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허기가 졌다. 자려고 누운 이불 위에서는 폰만 만지작거릴 뿐 잠이라곤 비만치 오지 않았다. 메말라서 그렇다. 헛헛하니 쌉싸레한 마음이 괜시리 고독해서 그렇다. SNS를 봤다가 소셜 큐레이팅 서비스를 들어갔다가 웹툰 서비스를 들어갔다, 나는 지하철의 행상인처럼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잤으면 나았을 것을. 그랬다면 혹여나 꿈에서 너를 그냥 보고 말았을지 모르지 않은가. 그랬다면 적어도 내가 이 늦은 시간에 외로움에 찌든 문자를 네게 하지는 않았겠지.

 

-

 

“안녕하세요, 이번에 조별 과제 같이 하게 된 K라고 해요.”

 

햇볕이 정말 색감이 예쁜 5월이었다. 두 번째 프로젝트였고, 공부에 별 흥미가 없던 남자는 조별 과제라 한들 별 관심이 없었다. 남자는 언제나처럼 낮잠 자기 좋은 창가 옆 셋째 줄에 앉아 있었고, 여자는 남자 앞에 서 있었다. 햇볕이 아름다운 5월, 햇볕을 받은 여자는 이상하리만치 색감이 예뻤다.

 

“아, 네. 조원은 저랑 그 쪽 뿐인가요?”

“네. 2인 프로젝트라서요.”

 

잘 부탁드려요, 여자는 머리를 귀 등으로 넘기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갈한 손 끝으로 드러난 하얀 목선. 남자는 순간 침을 삼켰다.

 

“전화번호 좀 주실래요?”

“왜요?”

 

남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왜라뇨? 같이 작업하시려면 서로 번호는 있어야죠.”

 

그래, 저 이유인 것이 당연한데. 혼자 응큼한 생각을 하던 게 부끄러워 남자는 급히 핸드폰을 받았다.

 

“J입니다. 12학번 건축과요.”

“아, 동기인 줄 알았는데. 저는 14학번 정보 시스템 공학과에요.”

 

그럼 이만. 또각 또각. 여자가 걸어가는 길 따라 소리가 났다. 둥 둥 둥, 그녀의 걸음은 내 심장과 고유 진동수가 같은 모양이다. 증폭된다. 심장이 점점 크게 뛴다. 남자에게 지나가는 여자의 뒷 모습은 어떤 다른 느낌보다 정갈하다는 게 가장 강했다.

 

-

 

답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의외로 금방 답이 왔다. 머리 맡에서 우웅 울리는 진동이 괜히 설레게 한다. 내용물을 까도 여전히 설렐까. 설레는 구나. 안 자요, 라는 답은 묘하게 섹시하고, 한 발 더 다가서게 한다.

 

볼까? 아니야, 너무 노골적이야. 보고 싶어. 이건 너무 찌질한데.

 

메시지를 지웠다 썼다 하는 동안 핸드폰이 뜨끈하게 달궈졌다.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이 시간에, 그것도 너에게.

 

[우리 집으로 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 우효가 Teddy bear rises에서 그랬듯이.

 

-

 

“음... 저는 작년이랑 똑같은 프로젝트 나올 줄 알고 소스 받아놨는데 교수님이 바꾸셨네요.”

 

둘은 학교 앞의 카페에서 첫 회의를 했다. 클류치, 학교 사람이 꽤 많이 다니는 카페이다. 여자 앞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는 물방울이 맺혀 흘렸다. 애초에 남자는 회의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홀짝 홀짝 마시던 아이스 카페 모카는 얼음만 덜그럭거린지 오래. 여자는 과제 안내가 적힌 프린트를 보며 볼펜 끝을 물었다. 오렌지 레드, 남자는 문득 저 입술에 애플 민트 잎 하나를 얹는다면 꽤나 색이 먹음직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니까 우선은 기업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3년 동안 주가가 5% 오른 기업이랑, 반대로 떨어진 기업을 찾아야 하는데... 각자 3개씩 조사해 오고, 다음 회의 때 추리기로 해요. 저기요, 선배. 듣고 있어요?”

“네? 네, 네. 듣고 있습니다.”

“다음 회의 때까지 뭐 해오셔야 하는데요?”

“아, 음...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의 눈썹이 잠깐 찡그려졌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매니큐어가 발라진 검지로 아랫입술을 긁었다. 묘하게 차가운 눈이라 남자는 긴장했다. 그리고 역시나의.

 

“이 과목이 어떤 의미신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전공 필수라 중요해요. 협조해주시면 고맙겠어요.”

 

말씀드려봐야 잊어버리실 것 같으니 나중에 문자로 따로 보내드릴게요. 여자의 눈은 고도가 높아져 있었다. 여자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기분이 상한 티가 역력했다. 도도하게 홱 돌아서 여자는 걸어 나갔다. 또각 또각, 무슨 테마 비지엠이야. 남자는 픽, 웃어버렸다. 아 미쳤나봐, 왜 저게 귀엽지? 남자는 갑자기 여자가 보고 싶어졌다. 얼굴에 점은 몇 개인지, 눈꼬리는 쳐졌는지, 올라갔는지, 머리 가르마는 시계방향인지 아니면 반시계 방향인지 그런 게 궁금한 척이라도 할까. 아니다, 그냥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할 참 이였다고 하지 뭐. 급하게 여자의 소리가 걸어 나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남자는 코 앞 열 보에서 발을 멈췄다. 어떤 걸 핑계로 해서 한 번 잡아보려 했던 여자의 정갈한 손은 이미 다른 남자가 다정하게 잡고,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이 되고 만다. 기형도가 그랬듯이. 게임은 쉽지 않다. K가 보낸 왜요? 라는 답에 나는 새로운 퀘스트를 받은 사람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왜긴 왜야, 내가 이 시간에 널 왜 집으로 부르고 싶어하겠냐. 뻔히 답을 알고 있을 텐데 너는 발을 뺀다. Мне нужен ключ. 니가 원하는 게 뭔지 나는 늘 몰랐었다. 그리고 지금도 네가 원하는 대답을 나는 알지 못한다.

 

[별로 건전하지 못한 이유로.]

 

어차피 너나 나나 둘 모두 알고 있는 이유일텐데 쓸데없이 둘러댄들 뭣하겠니.

