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도둑





*


그 현상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본성에서 제일 유래가 오래 되었다던 형제검이었다. 약간의 인상 차이만 빼면 서로 같은 주물에서 찍어낸 듯 비슷한 얼굴을 가진 형제는 오랜 세월이 지나 재회해서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들었다. 그러면서 검이었을 시절에는 하지 못했던 것을 하겠답시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종종 밤에 이루어지는 산책도 그 중 하나였다.

그들은 본채의 서쪽 툇마루 쪽에 따로 꾸며둔 후원을 자주 찾았다. 조경을 위해 따로 심어둔 정원수들과 다리를 낀 연못이 어우러진 곳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경치가 좋았다. 특히 계절이 여름이면, 열대야도 물리치는 시원한 공기가 반갑기 그지없어서 그 날도 그들은 연못의 터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고 했다.

오오쿠리카라는 그 말을 츠루마루 쿠니나가를 찾으러 왔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근처의 복도에서까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츠루마루는 자신이 배정 받았던 본당 청소를 뒷전으로 미룬 채 히게키리와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던 중이었다. 히게키리는 겐지의 두 보검 중 형을 자처하는 칼이었는데, 서로는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고 같은 주인을 모셨다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이상한 곳에서 대범해지는 성격이 일맥상통했다. 그런 부분 덕분에 둘은 오랜 나날이 흘러 재회한 지금도 서로 친근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친분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오오쿠리카라는 놀란 기색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그 수다는 방금 시작한 게 아니었을 듯 싶었는데, 정말로 주위에는 몇 번 바닥을 훔치다 말았을 걸레가 반쯤 구겨진 채로 버석버석 말라가고 있었다.

청소는 뒷전으로 미루었음이 분명한 증거 앞에서 오오쿠리카라는 지금이라도 그대로 발길을 돌릴까 고민했다. 양 손에 든 쟁반 위에 얹힌 냉보리차가 괜히 아까워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운데 지금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성정이 세심한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가 기껏 준비해준 음료는 아무래도 저 둘에게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간 너머의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관찰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른 채 대화에 열심이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하긴 하구나…. 어젯밤은 그다지 어둡지도 않았을 텐데.”

“응.”


이상하다. 츠루마루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을 텐데, 무심코 듣게 된 그 한마디가 오오쿠리카라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을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몇 마디 말로 추측하자면, 히게키리는 자신이 어제 겪었다는 기현상에 대해 털어놓고 있었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야의 환경 속에서 밤눈이 어두운 태도太刀의 눈을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달은 보였고?”


츠루마루는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하니, 어쨌거나 그 말을 믿어주는 모양이었다. 중간에 온 터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영문을 종잡을 수 없어 오오쿠리카라는 바로 끼어드는 대신 잠시 문간에 서서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지금은 비록 진지해보이는 대화일지언정, 만일 그것이 또 다른 기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미연에 싹을 방지하는 게 제일 편했다. 그들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심줄을 가지고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을 너무 쉽게도 벌이곤 했기 때문에 그런 경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달만 보였게. 석등 주변에서 깜빡거리던 반딧불과 자정이 넘어서까지 깨어 있던 용왕 나으리도 보았지.”


하지만 히게키리는 그 감시를 호락호락하게 넘기지 않았다. 오오쿠리카라가 아차, 싶었을 때는 느슨한 각도의 눈썹 아래에 놓인 시선이 이미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한 발짝 늦게 반가운 기색이 실린 인사가 뒤따라왔다. 카라 도령!


“벌써 새참 시간인가? 고맙구만.”

“…농땡이 치는 녀석들에게 줄 건 없어.”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 무안함 반, 할 일을 팽개쳐둔 녀석들에 대한 얄미움 반으로 오오쿠리카라는 어깃장을 놓았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너무하다며, 오해를 하고 있다며 뒷덜미를 잡아채는 아우성이 들리고 상대적으로 어린 칼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이 줄줄 흘러나왔다. 오래 몸을 낮춘 자세를 하면 허리가 아프다거나, 무릎이 쑤신다거나 하는.

이보다 훨씬 격렬한 활동이 필요한 전투 때는 그야말로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낯짝에 두꺼운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뻔뻔하게 혀가 돌아가는 모양을 보고 있자면 순식간에 어이가 사라졌다. 자신의 마음은 그에 비하면 훨씬 고결하지 않은가….

