단조롭고 자극적이었다. 재희는 반딧불이 같은 인어들의 빛을 따라 꼬리를 헤엄쳤다.

결정을 내리기엔 쉽지 않았다. 과연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걸친다 한들 들키지 않을까? 하지만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홀리는 인어가 줄어들어야 인어들을 없앨 수 있다. 수화는 그저 모든 일을 뒤집어쓸 죄인 일뿐.

난 여전히 인어 '사냥꾼'이야. 재희는 천천히 인어의 무리 뒤로 빠졌다. 숨겨둔 칼을 뽑아 들고 바다를 우회해 염호로 들어간 재희는 수화를 찾아 헤엄쳤다. 곧 까만 머리카락을 해초처럼 출렁거리며 꿩처럼 숨어있는 수화를 발견한 재희는 수화를 어이없이 바라보다 머리카락을 콱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 몸을 반으로 접은 자세 그대로 피라냐처럼 이빨을 드러내던 수화는 재희란 걸 알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방실방실 미소지었다.

가끔은 수화가 정말 바보가 아닌지 헷갈리곤 한다.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재희는 전 수장을 죽였던 칼날 조각을 수화에게 던져주었다. 작은 촌철은 물의 저항 때문에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점점 가라앉았다. 서둘러 촌철을 잡은 수화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풀고 그것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치렁치렁한 머리부터 어떻게 할 수 없어? 거슬려.]

수화는 재희가 뭐라 말을 하든 보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꼬리를 흔들거렸다. 재희가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자 수화는 그제야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대충 잘라냈다. 수화의 몸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까만 머리카락이 곧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폭죽같이 터지는 물거품들은 멍하니 바라보던 수화는 칼날 조각을 재희의 눈앞에 흔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희는 바로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먼저 온 이유를 떠올리고 수화의 비늘을 하나 붙잡았다.

[하나만 뜯는다.]

수화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재희는 수화의 꼬리 비늘을 위로 꺾으며 뜯어냈다. 짠 피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재희는 터져 나오는 수화의 피거품을 몸에 묻혔다. 이걸로 당분간 냄새를 숨길 수 있을 거다.

[똑똑히 봐. 수화 네가 날 인어로 만들어서 모든 게 망가진 거야.]

수화는 방긋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동자가 재희의 뒷모습을 새까맣게 비췄다.

비늘과 비늘이 부딪치는 소리,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비명, 곳곳에서 수화의 이름이 들렸다. 그렇게 내가 밉구나.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이게 재희, 너 나름의 복수구나. 수화는 눈을 감고 재희의 모든 것을 다른 감각으로 느꼈다. 넌 지금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증오하고 있을까. 수화가 바랐던 모든 인연을 작고 날렵한 칼로 끊어내면서 조금이라도 통쾌할까. 수화는 천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나 기쁘다면 같이 기뻐해 줘야지. 수화는 악착같이 날붙이 소리 사이에 들리지 않는 웃음소리를 섞었다.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며 무수한 물거품이 흩어졌다.

바다 위는 단풍이 진 듯이 붉게 물들었다.




외상(비늘)은 감춰도 감정(진주)는 감출 수 없는 법이지요.

결국 저지르고 말았소..! 재희!!!

글 드림

眞 宵香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