 

[알았어요.]

 

그런 네가 좋다. 그냥 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은 제일 크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정갈한 너의 대답은 내가 또 한 발 더 내딛고 싶게 한다.

 

 

 

 

02.

 

“발표는 제가 할게요. 질의응답을 맡아주세요.”

 

정말 한결같네. 남자는 입가로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원래 저런 성격일까, 내가 그렇게 능력 없어 보이려나? 묻고 싶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여자의 표정은 남자의 입을 막았다. 남자도 굳이 애인이 있는 사람을 건드릴 마음은 없었다. 궁금한 건 그냥 이대로 묻어 버려야지, 쓸데없는 사감과 함께.

 

그리고 발표날. 피피티는 메일로 공유받은 상태였던 터라 미리 옮겨 두었다. 늦게 오나 싶었는데 교수님이 들어오신 후에도 여전히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돌겠군. 남자는 이런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괜히 웃음이 났다. 한편으로는 여자는 수업이 끝나면 얼마나 더 난처해할까 생각하니 더 우스웠다. 그러나 저러나, 발표 순서는 돌아왔다.

 

미쳤어, 미쳤어, K, 너 미쳤어!! 하필 엘리베이터는 만원으로 코 앞에서 닫혔다. 곧바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긴장되는 마음에 늦게까지 발표자료를 보다가 알람도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자버렸다. 어떻게 준비한 건데! 눈물이 비죽 나왔다. 늦게라도 가면 조금 깎여도 다시 발표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여자는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강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뒷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여자의 눈에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과 제스쳐로 물 흐르듯 발표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자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원래 자신이 앉아 있어야 할 대기 의자를 가리켰다. 여자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세 번은 더 심호흡을 하고 태연하게 앞 열 의자에 앉았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질의응답은 14학번 정보시스템공학과 K 학생이 맡아주시겠습니다.”

 

-

 

K는 내 자취방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도어락이 열리고 소리가 따라 들어온다. 또각 또각.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왔네? 라며 K를 부른다. K는 자연스럽게 매트리스 위에 앉는다.

 

“내가 어떤 목적으로 널 부르는 줄 알고 오냐?”

“어떤 목적인데요?”

 

K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짧은 면 소재의 반바지와 브이넥의 헐렁한 반팔티. K는 빤히 나를 쳐다본다. 늘 그렇듯 나는 너의 저의를 알지 못한다. 생각이 복잡해지는 너의 차가운 눈빛. 심장이 섬찟해지고 목덜미부터 등줄기를 타고 서늘함이 흐른다. 짜릿한 설렘이다. 더 이상의 복잡함은 그만. 나는 곧바로 K의 입술을 덮쳤다.

 

늘 그렇듯 K는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

 

-

 

“선배, 진짜 고마워요. 정말 선배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질의응답에서 대단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고 다행히 둘의 발표는 교수님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K로서는 죽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시간 맞춰 뛰어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후배님.”

“그 동안 무례하게 대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만 앞서서...”

“고마우면 다음에 술이나 사줘요.”

 

남자의 말은 길 가다 동창을 만나 ‘다음에 밥이나 한 번 먹자’와 같은 뉘앙스였다. 남자가 놓친 것은 첫째, 여자는 농담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고 둘째, 빚진 건 반드시 갚는다는 것이었다.

 

“.....즉흥적이라 해야할까, 결단력이 좋다 해야 할까...”

“시기적으로도 오늘 해야 맞죠! 프로젝트 끝난 기념으로, 짠!”

 

말이 나오자마자 여자는 남자에게 오늘 저녁 어떻겠냐고 물었고 별 약속이 없던 남자는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저녁 술 약속 시간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클류치에 앉아 있었다.

 

“여기가 그래도 낫죠? 밤에는 술도 팔고, 학교에서도 가깝고.”

“저는 좋습니다. 얻어먹는 처지에 뭘 따지겠습니까.”

“싸고 좋잖아요. 그리고 말 놓으셔요. 너무 늦게 말한 감도 있지만, 그래도 말 놓으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여자는 유자맥주를 시켰고 남자는 핫초코에 럼을 추가해 마셨다. 알콜이 들어간 여자는 차가운 기가 많이 빠지고 말이 많아졌다. 남자는 어느 정도 사심을 뺀 상태였다. 생각보다 여자와 남자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남자는 여자가 어느 정도 친해졌다 생각했다. 대화가 잘 되는 사람과 여름밤의 시원한 대화는 청량했다. 여자는 톡톡 쏘는 매력이 있었다. 독특한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애인 얘기를 한참 했다. 그러다 전 애인 얘기를 또 한참 했다. 남자는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다. 별로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재밌었다. 전 애인 얘기를 한참 하던 여자는 이젠 자신이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난다는 얘기를 툭 꺼냈다.

 

“에? 둘은 알아?”

 

여자는 볼이 빨개져 있었다. 취한 건 아니였다. 원래 얼굴이 잘 빨개진다고 말했다. 여자는 아까의 수다스러운 모습은 어디에 뒀는지 고개를 숙이고 퍽 말이 없었다. 한 1분 쯤 지났을까. 전 애인은 알고 만나는 거에요, 우물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푸흐흐 웃어버렸다. 그래도 지 잘못한 건 아나보네.

 

“둘 다 정신적으로 좋아하는 거야?”

“사실 전 애인은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잘 하거든요, 그거. 여자는 한 쪽 손으로 벽을 만들고 속삭였다. 이번엔 둘 모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남자는 진심으로 유쾌해졌다. 아, 이런 사람 처음이야. 말도 안되게 매력적인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사심은 아니었다.

 

“니가 좋으면 됐지. 물론 지금 애인에게 예의는 아닌 것 같다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안 들키면 되는 문제인가 싶긴 한데... 잘 모르겠네요.”

 

여자는 그러다 한참 두 남자에 대해 말했다. 남자는 또 그걸 듣고 있다 여자의 말을 멈췄다.

 

“너 나한테 이런 거 말하는 거 아무렇지 않아?”

“이상하게 오빠는 믿어도 될 것 같거든요. 이렇게 편하게 말해지는 사람 처음 봐요.”

“내가 이 얘기를 너 남자 친구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남자는 짖궂게 여자를 놀렸다. 순간 여자는 얼음. 얼이 빠진 바보같은 얼굴로 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야, 안 그럴거죠...? 안 그럴 거잖아요?”