타인보다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한 오오쿠리카라였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변명 속에서는 자화자찬에 가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끝없이 움직일 것 같았던 입을 다물리기 위해, 오오쿠리카라는 결국 들고 있던 쟁반을 휙 내밀어버렸다. 얼음이 담긴 보리차를 얻어내자 시끄럽게 중얼대던 두 ‘할배’들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물컵이 아래로 기울어짐과 동시에 달칵, 달칵, 얼음이 흔들거린 소리는 창가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릴 때 나는 소리와 어쩐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둘은 순식간에 보리차를 싹 비워내고는, 꽃처럼 화사한 표정으로 오오쿠리카라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 살았다, 살았어. 더워서 혼났지 뭐야.”

“응, 정말로. 고마워. 오오카네카라.”


히게키리가 상대의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으니 신경 쓸 것은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주변을 흘긋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열심히 일한 것처럼 말하는군.”

“억울하네. 우린 정말로, 아주 잠깐만 쉬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흥.”


주변에 증거가 명확한데 당치도 않은 소리를. 오오쿠리카라는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을 츠루마루에게 쏘아보냈다. 잠시 후엔 오늘의 근시를 담당한 헤시키리 하세베가 점검을 위해 주변을 돌아다닐 것이었다. 주군과 관계된 일이라면 원래도 결벽에 가깝던 성정이 두 배는 깐깐해지고 쉽게 냉정을 잃는 놈이니만큼 이 꼬라지를 본다면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주위가 시끄러워지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 경고해주려 입을 여는 순간, 히게키리가 먼저 다른 소리를 했다. 아까 나누던 대화의 연장이었다.


“그래, 혹시 너도 보았을지 모르겠네.”


무엇을. 오오쿠리카라는 아직까지도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영문 모를 대화에 자신이 포함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뿐더러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몰랐기에 오오쿠리카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정작 츠루마루는 또 다시 본론과는 상관없는 다른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제 그 때까지 안 자고 있었어? 술이라도 들고 찾아갈걸!”

“…흥미 없다.”


당사자의 의중도 묻지 않고 허락을 받은 것처럼 중얼거릴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츠루마루는 시무룩한 기색 없이, 다음에는 어떤 술이 좋을까 혼자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일을 벌려놓고 보는 습관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한편 히게키리는 츠루마루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자신이 하던 말을 계속했다. 둘 다 상대를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부분은 놀랄 정도로 닮은 부분이 있었다.


“그 때 말이야, 그림자가 사라졌었거든.”

“…그림자?”

“응, 정말이야.”


하지만 예상치 못한 단어에 오오쿠리카라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밤중에 여럿을 놀래키기 위한 괴담도 아니고, 이런 자리에서?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짧게 반문하자 히게키리는 장담하는 것처럼 유순한 낯을 끄덕거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치 뱀을 닮은 듯한 인상의 동생이 이변을 알아차리는 것이 좀 더 빨랐다고 했다. 연못에 마주 뜬 달의 모습에 마냥 감탄하고만 있던 형님을 뒤로 물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본체를 꺼내들었다는 소리를 오오쿠리카라는 대답할 말을 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어둠에 잠겨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면 위로는 하얗고 둥근 달만 고요히 떠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눈이 어두워 살피지 못한 걸까 싶어 일단 동생을 말리고 주변을 살피니 그들이 발을 딛고 선 땅 위에도 그림자는 뻗어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랜 예전부터 다사다난한 일을 숱하게 겪어온 그들도 이런 일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미심쩍은 것,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일단 요괴의 것인 줄로 알고 의심하는 습관에 따라 뻗어나간 칼날은 한 번에 연못의 표면을 깊게 베었다. 히게키리는 강한 물보라가 일었던 자리를 중심으로 퍼진 파문이 잦아들 때까지 동생과 함께 그곳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단지 그림자를 빼앗긴 것 외에는.


“나는 이상이 없지만 말이야.”


츠루마루가 대신 대답하며 팔을 뻗었다. 하얗고 깡마른 팔의 절반이 볕이 드는 면적에 걸쳐졌다. 밝은 바닥에서 그 모양을 본뜬 그림자가 까만 모양으로 떠올랐다. 히게키리는 그 옆에 조용히 자신의 팔을 두어보았다. 정말로 바닥에 나란히 떠올라야 할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직접 보아도 믿기 힘든 장면에 오오쿠리카라는 말없이 눈을 부릅떴다. 히게키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래에만 시선을 두고 있으면 그의 모습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둘의 반응은 여전히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그림자도 베어내면, 이름이 바뀔까?”

“그럼 이번에는 카게키리(影切)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그게 지금 이름보다 좀 더 멋진 것 같지 않아?”

“음…. 그럼 한 번 시험해보게 도와줄래?”