“글세, 난 모르겠다.”

“뭐야, 그럼 오빠도 비밀 하나 말해줘요.”

 

남자는 턱을 괴고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사실 굳이 비밀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여자의 귀여운 요구를 남잔,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좋아, 하나만 딱 말해줄게.”

“말해줘요.”

“음. 사실 나 아직 동정이야.”

 

여자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만,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아, 생각보다 쪽팔리구나.

 

“그러니까, 아직 여자랑 안 해봤다고.”

 

여자가 폭소를 한다. 그 나이 먹고 아직도? 라는 투다. 남자는 푹 시무룩해졌다.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죠, 라면서 베이스에는 웃음이 깔려있다.

 

“야, 나도 안하고 싶겠냐. 건축과가 어지간히 바빠야지, 연애할 시간도 없어.”

“와 비겁한 변명이다. 내가 아는 건축과 중에 연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 몰라. 잘못한 건 아니잖아.”

“고자는 아니죠? 아니면 게이라던가?”

 

남자가 여자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너 함부로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

“그럼 무성욕자?”

“야, 나도 여자랑 하고 싶어.”

 

아 쪽팔린다. 남자는 말을 뱉어놓고 얼굴을 가렸다.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쪼그만한 게 쓸데없는 말까지 내뱉게 만든다. 남자는 민망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지 머리를 굴렸다. 화장실 간다하고 내뺄까, 민망해 죽겠네. 오히려 여자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빙글빙글 웃고 있기까지 했다.

 

“나랑 할래요?”

“뭐?”

“여자랑 하고 싶다며.”

 

럼이 들어가 슬슬 취기가 오르던 게 확 깨버렸다. 남자의 삐뚤어진 눈과 여자의 영문 모를 눈이 마주쳤다.

 

 

-

 



 




02

 

파아, 담배연기가 날렸다. K는 이불을 끌어올리며 내게서 돌아누웠다. K는 담배연기를 싫어한다. 그렇지만 나는 K와 섹스를 한 이후에는 늘 담배를 핀다.

 

“안 씻어?”

“귀찮아요.”

 

아직 담배가 반이 남았지만 재떨이에 비벼 껐다. K가 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K의 등을 보고 누웠다. 옹송그려 누워있는 등이 작았다. K의 등은 여드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런 모습마저 정갈한 K를 그대로 담고 있어 새삼 놀라곤 했다. 뒤에서 K를 감싸 안았다. 몸 끝이 차다. 속이 쓰다. 나는 K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할 수가 없다. 뭐랄까- 정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 자격이 없어서.

 

“또 할래요?”

 

K는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칼을 핥는 늑대의 기분과 같을 것이다. 어찌 됐든 너를 안는 건 좋다. 내 손 끝에서, 내 몸 아래에서 달뜬 숨과 발개진 볼과 찡그린 미간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좋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그 순간만큼은 네가 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기분이 좋다. 네 우위에 있는 기분이 좋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냥 네가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손 끝에 보드라움이 얹어진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그림을 그리듯 길을 낸다. 그런데 풀릴 듯 하면서 풀리지 않는 이 애매함은 뭘까. K와 나 사이에는 둘 모두 언급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수면 위로 데려오지 않는다. нам нужен ключ. 우선은 지금 내 눈 앞의 너를 안을 뿐.

 

-

 

다음 날 아침, 술에서 깨고 남자는 눈을 뜨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차라리 기억이 없었다면 마음이 좀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 거기에 옆에 누워있는 여자까지. 남자는 머리가 아팠다. 돌겠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되겠다, 진정 좀 하고 와야지. 남자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여자가 깨지 않게 조용히 베란다로 나갔다.

 

니코틴이 몸에 퍼지고 정신이 차가워졌다. 방 안을 힐긋 보니 여자는 아직 자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군. 아까의 ‘돌았군’ 보다 훨씬 덜 심각하게 남자는 중얼거렸다. 아무 생각없이 숨을 들이쉬다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담배를 떨어뜨렸다. 필터 끝까지 담배가 닳아있었다. 쯧, 혀를 차곤 다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또다시 한 모금. 남자는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첫 번째, K가 꽃뱀이라 나에게 돈을 요구한다. 두 번째, 알고보니 K는 나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세 번째, 여자도 술에 취해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뱉은 말이었다. 네 번째, 그리고 뭐가 또 있을까... 남자는 또다른 경우의 수가 없을까 생각하며 담배 끝을 툭툭 털었다. 그런데 뒤에서 순간 따뜻한 감촉이 있었다.

 

“으악, 뭐야.”

“뭐긴 뭐에요. 나 말고 다른 사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놀라는 바람에 장초를 떨궜다.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발로 꽁초를 비벼 껐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자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중간한 정수리께를 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려나.

 

“어이 J씨,”

 

복잡한 J의 고민이 무색하도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K가 입을 열었다.

 

“아침이나 먹으러 가요.”

 

라고.

 

학교에서 가까운 자취방이라 사람들 눈이 무서운 위치이다. 남자는 괜히 모자를 눌러쓰고 잔뜩 움츠러든 몸을 하고 길을 걸었다. K는 무슨 생각인지 남자의 팔짱을 끼고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해장국집을 가서 뼈 해장국 두 그릇을 시켰다. 이미 해는 높이 떠 있었다. 햇볕은 여전히 좋았고 무성한 나뭇잎 틈새로 쏟아지는 빛은 싱그러운 색이었다. 어제와 아무 다를 바 없다는 듯이 재재거리는 새소리도 똑같았다. 복잡한 J의 사정과는 달리 어제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J는 오히려 이질감이 들었다. K도 다를 바 없었다. 전혀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수저를 놓고 물 잔에 물을 따랐다.

 

“속은 괜찮아요? 술 되게 약한 것 같던데.”

“...럼이랑 맥주랑 같겠냐. 너도 어제 꽤 빨갰어.”

“아 그래요? 나름 어제 되게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K는 아무렇지 않아보였지만 J는 대화 사이사이 찾아오는 침묵이 너무 불편했다. 의도적으로 화제를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문한지 몇 분 되지 않고 금방 해장국이 나왔다. 김이 뽀얗게 오르고 J의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 J는 K의 시선을 피했다.

 

“K, 그 어제는 미안. 내가 술에 취해서 정신없이 그랬던 것 같다. 미안해.”

“별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좋았는데요?”

 

그리고 태연하게 밥을 먹는 K. J는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말도 아닌 말들이 오고 가는 기분이었다. J는 이마를 짚고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무슨,”

“심각하게 생각 안하셔도 돼요. 서로 좋았고,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야, 근데 넌 남자친구 있잖아.”

“So what?”

 

K는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었다. 이제 우리 공범이네요? 그리고 밥이나 먹어요,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뼈를 발라 먹었다. J는 물을 들이켰다. 등줄기가 쌔했다. 우스운 것은 설명할 수 없이 불안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다른 느낌으로 K가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

 

나는 항상 K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사실 물으면 아마 K는 대답해줄 것이다. 우리 사이는 그런 사이었으니. 불문율처럼 K와 나는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서로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불쾌한 진실일지라도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나는 K가 이 관계를 정의해주기를 바랐다. 굳이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K가 내게 우리는 이런 관계다, 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K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내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아요?”

“티가 났어?”

“우리가 보고 지낸지 몇 달 째인데 그 정도도 눈치를 못 채겠어요.”

 

게다가 오빠는 항상 하고 나면 그 얼굴인데. K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K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입으로 자신을 가장하려 하지만 눈으로 자신이 드러난다. K의 눈은 짙은 검은색이라 보고 있다 보면 내가 K에게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걸까?”

“아니요.”

 

꽤나 단호하게 K가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잠깐 설렜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이건 그냥 친구 사이에 손을 잡고 안아주는 일 같은 거 에요. 어떻게 보면 파트너 같은 건가?”

 

파하, 나는 웃음이 나왔다. K도 날 따라 웃으며 내 머리를 쓸었다. 오빠랑 나는 친한 친구같은 사이잖아요? 그렇죠? 나는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K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내 볼을 잡아 늘렸다.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속이 공허해졌다. 바람이 지나다니는 길을 낸 듯이 헛헛하고 썰렁한 기운이 감기처럼 몰려들었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을 때처럼 속에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긁을 수도 없게. 네 말이 틀려서 그렇다. 우린 파트너라고 할 수 없지. 파트너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찾는 것이다. 그렇지만 K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은 적이 없다. 다만, 거부하지 않을 뿐이다.

 

-

 

“오빠 졸업은 언제 해요?”

“이대로라면 2년 후에 졸업할 것 같네. 딱히 학점 수 부족한 것도 아니라서.”

“아아, 고학년 부럽다. 근데 건축과는 안 부럽다. 어떻게 초과학기도 아니고 5년을 다닌대요.”

“나도 몰라. 으, 설계 듀에 기말 프로젝트 2개 겹쳐서 다음 주까지다. 진짜 죽겠어, 아주.”

 

여자는 남자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남자가 그 웃음을 좋아한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좋다 싫다만 알지 여자에 대해 영 숙맥인 남자는 그게 또 좋다고 비식, 웃었다. 아직 남자는 여자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라고 하면 – 좋아하는 감정. 둘 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대화가 잘 통하고 잘 맞는 사이라는 건 사실이니 친하게 지내기 좋은 관계였던 것이다.

 

“바쁘면 나 만나지 말고 할 일에 집중 해요.”

“바빠지면 니가 그렇게 안 해도 그렇게 할 거야.”

 

남자는 쿨 한 척 했지만 사실은 조금 섭섭했다. 여자를 시간을 쪼개 만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는 행동들이 하루 중에 어느 정도 비중이 있어지고 중요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일부러 여자에게 연락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 과제하느라 바쁜 척, 신경 안 쓰는 척, 여자가 자신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닌 척. 억지로 만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남자에게 도움은 됐다. 남자는 과제에 푹 빠져 있었다.

 

야작을 하다 밤이 늦어졌다. 과방에서 설계를 하다 도저히 머리가 지끈거려 진행이 안되자 남자는 잠깐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늦은 시간이었다. 입 안의 텁텁한 실내 공기와는 맛이 달랐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지, 하고는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밤은 소리가 더 잘 들린다. 남자는 벤치 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다른 데로 가야지, 하다 발을 멈췄다. 아는 목소리였다.

 

K. 클류치 앞에서 봤던 K의 옆 사람과는 다른 사람과 K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 저게 전 남자친구구나. 남자는 침을 꼴딱 삼키고 재빨리 뒤돌아 걸었다. 마주치기 민망한 상황이었으니까.

 

딸꾹.

 

남자는 그만 소리를 내버렸다. 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거잖아? 남자의 딸꾹질 소리와 동시에 벤치 쪽에서 들리던 인기척이 조용해졌다. 엇 시발, 도망가야겠다. 남자는 서둘러 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딸꾹, 아 근데, 딸꾹, 내가, 딸꾹, 잘못한 건 없는데, 딸꾹, 왜 도망가? 딸꾹. 과 방에 들어와 남자는 헐떡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급하게 물을 마시자 그제서야 딸꾹질이 가라앉았다.

 

시발, 좆 같네.

 

남자는 괜히 물이 든 페트병을 집어던졌다. 내가 왜 짜증을 내지? 남자는 스스로 물었다.

 

그거야... 음, 걔네 때문에 내가 담배를 못 폈으니까.

 

-

 

“K, 너는 그런 관계들이 좋아?”

“좋으니까 하죠. 싫으면 제가 굳이 왜 하겠어요?”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물어본 내가 도리어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K는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가볍게 모든 것이 생각에서 지나쳐 버린다. 혹자는 장점이라 하지만 나는 K의 그런 부분이 무서울 때가 많았다.

 

“나는 좀 걱정된다. 너 그러다가 상처받을까봐.”

“그런 걸로 상처받는 사람 아니에요.”

 

벽을 보며 돌아눕는 K의 등은 마치, 그렇다 한들 오빠가 걱정해줄 부분은 아니죠,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주 차갑디 차갑다, 마치 네 손 끝처럼. 나도 너만큼 모든 것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너와 얼마나 다른지를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잠깐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자 K는 몸을 뒤척이다 다시 나를 마주보고 눕는다.

 

“내가 상처받는다 해도 그건 내가 감수해야죠. 내가 나쁜 년인데.”