하하하, 하하하.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물음표 끝에 뒤따라 나온 밝은 웃음소리는 점검을 하러 찾아온 헤시키리 하세베가 버럭 화를 낼 때까지 이어졌다.




“왜 나까지….”


자리에 있었던 오오쿠리카라 역시 연대 책임이라는 이유로 함께 청소를 도와야했다. 주명(主命)을 앞세운 헤시키리 하세베를 막을 수 있는 칼은 소우자 사몬지 정도 뿐이었다. 한 때 같은 주인을 모셨었던 과거를 공유한 소우자는 제 형제들과 다른 난색의 눈동자를 하세베에게 향한 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잔뜩 열이 오른 정수리에 차가운 얼음을 끼얹은 듯 그를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나머지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본당은 넓었다. 아까 들었던 변명은 역시 꾸며낸 것에 불과했는지 군데군데 먼지가 가득했다. 애초에 손대지도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 장소를 걸레로 훔치자 천은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다. 오오쿠리카라는 그것을 거칠게 양동이에 던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다에 어울린 죄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제 양심이 허락하는 만큼만 청소를 도왔다.

나머지는 저 둘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농땡이를 피운 죄로 한 번 벼락을 맞은 두 자루는 더 이상 꼼지락거리지 않고 아까보다는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허리나 무릎이 아프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으니 더 이상 별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그 모습을 흘겨보고는 헤시키리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자리를 뜨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랬던 오오쿠리카라를 츠루마루는 딱 한 번 불러 세워 이상한 부탁을 남겼다.


“카라 도령. 여기서 한 이야기는 우리끼리의 비밀이야!”


알았지? 하고 멋대로 중얼대는 목소리엔 이미 확약이라도 받은 듯 거침이 없었다. 남은 동의한 적도 없는데. 입을 다물고 뚱한 얼굴로 돌아보자 그는 미소와 함께 한 쪽 눈을 살짝 접어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외형이 유독 화려했던 아와타구치의 단도에게 배운 ‘윙크’라는 동작이었다.

나이를 잊은 잔망스러움에는 해줄 말도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그 모습을 어이없이 흘겨보다 몸을 홱 돌려 본당을 나섰다. 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남들이 보았더라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 것일까 생각될 정도의 속도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그는 기둥 몇 개를 지나치고 나서야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대낮의 마당은 내리쬐는 햇빛 덕분에 환했다. 그 위로 얼룩진 강렬한 그림자를 향해, 오오쿠리카라는 괜한 시선을 한 번 두어보고 말았을 뿐이었다.



*




별 일 아니겠지.

태평했던 둘처럼, 오오쿠리카라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기현상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태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번에는 아와타구치의 칼의 그림자가 백주대낮에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졸지에 같은 일을 겪었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치부할 수 없었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달려온 아키타 토시로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상황을 확인한 주인은 일정을 취소하고 혼마루의 모든 칼을 불러 모았다.

오랜 시간 동안 하나, 둘 늘어난 칼은 이제는 도합 여든 자루가 넘게 되었다. 아직까지 임무를 진행 중인 두 부대만 제외하고, 전갈을 받고 귀환한 칼들이 자리를 메우자 그렇게 넓었던 오오히로마도 빽빽한 콩나물시루처럼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넓디넓은 부지 탓에, 그리고 각자의 일정 탓에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잘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동료끼리는 이런 기회에 수다를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묻곤 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도란거림 대신 무거운 공기 속에서 주변의 눈치만 살피며 모두 말을 아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오오쿠리카라는 끼리끼리 모여 앉은 곳에서 그런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충 전말을 짐작하고 있을 옆 자리의 츠루마루나, 뒤편의 히게키리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모두 주목!”


얼추 인원이 모였다고 생각되었을 때, 주인의 곁에 앉아 있던 헤시키리 하세베가 목청을 높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거두절미하고 설명하자면 오늘 주군께서 이렇듯 모두를 불러 모은 까닭은, 혼마루 내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키타 토시로!”

“네.”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헤시키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아키타 토시로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자 다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바닥이 드러남과 동시에, 단에 가까웠던 앞 열부터 수런거림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그림자가 없어!”

“뭐?”

“그림자가?”


절반은 어안이 벙벙한 채 아키타를 바라보았고, 절반은 바닥을 돌아보며 자신의 그림자를 살폈다. 소란은 쉽게 멈출 기미가 없었다.충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 나도 없네…?”


일상 속에서 그림자를 일일이 신경 쓰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가 진작 사라진 줄도 눈치 채지 못했던 칼도 그제야 하나 둘 나타났다. 헤시키리는 혼란 속에서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했다.


“주군께서 사태를 파악하셔야 하니 그림자가 사라진 자는 오른쪽에, 그렇지 않은 자들은 왼쪽으로 나누어 앉도록!”


호령이 득달같았다. 칼들은 혼란 속에서 그의 말에 따라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둘으로 갈린 인원은 그 수가 거의 엇비슷했다. 이렇게 많은 수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사라졌었다니. 오오쿠리카라는 놀라움 속에서 반대방향에 선 칼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자신에게 일찍이 그런 일이 있었노라 사정을 털어놓았던 히게키리, 그리고 그의 동생 히자마루는 물론이거니와 아와타구치 형제들, 시시오, 코테츠 형제, 톤보키리와 무라마사, 미카즈키 무네치카를 비롯한 산죠파의 도검들, 타로타치와 지로타치 형제 등등….

일일이 그 이름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수의 인원이 왜 그림자를 빼앗겼는지 알 수도 없었다. 두루두루 모인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공통점도 딱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흐음….”


주인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평온하게 혼마루를 이끌어 온 그에게도 이런 사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는 오오쿠리카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림자를 빼앗긴 칼의 얼굴을 하나씩 돌아보다 타로타치에게 질문을 던졌다. 굳이 타로타치를 짚어 물어본 까닭은, 그는 실전용으로 사용된 이력보다 신궁에 봉납된 시기가 길었던 영험한 칼이었기 때문이었다.


“타로타치 님, 몸은 괜찮으신지요?”

“일단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의 대답은 침착하게 흘러나왔으나, 붉게 화장이 된 눈매가 두어 번 접혔다 펴지길 반복한 다음에 이어진 말에는 타로타치에게 살필 수 없었던 드문 당혹감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저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도~.”


옆에 서 있던 지로타치가 형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동의를 표했으나, 특유의 억양 속에서 평소의 명랑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흐르자 또 다른 신검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혼마루의 칼 중, 타로타치, 지로타치 형제들만 신사에 봉납된 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딱히 부정한 기운을 느끼지는 못했지. 오늘 아침 기도 때도 조용하기만 했고.”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꺼낸 칼은, 이시키리마루였다. 산죠 도파의 칼 중에서 유일하게 그림자를 잃지 않았던 그는 왼편에서 닛카리 아오에의 곁에 서 있었다. 오랫동안 신사에서 부스럼이나 병마를 영적으로 베었다는 칼도 그렇게 이야기하니 대부분은 한층 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당장 신체에 어떤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멀쩡히 존재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진 것인데 이것이 결코 좋은 징조일 리는 없었다.


“그림자엔 영혼의 일부가 담겨있기도 하지. 가끔 망자가 이승에 원한을 남기면, 그림자가 떠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까?”


뚜렷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 말을 들은 저마다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이시키리마루는 그것을 찬찬히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이렇듯 육肉으로 이루어진 신체를 주인께 부여받게 되었지만, 우리의 본질은 영혼이지.”


아무리 못해도 백 년을 넘는 세월 동안 사람의 입에서 입을 거쳐 연마된 영혼. 이곳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칼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시키리마루의 말을 미루어 생각해본다면 그들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영혼을 노린 공격에 이미 노출된 것일까?

그 문장은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피나 상처보다도 더욱 오싹하게 다가왔다. 숱한 격전을 헤쳐 온 창검이 신경을 곤두세우자 주위의 분위기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시키리마루는 그런 공기 속에서 태연히 주인에게 부탁했다.


“허락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서 혼마루의 곳곳을 돌아보고 싶어.”


태평하게 산책이나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혼마루의 구석구석에 기도를 올리며 정화를 꾀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원래도 삿된 것을 쫓아내는 기원이나 정화 쪽에 정평이 나 있었다. 실전에서 싸우는 것보다 가지기도를 올리는 것이 더 익숙한 칼이었다.

주인은 잠깐 고민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두 신검 분들도 이시키리마루 님을 도와주시지요. 저는 그 동안 정부에 연락을 취하고, 다른 혼마루의 사니와 분들께도 자문을 구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모여 있어봤자 뚜렷한 답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방도를 찾아낼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말에 한 자리에 모였던 칼들은 하나 둘씩 흩어졌다.




*




복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대부분의 칼이 방에 틀어박힌 혼마루는 조용했다. 그 조용한 공간을 가로지르며 오오쿠리카라는 간간히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게는 아직 그림자가 있었다.