“그런 말 하지 마.”

“그럼 내가 나쁜 년이 아니에요?”

“설사 네가 사회적인 시선에서 나쁜 년이라 하더라도 너만큼은 스스로한테 당위성을 가지라고. 자기 비하 하지 마.”

 

듣기 괴로워. 이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왜 듣기 괴로운지 아직 잘 몰라서.

 

“오빠가 보기엔 내가 어떤데요? 오빠가 보기에도 나 정말 나쁜 년 아니에요?”

“나는 네가 지독하게 외로워 보여. 외로워서 그러는 것 같아. 그래서 안쓰러워, 가끔은.”

“외로운 건 아니에요. 지금 남자친구랑 관계는 충분히 좋아요. 알잖아요?”

“그럼 너는 왜 그러는데?”

“재밌잖아요.”

 

네 입술은 너의 속마음을 감추려 하지만 네 눈은 진실을 말한다. 너는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리 사이의 이런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시작은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 깨지는 것이었다. K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늘어갔다. 나는 불안함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말하는 순간 이게 어떻게 될지 감 잡을 수 없었다. 파도가 닿는 거리 안의 모래성 같은 관계라 할지라도 나는 끝까지 버텨내고 싶었다. 정상이 아닌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이기적인 마음으로라도, 비루해지더라도 너를 곁에 두고 싶었다. K, 넌 죄질이 나빠. 그치만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선 나는 그것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을.




03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헐떡이던 숨은 가라앉고, 딸꾹질도 그쳤는데 정신이 없었다. 잔뜩 어질러져 있는 프로젝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썅,”

 

남자는 화가 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화는 남자를 더 못견디게 만들었다. 남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노트를 바닥에 던졌다. 갈색빛 소음이 터졌다. 여전히 속에서 부글거리는 무언가는 풀리지 않아, 남자는 의자를 발로 꽝 차 버렸다. 와장창. 과방이 엉망이 된 다음에야 남자는 진정이 된 눈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끙. 남자는 눈을 꾹 감고는 투덜거리며 과방을 정리했다.

 

“맞아, 나 찌질해.”

 

다시 그 벤치 앞. 두 사람은 없고 남자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뻐금거리고 있었다.

 

“원래부터 찌질한 건 어쩔 수 없잖아.”

 

캘록, 연기를 잘못 뱉고 남자는 숨이 넘어갈 듯이 기침을 했다. 정신 없는 사이 쥐고 있는 담배에서 나는 연기는 눈으로 들어가고, 속은 뜨겁고, 기침은 계속 나고. 담배 연기가 매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에이씨, 쪽팔리게 이게 뭐야.

 

남자는 홱, 담배를 버렸다. 꽁초의 불씨가 발갛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남자는 터벅터벅 걸어가 꽁초를 꾹 밟았다.

 

“불이라도 나면 어떡하냐.”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꽁초를 비비던 남자의 손에 핸드폰이 잡혔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알림센터를 봤지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습관이 참 무섭다. 남자는 어느새 여자와의 문자기록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손이 전화버튼을 누른 건 실수가 아닌 절박함 때문이었겠지. 늦은 시간이었다. 과연 받을까, 받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의 시간.

 

[여보세요.]

 

그렇지만 여자는 멀끔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지금 나랑 같이 있어줘.”

[음... 저 지금 밖인데요?]

 

여자는 난처하게 말했다. 남자도 물론 알고 있었다. 봤으니까. 같이 있어달라는 것도 어쩌면 도박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승률이 얼마 정도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남자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니가 필요해, 지금.”

[아... 미안해요. 빠져 나가기 힘든 상황이라.]

 

그리고 남자는 졌다. 동시에 남자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여자의 목소리 너머에서 어느 남자의 누구야,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여자는 스피커를 막았지만 여자가 그냥, 아는 사람, 하는 말이 남자는 고스란히 들렸다. 남자는 눈을 감고 하하, 웃었다. 아니, 웃음이 나왔다. 과음을 하면 자연스럽게 토가 나오듯 그렇게 웃음이 속에서 토해졌다.

 

“전 남자친구야?”

 

잠깐의 정적이 있었다. 여자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남자는 불편한 침묵에서 이미 여자의 대답을 읽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보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여자의 눈은 어떤 진실을 말할지 궁금했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자신이 비벼 끝 기다란 담배 꽁초를 내려 보았다. 처량하네, 너나 나나.

 

“잘, 살아. K.”

 

말 그대로 남자는 여자가 잘 살았으면 했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를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공허한 숨의 조각이 없게, 내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그렇게 네가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남자는 답이 오지 않는 전화기를 붙들고 생각했다.

 

[오빠, 내 애인같이 굴지 말아요.]

 

사실 남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가 하는 걱정은, 단순히 친구에게 하는 걱정이라기에는 도가 지나치다는 것.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씨발!”

 

남자는 벤치를 걷어찼다. 그리고 곧바로 저릿저릿해지는 다리를 잡고 그 벤치에 다시 앉았다. 욕 하는 것도 남자는 찌질했다. 남자도 알았다.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인 것은. 전화는 끊겼고, 남자는 도무지 메울 수 없는 마음의 구멍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담배를 피워야 할까, 술을 마셔야 할까, 친구를 만나 그 전 남친 놈 욕을 신나게 떠들어야 할까, 돈을 좀 써서 여자나 안을까, 어떻게 해야 이 헛헛함이 채워지겠니. K,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거니.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음이 나왔다. 이미 뻥 뚫린 마음에서 뭐 더 비울 게 있는지 한참을, 밤이 새 오도록, 오지도 않을 사람이 혹여나 발을 돌려 저를 보러 오지는 않을까 기다리면서 그렇게 눈물을 쏟아냈다. 물론 해가 뜨고도, 다음 날이 되어도 여자는 남자를 찾아오지 않았다.

 

-

 

“K, 오랜만에 나가서 술이나 마실래?”

 

K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K가 눈을 마주치고 빤히 나를 볼 때면 내가 관통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K는 저가 독심술사냐며, 습관일 뿐이라고 했지만 나는 K의 검은 눈이 무서웠다. 읽히는 기분이 들어서.

 

“얘기할 게 있으면 여기서 해요. 굳이 돈 들이고 또 귀찮게 나가는 건 별로인데.”

“진지하게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 이렇게 둘 다 벗고 할 얘기들은 아닌 것 같아서.”

 

K는 심드렁하게 입을 삐죽이고는 알았다며 옷을 꿰어 입었다. 둘 다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K는 손을 잡는 게 익숙했다. 그게 너무 익숙해서 나는 가끔 우리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건 알고 있었다. K는 그냥 그게 익숙할 뿐이다.

 

그리고 K는 장난을 치는 것 뿐이다. 아마 내 반응이 재밌어서 그러는 것이겠거니.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잡고 있던 손을 제 허리에 둔다거나 하는 그런 일. 나는 뻣뻣하고 여자를 어떻게 감싸는지 알 리 없다.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리며 걷고 있으면 K는 자연스럽게 몸을 뺀다 – 폰을 꺼낸다거나 하면서. 그러면 난 K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겸연쩍게 주머니에 손을 넣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럴 때의 K는 어떤 얼굴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자는 어깨를 감싸는 것 보다 허리를 감싸는 걸 좋아해요.”

 

더 폭 안기는 느낌이 들어서 더 안정감이 들거든요. 나만 그런 걸 수도 있지만. K는 고개를 빼꼼 들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좀 더 빨리 했다. 네가 끼를 흘리는 걸까, 끼가 흐르는 걸까. 아니면 내가 가벼운 걸까. 도대체 우리는 뭘까. 정의되지 않은 것을 견딜 수 없는 병이 있다, 내가. 그래서 그런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는 건 허리를 감싸달라는 거에요.”

 

내 보폭에 맞춰 내 옆에 다가온 K가 내 손을 잡아 제 허리를 감싸게 한다. 너는 참, 어떻게 나를 뻣뻣하게 만들 줄 아는 것 같다. 뻣뻣하게? 아니, 딱딱하게.

 

-

 

남자의 과제 듀가 모두 끝났다. 남자는 멍하니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지, 프로젝트가 다 끝나면.

 

“K.”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자 남자는 다시 코 끝이 맹해졌다. 몰라, 생각하기도 싫다. 남자는 몸을 뒤척여 모로 누웠다. 종종 매트리스 위에서 같이 자던 K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한참을 울고 난 이후에야 남자는 제가 화가 난 이유를 찾았다. 본인에게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찌질한 본인에게. 남자가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K는 건축학과 내에서 유명했다. 흔히 말하는 ‘잘 나간다’는, ‘집안이 장난 아니라서 바닥에서부터 굴러야 하는 서민들이랑 다르다’는 건축과 학회장이 K의 남자친구였다. 사람도 많고 관심도 없었으니 알 리가 없었다. 그나마 친한 친구에게 K에 대해 듣고 남자는 멍 했다. 잘 하는 거라곤 공부밖에 없다. 사교성은 떨어지고, 남의 여자를 뺏을 만큼 대담한 성격도 아니다. 심지어 보수적이고 집도 가난하다.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안 보면 좀 나아질까...”

 

남자는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여자를 보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런 이상한 관계에 말려들면 안되는 것이었다. 남자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여자와 연락을 끊고, 얼굴을 보지 않고, 그렇게 서서히 일상에서 여자의 비율이 줄어들다 보면 언젠가는 이유 모를 본인의 화와 외로움과 우울감이 없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

남자는 잠깐 얼굴을 보자는 여자의 문자에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갈증을 앓았다. 하늘과 떠 있는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푸른 구체 속에서 남자는 외롭게 떠있었다. 목이 마른 것이 갈증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아득해졌을 때 여자가, 누워 있는 곳에서 고개를 빼고 바깥을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혀를 내어보라 말했다. 바다가 닿았다. 처음 맛보는 해갈의 쾌감은 아찔했다. 끊임없이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바다를 들이켰다. 갈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같았다.’ 남자가 ‘짜다’는 것을 느끼고 더 마셔봐야 더한 갈증을 느낄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여자는 그런 바다였다.

 

-

 

“그래서- 하려는 이야기가 뭔데요?”

 

K는 주문을 하고 앉자마자 직구를 날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숨을 쉬었다. 당연히 술이 금방 나오지는 않겠지. 남자는 짧게 웃고는 여자를 보았다.

 

“천천히 얘기하자. 아직 술 나오지도 않았어.”

“그래요.”

 

K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카오톡이라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엄지로 스크린을 쓸던 K가 픽 웃었다.

 

“뭐야? 좋은 일 있어?”

“아뇨. 남친이요. 웃긴 얘기를 해서.”

“생맥 2잔입니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얘기하세요.”

 

마침 타이밍 좋게 다부진 몸의 주인 아저씨가 맥주를 우리 앞에 놓았다. K가 잔을 쥐었다. 눈이 없어져라 웃으며 내게 잔을 부딪쳤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요즘 표정이 말이 아니야.”

“짠.”

 

술을 넘겼다. 탄산은 약하다. 잔을 내려놓았을 때 K는 나의 2배쯤 맥주가 줄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벼운 주변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탐색전 같았다. 본심을 숨기고 잽, 잽. 눈으로는 둘 다 언제 스트레이트를 꽂을지 타이밍을 노리는 것 같았다. 피식거리고, 웃음이 터지기도 하면서 유쾌한 듯이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대화가 겉돌고 있어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서론이 너무 긴데요?”

 

K가 잔을 비우고 깡, 책상 위에 맥주잔을 놓으면서 삐뚤어진 시선을 하고 내게 말했다. 기시감은 착각이겠지. 나도 K를 따라 맥주잔을 비웠다. 깡, 나도 똑같은 소리로 맥주잔을 책상에 놓았다.

 

“너 말이야, 너”

 

침을 꿀꺽 삼켰다. K는 내가 좋아하는 눈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벗어날 수가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검은 눈은 깊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다.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 그대로 나는 말을 토해냈다. 입 안이 까끌하니 썼다.

 

“너 왜 나랑 잤냐?”

 

K는 대수롭지 않게 푸흐흐 웃었다. 가벼웠다.

 

“오빠 그 날 있잖아요, 그 때 우리 처음으로 술 마셨을 때.”