주인이 그들을 다시 돌려보낸 지도 몇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는 뾰족한 방도를 찾지 못한 듯, 들려오는 말이 없었고 양 손에 제기를 들고 혼마루 곳곳을 돌아다니는 신검들의 기도도 별 효험이 없는 모양이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림자를 잃어버린 칼은 계속 늘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평소 같은 일상을 영위할 순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인기척 없는 주방으로 들어섰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한참 분주했어야 할 공간은 텅 빈 채였다. 그곳엔 식신들이 만들어놓은 주먹밥 여러 개만 커다란 접시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마 그가 오기 전, 다른 누군가가 벌써 몇 개를 챙겨간 듯, 열을 맞추어 놓은 모양새가 삐뚤빼뚤했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는 어떤 산해진미를 맛본들 모래알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차라리 공복만을 쫓기 위한 이런 간편식이 편했다. 오오쿠리카라는 여섯 개의 주먹밥을 신중하게 골라 챙겨들었다. 현재 방에는 네 명이 모여 있었으나, 남는 두 개는 혹시 모를 여분이었다.

그리고 주방을 나서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그는 의외의 칼과 마주쳤다. 히자마루였다.


“오오쿠리카라로군. 나는 형님이 배고파하셔서 말이지.”


서로 살가운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말없이 어색하게 헤어질 사이도 아니었다. 히자마루는 묻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오오쿠리카라를 지나쳐 주방 안쪽으로 향했다. 오오쿠리카라는 고개를 돌려 잠깐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빛이 있는 곳에 응당 있어야 할 그림자가 없었다. 히자마루는 진작 자신의 형과 함께 그림자를 잃은 상태였다. 아까 주인이 그들을 소집했을 때에도 왼편에 서 있었고.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는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히자마루는 질문에 실린 의중을 냉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붙어 다니는 형의 성격이 적잖게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인지, 군말 없이 화제에 집중해주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의 화술은 썩 남달라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다. 히자마루는 자신의 발치를 흘끗 돌아보았다가 말을 이었다.


“약간 노곤하고, 배가 고프지만 이건 평소에도 이맘때가 되면 느낄 수 있던 감각이니.”

“…….”

“그나저나 이 주먹밥의 속은 모두 같은 내용물인건가? 형님은 명란을 좋아하는데 말이지….”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맛을 따져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어련히 알아서 잘 만들었으리라 생각했던 오오쿠리카라는 히자마루의 질문에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도 거기까지 고려할 수 있는 심줄은 형제가 아주 똑 닮아서, 과연 태평하다고 평가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대범하다고 평가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별로 걱정되지 않는 건가?”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는 마음 사이로는 이런 말만이 무심코 흘러나왔다. 히자마루는 그 말에 주먹밥을 살피다 말고 오오쿠리카라를 돌아보았다. 제 형을 닮은, 그러나 또렷한 눈썹의 각도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 더 강렬한 인상을 느끼게 만드는 주황빛의 눈동자가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황촉의 심지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걱정이 되지 않는다기 보다는….”


저절로 생겨나는 일은 없으며,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태연할 수 있을 뿐이라고, 히자마루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동공 안의 날렵한 초점이 잠깐 아득해지는 모습에서, 오오쿠리카라는 그가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히자마루 또한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사람들의 지식과 이해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건을 헤아려 온 겐지의 노련한 칼이었다.


“그리고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끝도 존재하는 법이지.”


물론 주인이나 혼마루를 돌아다니고 있는 신검들이 이 사태의 이유를 찾아내어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좋겠지만, 만사가 언제나 생각대로 잘 풀리리라는 법은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어보았다. 원래도 눈치를 살피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당장 몇 시간 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었으니. 히자마루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텐데도?”

“좋지 않은 방향이라 한들, 우리의 실체가 사라지는 것 밖에 더 있을까. 그것은 이미 어제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실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분령의 그들이 현재의 몸을 잃고 본령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끔찍이 아끼는 자신의 형과 헤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스스로 중얼거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히자마루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 형님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 것도 물론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가장 기뻤던 일은 재회 그 자체였다. 나는 이번 도생에서 우리 형제가 본질을 잃지만 않는다면, 몇 번이고 다른 존재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 사실만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몇 번의 끝을 마주해도 의연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히자마루는 결코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의 긴 말은 적잖은 여운을 남겼다. 오오쿠리카라는 뚜렷한 대답이나 감상을 내놓진 않았지만, 신중하게 주먹밥을 고르는 히자마루의 뒷모습을 얼마간 눈에 담았다가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의 까만 그림자도 그런 오오쿠리카라의 움직임을 뚜벅뚜벅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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