 

나는 날 버티고 있는 보트에서 몸을 뺀 상태였다. 푸른 구체를 찢고 나갈 것인가, 머무를 것인가. 내 몸뚱아리의 반절은 보트 밖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되게 불쌍한 얼굴이었어. 막 안쓰럽고. 근데 오빠가 막 하고 싶어 하는 그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였거든요. 짠한 데 그걸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니까 해준 거에요.”

 

 

 

 

 

 

 

 

 

아아.

기분이.

 

 

 

 

 

 

 

“그런 거죠. 초등학교 때 친구가 학습지 다 못 끝내서 쩔쩔 매고 있는데 나는 그게 너무 쉬운 거야. 그래서 내가 친구 학습지를 대신 풀어주는.”

 

 

 

 

 

 

끔찍해졌다.

나는 추락한다.

가라앉는다.

타는 듯한 갈증은 또 다른 생명체처럼 내 안에서 요동한다.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갈증은 덩치를 불려간다.

 

차라리 목마름이 목마름인지 아득하던 그 때가 나았을지도 모른다.



4.

 

  “뭐해? 밥 먹자.”

  “응. 잠깐만.”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 좀 자고 있어, 노트북씨. 노트북을 닫고 의자를 뒤로 빼기 전 멘솔향이 훅 퍼졌다.

 

  “이제 막 일어나려 했어, 인아.”

  “알아. 잠깐 안고 싶어서 그래.”

 

그녀의 얄쌍한 팔이 목을 감고 힘들지 않게 내 등에 고개를 묻는다. 새애새애 숨이 오고가는 촉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잡은 그녀의 손은 냉장고에서 갓 꺼낸 반찬통들 때문인지 조금 차가웠다. 싸늘한 느낌이 싫었다. 만지작거리면서 한기를 풀어주는 것을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저번부터 작업하고 있던 글 쓰고 있던 거였어?”

  “응. 나도 이제 슬슬 등단할 준비 해야지.”

  “흐음, 그 글로 도전하려고?”

  “아니. 이건 본격적인 글 쓰기 전에 연습용으로 쓰는 글이야.”

  “그랬구나.”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밥 먹어야지! 하고 멘솔향이 멀어졌다.

 

그녀는 박하향이 나는 샴푸를 쓴다. 늘 나에게 와서는 ‘냄새 좋지, 멘솔향이야.’ 라고 말한다. 멘솔향이라고 하면 꼭 담배같은데 그녀는 늘 박하향이라는 단어보다 멘솔향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추측으로 그녀도 예전에는 흡연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데워진 반찬 냄새가 기분 좋게 퍼져있다. 오늘 점심은 오뎅 볶음이 꼭 있겠군.

 

  “글 어제 읽어봤어. 재밌더라. J가 K보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뜬금없었지만.”

  “아 그래? 다행이네.”

 

역시, 예상대로의 오뎅볶음. 시금치 무침이 있었던 건 약간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나쁘진 않다. 밥도 적당히 고슬고슬하고, 조명을 켜지않아도 밝은 날도 기분 좋다. 늘 오늘만큼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날이다.

 

  “근데 오빠, 그 글 있잖아,”

  “응, 왜?”

  “오빠 얘기야?”

 

입으로 가져가려던 숟가락이 멈칫했다. 밥 위에, 김치를 얹어서 먹고 있었지. 나는 그냥 그녀를 보면서 씨익 웃어버렸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

  “감정들이 되게 세세해서, 오빠 얘긴가 했지.”

 

나는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려 그냥 웃어보였다. 소설은 소설일 뿐. 그냥 잠깐 그녀가 귀여워보였다. 그녀는 귓등에서 흘러내리는 머리를 잡고 식사를 계속했다. 화장기 없는 약간은 푸석하지만 깔끔한 피부, 쌍꺼풀 없이 둥근 눈망울, 밥 한술 넘길 때마다 혀로 입술을 핥는 저 버릇까지. 기분 좋은 날에는 세세한 게 눈에 들어오는구나. 괜히 사랑스러운 느낌이 좋았다. 웃지 않으려 해도 속에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이 설레는 기분 때문에 내가 힘들게 웃음을 참고 있는 걸 너는 알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고마워.”

  “목선 보이는 게 더 이쁘다.”

  “음, 오늘 나 안 바빠.”

 

나는 픽 웃어버리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그녀는 궁금한 게 많았던 모양이다. 조용히 밥 몇 술을 넘기다 입에 있는 걸 다 삼키지도 않고 내게 물었다.

 

  “그 소설 인물들 이름은 뭐로 생각했어?”

  “응? 처음부터 붙일 생각 없었는데?”

  “왜? 진짜 습작으로만 쓰고 버릴 생각이었어?”

  “이름을 붙인다는 건 좀 더 현실과 닿아 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소설은 소설로만 남겨야지.”

  “하여간, 특이해.”

 

하여간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줬더니 별 말 없이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한다. 밥을 먼저 먹은 그녀가 밥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면서 툭 던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그 K랑 J는 어떻게 되는거야?

 

K랑 J는, 그러게. 그 애들은 어떻게 이야기를 끝내야 할까?

 

-

 

남자는 남자의 생각만큼 화나 보이지 않았다. 술 때문에 붉어진 얼굴이 그의 화를 가렸을 것이다. 여자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문 밖을 쳐다본다. 남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여자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남자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기서 자신이 더 말하지 않는다면 아마 두 사람은 곧 안녕, 인사를 하고 각자의 길을 가겠구나. 남자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너 술 많이 남았다.”

  “배 불러서. 좀 마실래요?”

 

남자의 대답은 없었지만 여자는 제 잔 반절의 맥주를 남자의 잔에 부었다. 거품이 두껍게 올라온다. 남자는 눈두덩이를 지압했다. 졸린 게 아니라, 이건 화. 머리에 열기가 오르고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부숴버릴 수 있는 감정 덩어리를 남자는 꾹꾹 누르고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계의 혼란스러운 감정덩어리를 꺼내봐야 자신만 우스워질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여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표정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끝이겠구나. 말하지 않아도 닿게 되는 결승 테이프처럼, 언젠가 맞게 될 죽음처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끝을 맞고 있었다.

 

그렇지만 남자는 원하지 않았다. 너무 멀리 와버린 시점이었지만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더 가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 남자의 화 아래에 남루한 남자의 조각 하나가 있었다.

 

  “마지막 잔 비우고 돌아가요.”

 

여자는 현명했고, 깔끔했다. 남자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짠, 둔탁한 소리는 남자의 화가 머물러 있는 기관지 어디쯤을 툭, 툭 쳤다. 남자는 책상 아래로 내린 손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그만. 좀 더 버티자. 남자는 절박하게 초라한 자신을 감추려 노력했다.

 

여자는 한 번에 남은 맥주를 비웠다. 그리고 가게를 나갔다. 남자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치고 있었다.

 

  “가자.”

 

이 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버틸 만 했다. 주머니에 담배가 없고, 깜빡하고 라이터도 두고 왔었고, 핸드폰 배터리는 얼마 남지 않고, 그런 소소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어떤 생각에서였는지 남자는 모른다. 어찌됐든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남자에게 말했다.

 

  “아까 우리 술 마실 때 남자친구한테 연락 왔었는데. 오빠한테 고맙다고 다음에 셋이서 밥 한 번 먹재요. 시간 언제 괜찮아요?”

 

남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섰다.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보헴 시가 쿠바나 1미리 한갑만 주세요. 아, 라이터도 같이요. 남자는 겨우 겨우 말하고는 담배를 받아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자를 쫓아와서는 의아하게 남자 앞에 섰다. 남자는 거칠게 담배 비닐을 뜯었다.

 

  “담배 피지마요. 나 담배 냄새 싫어하는 거 알잖아.”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았다.

 

  “놔.”

 

전에 없던 차가운 얼굴로 남자는 여자의 팔을 뿌리쳤다. 여자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제서야? 남자는 금세 두 개피의 담배를 폈다. 여자는 말 없이 남자의 왼쪽에 서 있었다.

 

  “너,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제정신이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나 너랑 잤어. 심지어 아까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했어. 근데 넌, 하하, 조금이라도 니가 나를 친구로라도 존중했다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안 그래? 내가, 내가 너 남친이랑 하하호호 웃으면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 미쳤어?”

 

여자는 남자를 보지 않았다. 남자의 눈에는 핏줄이 오르고 거칠어진 숨이 둘 사이의 정적을 채웠다. 여자는 답하지 않았다. 남자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누르고 있던 남자의 화는 날카로운 가시로 남자를 뚫고 나왔다. 가시는 남자를 상처입히고 여자도 상처입혔다. 남자는 네 대째 담배를 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로등조차 없는 밤 거리에서 나란히, 말없이 서 있었다. 남자가 여섯 개피 째의 담배를 갑에서 꺼낼 때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만 펴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격양된 남자의 목소리에 비해 여자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남자는 담배를 꺼내지도, 다시 넣지도 않고 움직임을 멈췄다.

 

  “줄담배 몸에 안좋으니까, 이제 그만 피라구요.”

 

남자는 담배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찌질해. 그러고 싶지 않지만 너무 찌질해. 하지만 이게 나인 걸. 니코틴이 도는 순간 남자의 화는 물을 끼얹은 듯 차분해졌다. 이유를 알지 못할 때까지 분노는 너무 우습다. 화가 가라앉은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이전 어설픈 모습 그대로 여자의 옆에 서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남자가 담배를 주머니에 넣자 여자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계속 여기 서 있을 건 아니죠? 얘기 더 할 거에요?”

 

그제서야 남자는 여자를 봤다. 울 것 같은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여자의 얼굴. 남자는 자꾸 담배 생각이 났다. 남자는 홑몸으로 해외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분명 수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인데, 남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얘기 더 할 거면, 모텔로 가던가.”

 

여자는 핸드폰을 들었다. 카카오 택시를 부르고 있는 손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핸드폰을 빼앗아 취소 버튼을 눌렀다.

 

  “왜요?”

  “내일..... 내일, 새벽에 예약한 표가 있어. 집에 내려가야 해.”

 

미친 새끼. 남자는 더듬거리면서 말을 내뱉고 자학했다. 분명 치욕스럽게 화가 났음에도 그 순간에 여자를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한 스스로가 한심했고, 그 순간에 내일 예매한 표가 생각나 주저하는 스스로가 병신같았다. 남자는 언제나 그랬듯 행동력이 없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그렇게 재고 따지다 보면 네가 원하는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할 걸? 어렸을 적 누군가가 남자에게 충고했던 단어들이 남자의 기억을 스치고 갔다. 그런들 어쩌겠어. 이미 말은 내 입술을 떠나갔고 그녀에게 닿았는 걸.

 

  “그래요. 그럼 여기서 헤어져요.”

 

남자는 보수적이고 여자는 깔끔하다. 여자는 뒤돌아서고 남자는 여자의 등을 보고 있다. 이전에 비슷한 기억이 있는 듯한 기분은 말 그대로 기분 탓일까. 남자는 상상한다. 여자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여자의 숨을 삼킨다. 하지만 남자는 행동력이 없고 여자는 이성적이다. 저 멀리에서 여자가 코너를 돌아 없어지고서야 남자는 발길을 돌렸다. 바람이 차가웠다. 남자는 처음으로 자신에게서 나는 담배냄새가 역겨웠다. 아마, 다시 만나진 못하겠지. 남자는 홀로 남은 거리에서 중얼거렸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터져나와 알코올의 열기가 남아있는 볼을 식혔다.

 

_

 

  “이 글은 여기까지.”

 

저장하기를 누르고 워드 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바탕화면에 있는 ‘습작.docx’를 삭제했다. 나도 여기까지. 이제 모두 끝. 책상에 팔을 받치고 얼굴을 묻었다.

 

J는 K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는 자신의 열등감을 그녀를 통해 해소했던 거였어. 그리고 K는 그걸 알았지. 왜냐하면 J는 K를 안을 때 옷을 벗지 않았거든. 그건 폭력이었으니까. J는 내재되어 있던 말 못할, 이유 모를 분노를 K에게 풀고 있었던 거야. 현명한 K는 J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그만두기로 해. 그리고 J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 K를 사랑했노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합리화하는 거야.

 

- 그리고 소설은 소설일 뿐.

 

굳이 이야기의 끝을 완성내지 않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실존하지 않는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을 가지고 행복을 논하든, 불행을 논하든 그게 무슨 소용인가. 소설 속의 두 아이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내 사람이 더 중요한 걸.

 


  “인아-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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